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17)
나의 악당들 417화
64. 안개(4)
성벽과 문루가 일렁이는 불길들로 가득했던 것과는 달리, 도시 안쪽은 어둡고 고요했다. 물론 그 어둠과 고요함이 평화로움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달 없는 밤에 낀 짙은 안개가 사 람들을 답답하게 만든다. 먹구름이 통째로 내려앉아 도시를 감싸 안은 것처럼 호흡을 내뱉을 공간도 없다. 성벽에 선 병사들도, 도장에 모인 검호들도, 창문을 굳게 닫은 시민들 도, 모두 숨을 죽였다.
“이쪽입니다.”
앞장선 데오젠은 피가 뚝뚝 떨어지 는 단검을 쥐고 성큼성큼 걸어갔다. 살기등등한 깡패는 사방을 채운 밤 안개에도 아무 거리낌 없이 뒷골목 을 누볐다.
나는 그의 뒤를 따르며 숨죽인 골 목을 구경했다. 조약돌과 석회를 섞 어 깐 길을 사이에 두고 삼•사 층 높이의 벽돌 건물들이 서로를 마주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벽을 타고 옥상까지 올라간 담쟁이나 마치 녹아내린 듯 속살을 드러낸 건물들이 보였다. 그 세월의 흔적에 더해, 상하수도를 이루는 부 속물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는 것으 로 보아 이 도시의 역사는 먼 옛날 고대제국 시절에 닿아 있을지도 모 른다.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며 걸어가기 를 얼마쯤.
“이 앞이 대로입니다.”
데오젠은 어느 염료점 건물에 기대 어 서더니 고개를 내밀어 골목 바깥 을 살폈다.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그는 우리 쪽을 돌아보며 설명을 이 어갔다.
“대로 건너편엔 광장이 있고, 서문 은 그 너머에 있습니다.”
과연, 뿌연 안개 사이로 문루의 흐 릿한 윤곽과 횃불 든 인영들이 보인 다. 수많은 인기척은 덤이다.
“광장에는 징집병들의 군영이 있습 니다. 그저께 듣기로는 무관장과 고 위장교들이 머무르고 있댔는데, 지 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시장은?”
“패시호스는 평소 관저에서 지내는 데, 왕국군이 프로스하펜을 점령했 다는 소식이 들려온 이후론 남문 쪽 에 있습니다.”
“……흐음. 그, ‘레우폰’이라는 양 반은?”
‘검호들의 도시’.
아이스보발트의 별명 중 하나다.
그에 걸맞게 이 도시엔 일명 ‘검 호’라 불리는 실력자가 오십 명도 넘게 있다. 흔히 검호란 검술에 통 달한 자에게 붙는 호칭이지만 미테 르게란트 제국에서는 그 의미가 조 금 더 협소하다. 제자를 들일 자격 이 있는 검객들만이 검호라 불린다. 그리고 이 검호들에게 그러한 자격 을 내리는 자가 바로 ‘검의 달인’, 즉 소드마스터들이다.
검의 달인은 미테르게란트 제국의 황제에게 실력을 인정받아 검술 유 파를 창시할 수 있는 권한을 얻은 이들이다. 그만큼 희귀한 존재라 제 국 전체를 통틀어도 고작 열한 명뿐 이고, 일전에 내가 전장에서 마주쳤 던 호프컨 성백이 그중 하나였다.
늙은 쌍검수, 호프컨 성백은 오직 육신의 기량만으로 인류 정점에 오 른 괴물 중의 괴물이었다. 그리고 이곳, 아이스보발트엔 호프컨 성백 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들이 셋이 나 있다.
“저기, 저 성당 보이십니까?”
데오젠이 광장 옆에 있는 실루엣을 가리켰다.
“……성당? 저 돔 건물 말하는 거 야?”
“예, 나리. 이 동네 출신의 성인이 라는 ‘호르히우’가 묻혀 있는 성당 입니다. ‘호르히우 류’가 도장 겸 숙 소로 쓰는 곳이기도 하고.”
“성당을 도장으로 쓴다고?”
“말이 성당이지 유적 비슷한 곳입 니다. 교구가 설치된 것도 아니고, 사제도 없습니다. 그냥 칼 찬 새끼 들만 바글거립니다. 자리 잡은 지는 백 년도 안 됐어도 성세만은 아이스 보발트의 유파들 중 제일입니다.”
도시에 잠입하기 전에 확인한 정보 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었다. 내가 말없이 호르히우 류의 도장을 살피자 데오젠은 연신 주변을 살피 며 속닥거렸다.
“칼만 쓰는 게 아니라 창이랑 방패 도 가르쳐서 여기저기 써먹기 좋다 고 들었습니다. 주로 기웃대는 건 용병 나부랭이들이고, 도시 상비군 도 일단 입대를 하면 저기서 한 달 쯤은 굴러야 사람 취급을 해준답니 다.”
“레우폰도 저기 있겠네?”
그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어지간해서는 밖으 로 나오질 않아서……. 이 동네에 삼십 년 가까이 사는 동안 그 양반 얼굴을 딱 두 번 봤습니다. 아마 왕 국군이 성벽을 넘은 다음에야 모습 을 드러낼 겁니다.”
‘수도승’ 레우폰. 황제에게 인정을 받은 소드마스터이자 호르히우 류의 대표자다.
물론 진짜 수도승은 아니고, 평생 성당에 처박혀 검술만 수련하는 모 습에 아이스보발트의 시민들이 그런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호프컨 성백이 ‘시그밀 류’를 전수 받아 실력을 쌓다가 제국기사로서 명성을 얻은 다음 검의 달인 칭호를 받았다면, 수도승 레우폰은 평생 수 련을 하다가 유파의 전대 대표자가 죽어 그 자리를 승계하게 된 경우였 다. 물론 유파의 전수자라는 이유만 으로 그런 자리를 이어받을 수는 없 어서, 레우폰 역시도 황제 앞에서 검술을 시연해 실력을 인정받았다고 들었다.
“다른 유파는?”
“‘셀-시드 류’는 시장관저 옆에 붙 어 있는데, 아마 그쪽은 죄다 하사 관이나 장교 노릇을 하느라 자리를 비웠을 겁니다. ‘코발 류’는 남동쪽 에 있습니다.”
“••••••좋아.”
나는 횃불이 일렁거리는 문루, 징 집병들이 주둔 중인 광장, 검호들의 소굴인 호르히우 성당을 번갈아 살 피다가 결단을 내렸다.
“네 부하들, 죄다 징집당했다고 했 지? 다들 저기 어디에 있겠네?”
“그럴 겁니다, 나리. 왜 그러십니 까?”
“그럼 걔네랑 같이 군영에 불 지르 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예?”
데오젠은 입매를 움찔대다가 조심 스레 말을 꺼냈다.
“하지만, 나리들을 도시에 들여보 내고 길 안내를 하는 걸로 제 일은 끝이잖습니까.”
“나도 알아. 그냥 우리 사이의 호 의를 다질 겸 간단한 일 하나만 더 해달라는 거야.”
“……군영에 불을 지르는 게 간단 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난 피식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었다.
“야, 깡패야.”
“……예, 나리.”
“우리가 이 도시를 점령하면, 민심 을 다스리기 위해서라도 너 같은 범 죄자들을 싹 쓸어버려야 하지 않겠 어‘?”
“그때 내가 너랑 너희 애들까지 살 려주려면 약간의 호의라도 있어야 할 거 아냐.”
“하지만 전 나리를 여기까지,”
“무식한 깡패 새끼라서 계산이 잘 안 되나 보네. 네놈이 우릴 도시에 들인 거랑 길 안내를 해준 건 너희 두목이랑 호블룬지 호군지 하는 다 른 깡패 새끼들 죽이는 걸로 퉁이 야. 가격 맞춰서 거래를 했는데 호 의가 생길 게 뭐가 있냐?” 데오젠은 분기를 삼키는 듯 아랫입 술을 꾹 깨물었다. 난 그의 볼을 우 악스럽게 꼬집었다.
“인상 풀어, 친구야.”
마른 입술에 핏기가 비칠 정도로 세게 잡아당겼지만 놈은 끝내 신음 도 흘리지 않았다.
“깡패 새끼들만 몽땅 쳐죽이면 만 사 해결될 줄 알았어? 도시가 우리 한테 점령되더라도, 병력이 적으니 곧 다시 밀려날 거라고 생각했구나. 그치?” “근데 있잖아. 도시의 배신자 노릇 을 하려면 끝까지 해줘야지. 이쪽으 로 붙는 척하다가 제 이득만 챙기고 모른척하면, 우리가 그냥 넘어가 줄 거라고 생각했어?”
“……아닙니다.”
“표정 풀라니까. 그렇게 딴마음을 품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되냐? 어?” 내 말뜻을 알아차렸는지, 데오젠은 얼른 양 입매를 끌어올렸다.
“그래, 잘 웃네.”
“흐, 흐흐.”
“내 작은 부탁도 들어줄 거지?”
“……예. 받들겠습니다, 나리.”
“얼마쯤 걸리겠냐?”
“한 시간 안에 해보겠습니다.”
“음, 내가 그렇게까진 여유가 없는 데. 삼십 분 안에 해볼래?”
데오젠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였다. 난 격려하듯 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턱짓했다.
뒤에서 잠자코 서 있던 마스터 에 포즈가 막 떠나려는 데오젠에게 양 피지 두루마리를 건넸다. 두루마리 에 담긴 주문이 뭔지 설명을 들은 그는 곧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누가 보면 닉스, 네가 깡패인 줄 알겠어.”
한참 속을 게워내느라 볼이 홀쭉해 진 아탈란테의 말이었다. 마스터 에 포즈도 동의를 표했다.
“역시 여러모로 잔인한 분입니다, 포이닉스 경은요.”
“뭘 잔인하기까지야. 어차피 뒷골 목에서 포주나 상인들 등이나 처먹
는 놈 아닙니까.”
“황제도, 왕도, 대영주도 그렇지요. 촌장이나 마름, 지주는 물론이고 평 범한 농사꾼들도요. 모든 평범한 사 람들은 저보다 약한 자들을 이용하 며 삽니다.”
“그럼 저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 이겠네요.”
“그건 아닙니다. 이용해 먹는 것도 정도라는 게 있으니까요.”
마스터 에포즈가 웃는 낯으로 말하 자 나는 눈썹을 긁적거렸다.
“……시비 거는 건 아니죠?”
“오, 천만에, 절대로 아닙니다. 그
저 경이 잔학무도한 기사임을 새삼 깨달았을 뿐입니다.”
그는 겁먹은 척을 하며 과장되게 손을 흔들었다.
이것도 어딘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새끼라니까. 어찌 된 게, 울카 르 왕자의 막하엔 제정신 박힌 놈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저 깡패, 믿을 수는 있는 거야?”
“모르지.”
내 태평한 대답에 아탈란테는 미간 을 좁혔다.
“배신이라도 하면 어쩌게?”
“배신을 하더라도 시장이나 무관장 에게 달려갈 놈은 아니야. 저 혼자 몸을 숨기든가 부하들 데리고 튀든 가 하겠지.”
“혹시 우리의 존재를 알리면?”
“어쨌든 소란스러워질 테니까……. 뭐, 그거면 된 거 아냐?”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에 난 어깨 를 으쓱였다. 아탈란테는 푹 한숨을 내쉬곤 ‘에이, 나도 모르겠다’ 중얼 대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탈란테의 걱정과는 달리, 삼십 분은커녕 십오 분도 지나지 않아 광 장 쪽에서 화광이 치솟기 시작했다. 에포즈가 데오젠에게 건네준 ‘화염 발산의 두루마리’가 제 몫을 톡톡히 한 모양이다.
“뭐, 뭐야, 이거! 어디서 난 불이 야!”
“조장, 여기요! 여깁니다!”
“전원, 기상-! 물 길어와!”
광장 전체가 떠들썩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아탈란테, 에포즈와 헤어져 호르히 우 성당 앞에 선 난 미리 주머니에 채워두었던 짱돌 몇 개를 꺼내어 던 졌다.
쨍그랑!
창문에 끼워진 빛바랜 색유리들이 터지듯 비산했다. 2미터 너비에 높 이는 내 키의 두 배쯤 되는 유리창 들이 연달아 깨지는 통에, 광장을 채우고 있던 혼란이 성당까지 덮쳐 오는 것 같았다.
성당 앞으로 검과 방패, 혹은 창으 로 무장한 사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난 성당 뒤편으로 몸을 숨 기며 왼손에서 피의 채찍을 길게 뽑 아 올렸다.
휘릭.
6미터도 넘게 뻗은 네 줄기의 혈선 이 성당 지붕의 구조물에 휘감겼다.
난 잠입을 하느라 판금갑옷은커녕 투구도 없이 어디서 주워온 흉갑 하 나만 달랑 걸친 차림새였다. 덕분에 피의 채찍을 붙잡고 마치 날 듯이 뛰어오를 수 있었다. 외벽을 두어 번 박차니 순식간에 지붕에 올라섰 다. 레벨 대비 높은 민첩 점수가 빛 을 발한 걸까,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뭔가 터지기라 도 한 건가?”
“잘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을 보내 불 끄는 걸 도울까요?”
“……너, 너. 가서 상황을 파악해라. 나머지는 대기! 경거망동하지 마라!”
“옙!”
어느 검호와 제자들의 대화를 뒤로 하고, 성당의 경사진 지붕을 타 넘 었다. 칼란다리 교단이든 엘 가노어 교단이든, 광명교 성당의 생김새는 대체로 유사했기에 목표한 건물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성당 본관 뒤편, 고즈넉한 안뜰을 정사각형 모양으로 둘러싼 건물을 발견했다. 숙소동이었다.
본관의 돔 모양 지붕과는 달리 숙 소동의 지붕에는 자줏빛 기와가 올 려져 있었다. 그곳을 밟고 서자마자, 난 날카로운 시선을 느끼고 안뜰을 내려다보았다.
중년을 갓 벗어난 초로기의 사내가 안뜰 한복판에 서 있었다. 수수한 리넨 복장 차림, 평범한 장검과 손 목에 고정해 둔 자그만 버클러가 무 장의 전부였다. 반백의 머리칼과 파 르라니 깎은 수염, 중키에 다부진 체형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모 습이 었다.
나는 그의 청록색 눈동자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수도승 레우폰?”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딴 건 필요하지도 않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목덜미에서 오소 소 돋아난 닭살이 저 사내가 누구인 지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웃음기 섞인 날숨을 내뱉고, 지붕 을 박차 몸을 날렸다. 납작한 기왓 장이 여럿 깨진 탓에 요란한 소리가 내가 그리는 궤적에 따라붙었다.
지붕 위에서 안뜰로 단박에 떨어져 내렸다. 양발이 잘 다듬어진 잔디밭 을 딛기 직전, 3미터 가까이 솟구친 피의 칼날이 벼락같이 휘둘러졌다.
카캉!
사내는 새까만 버클러를 끊어치듯 휘둘렀다. 검붉은 검영이 미끄러지 듯 바닥에 처박혔다. 검은 얼음을 재차 휘두르기 전 왼손을 치켜들었 다.
까가각-
평범해 빠진 장검이 내 목을 향해 날아들다가 검은 비늘에 뒤덮인 손 아귀에 붙들렸다.
“흡!”
늙은 검객은 칼날이 잡히자마자 내 품으로 몸을 던지며 퍼멀을 들이밀 었다. 잽싸게 어깨를 비틀었다. 퍼멀 을 피하자 검객은 손목을 비틀었다. 십자막이의 끄트머리가 옆통수를 둔 탁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빡!
“크,”
길게 찢긴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와 귀와 턱을 적셨다. 그 불쾌한 축축 함에 난 욕지거리를 삼키며 검은 얼 음을 휘둘렀다.
쌔애앵!
장창만큼 길쭉해진 칼날이 회초리 보다 빠르게 사방을 난도질했다. 장 검과 버클러로 방어하던 초로의 사 내는, 내 검격이 기세를 더하자 미 련 없이 뒤쪽으로 몸을 날려 잔디밭 을 굴렀다.
“••••••X 팔.”
이상하게 노인네들이랑 붙을 때마 다 선빵을 맞는단 말이지. 매번 이 러니 자존심이 상할 지경이다.
비늘 덮인 손으로 왼쪽 귀 위를 훑었다. 찢긴 상처는 진즉 아물어가 는 중이었다. 흘러내린 피가 손을 적시며 비늘이 영역을 늘려갔다.
“설마 적기사인가?”
잔디가 붙은 팔을 툭툭 털며, 사내 가 물었다.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 었다.
“늦었어. 통성명하고 싶거든 팔이 라도 한 짝 내놔.”
초로의 검객, 수도승 레우폰은 말 없이 양손을 모으며 검세를 취했다. 가로로 누운 장검으로 내 눈을 겨누 었고, 버클러는 장검을 쥔 손등을 덮었다.
휘릭.
난 칼을 한 바퀴 휘돌리며, 가벼운 걸음으로 그에게 덤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