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98)
나의 악당들 398화
63. 은왕자의 기사들(5)
2주 전, 하이캐슬.
‘정 그렇다면…… 경을 이해시켜 주실 분이 계시오.’
테오도라 공녀가 남긴 이 알쏭달쏭 한 말에 대한 답을 듣기 위하여, 나 는 그녀의 시선을 더듬어 영주관으 로 향했다.
이름 높은 기사 가문 ‘윙드’의 자 랑스러운 딸이자 ‘새매기사’라 불리 는 지젤라 경이 나를 맞이했다. 내 방문을 예상이라도 한 듯 그녀는 말 없이 앞장섰다. 그렇게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끽해야 여섯 평이나 될 까 싶은 작은 서재였다.
“••••••전하?”
끈으로 철한 서류뭉치 두어 개와 양피지 두루마리가 널브러진 책상 에, 울카르 왕자가 홀로 앉아 있었 다. 그는 일렁이는 촛불 위로 흐릿 하게 미소를 지었다.
“포이닉스 경.”
“아니- 언제 일어나셨습니까?”
“글쎄, 한 두 시간쯤 되었나?”
“몸은요?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고 말고 할 것도 없소. 피로 가 쌓였던 것뿐이니.”
책장 근처에 놓여 있는 의자를 끌 어다 왕자의 건너편에 앉으며, 나는 작게 투덜거렸다.
“안키르 경이 웬 개짓거리를 하나 싶었는데, 전하의 명령이었군요. 귀 띔이라도 해주시지. 괜히 열 냈잖습 니까.”
“그러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
소.” “대군이 코앞에 있는데 시간이 무 슨 상관이랍니까?”
“경에게도 휴식이 좀 필요하리라고 여겼지.”
“하이고, 우리 왕자님은 배려심도 깊으셔. 너무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울카르는 낮게 웃으며 말했다.
“경의 연기 아닌 연기에 적의 세작 들도 깜빡 속았을 테니, 너무 섭섭 해하지는 마시오.”
“그게 목적이었군요? 적의 세작을 속이는 것?”
“목적이 그것이었다기보단, 믿음이 있었다고 해두겠소.”
“ 믿음이요?”
“그래, 믿음. 경이 속사정을 모르더 라도 일을 망치지는 않으리라고 믿 은 것이지.”
그렇게 왕자가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이자, 난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렸 다.
“……우리 왕자님, 배려심만 깊은 게 아니라 말도 참 잘하시네. 웅변 학원이라도 다니셨어요?”
“혀가 가장 강력한 무기인 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 정도는 해야지.”
“혀가 가장 강력한 무기인 곳이 요?”
“왕궁 말이오. 이래 봬도 난 왕자 인데, 혹시 몰랐소?”
“••••••으휴.”
내가 짜증스럽게 한숨을 쉬며 팔짱 을 끼자 울카르는 또다시 웃어대었 다.
그러기를 잠시, 그는 서류 뭉치 하 나를 툭툭 두드렸다.
“아리아드 경과 라이암 경이 작성 한 전투기록을 확인하던 참이었소. 경의 활약이 대단했더군.”
“하루 이틀 일입니까?”
도시에 숨어든 암살자들과 밤하늘 을 날며 룬돌을 뿌려댄 용기사들, 그리고 그 룬돌을 통해 강습해온 용 병들까지.
내성에서 있었던 전투에 대해 이야 기하다가, 왕자는 미세하게 굳은 얼 굴로 질문을 해왔다.
“……란드리 변경백의 원수를, 경 이 갚아주었다고 들었소.”
“ 아.”
정마검주 얘기로군. 난 눈썹을 긁 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정확히 말하면 제가 아니 라 라넌이 죽이긴 했는데.”
“라넌?”
“아, 뭉치의 새 이름입니다. 뭉치는 아시죠?”
울카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 다.
“경이 데리고 있는, ‘검은 여인’이 라는 별명의 암살자 말인가. 그러면 그녀, 라넌에게 내 감사의 말을 전 해주겠소?”
“예, 당연히 그래야죠.”
이어서 왕자는 죽은 란드리 변경백 을 떠올리는 듯 가만히 책상을 쓸어 만졌다.
“첫인상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지 만, 그는 명예롭고 훌륭한 사내였소. 나를 지지해준 첫 번째 영주였으며, 믿을 수 있는 동료였지. 가문과 영 지를 그 무엇보다 사랑했고……
울카르는 말끝을 흐리며 눈을 감았 다. 난 얌전히 그를 따라 침묵을 지 켰다.
“……그의 가문과 후계자는 영원히 내 보호를 받을 것이오.”
“저도 거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기쁘군.”
왕자는 헛기침 몇 번으로 슬픔을 털어내고 대화를 이어갔다.
“라넌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하탄 카 공에겐 따로 포상을 해야겠소.”
“우테콰이한테요?”
“그렇소. 그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적의 공세를 그리 수월하게 막아내 지는 못했을 테니, 마땅히 상을 줘 야지.”
“……어,”
난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글쎄요. 별로 좋아할 것 같지 않 은데.”
“좋아할 것 같지 않다? 어째서 말 이오?” “동족을 죽여서 그런지 좀 많이 시 무룩해져 있더라고요.”
“……음, 버카드의 노예군단에 초 원의 부족이 상당수 섞여 있긴 했 지.”
“그쵸. 동족 죽이고 상을 받고 싶 어 할 놈■이 아니라서.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언 고맙소. 그에 대해서는 고민 을 해봐야겠군.”
울카르는 슬쩍 미간을 좁히며 팔걸
이를 두드렸다.
“‘평화를 사랑하시는 알첸버그 부 왕 전하와 주의 인도를 받는 군대’ 라……. 온갖 더러운 비방을 동원하 여 만든 꼭두각시 군대에 그딴 이름 을 붙이다니. 역시 알첸버그 가문은 도저히 상종 못할 족속들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혹시 그들 을 풀어줄 방법은 없을까요?”
“노예병을 풀어줄 방법?”
“기왕이면 마법병들도요. 걔네도 다 세뇌된 거라던데.”
그는 잠시 고민에 잠긴 듯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려울 것 같군. 알첸버그 가문의 세뇌술은 사악한 만큼이나 비밀스럽 고 수준 높은 술수라고 들었거든.”
“마법이랑 무슨 약 같은 걸 쓴다고 듣긴 했는데, 그 정도입니까?”
“나도 문외한이라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마약을 써서 의식을 닫아 버린 뒤 꿈을 통해 무의식에 명령을 주입하는 식이라더군. 사실상 억지 로 장애를 만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 어서 파훼나 치료가 지극히 어렵다 고 알고 있소.”
“ O 으”
—”S三
마법이나 주술, 강령술 등 온갖 신 비가 난무하는 세상이니 세뇌를 하 는 방법에도 온갖 종류가 있을 터였 다. 그러니 무려 팔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알첸버그 가문이 어떤 술 수를 개발했을지 유추하는 일은 범 인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난 아쉬움에 혀를 차다가 문득 고 개를 들었다.
“맞다, 악몽을 꾸신다고요?”
“……아. 그렇소.”
“어떤 악몽을 꾸시는데요?”
“흠, 조금 갑작스러운 질문인데.”
“마침 꿈 얘기가 나오니까 생각나 서요.”
울카르는 난처한 듯 머리를 쓸어올 렸다.
“광명교도로서 그런 것에 대해 떠 드는 게 달갑지는 않소만.”
“그러지 말고 말씀해보십쇼. 제가 또 꿈에 관해선 전문가거든요.”
“전문가? 경이 말이오?”
“네, 제가요. 이래 봬도 꿈을 통해 성자님의 계시를 전해 받은 사람 아 닙니까.”
세테니오라 수도원에서 성자 아벨 이 죽음을 맞이하며 내게 계시를 남 긴 일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엘 가노어 교단의 고위 사제들은 물론이고, 귀깨나 밝은 귀족들 역시 도 소식을 접했겠지. 그리고 울카르 왕자는 왕국 제일의 군벌답게 정보 력도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경이 해몽에도 재주가 있는 줄은 몰 랐는데.”
“거참, 저 못 믿으십니까? 제가 헛 소리나 할 사람 같아요?”
“그쪽으론 썩 재주가 있지 않소?”
“누가요? 제가요?”
“말로 상대를 현혹하고 기습을 가 하는 건 경의 특기 중 하나잖소.”
“아이씨, 전하!”
내가 발끈 성을 내자 왕자는 낮게 낄낄거렸다. 그러기를 잠시, 그는 조 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 다.
“엄밀히 따지면 악몽이라 칭하기는 어려운데……
“어째서 입니까?”
“……어릴 적 어떤 순간에 대한 꿈 이라서 말이오.”
“어릴 적이라면-”
그의 유년 시절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음을 떠올리곤, 난 얼른 입을 다물었다. 울카르는 손을 휘휘 내저 었다.
“내게도 행복한 추억은 있소. 사실 꽤 많은 편이지.”
왕자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버 릇처럼 팔걸이를 두드렸다.
“왕궁의 정원에 대해서 아시오?”
“아뇨. 전 왕도에도 가본 적 없는 데요. 워낙 촌놈이라.”
“안타깝게 되었군. 내 언젠가 기회 가 되면 구경시켜주겠소.”
“왕도에 볼거리가 한둘이 아닐 텐 데 정원이나 구경하라고요?”
“왕궁의 정원이라고 했잖소. 경이 생각하는 그런 평범한 정원이 아니 오.”
“정원이 다 거기서 거기죠.”
“사슴이 떼지어 사는 정원은 흔치 않을 텐데?”
“……정원에 사슴떼가 살아요? 사 냥터 말씀하시는 거 아니고요?”
울카르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정원이 엄청 넓은가 보군요.”
“그렇소. 젤른트리와 비견될 만큼 넓지.”
천 단위의 대군이 격돌한 전장만큼 이나 넓은 정원이라니. 이 나라의 왕궁은 대체…….
“난 왕궁에서 정원을 제일 좋아했 소. 숨이 턱에 찰 때까지 정원을 달 리는 건 싫어하는 사람을 피하는 가 장 쉬운 방법이었으니까.”
“가끔 사소한 위험에 처하기도 했 지만……. 감수할만했지. 그럴 가치 가 있었어.”
남색 눈동자에 촛불이 일렁거렸다. 약한 온기에 젖은 눈빛이 조금쯤 나 른해졌다.
“동생도 정원을 좋아했소. 어머니 도. 내가 발견한 숲속의 연못을 특 히 좋아하셨지. 어머니와 나, 유릴을 제외하곤 토끼나 참새만이 찾아오는 그 아늑한 연못가……. 거기서 우리 셋은 소풍을 즐기곤 했소. 그리 자 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아니, 그 래서 더욱 소중한 시간이었지.”
추억에 잠기던 것도 잠시, 왕자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어깨를 으쓱였 다.
“그 정겨운 풍경을 감상하는 것을 어찌 악몽이라 칭하겠소.”
반전 없는 마무리였다.
나도 모르게 유혹하는 마귀나 살육 공장이 된 궁전, 타락한 기사들 따 위를 기대한 것일까. 난 조금 떨떠 름해져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그, 무척 괴로워 보 이셨는데요.”
“그랬겠지.”
“……어,”
“끝내 지켜내지 못한, 끝내 되찾지 못할 풍경이오. 괴로운 게 당연하 지.”
울카르의 말투는 지극히 담담했다. 홀로 죽어간 왕비와 수녀원에 갇힌 왕녀를 떠올리는 왕자라고는 상상하 기 어려울 정도로. 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침묵은 1분을 넘기지 않았다. 왕자 는 그만큼의 여유도 즐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본론이라고 하시면.”
“전에 말하지 않았소? 반격의 기회 가 올 것이라고. 지금이 바로 그 기 회를 잡을 순간이오.”
어느새 울카르는 자신만만한 워로 드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계획이 있으십니까?”
“아리아드 경이 제안한 작전이 있 소. 물론 내가 조금 손을 보았지.”
살무사의 작전이라.
홍미가 샘솟아 자세를 바로 하는 나에게, 왕자는 느긋한 어조로 말했 다.
“그에 대해 논의하기 전에, 먼저 이야기할 것이 있소.”
“어떤 겁니까?”
“경의 가문에 대해서.”
“••••••예?” 내가 멍청히 눈을 끔뻑거리자, 울 카르는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제 터놓을 때가 되지 않았소, 포이닉스 경? 아니, 포이닉스 오브 자하카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