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93)
나의 악당들 393화
62. 기만전술(20)
늦은 오후에 잠들었던 내가 눈을 뜬 건 대충 자정 무렵이었다.
귀가 간지럽다. 날 꿈나라에서 끄 집어올린 소리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아련한 말 울음소리와 돌계단을 두 드리는 급한 발소리였다.
“••••••끄음.”
지난 이틀간 고생을 하긴 했는지, 뻐근함에 신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기를 얼마쯤, 방문 너머에 멈춰선 누군가가 숨을 고르며 손을 들었다.
“잠깐만 기다려.”
“어- 알겠습니다, 나리!”
역시, 초장이 골만이었군.
시끄럽게 노크하는 걸 막기 위해 경고한 거였는데, 몸만 큰 소년의 대답은 썩 우렁찼다. 눈치 없는 놈 같으니.
결국 내 품에 곤히 잠들어 있던 뭉치가 깨고 말았다. 번쩍 눈을 뜨 고는 몸을 바짝 긴장시키는 모습이 헤일라와는 영 대조되어 괜히 웃음 이 흘러나온다.
“괜찮아. 좀 더 자.”
속닥거리며 녀석의 하얀 등을 쓸어 내렸다. 손끝이 미끄러질 듯 부드러 운 살결…….
“포이—”
뭉치는 어깨를 잘게 떨고 목을 움 츠리더니 고양이처럼 가르릉대며 가 슴팍에 얼굴을 비벼왔다. 어깨를 덮 을 만큼 기른 머리칼은 온통 산발이 되었고 눈꺼풀은 퉁퉁 불었지만 여 전히, 아니, 오히려 더욱 사랑스럽 다.
닿은 살결을 통해 몸이 이완되는 게 느껴진다. 다만 정도 이상으로 늘어지진 않는 걸 보니, 이미 졸음 이 달아난 모양이다.
“으웅.”
조금 진해진 과일향을 즐기며 짧게 입맞춤을 나눈 다음, 침대에서 일어 나 바지를 꿰어 입었다.
“저도 주세요.”
“일어나려고? 아직 한밤중인데.”
“안 졸려요.”
머리맡 협탁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져 있던 옷가지를 넘겨주니, 뭉치는 모포 아래에 쏙 숨어서는 꼼지락대 기 시작했다.
그때쯤, 아까 들려왔던 말의 기척 이 재차 들려왔다. 귀를 기울여보니 히힝, 하는 울음소리와 짜증 섞인 투레질이 어지럽게 섞여 있다.
한둘이 아니라, 족히 수십 마리가 내는 소리였다.
“……뭐야, 이 시간에?”
얇은 빗장이 걸려 있던 나무창을 열자-
“……무장은 최대한 가볍게 하십시
오! 갑옷은 투구와 흉갑만! 기창은 안 챙기셔도 됩니다!”
“예비용 마필도 둘 이상 챙기도록 하시오!”
“나눠드린 식량은 각자 잘 보관하 십시오! 언제 추가 보급이 될지 모 릅니다……
찬바람과 함께 왁자지껄한 소리가 한꺼번에 밀어닥쳐왔다.
“말이 부족하신 분들은 이쪽으로 오십시오!”
“잠깐, 나더러 이딴 비루먹은 말을 타라고?” “훈련받은 전마가 부족해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예비마는 사냥마나 승용마, 하다못해 짐말이라도 괜찮 다고 하셨으니 일단 가져가십시오, 나리.”
“허, 제길.”
성탑 3층에 자리 잡은 내실은 시 야가 썩 괜찮은 편이다. 내성 성문 아래에 모여든 기사와 종자, 친위기 병들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딱 봐도 중기병대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의문도 잠시, 내실 앞에서 기다리 고 있는 소년에게 생각이 닿았다.
벌컥.
“으헉!”
바지만 걸친 채 방문을 열어젖히자 골만은 깜짝 놀라 뒷걸음을 쳤다.
“나, 나리-”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놀란 것도 잠시, 소년은 얼른 표정 을 수습하며 입을 열었다.
“그, 중기병대가 출동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야밤에 무슨……. 누구 명령인 데? 왕자님 깨셨어?”
“아니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중기병대를 집결시킨 건 안키
르 경이십니다.”
“안키르 경이?”
내가 미간을 좁히자, 골만은 고개 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그렇게 전해 들었습니다.”
“전해 들어? 누구한테?”
“어, 프리츠랑 오브린, 두 형님하고 컨휘어 님이 그러던데요. 중기병대 가 집결 중인데 나리께 명령이 전해 지지 않은 게 이상하다며, 얼른 나 리를 깨우라 하셨습니다.”
중기병대의 준비 상태를 보아하니 적어도 이십 분 전에는 명령이 떨어 진 것 같았다. 골만의 말마따나 내 게 소식이 전해지지 않은 건 이상한 일이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 는 거야……
일단 골만에게 바이콘을 대기시켜 두라 명령한 뒤, 급히 준비를 시작 했다.
대충 무장을 갖추고 성탑을 뛰어나 갈 즈음, 성문 아래 집결한 중기병 대는 내성 밖으로 뛰어나가기 직전 이었다.
“안키르 경!”
짜증 섞인 고함을 내지르며 성큼성
큼 걸음을 옮기니 기병들이 분분히 길을 터주었다.
“포이닉스 경.”
“이게 지금 무슨 난리입니까? 이 한밤중에 출격이라됴?”
자기 몸집에 어울리는 거대한 전투 마를 탄 안키르 경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좋아. 때맞춰 잘 왔구만.”
“예?”
내 반문에, 그는 옆구리에 끼고 있 던 투구를 눌러쓰곤 살짝 헛기침을 했다. 그러더니 우렁우렁한 목소리 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적군의 뒤를 칠 것이오!”
“……아니, 참- 휴식이 필요하다고 하실 때는 언제고, 갑자기 그게 뭔 개소리예요.”
“말조심하시오!”
황당해하는 내게 호통을 친 안키르 경은 말고삐를 당기며 말을 이었다.
“주군께서 의식이 없으시다 하여 반격의 기회를 놓칠 순 없소!”
“그래서 뭐, 어쩌겠다고요?”
“적은 이미 상당한 피해를 보아 기 세가 크게 꺾였소. 우리가 보급로까지 끊어버리면 물러날 수밖에 없겠지!”
“보급로? 설마-”
난 이 거대한 기사의 계획을 눈치 채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사그, 그 빌어먹을 늪지를 통과 하겠다는 겁니까? 그 성자의 유해인 지 뭔지 하는 뼈다귀 들고?”
“그렇소.”
“시X, 대가리에 총- 아니, 화살 맞았어요?”
죽음의 늪지, 아사그는 독기로 가 득한 땅이라 군대가 기동로로 쓸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안키르 경이 안달-비렌의 성당에 서 ‘발견’한 성유물, 이른바 ‘흰 목 동의 정강이뼈’를 쓰면 독기를 태워 버릴 수 있지만…….
“그걸 써봤자 기껏 서른 몇 명 보 호하는 게 전부잖습니까. 지금 모인 중기병대는 쪽수가 족히 삼백은 넘 고.”
“경. 설마 내가 그 정도도 생각을 못 했겠소?”
안키르 경은 여봐란듯이 손을 들었 다. 그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 리니,
“••••♦•공녀님?” 갑주와 하얀 서코트를 걸친 채 백 마 브라이트미어에 탄 테오도라가 눈인사를 건네왔다.
“포이닉스 경.”
“……여기서 뭐 하십니까?”
“안키르 경의 요청을 받았소.”
“무슨 요청이요?”
“아사그를 지나기 위해 동행해달라 더군.”
“예? 아니……. 광명교도 간의 전 쟁엔 관여할 수 없는 거 아니었습니 까?”
어쩐지 부자연스럽게 굳은 얼굴의 테오도라 대신, 안키르 경이 내 질 문에 답했다.
“전쟁에 관여하시려는 게 아니오, 경. 고향을 방문하시는 길에 외숙부 의 친신(親臣)들과 동행하는 것뿐이 지.”
“……거, 참신한 개소리네요.”
테오도라 공녀는 스트롬 가문 출신 으로, 지금 하이캐슬을 공격하고 있 는 군대의 총사령관인 아빌람버스 공작의 조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테오도라의 고향은 아빌람버스 공작 의 본거지인 토팔 지방, 그중에서도 백년성이다.
“공녀님께선 고절한 신성력을 가지 신바, 성유물의 힘을 몇 배나 증폭 시킬 수 있소. 중기병 삼백쯤은 너 끈히 보호해 주시겠지.”
“……그래, 뭐, 그럴 수 있다고 쳐 요.”
난 미간을 좁힌 채 쏘아붙였다.
“그래도 그렇지, 왕자님의 명령도 없이 이런 짓을 벌이겠다는 겁니까? 제정신이세요?”
“말을 삼가라고 하였소, 포이닉스 경! 그리고 나는 엄연히 중기병대의 주장(主將)이오. 주군께서 부재하신 지금, 중기병대를 움직일 권한은 오 롯이 나에게 있소!” 당당히 고함을 지르는 안키르 경 을, 난 멍하니 올려보다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 진짜 정신 나갔냐?”
“••••••뭐라?”
“이 미친 새끼야, 트롤을 할 거면 혼자서 하든지! 최정예 병력을 싹 다 빼가는 걸로도 모자라서, 공녀님 까지 데려가겠다고? 누구 까음功 로!”
밤하늘에 쩌렁 울려 퍼진 고함과 나도 모르게 배어 나온 살기에, 안 키르의 거대한 전투마가 깜짝 놀라 선 앞다리를 쳐들며 날뛰었다.
“이런-”
그가 고삐를 당기며 말을 진정시키 는 사이 난 주변에 모여든 다른 기 사들을 돌아보았다.
“휠테르 경, 데일레시드 경! 등신 같이 닥치고만 있지 말고 뭐라고 좀 떠들어보십쇼! 설마 아무 생각도 없 이 이 미친 짓거리에 동참하려는 겁 니까?”
내가 으르렁거리자 ‘화가’ 휠테르 경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왜 아니겠습니까? 척 봐도 즐거운 일이 될 것 같은데, 망설일 이유가 없지요.”
“그게 뭔.”
“예상 밖이로군요, 경이라면 나와 생각이 통할 줄 알았는데……. 안키 르 경이 이 작전에서 경을 배제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즐거움을 숨길 수 없는 듯, 휠테르 경의 두 눈은 그의 창날처럼 반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아, 맞다. 이놈도 정상은 아닌 새 끼였지…….
“뭐,”
옆에 있던 ‘오든록의 챔피언’ 데일 레시드 경은 면갑 아래로 수염을 만 지작거리며 말했다.
“안키르 경의 장담대로 아사그를 넘을 수만 있다면야…… 그다지 미 친 짓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하오.”
“……하. 진심입니까, 그거?”
“물론. 또, 삼왕자 전하께서 부재중 이신 지금 안키르 경이 중기병대를 이끄는 건 순리 아니오?”
순리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다들 말이 안 통하는구만.”
이따위 단체 트롤링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순 없었기에, 난 문루를 올려 다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도넬!”
“예, 나리!”
“성문, 닫아!”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묵직한 창살문이 ‘쾅!’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문루 아래 모여 있 던 기사와 종자, 기병들이 식겁하여 흩어졌다.
“이게 무슨!”
순식간에 내성에 갇힌 신세가 된 안키르가 노성을 터뜨렸다.
“당장 문을 여시오!”
“싫다면?”
“포이닉스!”
난 장검 ‘검은 얼음’에 손을 얹으 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왜? 중앙수비대장으로서 내성의 성문을 닫은 것뿐인데, 뭐가 문제 야?”
“……지금 한번 해보자는 건가?”
“해보든가.”
안키르의 눈동자가 벌겋게 불타올 랐다.
그와 나를 중심으로, 가뜩이나 차 갑던 밤공기가 숫제 얼어붙기 시작 했다. 종자나 일반 기병들은 숨소리 조차 내지 못했고, 기사들 역시 쉽 사리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칼부림이 날 것 같은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안키르와 나 사이에 끼어든 건-
“그만. 둘 다 멈추시오.”
다름 아닌 테오도라 공녀였다.
슬쩍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선 그녀 는 아까 전과 같이 딱딱히 굳은 얼 굴이었다.
밝은 금발과 연녹색 눈동자를 비롯 해, 테오도라의 이목구비는 전체적 으로 무척 온화한 편이다. 그 때문 인지 무표정이 썩 어색하다. 정색하 거나 화를 내는 게 어울리지 않는 인상인 걸까.
“아군끼리 분란을 일으키다니. 외 숙께, 경들의 주군께 무슨 낯을 보 이려고 이런 추태를 부리는 게요?”
테오도라의 낮은 호통에 안키르가 입을 다물었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에게 반문했다.
“공녀님이야말로 대체 무슨 생각으 로 이런 멍청한 짓거리에 동조하시 는 겁니까?”
“경!”
“자중하시오!”
몇몇 기사들이 만류를 해왔지만, 난 그들을 깨끗이 무시한 채 테오도 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고향에 방문하실 거라고요? 백년 성에 공녀님을 반겨줄 사람이 아직 도 남아 있습니까? 아니, 있다손 쳐 도, 저와 했던 약속은 다 잊으신 겁 니까?”
세테니오라 수도원에서, 난 그녀에 게 성자 아벨이 남긴 꿈을 공유해주 었다. 어둠에 집어 삼켜지는 은빛 갈기의 사자를 보여주었고, 그녀는 나와 함께 울카르의 곁을 지키기로 했더 랬다.
이를 떠올렸는지, 테오도라 공녀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 잊지 않았소.”
“근데 이렇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떠나시 겠다고요?”
“……경이 이해해 주시오.”
“이해요? 전 지금 공녀님이 왜 이 러시는지도 감도 안 잡히는데, 이해 는 무슨 이햅니까? 이상한 말씀 마 시고 내리십쇼.”
“정 그렇다면……
그녀는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그 러다가 눈짓을 하여 내성 안쪽, 정 확히는 영주관을 가리켰다.
“……경을 이해시켜 주실 분이 계 시오.”
“예? 누구요?”
“누구겠소?”
테오도라의 지긋한 시선에 나도 모 르게 영주관 쪽을 돌아보았다.
거대한 석조 저택인 영주관의 복도 에서는, 어렴풋이 불빛이 엿보였다. 그 흐릿한 빛에 갑주를 걸친 실루엣 이 비쳐서 안력을 돋웠다.
“……어?”
지젤라 경이잖아? 안달-비렌의 성 당을 지키고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에?
난 의문을 품자마자 그 답을 눈치 채고는 테오도라를 돌아보았다.
“혹시-”
“ 쉿.”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이만 길을 열어주시오, 경.”
“아니……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안키르를 돌아보았더니, 부리부리 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던 그는 슬쩍 윙크를 해보였다.
“……X팔, 뭐야?”
난 더욱 혼란스러워져서 눈만 끔뻑 거리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 정으로 물러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