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38)
나의 악당들 338화
58. 재회(7)
피로 이루어진 두꺼운 뿔기둥 다섯 개가 서로 교차하며 쇄도했다. 트롤 한두 마리쯤은 손쉽게 조각낼 만한 흉험한 공격이었다.
이를 앞두고, 트롤 영매는 춤을 추 었다. 허리를 반쯤 구부린 엉거주춤 하고 우스꽝스러운 자세로 걸음을 옮기며 손을 휘저은 것이다.
그 기이한 몸짓에 자연의 영혼들이 답했다.
삭풍을 타고 부유하는 바람의 정령 들, 야영지를 뒤덮은 불길에 숨은 화염의 정령들, 헤아릴 수 없는 세 월 동안 발밑에 잠들어 있던 대지의 정령들, 그리고 한때 고원을 지배했 던 짐승들의 영혼까지.
“Koagan thuc, zorkul-”
영매는 뱃속에서 끌어올린 듯한 깊 고 기이한 울음소리를 냈다.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그린스킨의 언어였다.
문득 익스페디션 모드에서 종종 마 주쳤던 ‘잠든 신의 영토’가 떠오른 다. 오크, 고블린, 오우거, 트롤 등 이 고대신의 후예를 자처하며 문명 을 온존하고 있던 차원…….
언어를 구사하는 트롤은 분명 그곳 에서 비롯된 존재일 터였다.
휘우우우-
트롤 영매의 부름에 가장 빨리 답 한 건 바람의 정령이었다.
살을 에는 삭풍이 언덕 사이로 휘 몰아치며 높이 15미터에 이르는 잿 빛 회오리를 만들어냈다. 세 쌍의 팔을 가진 거대한 형상, 높은 격을 지닌 바람의 정령이었다.
고위 바람의 정령은 소리 없이 울 부짖으며 영매와 전사들의 앞을 가 로막았다.
다음 순간 헤일라의 붉은 가시들이 그 거대한 형상을 찢어발겼다. 바람 의 정령은 눈 섞인 바람을 모아 제 몸을 수복했으나, 피로 이루어진 다 섯 발톱은 놈을 무시하고 곧장 영매 를 노렸다.
끄우어!
트롤 영매의 곁을 지키던 세 전사 들 중 하나가 몸을 날렸다. 트롤 용 사로서 영매가 불러낸 고원 늑대의 영혼을 받아들인 놈은, 어느새 까만 털에 뒤덮인 채였다.
콰가각!
바람의 정령을 거치며 얼마쯤 쪼그 라든 붉은 가시가 트롤 늑대전사의 방패와 팔을 난자했다.
그어윽-
그러나 끝끝내 물결치는 비늘갑옷 과 두꺼운 털가죽은 이를 버텨내고 야 말았다.
흑마 올토니제를 타고 내달리던 헤 일라는 눈을 가만히 깜빡이다 단검 을 고쳐 쥐었다. 투명한 보석 같은 칼날이 우웅 하고 울자 트롤 용사를 난자한 붉은 가시가 폭발했다. 땅이 울리는 굉음에 이어 검붉은 섬광이 사방을 휩쓸었고, 늑대를 받아들인 트롤 용사는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 다.
그러는 와중에도 영매는 춤을 추었 다. 고위 바람의 정령은 재차 가슴 을 부풀렸고, 불길은 서로를 끌어당 기듯 모여 거인의 형상을 이루었으 며, 땅이 갈라지며 흙과 돌덩이가 솟아났다.
“……불길한데.”
내게 등을 기대고 있던 아탈란테가 백색의 창을 고쳐 쥐었다.
“저 트롤, 대책 없이 힘을 펼치고 있어. 저대로 두면 근방의 정령이란 정령들은 모조리 모여들 거야.”
“서두르라는 거지?”
고삐를 쳐 바이콘을 재촉하는 동안 아탈란테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아쉽네. 이오피야가 있었다면 쉽 게 처리했을 텐데.”
……이오피야?
“영혼주술사 말하는 거야? 우테콰 이의 처제라는?”
“어. 영혼을 달래는 게 녀석의 장 기거든. 따라오겠다고 엄청 징징거 렸는데, 못 이긴 척 받아줄 것 그랬 나 봐.”
짧은 대화는 그걸로 마무리되었다. 화염의 정령이 눈앞을 가로막은 탓 이다.
화르륵!
놈 역시 격이 높은 정령인지 한눈 에 봐도 그 위압감이 대단했다.
높이 솟구친 불기둥 안에 검은 실 루엣이 들어찬 모양새로, 머리와 두 팔이 달렸으며 아가리는 도마뱀의 그것처럼 찢어졌고 손톱은 갈고리처 럼 길쭉했다.
“저건 내가 맡을게. 이따 봐.” 아탈란테는 마치 산책이라도 가는 듯 가볍게 인사를 건네곤 안장을 밟 으며 뛰어올랐다.
지잉, 공기가 떨었다.
살짝 그을린 구릿빛 피부를 은은한 연보랏빛으로 물들인 아탈란테는, 보이지 않는 줄에 매달린 것처럼 허 공을 부유했다. 비전의 힘에 물든 머리칼 아래에서 공허의 창이 줄기 줄기 뻗어 나왔다.
“흐압-”
짧은 기합과 함께, 자색창들은 덩 굴 얽히듯 서로 꼬이며 덩치를 불리 더니 화염 정령을 꿰뚫었다.
퍼엉!
화염의 정령이 제 몸에서 폭발을 일으키며 저항을 해댔기에, 난 팔로 눈을 가린 채 바짝 엎드렸다. 불티 가 튄 탓인지 바이콘은 히힝! 비명 을 지르며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아탈란테가 공허에서 끌어온 보랏 빛 섬광을 번쩍이며 화염 정령에 맞 서는 사이, 헤일라는 혈왕의 영토를 수습하며 바람 정령을 향해 달려갔 다.
여긴 수천의 병력이 격돌하는 전장 이었기에, 그녀가 쓸 재료는 충분하 다 못해 넘쳐났다.
헤일라는 피의 장막을 제 주변으로 모아 날카롭게 빚어냈다. 마치 검붉 은 연꽃과도 같은 형상이었다.
쌔애앵!
연꽃이 맹렬히 회전하자 고위 바람 의 정령은 그 기세에 휘말리며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놈■이 가까스 로 형상을 유지하는 사이, 헤일라의 뒤를 따르던 십여 명의 기수가 내 쪽으로 달려왔다.
“나리!”
“따라와!”
쩌저적-
땅이 갈라지며 균열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바이콘을 몰아 기민하게 균열을 피 했으나, 마침내 땅에서 솟아난 흙과 돌덩이가 거인의 형상을 이루며 앞 을 막아섰다.
“이런 씨,”
영매의 춤사위가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더 많은 정령과 영혼이 모여들 테고, 그러다 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놈이 나타날 수도 있었다.
그 전에 영매의 모가지를 따는 게 유일한 해답이건만, 눈앞에 나타난 대지의 정령은 쉽사리 길을 터줄 것 같지 않았다.
구우우
두꺼운 팔다리를 가진 대지의 정령 은 얼핏 바위 골렘과도 닮아 있었 다. 하지만 눈이 덮인 표면을 끊임 없이 맥동하고, 바위틈으로는 연기 를 뿜어내며 골렘이 흉내 낼 수 없 는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빛이여!”
짧은 고함을 내지른 건 쇠뇌수 기 돈이었다. 등자를 밟고 몸을 세운 그는 강철활대의 중쇠뇌를 대지의 정령에 겨누고, 쏘았다.
번쩍, 흰 빛이 어둠을 갈랐다. 수도사제 오칸의 도움을 받아 축성 한 팔뚝만 한 쇠뇌살은, 대지 정령 의 왼쪽 눈에 해당하는 바위틈을 정 확히 파고들었다.
구웅.
자연의 힘이 신성력에 녹아내리며 바윗덩이 일부가 부스러졌다.
그러나 거대한 대지의 정령에게 기 돈의 쇠뇌살은 이쑤시개에 불과했 다. 놈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묵직한 발걸음을 떼었다.
“포이닉스 경!”
내 이름을 외치며 옆으로 따라붙은 건, 순백의 군마를 타고 갑주를 갖 춰 입은 성기사였다.
“……테오도라 공녀님? 아니, 공녀 님이 왜 여기에.”
“순리를 거스르는 힘의 행사를 지 켜만 볼 순 없지!”
그녀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기세를 뿜고 있었다.
등 뒤로 황금빛 오라가 일렁였고, 일자로 갈라진 풀헬름의 홈에선 하 얀 광채가 새어 나왔으며, 기창(호 槍)의 창날과 갑주는 은빛으로 물들 어 있었다. ‘구마(驅魔)의 빛’과 ‘진 실을 밝히는 눈’, ‘신성한 칼날’, ‘믿 음의 갑옷’을 전개하여 칼란다리 성 기사로서의 ‘전투태세’를 갖춘 것이 다.
“따라오시오, 내가 앞장설 테니!”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백마 브라 이트미어는 ‘기사의 축복’을 받아 근육을 부풀리며 앞으로 달려 나갔 다. 얼른 고삐를 쳤고, 바이콘은 브 라이트미어의 엉덩이를 물어뜯을 기 세로 바짝 따라붙었다.
“빛으로 심판하시는 주여!”
기창과 방패를 든 테오도라는 삼색 의 상서로운 빛에 휩싸인 채 길게 뻗어 나갔다.
마상돌격을 할 때는 허리를 세우고 기창을 겨드랑이를 끼는 게 정석인 데, 그녀는 말 목에 가슴을 붙인 채 앞으로 쭉 창을 내뻗고 있었다.
자세는 영 엉터리 같았으나 기세만 은 훌륭했고, 위력은 그 이상이었다.
콰앙-!
기창이 대지 정령의 정강이에 닿은 순간 다리 전체가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구우으으-
여느 아성(芽城)만큼이나 거대한 돌덩이는 앞으로 엎어지다가 팔을 뻗어 가까스로 균형을 잡았다.
사방이 요란스러워 귀가 먹먹한 가 운데, 허벅지로 바이콘의 옆구리를 꽉 조이며 고삐를 잡아챘다.
“뛰어!”
내 뜻을 알아차린 바이콘은 즉시 땅을 박차며 뛰어올랐다.
크릉.
놈은 엄밀히 따져 말이 아닌 마수 (魔獸)였고, 이를 증명하듯 고양잇 과 맹수 같은 몸놀림을 뽐내며 대지 의 정령을 타고 올랐다.
그우워어!
대지 정령이 나머지 팔을 휘저어 나와 바이콘을 쳐내려 하던 그때.
“으아아악!”
기합인지 비명인지 헷갈리는 괴성. 슬쩍 내려다보니 정신없이 말을 내 달리던 퉁퉁한 에손이 묵직한 글레 이브를 휘두르고 있었다.
셋으로 갈라진 날 끄트머리에서 붉 은 연기가 샘솟는 삼첨도, ‘핏빛 선 봉장’은 땅을 지탱하고 있던 대지 정령의 팔을 절반 가까이 잘라냈다.
“껙!”
승마술이 서툰 에손은 그 반탄력에 밀려 낙마하더니 땅을 나뒹굴었다. 대지의 정령도 그와 비슷하게 뒤로 몸을 기울였고, 난 그 기회를 놓치 지 않고 바이콘을 박찼다. 그리고 익숙한 시동어, ‘아엘로’를 읊조렸 다…….
펑!
마법의 부츠가 거센 바람을 뿜어냈 다. 그렇게 쏜살처럼 날며 샛별을 뽑아 들었다.
샛별은 웅/ 하고 눈부신 검신을 뽐 냈다. 파사(破邪)의 빛을 머금은 칼 날을, 그대로 대지의 정령 미간에 꽂아버렸다.
그우. 게임 속에서 놈이 죽을 때 미간이 빛나며 사라지던 걸 떠올리고 그렇 게 한 것이다. 과연 뭔가 약점 같은 걸 건드린 건지, 대지의 정령은 힘 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 어이씨—”
다만, 내 생각보다 그 효과가 더 대단했다. 마치 산사태라도 난 듯 놈은 빠르게 허물어졌고, 난 바위와 흙더미에 파묻히지 않기 위해 필사 적으로 몸부림쳐야 했다.
“닉스!”
그때 타이밍 좋게도 어디선가 공허 의 창이 날아들었고, 난 곧장 손을 뻗어 그걸 붙들었다.
“으악, 무거워-”
공중을 부유하던 아탈란테는 힘에 부치는지 내가 잡은 자색창을 제외 한 나머지를 거두었다.
우웅.
그리고 보랏빛 안광을 번뜩이며 날 지상으로 이끌었고, 난 공허의 창에 매달려 아찔한 진자운동을 한 끝에 바닥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그즈음 헤일라도 바람의 정령을 완 전히 갈아버렸지만, 트롤 영매의 춤 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사방에서 는 자잘한 정령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하하, 포이닉스 경!”
급박한 전황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밝은 목소리.
“왕자님‘?”
바이콘에 타며 돌아보니 어느새 울 카르가 일단의 부하들을 이끌고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경과 회포를 풀고 싶은데 영 상황 이 따라주질 않는군.”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이들 중엔 회색 갑옷을 걸친 기사와 흰 망토를 늘어뜨린 기사, 보석 박힌 금속띠를 이마에 두른 마법사 등 낯선 이들도 있었지만 눈에 익은 자들도 많았다.
‘거대한’ 안키르 경, 수계 마법의 대가인 마스터 리몬드, 왕자의 친병 이자 중장기병인 란델과 안드로 “저들은, 경의 부하인가?”
“예? 아, 맞습니다.”
“그럼 실례하지.”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눈인사를 나 눌 틈도 없이, 울카르는 주변을 돌 아보며 고함을 질렀다.
“집결하라! 저 사악한 주술사를 노 릴 것이다!”
그는 그렇게 외치곤 곧장 내달리기 시작했고, 내가 이쪽에 있는 걸 본 부하들은 얼떨결에 대열에 합류했다.
“마스터 에포즈!”
올카르의 호명에 금속띠를 두른 마 법사가 주문을 외웠다.
“아슬아슬하게, 구름 위로, 가用운 걸음을.”
밀라놀어잖아? 밀라놀어로 주문을 외는 건 처음 보는데.
의아함도 잠시, 마지막 시동어에 이어 그가 지팡이를 휘젓자 바이콘 이 급격히 가속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대열 전체가 전보다 훨씬 빨라진 것이었다.
“휠테르 경, 지젤라 경! 왼쪽을 맡 으시오!”
휠테르와 지젤라.
들어 본 이름이다. 울카르 왕자의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기사…….
회색 갑옷을 입은 기사가 반달 모 양 창을 휘두르며 왼편의 트롤 용사 에게 돌격하자, 백합 꽃잎을 새긴 망토를 두른 여기사가 뒤따랐다.
하지만 영매를 지키는 트롤 용사는 하나 더 있었기에, 이번엔 내가 고 함을 질렀다.
“컨휘어! 저기, 오른쪽 놈!”
“예, 나리!”
중장병 데르비쉬, 중검사 움베르 타, 창잡이 맥케이그, 성당기사 카바 르 등이 컨휘어를 따라 갈라졌다.
뒤에서 온갖 굉음이며 고함이 울렸 지만,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앞만 보고 질주했다.
울카르의 기사와 친병, 그리고 마 법사들은 끊임없이 나타나는 자잘한 정령들을 뭉개 버리다시피 하며 앞 으로 돌격해갔다.
어느새 나와 말머리를 나란히 한 울카르는 번쩍이는 은빛 손으로 -살점 없는 관절이 언뜻 보이는 것 이, 의수인 것 같았다- 활대를 쥐며 외쳤다.
“포이닉스 경!”
고함과 함께 쏘아진 화살이 영매의 앞을 지키던 반투명한 불곰을 꿰뚫 었다.
크릉!
바이콘은 뿔을 내밀어 허물어지는 불곰의 영혼을 흩어내곤 펄쩍 뛰어올 랐고, 난 곧장 검은 얼음을 휘둘렀다.
써컹!
마침내, 영매의 머리통이 하늘로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