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45)
나의 악당들 345화
59. 고원(5)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정도가 있 지, 갑자기 찾아온 셰아는 눈을 진 지하게 반짝이며 나를 재촉해 댔다.
“나리, 시간이 없지 않나요? 내일 아침에 출정한다고 들었는데……
“셰아, 잠깐만. 뜬금없이 나타나선 왕자님을 뵙게 해달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전할 말이 있다고 말씀드렸잖아 요.”
“그러니까, 그게 뭔데?”
“그건……
녀석은 잠시 입술을 달싹이더니 단 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3왕자님께만 말씀드릴 수 있어요.”
“……답답하네. 왕자님이 어디 길 가는 잡상인도 아니고, 갑자기 와서 만나게 해달라고 하면 만날 수 있는 분이야?”
“그럴 수 없는 걸 아니까 나리께 부탁드리는 거예요. 그분의 기사이 시니 만나게 해주실 수 있잖아요.”
“그래, 가능할 수도 있겠지.”
“그럼••••••
“근데 이렇게 아무것도 말 안 해주 고 무작정 만나게 해달라고 하면, 난 왕자님 호위들한테 뭐라고 말할 까? ‘얘가 제 부하인데, 왕자님을 꼭 뵙고 싶대요. 근데 용건은 비밀 입니다’, 이런 얼빠진 소릴 하라는 거니?”
“……으 ”
“정 왕자님한테 직접 말씀드려야 하면 내일 아침에 출정할 때,”
“그건 안 돼요. 다른 사람들이 알 면 안 되는 일이라서……
“……그럼 뭘 나더러 어쩌라고?”
셰아는 앵무새처럼 왕자님을 만나 게 해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비밀을 지켜줄 테니 내게 먼저 말해보라고 설득해 봤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아이씨. 이게 뭐 하는 거야, 추워 죽겠는데.
“닉스.”
속으로 투덜대고 있는데, 조용히 천막에서 나온 아탈란테가 어깨에 갬비슨을 걸쳐주었다.
“아, 고마워.”
“겨울 한밤중에 그렇게 입고 나가 면 어떡해.”
“하, 왜? 감기라도 걸릴까 봐?”
“Anshiuamatte. 젊은 거 믿고 그 러다 큰코다친다, 너.”
……글쎄. 젊은 건 둘째치고, 이 무식하게 튼튼한 몸이 감기 같은 거 에 걸려 골골거린다니 상상이 안 되 는데.
“ 당신은-”
“안녕?”
“어……
눈을 동그랗게 뜬 셰아는 인사를 건네는 아탈란테와 그녀가 나온 천 막, 그리고 나를 번갈아 살펴보았다. 그러다 무슨 상상을 했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이는 것이었다.
“……어, 그게, 제가 방해를. 일부 러 그런 건.”
“뭐, 괜찮아. 슬슬 일어나려던 참이 었거든. 아니, 오히려 내가 고맙다고 해야 하나?”
“네, 네?”
“덕분에 또 하고 싶었던 거 참았거 든. 한 번 더 했으면 내 발로 못 돌 아갔을지도 몰라.”
“••••••네에?”
“야, 그만해.”
뒤늦게 아탈란테의 장난을 말렸으 나 이미 셰아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평민이지만 오랫동안 수도원 생활을 한 탓에 이런 농담에 약한 편이었다.
“어.”
잠깐만……. 수도원?
“……셰아, 너. 왕도에 있는 수도원 에서 지냈다고 했지?”
“네‘?”
내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깨를 움찔 거린 셰아는 이내 진정하듯 숨을 고 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요.”
셰아를 제외하면, 내가 아는 사람 들 중 왕도의 수도원과 관련된 사람 은 둘 뿐이었다.
첫 번째로, 테오도라 공녀.
그녀는 십여 년 전에 있었던 스트 롬 공작가의 정쟁에서 도망쳐 밀라 놀 왕국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라이 오넬 3세는 그녀를 왕도의 수도원에 가둬 버렸다.
그렇게 수녀로 살던 테오도라는 5 년쯤 전에 수도원에서 도망쳐 돌연 칼란다리 교단의 성기사가 되었다.
시간을 따져보자면, 그즈음 수도원 에 들어간 셰아와는 아예 마주치지 못했거나 별 인연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유릴 공주님이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는데 요.”
“유릴 라이오넬도티르 오브 제오 레. 울카르 왕자님의 여동생 말이 야.”
성자 아벨이 남긴 꿈의 막바지에 은빛 광채와 함께 등장한, 밝은 남 색의 눈동자를 지닌 수녀.
난 그 얼굴을 떠올리며 재차 질문 했다.
“너, 유릴 공주님이랑 같은 수도원 에 있었던 거지?”
“그건, 아니에요.”
“••••••아니야?”
“제가 지낸 곳은 성 아데이온 수도 원이고, 공주님께서 계신 건 성 토 마시아 수녀원이니까요.”
“……수도원이 하나가 아니었어?”
“네. 성 아데이온과 성 토마시아 말고도 두 곳 더 있는데요.” 뻘쭘한 기색을 숨기려 코밑을 쓱 훑는 내게, 망설이던 셰아가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친구 사이이긴 했어요.”
“……친구? 너랑 유릴 공주님이?”
“네. 그쪽 수녀원과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어서 나름 교류 도 있었고, 마티아리옷 대성당에서 큰 행사가 벌어질 때면 며칠씩 같이 지내기도 했으니까요.”
별로 특이할 것 없어 보이는 이야 길 하면서도, 그녀는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도원에 처음 들어가 적응을 못 하던 시절에 공주님께 도움을 받기 도 했고……. 어쨌든, 그래요.”
“그래서 왕자님을 뵙고 싶다는 게 유릴 공주님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라는 거야?”
셰아는 또다시 입을 다물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아무래도 왕자님을 뵈러 가야겠는 데, 넌 어쩔래?”
내 질문에 아탈란테는 잠시 고민하 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좀 궁금하긴 한데, 모르는 편이 낫겠어. 왕실의 일을 이민족이 알아 봤자 득 볼 게 없을 테니.”
그녀는 자연스레 손을 뻗더니 내 목을 당겼다. 그리고 입술을 맞추고 혀를 엮어오는 것이었다.
“윽, 애가 보는데-”
“여기 애가 어디 있어?”
“ 야.”
“그럼 내일 보자구, walasim.”
내가 뭐라 말하거나 말거나,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인 아탈란테는 코끝 을 톡 두드리곤 뒤돌아 떠나버렸다.
어쩐지 숨을 죽이고 있는 셰아를 돌아보며, 난 슬쩍 눈썹을 긁었다.
“그, 이게 뭐, 들키면 안 되는 비 밀 같은 건 아닌데……. 그래도 굳 이 떠들고 다닐 필요는 없겠지?”
“네, 넵.”
토끼 눈을 한 소녀는 입술을 앙다 물곤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울카르를 찾아가니, 마침 그는 오 스 백작과의 대화를 마치고 측근들 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셰아는 왕자와 독대하길 바랐으나, 호위들이 이를 허락해줄 리 없었기 에 난 그녀를 데리고 울카르의 천막 에 들어갔다.
천막 안은 왕자의 측근 예닐곱 명 이 들어차 있었다.
천막은 앤트럼의 어느 남작이 내어 준 것이었는데, 품질이 꽤 좋은 건 물론이고 내 것보다 두 배쯤은 커 보였다. 그래도 장정이 열 명이나 바글거리니 숨을 쉬지 못할 지경이 었다.
“……지젤라 경,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소?”
“물론입니다, 전하.”
울카르의 호위를 담당하는 건 ‘새 매의 기사’ 지젤라 경이었다.
따로 공식적인 직함을 받거나 한 건 아니고, 그녀가 하도 왕자의 호 위에 신경을 많이 쓰다 보니 은연중 에 그 지위를 인정받게 된 경우 같 았다.
“성벽은커녕 목책도 없는 야지잖습 니까. 전하의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니 더욱 주의하셔야 합 니다.”
“그런가. 적이 하도 많으니 이런 점이 불편하군.”
울카르의 한숨 섞인 중얼거림에 지 젤라 경은 당황한 눈빛으로 더듬거 렸다.
“하지만- 적이 많다고는 해도 전 하를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더 많 고, 또, 기사들이 충심으로 지키고 있으니 부디,”
“하하,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 었소. 아무렴 내 곁에 경이 있는데 암살자 따위가 무서울까.”
지젤라 경은 입을 꾹 다물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고, 왕자가 사심 없이 건넨 말에 여기사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 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안키르 경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이거, 불을 너무 세게 땐 모 양이구만! 나가서 찬바람이나 좀 쐬 고 오지 그러나?”
날카롭게 흘겨볼 뿐 입을 열지 못 하는 지젤라 경 대신, 무릎에 투구 를 내려놓은 휠테르 경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조용히 해주십시오, 경. 안 그래도 여기 있는 숨을 혼자 다 마시고 계 시는데 입까지 여시면 저희가 숨을 못 쉬지 않습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요?”
“ O » “S”.
안키르가 자신을 돌아보자, 휠테르 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코를 틀어막 았다.
“제기랄, 혼자 깔끔한 척 하겠다는 거요?”
“기본을 지키라는 겁니다. 전하의 안전에서 이런 악취를 풍기다니, 기 사로서 불충한 일입니다.”
“불충? 불추웅?”
씩씩대며 일어난 ‘거대한’ 안키르 경은 천막 꼭대기에서 대각선으로 뻗은 지주(支柱)에 정수리를 박고 말았다.
“어, 어어!”
“거기 잡아!”
그 여파로 천막이 기울자, 기사들 뒤편에 서 있던 란델과 안드로스 등 친병들은 깜짝 놀라서 넘어지려는 지주를 붙들었다.
“이, 이런.”
“역시 안키르 경. 싸울 때를 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십니다. 되 도록 회의 때는 알아서 빠져주시지 요.” “이런, 그 주둥이 좀 다물지 못하 겠소!”
“경의 냄새 나는 입이나 먼저 다무 십시오.”
……저 유치한 아저씨들이 왕국에 서 이름을 날리는 기사라니. 믿을 수가 없구만.
“하하.”
얼굴을 붉힌 세 기사와 천막을 세 우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친병들을 보고도 울카르는 그저 푸근하게 웃 고만 있었다.
그래. 왕자님이 괜찮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가까스로 상황이 진정된 뒤, 울카 르가 내게 질문을 해왔다.
“전할 말이 있다고 하셨소?”
“예. 제가 아니라 여기, 제 부하인 셰아가 전하께 올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기에 이 야밤에……
왕자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에 셰아는 침을 꿀꺽 삼키곤 입을 열었 다.
“유릴 공주님께서 제게 부탁을 하 셨습니다. 말을 전해달라구요.”
“유릴?”
“공주님께서?”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왕 자는 물론 기사와 친병들 역시 놀랍 고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물론 몇몇은 의심 어린 눈빛을 보냈으나 일단은 침묵하려는 듯했다.
셰아가 성 아데이온 수도원 출신이 며 유릴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음을 밝히며 공주의 전언이 있다고 하자, 이내 울카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 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나와 유릴 은 일 년에 세 번씩은 편지를 주고 받고 있다. 할 말이 있으면 편지에 쓰면 될 텐데 왜 구태여 사람을 보 낸단 말이냐?”
“편지에 쓰지 못할 이야기이기 때 문이에요.”
“편지에 쓰지 못할 이야기?”
“공주님이 말씀하시길, 전하와 주 고받는 편지는 안전하지 못하다고 하셨어요. 성 토마시아 수녀원의 원 장님은 물론이고, 근위대장님이나 자카리스 왕태자께서도 편지를 확인 해보고 계실 거라고……
국왕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자카리 스가 거론되자 훈훈하던 천막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자카리스는 이복동생인 울카르를 정적으로 여겨 몇 번이고 모략을 꾸 몄던 자다. 울카르의 부하들이 경계 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내용이 지?”
울카르는 테이블 위에 주먹을 말아 쥔 채 굳은 표정으로 질문했고, 셰 아는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누군가 유릴 공주님을 죽이려 해 요. 지금까지 몇 번이나 암살 시도 가,”
“잠깐.”
충격적인 이야기를 멈춰 세우곤, 울카르는 천막 안을 돌아보았다.
“모두 나가주시오.”
“ 전하.”
“어서.”
지젤라 경이 무어라 입을 달싹거렸 으나, 왕자의 가라앉은 눈빛에 고개 를 숙이며 물러나고 말았다.
안키르와 휠테르, 그리고 친병들 역시 군말 없이 천막을 벗어났다.
나 역시 잠깐 눈치를 살피다 그들 을 따라 나가려던 그 순간, 왕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이닉스 경. 그대는 남으시오.”
……어이씨, 난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