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22)
나의 악당들 422화
64. 안개(9)
아이스보발트 점령 후 일주일간은 도시를 안정시키고 부상자들을 돌보 는 데에 주력했다.
아군은 멀쩡한 병사가 오백이 채 안 되었기에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 리고 있었다. 성벽을 성기게나마 채 우고 포로들을 감시할 병력을 배치 하니 여유 병력이 고작 쉰 명 남짓 이었다.
물론 이오피야와 밀그레스터 가문 의 군종사제들, 그리고 아이스보발 트에 남아 있던 칼란다리 교단 사제 들이 밤낮없이 치료소를 운영한 덕 에 부상자들이 복귀하는 속도는 꽤 빠른 편이었다. 사흘 만에 병상을 털고 일어난 병사들의 수가 마흔 명 이 넘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여유 병력은 백 명도 안 되었다. 인구가 오천이 넘 는, 그것도 적대적인 분위기가 흐르 는 도시에서 치안 업무를 수행하기 엔 턱없이 적은 수였다.
그래서 자경단을 만들었다.
도시가 혼란에 빠져 가장 큰 피해 를 보는 건 점령군이 아니라 아이스 보발트의 시민들이었다.
도둑, 강도, 납치꾼, 깡패 등 온갖 잡범들이 날뛰었는데, 그들이 살기 등등한 점령군을 노릴 리 만무했다. 희생당하는 건 대부분 무력한 시민 들이었다.
도시는 범죄자들을 잡아다 손을 자 르거나 차꼬에 묶거나 목을 매달기 를 원했다. 그래서 자경단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임시로 만들어진 자경단은 데오젠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아이 스보발트 뒷골목의 새로운 두목, ‘젓갈장수’ 데오젠 말이다.
호출을 받고 몰래 찾아온 데오젠은 내 제안을 듣자마자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전 못 합니다. 자경단장이라됴.”
내가 거처 겸 집무실로 쓰고 있는 건물은 도시경비대의 본부였다. 원 래는 시장관저를 쓸 셈이었는데, 누 데인족 놈들이 홀랑 불태워 버려서 이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왜? 못 할 건 뭐야?” “가뜩이나 나리께서 호블루네 패거 리만 절묘하게 쳐내셔서 시장이 술 렁거리고 있잖습니까. 이런 상황에 서 제가 자경단장이 되면 다들 어떻 게 생각하겠습니까. 왕국놈들 앞잡 이라며 손가락질받을 게 뻔합니다.”
데오젠과 약속했던 대로, 난 놈의 적대 세력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내가 직접 나선 건 아니고, 마스터 에포즈에게 하사관 고트롭을 비롯한 병사 쉰 명을 붙여주며 처리를 부탁 했다.
전투마법사 중에서도 실력이 아주 뛰어난 축에 속하는 에포즈가 나섰 는데 일개 깡패새끼들 따위가 저항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동쪽의 빈민 가와 도박장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호블루는 그날로 목이 잘렸고, 그 부하들은 모조리 손이 잘린 채 지하 감옥에 처박혔다.
“아, 그래……. 그쪽 애들만 절묘하 게 쳐낸 게 실수라는 거지? 너희 애들도 한 절반쯤은 손목을 잘라줬 어야 했나?”
“예? 아니, 아닙니다, 나리.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 네.”
곧장 따귀를 갈겼다. 창백한 표정 을 하고 있던 데오젠은 ‘꽥’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커흑, 나, 나리……
“후환이 두려워?”
“예?”
“뒷일이 무섭냐고, 이 깡패 새끼야. 언젠가 아이스보발트가 다시 제국군 에 넘어갈까 봐, 그게 무서워서 못 하겠다는 거 아니야?”
데오젠이 우물쭈물하자 난 피식 웃 으며 집무용 책상을 두드렸다. 놈은 비척대며 일어나 도로 자리에 앉았 다.
“그렇게 될 일도 없겠지만, 혹시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넌 어차피 죽 어. 진짜 몰라서 이러는 거야?”
“알고 있습니다, 나리. 저와 나리 는…… 그, 운명공동체 같은 거지 요.”
“네까짓 놈이 무슨 나랑 운명공동 체야, 그냥 빈대지.”
데오젠은 터진 입술을 슥 닦아내었 다.
“자경단장 맡아. 깡패 새끼들 동원 하든, 아니면 시민들 꼬시든 해서 삼백 명만 채워. 치안만 잘 유지하 면 네가 무슨 개짓거리를 하든 안 건들 테니까.”
놈은 흥미가 돋는지 입술을 적셨지 만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 안 해?”
“나리, 그게……. 고민을 좀.”
“혹시 내가 지금 부탁하는 걸로 보 이냐?”
“아닙니다, 나리. 받들겠습니다.”
“포건에게 말해뒀으니까 가서 포고 문 받아 가고……. 아, 다른 일은 어떻게 되고 있어?”
“다른 일이라 하시면?”
“소문 말이야.”
데오젠은 ‘아’ 하더니 미간을 좁혔 다.
“패시호스, 그 새끼가 워낙 평판이 별로였던지라 나름 먹히고는 있습니 다.”
데오젠은 뒷골목을 중심으로 패시 호스 시장의 최후에 대한 거짓 소문 을 퍼뜨리고 있다. 왕국군이 서문을 뚫고 들이닥치자, 시장이 제 식솔도 죄 내팽개치고 보물만 챙겨 튀려고 했다는 소문 말이다.
“근데 남문 근처에서 놈을 봤다는 사람들도 있고, 아무리 그래도 시장 인데 제 손으로 관저에 불을 놓았겠
냐는 사람도 있고……
패시호스 시장의 불탄 시체는 밀수 꾼들이 주로 이용하는 개구멍에서 발견되었다. 아이스보발트의 모든 밀수꾼들을 부하로 거느린 ‘배불뚝 이’ 쿠르츠의 시체와 금은이 가득 담긴 궤짝이 그의 옆에 있었고.
그런 흔적들을 보고도 의심을 거두 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지역 상인이든 도시를 오가는 거 상이든 아무리 성의를 표하겠다 아 부해도 생전 받아주지 않던 양반입 니다. 보물만 챙겨서 튀었다는 말에 미심쩍어할 만도 하죠.”
“••••••그래?”
난 눈썹을 긁적이며 말을 덧붙였 다.
“뭐, 어차피 도시에 있는 모든 사 람들을 설득할 필요는 없어. 시민들 이 뜻을 모아서 봉기를 일으키는 것 만 막으면 되니까.”
“그 정도라면 문제없을 겁니다.”
“자경단 편성 끝나는 대로 술집이 고 뭐고 다 열게 할 생각이니까 소 문 도는 것도 잘 확인하고.”
“알겠습니다, 나리.”
데오젠이 방을 떠난 뒤에도 나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 Q ”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숨결 과 부드러운 감촉에 잠시 눈을 감았 다. 이어서 노크를 하듯 집무용 책 상을 똑똑 두드렸다.
“이제 나와. 일할 시간이야.”
의자를 물리며 말하자, 조그만 얼 굴이 발갛게 물든 뭉치가 모습을 드 러내었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 자마자 헤헤 웃어 보였다.
“재밌니?”
“네에.”
“……그래, 네가 좋다면 됐다.”
“포이도 좋으면서.”
뭉치는 특유의 탁월한 은신 능력을 활용하여 시도 때도 없이 엉겨 붙어 왔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당황하는 내 모습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마냥 뭉치 탓을 할 수도 없었다.
녀석이 구사하는…… ‘그런’ 기술 들은 하나같이 내가 가르친 것들이 니까. 아주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 더랬지.
한마디로, 뭉치가 치는 온갖 장난 들은 모두 내 업보인 셈이었다.
“……얼른 따라가 봐. 딴 길로 새 지는 않는지, 곧장 거처에 들어가는 지만 보고 오면 돼.”
“네!”
뭉치는 하사관들을 따라 하듯 착, 군례를 올린 뒤 방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다가, 홱 돌아서더니 내 품에 뛰어들어 입을 맞추었다. 난 무의식중에 녀석과 입을 맞추곤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으윽. 잠깐-”
“히.”
상큼한 과일향과 어쩐지 찝찝한 냄 새를 남겨두고, 뭉치는 내 품을 휙 벗어났다.
“야!”
꺄륵 웃으며 창문틀에 올라선 녀석 은 뒤돌아보며 윙크를 했다. 그리고 휙 몸을 날려 사라져 버렸다.
“……으휴. 어쩌냐, 저걸.”
난 푹 한숨을 내쉬었다.
뭉치 덕에 즐거움과 근심을 동시에 느끼던 것도 잠시.
침상에 앉아 있는 아탈란테와 마주 한 나는 답답함에 미간을 좁혀야 했 다.
“그래서, 아무도 처벌을 안 하겠다 고?”
탄틸로스를 필두로 한 ‘셀-시드 류’의 검사들에게 중상을 입은 아탈 란테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그녀가 칼에 찔리는 와중에도 본능 적으로 비전력을 돌려 상처가 벌어 지는 것을 막았고, 하레스 키스들이 값비싼 지혈제와 상처치료의 물약을 물 쓰듯 썼던 덕이다.
거의 절단될 뻔했던 왼팔은 이미 완전히 아물었고, 두꺼운 도에 깊이 찔렸던 배도 겉으로는 괜찮아 보였 다. 그러나 내장이 꽤 많이 상했기 에 한동안은 묽은 죽만 먹으며 정양 을 해야 했다.
“깡패들을 통해서 소문을 퍼뜨리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전사들에게 벌을 주면 네 계획이 틀어져버리잖 아.”
“아탈란테. 내가 너희 전사들을 처 벌하라는 게 평판 때문에 그런 것 같아?”
“그럼?”
“당연히 군율 때문이지.”
그간 부상을 핑계로 뒤로 미뤄두었 던 일을 입에 담은 탓인지, 아탈란 테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 에게 따져 물었다.
“너 하나 없어졌다고 명령이고 뭐 가 다 쌩까고 제멋대로 날뛰더라. 그게 군대야?”
“화가 나는 거야 당연히 이해하지. 대장이 다쳤으니까. 근데 몇 놈이 선동한다고 우르르 몰려가서는 불 지르고, 사람 해치고……. 약탈한 게 아니라 불 난 걸 알리고 대피시키려 한 거라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 긴 했지만- 야, 말하는 내 얼굴이 다 빨개지더라.”
“그건 고맙게 생각해.”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하는 소리 아니야. 너 진짜 그냥 넘어갈 생각 이야?”
“절대로 아니야. 내가 직접 나서서 엄하게 벌할-”
“주동자들 모아다 채찍질 몇 번 하 고 끝낼 거라며. 그게 엄한 처벌이 야? 아이네스 백작이나 랭볼트 경은 둘째치고, 나부터가 납득이 안 되는
데?” 할 말이 궁해졌는지, 아탈란테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명치 아래를 어 루만졌다.
아픈 걸 어필하고 싶은 모양인데. 어림없다, 이년아.
“안 그래도 오두엔느에서 사고 친 것 때문에 아이네스 백작이 이를 갈 고 있더라. 네가 이번 일까지 어영 부영 넘기면 종전 후에 누데인족은 범죄자 집단 취급을 받을걸?”
“내가 어떻게 하길 바라는데.”
“주동자 다 처형해. 나랑 랭볼트 경, 아이네스 백작을 참관인으로 세
우고.”
“……죽이라고? 내 전사들을?”
아탈란테가 호박색 눈동자를 잘게 떨자, 난 한숨을 내쉬었다.
“전사는 무슨. 걔네는 강도, 방화 광, 살인자, 강간범이라니까?”
“비록 큰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다들 나 하나만 보고 바다를 건너고 사지를 헤쳐온-”
“아탈란테, 정신 좀 차려.”
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질문했다.
“정착 안 할 거야?”
“정착할 기회를 얻었잖아. 풍요로 운 앙스트의 절반이, 심지어 항구까 지 너희 차지야. 이 기회를 놓칠 거 야? 그까짓 강도, 방화광, 살인자, 강간범들 때문에?”
“닉스.”
아탈란테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 다.
“난 모든 누데인족의 구원자가 되 기로 맹세한 사람이야. 내가 ‘나피닷’ 이라 불리는 것도 그것 때문이고.”
“그래서? 너희 민족이 범죄자 집단 취급받는 걸 계속 내버려 두게? 네 가 되고 싶은 구원자가 범죄자 집단 의 구원자였어?”
“……말이 좀 심해. 아무리 너라도 그런 말은,”
“네가 더 심해. 민족이 똥구덩이에 처박히겠다고 아주 악을 써대고 있 는데, 넌 민족의 지도자를 자처하면 서도 그걸 구경만 하고 있잖아.”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얼마간 침묵이 이어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탈란테는 불쑥 이상 한 질문을 했다.
“네 미래에 내가 있어?”
“미래에, 네 곁에 내가 있냐구.”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게.”
“예언 말이야.”
난 잠시 눈을 깜빡인 끝에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아탈란테는 내가 아칸쿠 카라멕에 게 지껄인 소리를 들은 사람 중 하 나다. 그때 그녀는 내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님을 눈치챘고, 미래에 대 한 지식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 다.
지금 아탈란테가 한 질문은 그때의 일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 터였 다.
“……이번 일이 분명 심각한 일이 긴 하지만 그런 질문을 할 정도는 아니거든?” “그래도 말해줘.”
잠시 눈썹을 긁적이더 나는, 그녀 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 보여서 고개 를 끄덕였다.
“있지, 당연히.”
“••••••정말?”
“어. 그간 우리가 같이 고생한 게 얼만데, 설마 이런 일로 틀어질 줄 알았어?” 아탈란테는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 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는 듯 눈 을 감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할게.”
“……뭘? 처형?”
“응. 막시아고를 포함해서, 스무 명 정도 처형하면 되겠지?”
난 조금 놀라서 눈을 깜빡였다.
“그 아저씨는, 씨족장이잖아. 서열 로 따지면 네 다음 아냐?”
“어찌 됐든 이번 사고의 주동자니까.”
“괜찮겠어?”
“응. 잘라둡의 씨족원 중에 눈여겨 봐둔 전사가 있어. 막시아고를 처형 하고 그 녀석을 씨족장으로 삼으면 별문제 없을 거야……. 그리고 뭐,”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어깨 를 으쓱였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너 따라 도 망치면 되잖아.”
“……갑자기 너무 쿨해졌는데.”
아탈란테는 실없이 웃기만 했다.
“내가 아픈 사람을 오래 괴롭혔네. 이만 쉬어.”
“아니, 잠깐만.”
방을 떠나려는데, 그녀가 손끝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목을 감싸 안으 며 입을 맞추었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침대 위로 끌 어당기기까지 하기에 난 떨떠름하게 물었다.
“야, 잠깐만. 너 아직 안정을,”
“다 나았어.”
“어?”
“다 나았다니까. 봐.”
아탈란테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배는 여전히 탄탄하고 부드 러웠다.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에 눈 이 뒤집힐 뻔했지만 난 애써 인내심 을 발휘했다.
“겉이야 괜찮지. 안쪽이 문제잖아.”
“안도 괜찮은 것 같은데.”
아탈란테는 다리로 내 허리를 휘감 으며 장난스레 속삭였다.
“네가 확인해 줘.”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난 유혹에 약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