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27)
나의 악당들 327화
57. 서전(8)
뭉치가 침대에 쪼그려 앉아 있는 동안, 난 창문과 방문을 다시금 점 검했다.
당연히 모두 잠겨 있었다.
아무리 확인해도 빈틈이라곤 없는 데 삼합회, 아니, 삼검회의 암살자들 은 대체 무슨 수로 여기 들어온 걸 까.
내 의문에 답한 건 뭉치였다.
“영술(靈術)이요. 무검회가 잃어버 린 것.”
“무검회가 잃어버린 것?”
“네. 저도 아주 조금 알아요……
녀석이 어물거리며 설명해준 내용 에 따르면, 삼검회는 오래 전에 무 검회에서 떨어져 나간 조직으로 무 검회의 가장 비밀스러운 기술들을 탈취해갔다고 한다.
글쎄, 이게 진실일지는 잘 모르겠 다. 어쨌거나 뭉치는 무검회 소속이 었고, 놈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녀석 에게 객관적으로 알려줬을 것 같진 않았다.
다만 플레이어로서의 지식을 떠올 려보자면, 삼검회가 특이한 비술을 지니고 있는 건 확실했다. 검객의 스킬트리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사 실이다.
검객의 스킬은 크게 세 계열로 나 뉜다. 각각 검(劍), 인(忍), 체(體)가 그것이다. 세 계열은 나름 구분되고 개성 있는 스킬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한 가지 공통점을 꼽자면, 중 반까진 순수한 무술이지만 후반엔 주술(況術)에 가까운 기술들이 등장 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검 계열의 기본 스킬 참(所)은 그저 똑바로 베는 기술이 다. 그 강화판인 쾌(快), 중(重), 유 (柔) 역시도 빠르게 베고, 강하게 휘두르고, 부드럽게 받아치는 정도 로 여전히 무술의 영역에 있다.
다음 티어인 절〈切), 강(剛), 변(變) 은 무협지에서나 나올 기술들이다. 게임에서야 회피를 무시하거나, 방 어를 무시하거나, 반격이 패시브가 되는 정도의 효과지만 그게 현실에 서 펼쳐진다면 신비의 영역에 반쯤 발을 걸친 기술이 될 것이다.
궁극기인 뇌(雷), 파(破), 환(幻)에 이르면 사실상 무술이라고 부르기도 우스워진다. 잔상이 남을만한 속도 로 칼을 휘두르거나, 날에 강기를 두르거나, 칼이 여러 자루로 늘어나 는 게 무슨 무술이냐고. 마법이나 주술이지.
인 계열 궁극기인 영(影)이나 체 계열 궁극기인 봉(鳳)도 비슷하다. 무협지보단 선협지에 어울리는 기술 들이라고 할까.
아마 뭉치가 영술(靈術)이라 칭한 것도 이런 뉘앙스일 거다. 무술이라 고 부를 수 없는, 신비한 어떤 것을 지칭하는 거겠지.
어쨌든 이런 신비가 섞인 고티어의 스킬들을 습득하기 위해선 높은 레 벨은 기본에, 전용 퀘스트를 반드시 완수해야만 했다.
그러니 검객의 전용 퀘스트를 부여 하는 더 컴퍼니, 삼검회가 영술(靈 術)이라 불리는 비밀스러운 기술을 가지고 있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 다.
“넌 어떻게 생각해?”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묻자, 무릎을 안고 있던 뭉치는 잠시 망설이다 나 지막이 말했다.
“파사검이 보고 있어요.”
“……파사검이 보고 있다고? 널?”
“이야기 들으니 알겠어요. 귀신이 아니라 파사검이었어요.”
녀석은 무릎을 감싼 팔을 파르르 떨어대었다. 뭐가 두려운 걸까.
“괜찮아. 겁 먹을 것 없어.”
몸을 뉘며 뭉치를 품으로 당겼다.
녀석은 기다렸다는 듯 내 허리를 꼭 끌어안으며 가슴께에 얼굴을 묻 었다. 은은하고 향긋한 과일향이 코 끝을 스친다.
“내일 같이 은행에 가보자. 시간이 없다곤 하지만 질문 몇 개 정돈 더 할 수 있겠지.”
“……싫어요.”
“……싫어? 왜?”
뭉치가 바짝 달라붙은 채 말하는 통에 가슴이 웅웅 울리는 것 같다.
“포이 따라갈 거에요.”
“뭐?”
“파사검의 전설 알아요.”
“파사검의 전설?”
“사람 휘두르는 검이래요. 난 싫어 요. 안 갈래요.”
“뭉치야.”
난 한숨을 삼키며 녀석의 어깨를 토닥였다.
“정말 그게 맞을까? 파사검이 널 찾아올 수도 있다고 했잖아. 그러면 더…… 위험해지는 거 아냐?”
“삼검회니 무검회니 하는 일엔 나 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괜한 곳에 현혹되지 말고 옳은 판단을 해. 너 를 위해서.”
행장이 사기를 치는 건 아닐 거라 는 게 내 생각이다.
게임 플레이 중 대사를 제대로 읽 어본 적이 없어서 자세한 건 모르겠 지만, 적어도 삼검회와 관련된 몹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오히려 검객의 전용 퀘스트나 캠페 인 메인 시나리오에서 조력자로 등 장하곤 했던 세력이니, 어느 정도는 믿어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싫어요.” “왜?’’
“저는. 뭉치는 숨을 한 차례 삼키곤 제대 로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 로 말했다.
“엘렌처럼 되는 거 싫어요.”
“……엘렌? 음, 엘렌처럼 되는 게 뭔데?”
“떠난 사람, 잊혀진 사람이요.”
난 잠시 침묵했다.
그래, 엘렌은 떠난 사람이다. 내가 떠나보냈지.
“하지만…… 잊힌 사람은 아니야.”
“••••••네?”
“난 엘렌을 잊어본 적이 없어.”
가느다란 몸이 잠시 굳어졌다.
“늘 떠오르고, 늘 걱정되고, 늘 궁 금해. 몸은 건강한지, 일은 잘 풀렸 는지, 딸려 보낸 애들은 챙겨주고 있는지, 키는 컸는지,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내 생각은 하는 지……
난 눈을 감은 채 녀석의 머리를 매만졌다. 찰랑찰랑, 부드러운 머리 카락. 라임 향이 나는 듯한, 말도 안 되는 착각에 빠져든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결국 못 참고 편지까지 썼잖아.”
“너도 그럴 거야. 장담해.”
어느새 내게 향한 눈동자를 내려다 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내가 널 어떻게 잊겠냐.”
“포이.”
“맨날 꾀병 부리고, 몰래 따라다니 고, 밤마다 이불 아래로 숨어들고, 그러면서 귀여우면 다인 줄 알고 의 기양양한 녀석을, 어떻게 잊어. 응?”
“에-”
“뭐가 ‘에’야. 틀린 말 했어?” 뭉치는 빠끔대던 입술을 비죽 내밀 었다.
“……의기양양 안 했어요.”
“안 했긴.”
난 녀석을 더 세게 안으며 눈을 맞췄다. 코가 맞닿을 듯 가까워지자 흡, 잠시 뭉치의 숨이 멎었다.
“걱정하지 마. 절대로 안 잊을 테 니까.”
“그리고, 돌아오면 새로운 이름을 지어줄게.” “이름, 이요?”
“언제까지 새끼돼지일 때 얻은 별 명으로 불릴 순 없잖아.”
“아니요, 저는-”
“서대륙에 어울리는 예쁜 이름을 떠올려둘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
“에……
“알겠지?”
장난스럽게 코끝을 톡 맞닿은 뒤 도로 고개를 드는데,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녀석이 재빨리 팔을 뻗어 목 을 휘감아왔다.
“어,”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보드랍고 촉촉한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꼬물거리는 입술과 굳은 혀, 풋풋 한 숨결, 잘게 떨리는 어깨. 도저히 밀어낼 수가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얼마간의 입맞춤 후에 떨어진 뭉치 는 가쁜 숨을 고르며 날 올려다보았 다. 촉촉한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니 미지에 대한 두려움 사이로 열망 비 슷한 것이 엿보였다.
지난 하루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탓일까? ‘이러면 안 되는데’하는 멍 청한 망설임은 ‘안되긴 뭐가 안돼?’ 하는 예리한 질문에 단숨에 무너지 고 말았다.
지난 몇 개월 간 그랬던 것처럼, 녀석은 나를 믿고 낯선 곳을 헤쳐나 갔다.
서투름은 적극적인 태도로, 무지함 은 왕성한 호기심으로, 어색함은 암 살자다운 유연함으로 극복했다. 형 편없는 체력은 명백한 약점이었으나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려는 의지는 과연 대견한 것이었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법이라, 난 탐험을 일찍 마무리 지 었다. 이성을 잃지 않고 끝까지 조 심스러운 진행 방침을 유지한 나 자 신이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간만의 탐험이 이르게 끝난 것은 아쉬웠으나, 곤히 잠든 여인의 살결 을 쓰다듬는 것도 충분히 행복한 일 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뭉치와 단둘이 별궁을 나섰다.
은행으로 향하는 거리는 이른 아침 임에도 시끌벅적했다. 간밤에 있었 던 일 때문이다.
“……초장이 길드가?”
“그래, 죄다 피떡이 됐다드만. 처음 발견한 게 물장수 놈인데, 살인이 크게 난 줄 알고 오줌을 지렸다는 거 아니야.”
어느 행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프리츠가 벌써 일을 처리한 모양이 었다. 하여튼, 이럴 때만 부지런하다 니까.
은행은 상공업 관련 길드가 줄줄이 늘어선 거리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꽤 크긴 했지만 고작 2층짜리 건 물이 었고, 외 양도 호화롭다기 보단 그냥 깔끔한 편이었다.
최대한 자기 자신을 숨기려고 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삼합회, 아니, 삼검회의 소굴답다고 할까.
창구가 있는 1층에 들어서자, 한 사내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2층으로 안내해 주었다.
한산한 창구에 앉아 있던 몇몇 상 인이 계단을 오르는 우리를 향해 의 아한 눈빛을 보냈다. 안내역 사내는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지 마냥 태 연한 기색이었다.
2층은 조그만 방을 중심으로 좁은 복도가 여러 갈래로 퍼진 형태였다. 미로 같은 구조라 안내가 없으면 길 을 찾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 같았 다.
마침내 도착한 행장의 방은, 은행 건물의 외양이 그랬던 것처럼 넓지 만 깔끔했다. 필수적인 가재도구만 놓인 아늑한 방엔 어제 만났던 중년 사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포이닉스 경. 저는 이 곳의 행장인 크샨입니다.”
기이한 재질의 검은 갑옷 차림이던 어제완 달리, 그는 평범한 회색 조 끼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낯설게도 공손한 태도까지 보이니 여러모로 밤낮이 다른 놈인듯했다.
안내역 사내는 나와 뭉치에게 흰 천으로 감싼 의자를 내주었다. 난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행장 에게 물었다.
“……크샨? 그게 이름인가?”
“예. 크샨 장. 제 조부께서 물려주 신 이름입니다. 크샨이든 행장이든 편한 대로 불러주십시오.”
빙글빙글 웃기까지 하는 놈을 보며 난 슬쩍 눈썹을 긁었다.
“이럴 거면 정식으로 초대하는 편 이 낫지 않았나? 왜 굳이 야밤에 후작궁까지 기어들어 온 거야?”
“말씀드렸다시피 저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또, 옆에 계신 아가씨께서 진짜 환신자인지 재확인할 기회도 필요했지요.”
“재확인할 기회라……
놈의 말에 담긴 뉘앙스가 뻔히 읽 혀서, 피식 웃음을 흘러나왔다.
“진짜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죽일 생각이었군?”
“아닙니다. 무검회의 추적을 받는 자와 구태여 얽힐 필요가 없으니까 요.”
“그래?”
“그렇습니다.”
고동빛 광택이 흐르는 테이블 너머 로 행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크샨이 라는 이름의 중년 사내는 여전히 빙 글거리는 얼굴이었다.
“……왜 이렇게 재수가 없냐.”
“그게 무슨 뜻-”
그가 말을 마무리 끝내기도 전에, 난 단숨에 책상 위로 튀어 올랐다.
덥석!
행장은 침착하게 의자 아래로 손을 뻗었지만, ‘붉은 손아귀’에서 뿜어진 흡인력이 놈을 빨아들이는 게 먼저 였다.
“끄윽!”
“엄살 부리지 마, 이 쥐새끼야.”
목이 붙들린 채 책상에 얼굴을 처 박은 행장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놈을 지그시 짓누르는 내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어서 방 이곳저곳에 숨어있던 암 살자 예닐곱이 모습을 드러냈고, 밖 에서도 단단히 무장한 사내 여럿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멈춰. 다 뒤지기 싫으면.”
마력과 살기를 잔뜩 흘리며 경고하 자, 삼검회의 하수인들로 보이는 이 들이 흠칫 멈춰 섰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오!”
“경고하는 거야.”
아귀에 약간의 힘을 더하여 목을 조이자, 몸부림치던 행장은 켁켁거 리며 눈을 뒤집었다.
“나나 뭉치한테 장난질 치면 네놈 이고 네 부하들이고 모조리 죽여버 리겠어. 왕국에 있는 모든 은행을 불태워버리는 건 덤이고.”
“그으, 크흑!”
“알겠어?”
행장은 흰자위에 핏대를 잔뜩 세운 채로도 굴복하지 않았다. 난 손에 걸리는 대로 장검 한 자루를 뽑아 놈의 발등에 박아넣었다.
푸욱!
“까으윽-”
검은 얼음이 냉기를 풀풀 풍기며 살을 저미자, 행장의 손이 책상을 마구 긁어댔다.
“알겠냐고. 이 냄새나는 암살자 새 끼야.”
“아흐으, 아, 알겠소, 알겠-”
난 나머지 칼을 뽑아 반대편 발등 에 꽂았고, 마침내 손톱 몇 개가 뒤 집혔다.
“끄으아아악-!”
“ 알겠소?”
“으흐, 알겠, 알겠습니다, 알겠습니 다-”
놈이 턱을 덜덜거리며 빌어대자, 난 두 자루 장검을 뽑아 도로 자리 에 앉았다.
문득 뒤통수가 간지러워 돌아보니 암살자들과 무장한 사내들이 엉거주 춤한 자세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뭘 봐? 다 꺼져, 이 깡패 새끼들 아.”
놈들은 잠시 내 눈치를 보다가, 신 음을 흘리던 행장이 다급히 손을 젓 자 얼른 밖으로 물러났다.
“좋아.”
난 등받이에 몸을 묻으며 필사적으 로 상처를 지혈하는 행장을 내려다 보았다.
“이제 얘기를 들어볼까.”
“흐으, 어, 어떤.”
“파사검의 주인이 되는 과정 말이 야. 애 보내기 전에 계획은 들어야 하지 않겠냐?”
행장은 이를 악문 채 숨을 고르다
가 설명을 시작했다.
뭉치를 삼검회로 보내고 이틀 뒤.
난 리안 웰에서의 일정을 마무리 짓고 길을 나섰다. 후작이 내어준 천육백 명의 군대도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