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09)
나의 악당들 409화
63. 은왕자의 기사들(16)
전쟁 중이라는 소식은 들었다.
이곳 앙스트를 포함해 다섯 지방의 대영주인 아빌람버스 공작이 부왕 알첸버그와 함께 밀라놀 왕국을 공 격하고 있음은, 하사관 고트롭은 물 론 프로스하펜의 항만수비대원 전원 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프로스하펜과 별 상관 이 없는 전쟁이었다. 앙스트 전체에 서 장정을 징집하는 와중에도 프로 스하펜은 예외라, 병력을 보내는 대 신 금은과 각종 물자만 보급했기 때 문이다.
또한 육로는 오브도르프 지방을 포 함한 여러 이웃 영지들에, 해로는 해적대공에 의해 틀어막힌 형편이 다. 어지간히 전황이 불리해지지 않 는 이상 적의 공격을 받을 일은 없 으리라고 여겼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강철함대다!”
“밀라놀 야만인들의 공격이다!”
겔란족은 그들 스스로 고대제국의 적통임을 자부하므로, 북방 이민족 에 정복을 당한 밀라놀 왕국을 야만 인의 무리라 여겼다. 그러나 전쟁의 유불리를 가르는 건 민족이나 역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쏴!”
항만 입구의 왼쪽 등대를 지키던 항만위사가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 다. 이에 호응해 병사들은 노포(쪼 砲)를 쏘고 활을 당겼다.
콰직.
꽁무니에 질긴 밧줄을 단 거대한 화살들이 연달아 허공을 갈랐다. 반 절은 허무하게 빗나갔지만 나머지 반절은 선두 범선의 갑판이나 뱃전 을 꿰뚫으며 매달렸다.
그러나 여러 겹의 쇠사슬마저 끊어 버린, 전장 45미터에 전폭 13미터에 이르는 거선(巨船)을 노포 따위로 멈춰 세울 수는 없었다.
그나마 속도를 늦추는 게 고작이었 지만-
“Uin adandiara—!”
늙은 목소리가 기이한 음율의 주문 을 외웠다. 축대 위에 선 고트롭은 기함의 함교에 수염을 길게 기른 마 법사를 발견했다. 그는 알 수 없었 지만, ‘앤트럼의 마도사’라 불리는 오그슐리조였다.
후우우웅!
마치 여름철 태풍이 덮치기 직전에 그러는 것처럼, 물기를 잔뜩 머금은 센바람이 부두를 향해 불어닥쳤다.
강철함대의 기함인 ‘그랑 마담’은 돛을 팽팽하게 부풀린 채, 마치 기 마돌격을 감행하는 기사처럼 항만 입구를 단숨에 돌파했다.
끼기긱-
“어, 어!”
적의 기함에 작살 같은 화살을 박 아넣은 노포들은 고정부가 비틀리다 못해 산산이 박살 나며 추락했다. 불운한 병사 몇이 그에 휘말려 목숨 을 잃었다.
그웅, 그우우우우-!
바다 쪽에서 낯선 나팔 소리가 울 려 퍼졌다. 경쾌한 듯, 한편으로는 음울한 음색. 적의 것이다.
과연 고트롭의 예상이 틀리지 않아 서, 항만 입구로 그랑 마담을 쏙 빼 닮은 거대한 범선 두 척이 밀고 들 어왔다. 그들에는 못 미치지만 흑룡 함대의 주력 전선만 한 규모의 범선
들도 연이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노마법사가 불러들인 남동 풍을 타고 마치 날듯이 항만으로 들 이닥쳤고, 직후 옆구리에 묶어둔 전 투용 노선(權船)들을 떨어뜨렸다. 사방에 방패판을 단 방패선이나 지 붕을 덮은 거룻배 같은 작은 전투선 들이 덩치 큰 범선들 사이를 채웠 다. 그리고 부두에 정박 중인 흑룡 함대를 향해 노질을 시작했다.
“탐선(探船; 정찰용 군선)들은 도 대체 뭘 했길래-”
순식간에 항만을 가득 채운 적의 함대를 보고 하사관 고트롭은 원망 섞인 탄식을 내질렀다.
하지만 쇠비늘 함대에 겁을 먹고 항구에 처박힌 아군 함대를 탓하는 건, 지금 와선 하등 쓸모없는 짓거 리였다. 코앞까지 들이닥친 강철함 대를 상대하는 게 먼저였다.
“전원, 전투준비!”
코블 경이 긴 칼을 뽑으며 호령했 다. 다른 항만위사들도 비슷하게 기 세를 돋웠다. 한편 항만장은 영주관 으로 전령을 보냈다. 적의 규모가 범선만 스무 척에 이르니 서둘러 원 군을 청하려는 것일 터다.
“화살 준비해! 다들 정신 바짝 차 려!”
“옙!”
조원들을 독려하며, 고트롭은 부두 를 내려다보았다.
두 줄로 길게 뻗은 부두에 계류 중인 흑룡함대를, 강철함대가 가공 할 속도로 덮쳐갔다. 넓적한 돌판으 로 얇은 막대기의 한쪽 끝을 내리 치는 듯한 형상이었다.
“기습! 기습이다!”
“반격하라!”
배에 남아 있던 선원이며 수병들이 고함을 질러대며 바삐 움직였지만 병력의 반 이상이 자리를 비운 터라 재빨리 대응할 수가 없었다. 부두의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범선이 밧 줄을 풀어 부두에서 벗어나기 직전, 그랑 마담이 옆구리를 전력으로 들 이받았다.
콰앙!
부두를 넘어 도심까지 울려 퍼질법 한 굉음……. 하사관 고트롭은 일순 간 귀가 먹먹해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보니, 적 의 기함은 가장 외곽의 아군 범선을 두 동강 내고 그다음 범선에 올라타 다시피 한 모양새였다.
쩌저적.
불길한 굉음과 함께, 그랑 마담의 용골 아래 깔린 범선이 터지듯 박살 났다.
“닻을 올려!”
“밧줄을 풀어라! 부두에서 떨어져 야 한다!”
범선 두 척이 순식간에 수몰되는 모습에 경악한 것일까. 배에 남아 있던 선장이며 갑판장 등이 실성한 사람들처럼 악을 질러댔다.
“수병, 정위치-!”
미테르게란트 제국에서 가장 강력 한 함대라는 명성이 마냥 헛된 것은 아닌지, 흑룡함대는 기습을 당해 혼 란스러운 와중에도 금세 반격할 태 세를 갖추었다.
“돛줄 잡아! 기동해!”
“쏴! 뭐든 던지라고!”
정신을 차린 선원들은 선박을 부두 에서 떨어뜨리거나 회전시키며 진형 을 갖추었다. 수병들은 화살을 쏘고 투창을 던졌다. 몇몇 사관들은 선실 에 처박혀 있던 전투마법사들을 끌 고 나와 윽박질렀다.
“정신 차리십시오! 마기아 커트, 제발 정신- 야! 이 병신새끼야!”
“당장 주문 외라고요! 배때기 갈라 버리기 전에!”
사관들이 악귀 같은 얼굴로 다그치 자 전투마법사들은 경황 중에도 반 사적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급하게 주문 을 외운들, 진즉부터 준비를 마치고 있던 강철함대의 전투마법사들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BrQlantiaune!”
“Expulso arma!”
하사관 고트롭으로서는 알아들을 수도 없는 밀라놀어 내지는 슈파흐 트어 주문이 마파람을 타고 흘러들 었다.
기함인 그랑 마담을 포함하여, 부 두에 머리를 들이민 범선과 노선들 이 주변을 향해 온갖 공격 주문을 쏟아냈다.
“꼬아아악!”
“불이다!”
화염구가 갑판에 모여든 선원들을 집어삼켰고, 축축한 넝쿨이 제멋대 로 자라나 용골을 비틀었으며, 푸른 전류가 흐르는 작살이 헤엄치던 수 병들을 튀겨 버렸다.
U I 99
목청이 찢어지는 비명과 목재가 쪼 개지는 파열음 등 혼란과 소음 사이 로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기사다.”
고트롭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대 로 목소리의 주인공은 기사였다. 빛 나는 판금갑옷을 입은, 푸른 망토의 기사.
그는 기함의 뱃머리를 박차고 뛰어 올라 가장 가까운 흑룡함대의 선박 에 착지했다. 당황한 것도 잠시, 수 병들은 곧장 기사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수병들의 단창이나 곡도가 제대로 휘둘러지기도 전에 얇은 칼 이 번쩍였다. 검광이 비칠 때마다 수병 하나가 피를 뿜었고, 그렇게 두어 호흡 만에 쓰러진 수병이 열 명에 달했다.
“이놈, 감히이-!”
판금 흉갑을 입은 갑판장이 철퇴를 휘두르며 덤벼들었지만 채 세 합도 버티지 못하고 목을 꿰뚫리고 말았 다.
푸른 망토의 기사가 활약하는 모습 에 감명을 받은 것일까. 강철함대의 수병들은 갈고리를 던지거나 맨몸을 내던져 적 함선에 뛰어들었다. 수백 명의 사내들이 한 목소리로 ‘얼쇼어 어쩌고-’ 하며 고함을 지르는데, 그 기세가 사납기 짝이 없다.
“코블 경, 코블 경! 우리도 저쪽으 로 합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우리는 이 자리를 지킨 다!”
“경!”
항만 입구의 좌우 등대를 지키던 병력은 이미 궤멸하여 흩어진 뒤였 다. 프로스하펜에 들어서는 적의 범 선들이 차례로 공격 주문을 날려댄 탓에 등대고 보(쪼)고 순식간에 무 너진 것이다.
하지만 아직 항만수비대는 오백이 나 남아 있었다. 항만장과 세 항만 위사가 이끄는, 부두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축대 위를 지키고 선 병력이 다.
“여기서는 손가락이나 빨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항만장님의 명령이다! 우린 이곳 을 굳게 지키며 원군을 기다린다!”
높은 축대에 서 있긴 하지만, 아무 리 힘껏 화살을 쏘아도 적들에게 닿 진 않을 터였다. 두 줄의 부두는 축 대로부터 길게 뻗은 형태였기에 항 만수비대의 사거리에 드는 건 혼란 을 수습 중인 아군 선박 예닐곱 뿐 이었다.
강철함대와 직접 맞붙어 교전 중인 아군은 저 멀리 부두 끄트머리에 위 치한 대여섯 척의 범선과 열댓 척의 거룻배 뿐이었다. 그나마 개중 절반 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중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불타거나 적에게 일 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씨X, 이렇게 따로따로 깨지면 안 되는데.”
따로 병법을 배우진 않았어도 지금 이 각개격파를 당하는 상황임은 알 기에, 하사관 고트롭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초조함을 읽은 것일까? 축대 바로 앞에 계류 중이던 흑룡함대의 기함, ‘융 드라코’가 부두를 벗어나 며 머리를 돌렸다.
“대형을 갖춰라!”
융 드라코의 선교(船橋)에 선 늙은 선장이 허연 수염을 휘날리며 호령 했다. 휘하의 사관들은 선장의 명령 에 따라 필사적으로 깃발을 흔들고 나팔을 불었다.
그 지휘 아래, 범선과 거룻배들이 기함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크고 작은 선박들은 각자 기예에 가까운 조타술을 발휘하여 부두 사이의 복 잡하고 협소한 공간을 요리조리 파 고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전투대형 이 갖추어졌다.
“와……. 보셨습니까, 조장?”
“봤다. 대단한데.”
감탄하여 혀를 내두르던 고트롭은 이내 미간을 좁혔다.
“……뭐야, 저건?”
“어- 글쎄요. 폐선(廢船)인가?”
그들이 발견한 건 웬 방패선이었 다. 큰 전선들이 서로 부대끼는 사 이 그들의 흘수선 어림을 유유히 스 쳐, 이쪽을 향해 미끄러져 오는 작 은 방패선.
축대 위의 병사들이 보는 것을 배 에 탄 수병들이 발견하지 못했을 리 만무했다. 근처에 있던 범선이 정체 불명의 방패선 쪽으로 살짝 뱃머리 를 틀었다. 대형을 지키며 나아가는 김에 짓밟아버리려는 것이다.
범선의 밑널이 방패선을 덮치려던 그 순간.
지잉.
“어, 어어?”
방패선에서 여섯 가닥의 빛줄기가 치솟았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의 촉수처럼 꿈틀대는 보라색 빛줄 기……. 그것들은 잠시 움츠렸다가 용수철처럼 몸을 뻗었다.
파가각! 방패선을 덮쳐가던 범선의 뱃전을 보랏빛 촉수- 아니, ‘공허의 창’ 여 섯 개가 연달아 파고들었다.
“요술! 요술이다!”
“아니, 비전술사다! 마기아 만골트 를 데려와!”
사관과 수병, 선원들이 어찌 대처 하기도 전에 공허의 창이 범선을 끌 어당겼다. 그러나 범선은 방패선보 다 열 배는 크고 무게는 그 이상으 로 차이가 났다. 결국 범선의 방향 이 조금 틀어지는 동안 방패선은 부 두 안쪽으로 훌쩍 나아갔다. 그리하 여, 아주 절묘하게도, 방패선은 흑룡 함대의 기함인 융 드라코 앞으로 미 끄러지게 되었다.
“……공격하라! 저 배를 파선시켜 라!”
늙은 선장이 다급하게 소리 쳤다. 그러나 갑판장과 수병들이 불붙은 작살을 집어던지기도 전에 방패선은 융 드라코의 용골 아래로 사라졌다.
그리고, 세상이 빛으로 차올랐다.
눈을 태울 듯한 보라색 광채. 그에 따른 굉음이 어찌나 큰지, 고트롭과 조원들은 몇 초간 아무런 소리도 듣 지 못했다. 빛이 잦아들 무렵에야 ‘구구궁’ 하고 공기가 떨리는 소리 가 들려올 지경이었다.
“크윽, 씨-”
“뭐, 이게 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눈을 가 렸던 항만수비대의 병사들은 축대 아래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들이켰 다.
보라색 광채에 휘말린 선박들은 하 나같이 절벽에서 구른 듯 넝마가 되 어 있었다. 폭발에 밀려나 부두에 처박힌 게 두 척, 꼬리나 옆구리가 뜯겨 한창 가라앉는 게 세 척이었으 며, 폭심지와 가장 가까이 있던 융 드라코는 아예 수면에 거꾸로 처박 혀 있었다.
범선만 그 정도였고, 자잘한 병선 (兵船)은 스무 척도 넘게 박살 나 그 흔적만 수면에 떠다녔다. 그뿐만 이 아니라 폭발의 여파로 큰 너울이 일어, 전투 중이던 범선들이 서로 뒤섞여 항만의 입구 쪽으로 밀려날 정도였다.
병사들은 몰랐지만, 폭발한 것은 방패선에 숨겨져 있던 ‘공허의 구’ 였다. 그 위험하기 짝이 없는 기술 로 흑룡함대의 기함 등 주 전력을 깨부순 건 물론, 부두마저 끊어버린 당사자는 저가 만든 풍경을 발아래 두고 유유히 떠올라 있었다.
지이이잉.
하얀 창을 빗겨 든 키 큰 여인.
광채가 흐르는 머리칼, 안광이 터 져 나오는 눈 그리고 이마에 박힌 제3의 눈. 위압감 넘치는 자색(紫 色)으로 온몸이 번쩍거리는 여인이, 경추 어림에서 여섯 개의 자색창을 뽑아 올렸다.
“악마, 악마다! 우으아앍-!”
“정신 차려! 자리를 지켜라!” 여인은 쏜살같이 날아 몇 안 남은 흑룡함대의 범선을 덮쳤다. 등 뒤에 서 솟은 자색창을 내질러 뱃전을 단 단히 틀어쥐었다. 손에 쥔 백색창, ‘하얀 가시’를 돌개바람이 휘류류 감싸 안았다. 그대로 나선을 그리며 내지르니 묵직한 굉음과 함께 갑판 이 터져나갔다.
앞은 강철함대, 뒤는 자색의 여인 에 둘러싸인 흑룡함대 잔당은 제대 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너져내 렸다.
“……이거, 영주성 쪽으로 후퇴해 야 하는 거 아닙니까?”
조원의 물음에 고트롭은 같은 의문 을 품고 제 상관을 돌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마침 영주성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전령이 와 있었다. 코블 경은 경악 한 얼굴로 전령의 멱살을 틀어쥐었 다.
“다시 말해봐라! 그게 무슨 개소리 냐!”
뭔가 일이 잘못됨을 감지한 고트롭 은, 얼른 발을 놀려 그리로 다가갔 다. 사방이 요란한 와중이었지만 원 체 귀가 밝았던 그는 전령이 떠듬거 리며 대답하는 말의 끝자락을 엿들 을 수 있었다.
“……하셨습니다. 지금은 소영주님 을 찾아야 하는데, 오전에 성 밖으 로 나가신지라-”
“말도 안 된다. 그 삼엄한 거처에 계신 분이 어쩌다.”
“제게는 아무런 말도 안 해주셨습 니다. 다만 가병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암살자가 나타난 것 같습
하사관 고트롭이 상황을 파악하고 턱을 떨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나리, 저쪽에!”
어느 병사가 가리킨 곳을 돌아보 니, 웬 범선이 이쪽으로 곧장 달려 들고 있었다.
그 기세를 살핀 코블 경이 미간을 좁혔다. 영주성에서 무슨 난리가 났 든, 일단 코앞에 있는 적에 집중해 야 했다.
“저게 무슨……. 이 난장판을 뚫고 상륙이라도 할 셈인가?”
늙은 제국기사의 말대로 항만 안은 온통 난장판이었다.
함대 간 개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항만 외곽이야 어떻게 우회할 수 있 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항만 안쪽은 끊어진 부두와 박살 난 전선, 거기 휘말린 상선과 어선으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저 문장을 아는 자 있느냐!”
“제가 압니다!”
코블 경의 질문에 하사관 고트롭이 얼른 손을 들었다. 그는 이쪽으로 접근 중인 범선의 문장, 여섯 마리 오리와 푸른 비늘의 검사를 다시금 확인한 뒤 단언했다.
“밀그레스터! 밀라놀 왕국의 밀그 레스터 백작가의 문장입니다!”
“……밀그레스터? 어쨌든 확실히 적이라는 거군.”
밀그레스터는 그 역사가 고대제국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 있는 가 문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저 범선은 꽤 튼튼해 보이긴 했지 만, 아무리 머리를 들이민다 해도 부둣가까지의 거리는 족히 70미터 는 되었다. 거기서부터 수면에 가득 한 부두 파편이나 암초처럼 자리 잡 은 범선들을 피하며 들어올 수도 있 겠지만…….
“항만수비대! 전원 사격 준비!”
코블 경의 명령에, 항만수비대 병 사들은 즉시 활이며 쇠뇌 등을 꺼내 들었다.
높이 5미터에 이르는 축대는 사실 상 성벽이나 마찬가지였다. 뭍으로 들이닥치는 적선과 부둣가에서 도시 로 올라오려는 적병을 막아서기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마기아 빌그루트! 마기아 메인! 주문을 준비하시오!”
“예, 알겠습니다.”
거기에 전투마법사들의 공격 주문 까지 더해진다면, 어지간한 규모의 군세도 쉬이 막아설 수 있을 터였 다.
“노포대는 전원 그물살을 재어라! 저 요녀가 다가오면 곧장 쏴버리는 것이다!”
“예!”
축대 한가운데에 선 항만장의 명령 이었다. 그의 주변에 설치된 노포들 은 저 멀리서 전선을 해체하고 있는 자색의 여인을 겨냥했다.
꽤 강력한 비전술사 같기는 했지 만, 쇠로 짠 그물을 서너 겹쯤 뒤집 어쓰면 덫에 걸린 멧돼지나 다름없 는 신세가 될 터였다.
착착 완성돼가는 전투태세에, 고트 롭은 저도 모르게 용기가 솟는 것을 느꼈다.
“어? 조장, 저기.”
“ 응?”
적선을 향해 쇠뇌를 겨누고 있던 병사가 고트롭을 불렀다. 돌아보니, 밀그레스터 가문의 문장을 단 범선 은 온갖 장애물 앞에 멈춰 서 있었 다.
그 꼴을 비웃으려던 찰나, 고트롭 은 부하가 저를 부른 이유를 깨달았 다. 범선 위에 웬 기이한 말에 탄 사내가 서 있었던 탓이다.
“……뭐 하는 새끼지?”
배 위에서 말을 타고 있는 그 괴 상한 행색에 의문을 표하려던 찰나.
별안간 기수가 고삐를 쳤다. 다시 보니 평범한 말과는 비교도 안 되게 거대한 말이 갑판을 몇 발 딛고 뱃 전을 거세게 박찼다.
쿠웅.’
길이가 40미터도 넘는 범선이 일 순 출렁거렸다.
또다시 보니 덩치만 큰 게 아니라 대가리에 뿔도 둘이나 단 말이, 하 늘을 날 기세로 뛰어올랐다.
“어어?”
“뭐야, 저거?”
병사들이 놀라 눈을 크게 떴지만, 뿔은 두 개나 달렸으되 날개는 없는 말이 정말로 날 수는 없었다.
그렇게 2, 30미터쯤 날던 말에서, 기수가 안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크르힝!
거대한 말이 사납게 투레질하며 수 면에 처박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 수는 또다시 얼마쯤 허공을 유영하 다가 고함을 질렀다.
“아, 엘로-!”
그게 무슨 주문이라도 되는지, 발 밑 어림의 공기가 펑! 하고 터졌다. 기수는 그렇게 20미터쯤을 수평으 로 쏘아졌다가, 완만한 곡선을 그렸 다.
“어, 어어!”
“이쪽으로 온다!”
저게 무슨 멍청한 짓거린가, 하고 지켜보던 항만수비대의 병사들은 식 겁하여 흩어졌다. 어느새 긴 칼을 빼든 기수가 축대 위로, 저들 머리 위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쾅
판석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추락 한 사내가 칼을 휘둘렀다.
쌔애앵!
힘껏 휘두른 회초리가 귓가를 스치 는 듯한 파공음. 허공에 시뻘건 실 선이 그어졌다. 투두둑, 아홉 사람이 열여덟 조각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 었다.
“으, 으아아으I!”
“죽여라!” 겁먹고 뒷걸음치던 병사도, 애써 고함을 지르던 하사관도 이내 고기 조각이 되었다.
장대만큼이나 길어진 칼을 든 사내 가 왼팔을 들었다. 일순 세상이 붉 게 물들고, 또 한 뭉텅이의 병사들 이 쓰러졌다.
그들로부터 뿜어진 피가 거꾸로 솟 아 사내의 팔에 엉겨 붙었다. 끈적 한 피는 차라敢 하는 섬뜩한 소리 와 함께 비늘처럼 사내의 왼 팔뚝을 감쌌다.
“비-켜라!”
부하들을 밀치며 덤벼든 코블 경은 한 합에 손목이 잘렸다. 갈고리 같 은 손톱을 단 손아귀가 그의 머리통 을 뜯어내었다.
핏빛의 풍경이 한동안 이어졌다.
“……어흐, 어어……
상관과 동료와 부하들의 죽음 속에 서 고트롭은 사지를 벌벌 떨 뿐이었 다. 손끝의 떨림이 칼을 밀어내었다.
챙그랑.
그게 신호라도 되는 듯, 그의 조원 들도 무기를 버렸다.
“후우.”
온몸에 피칠갑을 한 사내는 ‘철혈 갑주’에 뒤덮인 손으로 머리칼을 쓸 어올렸다. 산 것을 찾는 검은 눈동 자가 고트롭에게로 향했다.
사내는 슬쩍 웃었고, 고트롭은 정 신을 잃었다.
하사관 고트롭이 의식을 찾은 건 몇 시간 뒤 자정 즈음이었다.
지하 감옥에 갇힌 그는 프로스하펜 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에 적잖이 충 격을 받았지만, 곁에 조원들이 있다 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