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18)
나의 악당들 418화
64. 안개(5)
쌍검의 달인 호프컨 성백이 그랬던 것처럼, 수도승 레우폰은 고요한 물 처럼 침착하기 짝이 없었다.
내 끝없는 도발에도 분노하지 않았 고, 거인의 힘이 담긴 검격에도 겁 먹지 않았으며, 온갖 혈조술에도 놀 라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표정 없 이 버클러와 장검을 휘두를 뿐이었 다.
저 침착함이 세월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가 쌓아 올린 기량에서 비 롯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늙은 소드마스터가 얼마나 까다로운 상대인지 새삼 깨달을 따름이었다.
“훅, 후-”
늙은 검객은 두어 번의 큰 호흡으 로 가빠진 숨을 다스렸다. 그러고 나면 처음의 기세 그대로 땅을 박차 며 공격을 해왔다.
그의 장검과 버클러는 아주 평범한 생김새에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단단해서, 내가 전력으로 휘두른 칼을 받아내 고도 흠집 하나 없이 말짱했다.
“엿 같은 늙은이가,”
검의 간격이 맞닿기 전에 피의 채 찍을 크게 휘둘렀다. 네 줄기 혈선 이 안뜰에 내려앉은 안개를 갈랐다. 좁아진 시야 탓에 흡사 뒤에서 튀어 나온 거나 다름없는 피의 채찍.
그러나 레우폰은 젖은 잔디밭을 낮 게 구르는 것만으로 그 기습을 간단 히 피해냈다. 이어서 늙은 검객은 수면을 박차는 날치처럼 튀어 올라 장검을 찔러왔다.
쐐액.
피하는 대신 마주 칼을 내질렀다.
팔이나 어깨 정도를 내주고 상대에 칼을 박아 넣을 셈이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생명력과 마력이 넘쳐흐르는 육신으로 저까짓 칼침 한 방 견뎌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 이 아니니까.
까그그극-
그때 평범한 외양의 장검이 검은 얼음을 뱀처럼 휘감아왔다. 칼끝이 혀를 날름거리며 손목을 노려온다.
“잔재주는.”
소드레슬링이라면 나도 나름 자신 있다. 뒤로 물러나는 대신 타이밍을 노리고 손목을 비틀었다. 십자막이 로 레우폰의 칼날을 옆으로 밀어내 었다.
동시에 혈기를 끌어올렸다. 피의 칼날이 검에 담긴 냉기에 쩌적, 고 드름처럼 얼어붙었다. 눈을 꿰뚫을 기세로 얼음칼을 들이밀었다.
“제법,”
날치처럼 도약했던 늙은 검객은 그 제야 바닥에 발을 디디며 버클러를 휘둘렀다. 둥근 강철이 얼음칼의 옆 면을 땅, 거세게 두들겼다.
얼음칼날이 산산조각난 순간, 엄지 손가락만 한 크기의 파편들에 혈기 를 불어넣었다. ‘째앵!’ 하는 날카로 운 금속성과 함께 흩어지던 파편들 이 일제히 폭발했다. 검붉은 얼음 폭풍이 휘몰아쳤다.
M 으 99
변형된 피보라 속에서 레우폰은 재 빨리 몸을 웅크렸다. 얼굴 하관과 목을 버클러로 보호하며, 검을 쥔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내밀었다.
후루르릉/
거센 돌풍이 비좁은 협곡을 빠져나 가는 듯한 소리. 그와 함께 바람의 장막이 레우폰을 감싸 안았다. 산탄 총처럼 쇄도하던 얼음 폭풍이 거기 에 휩쓸려 우수수 떨어졌다.
범상치 않은 마도구로군…….
다만 그 반지가 파편에 담긴 힘까 지 흩어낼 순 없었는지 늙은 검객은 뒤로 7, 8미터쯤 튕겨 나갔다. 하지 만 그는 어렵지 않게 균형을 잡고 땅에 착지했다.
“하. 별명이 수도승이라 궁상맞은 노인네인 줄 알았는데, 꽤 좋은 걸 가지고 있네?”
저 마법반지만 아니었으면 방금 끝 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 을 담아 비아냥거렸지만, 레우폰은 아무 말 없이 검세를 취했다. 그리 고 옅게 웃을 뿐이었다.
“……그래, 내가 할 말은 아니라는 거지?”
중얼대며 칼을 고쳐 쥘 무렵, 숙소 동과 본관을 잇는 회랑에서 한 무리 의 장한이 뛰쳐나왔다.
“마이스터!”
“침입자다, 포위해!”
안개 속에서 서른 명 정도로 보이 는 장한들이 꿈틀거렸다. 모습을 드 러낸 그들은 대개 레우폰처럼 장검 과 버클러로 무장한 채였고, 일부는 내 키만 한 창을 들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무기술을 제대로 익힌 자 들이었다. 개중 너덧 명은 내 신경 을 긁을 만큼 날카로운 기세를 뽐냈 다.
“그만, 물러서라.”
레우폰의 단호한 목소리에 날 둘러 싸던 검호와 제자들이 덜컥 멈춰 섰 다.
«흐 ” r그- •
늙은 검객의 눈길이 장한들에게 머 문 그 짧은 순간. 난 청록색 눈동자 에 떠오른 감정을 읽어냈다.
내가 비뚜름히 미소를 짓자, 늙은 검객은 표정을 굳히고 땅을 박찼다. 물론 내가 뒤돌아서는 것이 반 발짝 쯤 빨랐다.
“어, 어—”
어느 제자에게 덤벼들자, 얼굴에 여드름이 가득한 근육질의 청년은 어정쩡한 자세로 뒷걸음질을 쳤다.
장창을 내질러도 닿을까 말까 한 거리에서 칼을 휘두르는 내 모습에, 젊은 제자는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순식간에 주욱 늘어난 피의 칼날이 청년의 목을 얕게 훑었다.
“케헤에,”
눈깔을 뒤집으며 뒤로 쓰러진 청년 은, 목젖이 갈라져 이상한 숨소리를 내었다.
얼음을 덧입은 탓에 무게중심이 칼 끝에 쏠린 장검을 머리 위로 크게 휘돌렸다. ‘쐐애액!’ 소름 돋는 파공 성 끝에 머리통 두 개와 팔뚝 하나 가 하늘로 솟구쳤다. 질긴 근육과 두꺼운 뼈를 몇 개나 끊어냈음에도 손아귀로 전해져 온 저항감은 미미 했다.
“멈춰라!”
뒤통수를 간지럽히는 고함을 무시 하고, 시체들을 타 넘으며 재차 칼 을 휘둘렀다.
또다시 하나를 베어 넘기니 이번엔 꽤 실력자로 보이는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과연, 그는 내 얼음칼이 그 리는 검붉은 궤적을 눈으로 좇으며 버클러를 들이대었다. 기세 좋게 안 개를 가르던 얼음칼이 버클러에 미 끄러지며 위로 치솟았다.
검호인가. 솜씨가 좋은데.
난 얼음칼을 회수하거나 힘주어 꺾 지 않았다. 대신 칼날에 막대한 혈 기를 밀어 넣었다.
꽝!
폭탄이 터진 듯한 굉음. 얼음 폭풍 이 또다시 안뜰을 휩쓸었다.
레우폰과 달리 검호와 일반 제자들 은 ‘투사체 방어’ 주문이 깃든 마도 구 같은 게 없었으므로, 날카로운 파편 세례를 온몸으로 받아낼 수밖 에 없었다.
장한들은 하나같이 질긴 가죽옷이 나 경갑 정도만 걸친 차림새였다. 덕분에 피보라는 열댓 명의 사내를 너무나 쉽게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비명을 지른 건 한둘뿐이었고, 나머 지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 잡놈이-!”
레우폰이 또다시 고함을 지르자, 난 낄낄대며 피의 채찍을 휘둘렀다. 네 줄기 혈선이 반씩 나뉘었다. 피 보라를 피한 이들 틈에서 둘을 낚아 챘다.
뿌득, 뿌드득-“거, 커헉!”
피의 채찍을 바짝 조이자 하나는 목이 조여 캑캑댔고, 다른 하나는 창을 놓치며 나자빠졌다. 난 왼손을 거칠게 휘둘러 두 사내를 레우폰 쪽 으로 내팽개쳤다. 캑캑거리던 놈은 끝내 목이 부러져 침묵했고, 자빠졌 던 놈은 팔이 기괴하게 꺾여 마구 비명을 질러댔다.
늙은 검객이 꽥꽥대는 놈을 받아드 느라 잠시 멈춰선 사이, 난 젊은 검 객을 네 명이나 더 사냥했다. 검호 들이 이를 악물고 앞을 막아섰지만 내 검격을 세 합 이상 버티는 놈은 없었다.
찌이 익!
아직 솜털이 뽀송뽀송한 젊은 제자 를 붙잡아 배를 얕고 길게 갈랐다.
“ 아파?”
“허, 허으으.”
청년은 피로 물든 덩어리가 쏟아지 려는 배를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너희 사부님한테 한번 가봐.”
“살려, 살려—”
“나한테 그러지 말고. 너희 사부님 이 도와주실 거야.”
등을 툭 떠밀어줬더니 청년은 비척 대며 갈지자를 그렸다. 그는 뭐에 홀린 것처럼 레우폰에게 다가갔다.
“마, 마이스터. 마이스터.”
젊다 못해 어린 제자의 목소리를, 늙은 검객은 외면하지 못했다. 평생 무술을 수련하긴 했지만 전장과는 인연이 없던 노인답게, 그의 판단은 굼뜨기 짝이 없었다.
난 비웃으며 안개 속으로 물러났 다. 그리고 육상선수처럼 몸을 웅크 렸다. 내 시선 위에서 늙은 소드마 스터와 죽어가는 제자가 겹쳐진 순 간 시동어를 뱉었다.
“•…♦‘아엘로••••••
입속으로 은밀히 중얼대기 무섭게 마법의 부츠가 퍼엉! 거센 바람을 뿜었다. 난 쏜살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영문 모를 소리에 레우폰이 즉시 몸을 굳혔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는 제자의 가슴에서 칼날이 솟구치리라 고는 상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노인 이라 창의력이 부족한가.
푸욱!
고드름을 벗어던지고 본연의 빛깔 을 드러낸 검은 얼음에, 늙은이와 젊은이가 꼬치처럼 꿰였다.
“크, 흐어윽.”
레우폰은 빗장뼈 아래에 박힌 칼날 을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난 재빨리 비늘 덮인 손을 내뻗어 그의 목을 틀어쥐었다. 여유를 부리 기엔 너무 위험한 상대다. 망설임 없이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뿌드득. 호르히우 류의 달인은 그렇게 죽음 을 맞이했다. 그의 최후를 애도하듯, 저 멀리서 번쩍 광채가 솟았다. 보 랏빛 광채였다.
우르릉-!
산사태를 연상시키는 굉음이 도시 전체에 울려 퍼졌다. 마스터 에포즈 의 도움과 광장에서부터 시작된 혼 란에 힘입어, 아탈란테가 서문을 날 려버린 것이다.
굉음이 멎을 즈음 저 멀리서 아련 하게 함성이 들려왔다. 군영을 비우 고 허수아비와 횃불을 세워둔 왕국 군이 몰래 우회하여 무너진 서문을 향해 몰려드는 것일 터다.
“이제 본게임인가.”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소 드마스터 하나를 처리했다. 이제 괴 물딱지 셋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한 다는 부담은 덜었다.
물론 부담을 덜었다 해도 방심할 정도는 아니다. 아군의 피해를 최소 화하기 위해서라도 발바닥에 땀띠 나도록 뛰어다녀야겠지…….
난 레우폰의 사체에서 ‘투사체 방 어의 반지’만을 챙기고 얼른 서문을 향해 달려갔다.
“Anshe kees! Undum, kavilos!”
아탈란테가 고울란어로 포효했다.
서쪽 성문이 남긴 돌무더기 위를 부유하며, 그녀는 기이한 자태를 뽐 냈다. 이마에선 비전력을 줄기줄기 흘리는 제3의 눈이 번뜩였고, 송과 체에서 비롯된 정신파가 머리를 중 심으로 아지랑이를 피워올렸으며, 하레스 키스에게서 받아든 ‘하얀 가 시’는 검은 돌개바람에 휩싸여 있었 다.
백색, 자색, 흑색 광채를 어지럽게 두른 그녀의 모습에 아이스보발트의 수비병들은 절망스러운 비명을 질러 댔다.
“악마, 악마다!”
“도망쳐!”
누구보다 이성적이어야 할 마법사 들 중에서도 턱을 달달 떨며 고함을 질러대는 이들이 있었다.
“파괴의 여신이다! 깊은 공허에서 파괴의 여신이 기어 올라왔다!”
“마신이여, 충직한 하수인을 돌보 소서. 마법의 왕이여, 구원의 주문을 내리소서!”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을 해대는 마법사들에게 아탈란테의 자색 촉수 가 날아들었다. 공허의 창에 꿰뚫린 시체들이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도 시의 지붕에 떨어졌다.
“KAvilos! Untibie kavilos!”
또다시 이어진 포효와 함께, 백색 창에서 쏘아진 돌개바람이 방진을 갖추고 저항하려던 병사 무리 수십 을 넘어뜨렸다.
아탈란테가 실제로 처치하는 적들 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짙은 안개 속을 유영하며 무시무시 한 존재감을 떨치는 것만으로도 적 들은 겁을 먹었고, 아군은 용기를 얻었다.
“Napidat adang’t!”
“Undum, kavilos!”
누데인족 전사들은 특히 심했다.
원래 계획은 밀그레스터 가문의 정 예 가병들이 선봉을 맡는 것이었지 만, 아탈란테의 목소리를 들은 누데 인 전사들이 발작하듯 날뛴 탓에 순 서가 뒤바뀌고 말았다.
개중에서도 비늘갑주로 무장한 하 레스 키스들은 마치 미친놈들처럼 날뛰었다. 그들은 아탈란테의 광채 를 올려다보며 무어라 기도를 지껄 이더니 마치 광전사처럼 도시로 쏟 아져 들어왔다. 광장을 지키고 있던 징집병들은 하레스 키스들의 곡도에 줄줄이 쓰러졌다.
“……아주 개판이구만.”
난 그 난장판에 뛰어드는 대신, 멀 쩡한 망루에 올라 전황을 내려다보 았다. 내가 나서기 가장 좋은 무대 를 찾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