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26)
나의 악당들 426화
65. 봄의 절정(1)
3월의 마지막 날. 선선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계절이 만개했다.
오브도르프의 어느 들판에는 희고 노란 데이지, 연보랏빛으로 물든 제 비꽃, 파란 별 같은 수레국화가 활 짝 피었다. 뭉게구름이 흐르는 푸르 른 하늘 아래 찌르레기들이 쌍쌍이 노닐었다. 작은 마을에서 얼마쯤 떨 어진 곳에서는 홀로 선 풍차가 느긋 이 돌아가고 있었다.
마을의 낮은 목책을 싱그러운 빛깔 의 귀리밭이 너른 강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어-이! 어-이!”
귀리밭 한가운데를 거니는 남자아 이는 구호인지 노래인지 모를 단조 로운 곡조로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 면서 낭창거리는 장대를 이리저리 흔들자 참새들이 푸드득 날아올랐 다.
“어-이! 어-이!”
아이의 청량한 목소리를 노동요 삼 아, 어른 서넛이 힘차게 괭이질을 했다. 촉촉한 흙에 고랑이 파이고 배수로가 뚫렸다.
봄비와 따사로운 볕 그리고 사제의 축복을 머금은 귀리는 벌써 아이의 턱밑까지 자라 있었다. 별 탈이 없 다면 곧 이삭이 팰 것이고, 5월이 되자마자 수확을 할 수 있을 것이 다.
“어-이! 어-이……. 어?”
그림 같은 풍경에 입혀지던 음악이 멈추자, 머릿수건을 두른 중년 여인 이 오랜만에 허리를 펴며 소년을 돌 아보았다.
“무슨 일이니?”
“……고모, 저어기.”
“으응?”
꼬막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 선을 돌린 여인은 헉 하고 숨을 삼 켰다.
“주여……. 여보, 저기 좀 봐요.”
저 멀리, 색색의 꽃이 만개한 들판 한가운데 선 풍차가 검은 연기를 뿜 고 있었다. 놀란 농부들이 ‘어어-’ 하고 눈을 휘둥그레 뜰 즈음 불길이 풍차를 집어삼켰다.
“다들 목책으로 가! 어서!”
여인의 남편이 소리쳤다. 그는 십 년쯤 전에 있었던 전쟁에서 손가락 을 네 개나 잃은 덕에 최근의 징집 령을 면한 운 좋은 사내였다.
“고모부. 불난 거예요?”
“이 녀석, 네 알 것 없으니 어서 가라니까!”
멋모르고 장교니 기사니 하는 양반 들을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녔던 기 억이 생생했기에, 그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금세 알아차 렸다. 저 풍차를 덮치고 있는 건 분 명 전쟁의 화마일 터였다. 근래 아 이스보발트를 중심으로 활활 타오르 고 있다는 그 전쟁의 화마 말이다.
부우우우웅/
목책 쪽에서 나팔 소리가 들려왔 다. 유랑 중 마을에 들른 음유시인 이 상황을 알리려 직접 만든 목제 관악기를 분 것이다.
효과는 충분해서 마을 사람 전체가 불타고 있는 풍차를 발견했다. 문제 는, 그 멋진 소리가 군대에서 흔히 사용하는 뿔나팔 소리와 꼭 닮아 있 었다는 것이었다.
풍차를 불태운 자들이 경계 어린 눈빛으로 마을 쪽을 노려보았다.
“대열을 갖춰라-!”
우렁찬 구령에 병사들이 고함으로 복창하며 집결했다. 우르르 몰려든 병사들이 언덕배기를 뒤덮자 목책에 서 있던 장정들의 얼굴이 창백해졌 다.
“뭐지? 어디서 온 놈들이야?”
“이걸 어째……. 촌장님! 일단 촌 장 어르신부터 모셔와!”
마을의 자경단장 노릇을 하는 젊은 장한이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에게 고 함을 질렀다.
“순번 서던 놈들은 일단 다 아래로 내려가! 사람 다 들어오면 목책부터 걸어 잠그라고! 너랑 너! 아직까지 안 나온 놈들 싹 다 끌고 와!”
몇 안 되는 청년들이 분주히 움직 일 무렵, 중늙은이 한 명이 헐레벌 떡 달려왔다.
“촌장 어르신!”
“아이고, 도대체 무슨 난리냐, 이 게.”
촌장은 마을로 접근하는 병사들을 발견하고 손을 떨었다.
“아니, 저, 저. 저 떼거리가 다 어 디서 왔대냐?”
“빠꼼이인 어르신이 모르는 일을 나인들 알겠소?”
“애어른 할 것 없이 다 모아도 저 절반이 안 될 것인데……. 아이고, 어쩌면 좋으냐. 백기라도 걸어야지 않겠냐?”
자경단장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 렸다.
“이레인가 전에 그, 뭐야, 누데인 쌍놈 새끼들이 와서 뭐랬소? 적한테 협조하면 마을을, 응? 싹 다 불태우 고 남자고 여자고 다 잡아간댔잖 소.”
“이 사람아, 내가 뭐 협조를 하쟀 나? 제 놈들 갈 길 갈 때까지 납작 엎드리고 있자는 것이지.”
“병사들 먹이겠다며 보리호밀 빼가 고, 말 먹이겠다며 건초 빼가면?”
“내줘야지 어쩌나. 목숨이 귀하지 그깟 풀떼기가 귀한가?”
“쪽수 채우겠다며 남자들 잡아가 면?”
“설마, 남은 청년이 서른도 안 되 는데 그렇게까지 할까?’’
촌장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자 경단장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좀 차리소, 어르신. 전쟁이 장난이오? 그리고 또, 저놈들 어찌 어찌 보낸다 한들 무지막지한 누데 인 놈들이 오냐 잘했다며 그냥 넘어
가겠소?”
“그럼 어쩌자고? 오늘 당장 싸우다 죽겠다고?”
“아이스보발트는 지척이오. 오늘 납작 엎드렸다가 ‘적기人}’니 ‘자안의 악마’니 하는 놈들이 오기라도 하면 어쩌겠소?”
“이놈아, 저 봐라, 저거. 딴 건 몰 라도 가운데 있는 깃발은 공작님네 깃발 아니냐? 붙어먹어도 같은 민족 끼리 붙어먹어야지, 북방야만인이나 부랑도적떼에 붙어먹을 셈이냐?”
두 사내가 언쟁을 벌이기를 얼마 쯤, 목책 한쪽에 서 있던 사내가 다 급한 소리로 외쳤다.
“어르신! 형님! 저기!”
동쪽으로 고개를 돌린 촌장과 자경 단장, 그리고 마을 청년들은 깜짝 놀라 입을 벌리거나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인마 한 기가 목책 앞 귀리밭 둘레를 달리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기수 가 어느새 코앞을 지나가고 있는 것 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건 그를 태운 말이었다.
크흥, 크르릉/
짐말보다 두 배쯤 큰 덩치에, 이마 엔 한 쌍의 나선뿔이 달려 있었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맹수 처럼 으르렁거렸다.
쏜살처럼 달려가는 그 괴물의 정체 를, 목책에 선 이들은 단숨에 알아 차렸다.
“바이콘……
“그렇다면 설마.”
저 멀리 국경의 젤른트리에서, 앙 스트의 프로스하펜에서, 그리고 오 브도르프의 아이스보발트에서 공포 스러운 활약을 펼친 자.
제대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지 일 년도 안 되어 왕국을 넘어 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치는 자.
“적 기사다!”
귀리밭의 둘레를 따라 완만한 호선 을 그리며 달리던 적기사는, 색색의 꽃이 핀 들판에 이르러 고삐를 당겼 다. 그리고 마을로 진격 중이던 군 대를 향해 똑바로 달려가기 시작했 다.
“……혼자 덤비는 건가?”
“아니, 아무리 적기사라도.”
족히 육백 명도 넘는 인원이 단단 한 대열을 갖춘 상태였다. 게다가 상대가 농투성이들이라면 모를까, 나름 충실한 무장을 갖춘 병사들이 었다. 적기사가 떨치고 있는 명성을 감안하더라도 단기필마로 맞설 수는 없었다.
“저기, 저쪽에 더 있습니다!”
다시 돌아보니, 적기사가 달린 길 을 따라 기병 오십여 기가 질주하고 있었다. 단단한 말발굽으로 귀리밭 을 짓뭉개는 모습에 몇몇 사내가 작 게 곡소리를 냈지만, 이내 사람들의 관심은 다시 적기사에게 쏠렸다.
그는 가벼운 판금흉갑 위로 검붉은 망토를 휘날렸으며, 코까지 가려진 투구 사이로 검고 차가운 안광이 번 뜩였다. 얇은 비늘에 뒤덮인 듯한 장갑 낀 손이 안장에서 길쭉한 투창 을 꺼냈다.
쐐애애액!
다음 순간, 사나운 파공음과 함께 투창이 푸른 하늘을 갈랐다. 육십여 미터의 간격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끄헉!”
대열의 한가운데 모인 기수들 중, 화려한 복장을 한 중년인이 낙마했 다. 가슴 한복판이 투창에 꿰인 채 였다.
“이런!”
“영주님을 보호하라!”
제국기사 너덧과 중무장한 보병들 이 어느 왜소한 청년을 중심으로 모 여들었다. 면갑 아래로 드러난 창백 한 얼굴이 방패와 갑옷의 벽 뒤로 사라지자, 포이닉스는 인상을 찌푸 렸다.
“에이씨, 틀렸네.”
중얼거림에 이어 투창 네 자루가 연달아 쏘아졌다.
치렁한 로브를 걸친 중년 여인, 깃 발을 든 거구의 청년, 궁수들을 향 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늙은 장 교가 순서대로 쓰러졌다. 대열의 선 봉에 서 있던 제국기사는 가까스로 어깨를 젖혀 투창을 피했고, 그 뒤 편에 있던 병사 둘이 꼬치가 되어 땅에 처박혔다.
적기사가 흥 섞인 미소를 지으며 칼을 뽑아 들었다. 검은 칼날이 풍 기는 냉기가 어찌나 강렬한지, 첫 번째 열에 선 병사들이 흠칫 놀라 몸을 움찔거릴 정도였다.
“쏴!”
“바이콘을 노려라!”
백오십 명도 넘는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았다.
포이닉스는 잔뜩 자세를 낮추며 검 면으로 바이콘의 엉덩이를 후려쳤 다.
끄릉.’
이미 놀라운 속도로 달리고 있던 바이콘이 성난 으르렁거림과 함께 한층 더 가속했다. ‘두두두두-’, 우 렁찬 말발굽 소리에서 박자감마저 지워졌다. 화살비가 드리운 성긴 그 림자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물론 그것으로 모든 화살을 피해낼 순 없어서, 적기사의 등과 바이콘의 엉덩이에 화살 몇 발이 내리꽂혔다. 하지만 ‘코발 류’의 검호들이 즐겨 입는 튼튼한 판금흉갑은 손쉽게 화 살을 튕겨냈고, 바이콘은 화살 몇 발 맞은 것으로는 콧방귀도 뀌지 않 았다.
“창, 앞으로!”
“차앙-! 앞으로!”
서너 겹으로 늘어선 병사들이 일제 히 장창을 내밀었다. 백여 자루의 창이 적기사를 겨누었지만, 개중 창 끝이 흔들리는 건 손에 꼽았다. 가 혹한 훈련을 견뎌낸 정예병이 분명 했다.
“흐읍,”
장창의 숲 앞에서, 검붉게 물든 ‘검은 얼음’이 주욱 늘어났다. 적기 사는 등자를 밟고 서며 3미터 가까 이 치솟은 칼날을 거칠게 휘둘렀다.
키가가각/
창대 수십 자루가 한꺼번에 잘리 고, 부러지고, 밀려나며 엉켜 들었 다. 선두에 선 병사들은 영문도 모 른 채 목이나 가슴에서 피를 줄줄 홀렸고, 그 뒤에 선 병사들은 아귀 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크르 릉/
고개를 크게 휘돌려 두 뿔로 창을 한 뭉텅이 걷어낸 바이콘이 병사들 의 대열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바이콘의 질긴 가죽을 고려하더라도 과감한 움직임이었다. 그 과감함의 비결은, 어떻게든 앞으로 달려 나가 면 위에 탄 주인이 모든 문제를 해 결하리라는 믿음이었다.
포이닉스는 그 믿음을 배신하지 않 았다.
“으합.”
작고 간결한 기합에 이어, 장창만 큼이나 길쭉한 칼날이 사방을 휩쓸 었다. 바람개비처럼 돌아가는 궤적 에 병사들의 머리통이며 사지가 이 리저리 치솟았다.
“밀어붙여!”
“공간을 주지 마!”
아빌람버스 공작의 충실한 봉신이 이끄는 군대는, 순식간에 전우를 마 흔 명 가까이 잃었음에도 용맹하게 덤벼들었다.
적기사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왼팔 을 들어 올렸다.
•쾅/
바닥을 흥건히 적셔가던 피 웅덩이 가 폭발했다. 찐득한 피는 붉은 염 료로 물들인 유리 조각처럼 변해 병 사들을 덮쳤다. 병사들은 사슬갑옷 과 쇠투구로 잘 무장했지만, 혈편은 송곳처럼 갑옷을 파고들어 급소를 헤집었다.
폭발은 한 차례로 끝나지 않았다. 적기사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혈편 이 휘몰아쳤다. 서너 호흡 만에 일 곱 차례의 폭발이 일어났고, 백 명 이 넘는 병사들이 쓰러졌다.
“쏴! 쏘라고!”
재차 퍼부어진 화살세례에 이어, 마법사들도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적기사에겐 이미 너무나도 많은 자원이 주어져 있었다.
구우우우-
포이닉스는 왼팔을 높이 들어 올렸 다. 사방에서 흐르는 피가 마력의 흐름에 따라 중력을 거스르기 시작 했다. 거꾸로 내리는 비처럼 떠오른 핏방울들이, 왼팔을 중심으로 붉은 와류를 그렸다. 회전하는 핏방울들 은 저마다 뭉치며 여러 갈래의 줄기 를 이루었다.
차라락.
핏줄기 중 절반은 팔에 달라붙었 다. 응축된 피가 검붉은 비늘을 이 루어 손가락부터 어깨까지 집어삼켰 다.
나머지 핏줄기들은 점점 회전하는 속도를 더해 갔다. 포이닉스는 들끓 는 혈기를 통제하며 왼손을 휘둘렀 다. 붉은 와류가 그 손짓에 따라 홀 러 갔다.
시이이잇!
‘피바람’은 화살비를 사방으로 흩 어낸 다음 궁수들을 향해 휘몰아쳤 다.
“꼬아악!”
“커헉,”
마치 회오리바람에 칼날이 잔뜩 섞 인 것처럼, 뾰족이 날을 세운 핏줄 기들은 와류를 따라 주변을 난도질 했다.
붉은 와류는 근 40미터쯤 몰아친 다음에야 후두둑, 흩어지며 들판을 적셨다. 피바람이 훑고 지나간 길에 붉은 융단이 깔렸다. 육십여 명의 궁수들이 흘린 피를 씨실과 날실로 삼은 융단이었다.
“……저, 저런 악마 같은……
충격적인 장면에 얼이 빠진 이들이 더듬대는 사이, 너덧 명의 전투마법 사가 공격주문을 쏟아냈다.
불길에 뒤덮인 뱀들이 들판을 사르 며 적기사를 덮친 것을 시작으로, 보이지 않는 커다란 주먹으로 내리 찍은 듯한 충격파가 터졌다.
“끅 ”
적기사가 비틀거리는 사이, 불뱀들 이 바이콘의 네 다리를 휘감았다.
크흥!
깜짝 놀라 발버둥을 치는 바이콘 을, 포이닉스는 고삐를 짧게 쥐며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연이어 날아든 넝쿨 채찍이 그의 어깨와 허 리를 감싸 낙마시키고 말았다.
“이 X팔-”
마음 놓고 욕지거리를 뱉을 여유도 없었다.
어느 늙은 전투마법사가 육척봉을 들어 올리자 그 끝에서 검은 빛이 터졌고, 그걸 마주한 포이닉스는 잠 시간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마비 의 광선’이었다.
“지금이다!”
연달아 충격파가 터지고 세 줄기의 번개화살이 날아들었다. 가벼운 갑 옷에 도끼를 맨 정예병들이 달려와 쇠그물을 연달아 집어던졌다.
“카학,”
마비가 지속된 시간은 고작 3초에 불과했으나, 다섯 겹의 쇠그물에 짓 눌린 채 적기사는 무릎을 꿇고 몸을 덜덜거리고 있었다.
“찔러!”
“끝장내!”
뒤이은 병사들이 장창을 휘둘렀다. 구령과는 달리 창을 찔러넣는 병사 는 드물었다. 대개 장대를 휘두르듯 포이닉스의 어깨와 등, 뒤통수를 후 려쳤다.
“급,”
포이닉스는 묵직한 창대에 뒤통수 를 얻어맞고 제 혀를 짓씹었다. 진 한 혈향이 퍼지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양팔을 허우적거렸다.
‘철혈갑주’에 뒤덮인 손아귀로 쇠 그물을 그러쥐며, 그물코에 검은 얼 음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전력을 다해 당기니 다섯 겹의 쇠그물이 천 천히 뜯겨나갔다.
“저, 저런 미친.”
“마법사, 마법사!”
“계속 공격하라!”
포이닉스는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 다. 근처에서 검은 섬광이 터지는 게 느껴졌다. 이어서 또다시 충격파 가 정수리를 후려치고, 불꽃의 뱀들 이 양 발목을 휘감으며, 번개 화살 이 배와 겨드랑이에 꽂혔다.
“이 개, 새끼들이.”
그는 울카르 왕자가 하사한 마법의 단검, ‘달마이스’를 써 마력을 모조 리 얼려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포이닉스는 끝끝내 모든 공 격 주문을 몸으로 받아내었다. 고작 전투마법사 몇 때문에 마도구의 힘 을 빌리는 건 굴욕스러운 일이었고,
한 번 사용하면 보름이나 무용지물 이 되는 마도구를 쓰기엔 아직 견딜 만한 상황이었다.
“왼쪽, 왼쪽을 막아!”
“기병들이 들어온다!”
아이스보발트에서 데려 온 기병들 이 대열 외곽을 공격하고 있었다. 포이닉스는 재차 아귀에 힘을 주어 쇠그물을 완전히 찢어발겼다.
“어, 으어.”
“공격! 물러서지 마라!”
적기사가 쇠그물을 털고 나오자 병 사들이 기겁을 했다.
투구와 흉갑은 우그러지고 깨져 어 디론가 사라진 채였고, 온몸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아 니, 그래서 더욱 적기사는 꿈에 나 을까 두려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으, X발. 마법사고 검사고 대단 한 놈은 없다더니.”
포이닉스가 그렇게 중얼거리곤 횡 으로 검을 그었다. 휘둘러지는 도중 에 주욱 길어진 칼날에 병사 열댓이 걸려 두 동강이 났다.
“으, 으아아아악!”
“이건 아냐, 도저히 안돼!”
그 검격에 사기를 잃는 병사들이 생겨났다. 적병들이 뒤엉키는 와중 에, 적기사는 사납게 눈을 빛내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비늘이 날카 로운 손톱처럼 돋아난 왼손가락 끝 에서 피의 채찍을 뽑아내었다.
99 jutir, ma.
마나가 잔뜩 실린 목소리에, 포이 닉스는 얼른 눈을 감으며 피의 채찍 을 휘둘렀다. 소리를 쫓아 뻗어간 다섯 줄기의 채찍이 검은 섬광을 뿜 어대는 노마법사를 휘감았다.
촤락!
“커억,”
피의 채찍은 뻗어갈 때만큼이나 빠 른 속도로 줄어들었고, 노마법사는 순식간에 비늘 덮인 손아귀에 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덕분에 죽는 줄 알았어요, 할아버 지.”
“흐 O 흐一” –9 —–
적기사는 아귀힘만으로 노마법사의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버렸다.
“적 기사-!”
병사들을 헤치고 나타난 제국기사 들이 그를 둘러쌌다. 방패를 든 중 갑병과 가벼운 차림새의 도부수들도 함께였다.
“하, 그래.”
포이닉스는 반갑다는 듯 씩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너희 같은 놈들이 마음 편 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창대 중 간이 부러진 장창을 차올렸다.
적기사가 창을 쥐자 포위망을 구성 한 병사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 러나 등골이 오싹해지는 파공음을 남기며 날아간 투창은 완드를 쥔 사 내의 목을 꿰뚫어버렸다. 전격 계열 마법을 다루는 전투마법사였다.
“치사하게 마법을 쓰고 말이야. 안 그래?”
그때, 갑자기 뒤쪽에서 요란한 소 리가 들려왔다.
포이닉스가 돌아보니 이리저리 찔 리고 베인데다 네 다리엔 검게 탄 흔적을 새긴 바이콘이 꼬랑지에 불 이라도 붙은 양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뒤!”
“젠장, 창병!”
그러나 포이닉스를 포위한 정예병 들 중에 창을 쥔 자는 거의 없었다. 바이콘은 한 쌍의 뿔과 날카로운 이 빨이 돋은 아가리, 단단한 발굽으로 사방을 찌르고 물어뜯고 걷어차댔 다.
“으하- 야, 여기!”
적기사는 웃음을 터뜨리며 바이콘 에게 달려갔다.
제국기사 하나가 막아서며 말 위에 서 양손검을 내리쳤다. 검은 얼음을 들어 검격을 흘려낸 포이닉스는 제 국기사의 전투마에게 비늘 덮인 손 을 휘둘렀다.
히히힝!
얼굴이 깊이 할퀴어진 전투마가 앞 발을 들어 올린 순간, 기수의 흉갑 아래 틈으로 칼날이 파고들었다.
“끄윽,” 배가 갈라진 제국기사가 낙마하는 사이, 포이닉스는 단숨에 몸을 날려 바이콘에 올라탔다.
그는 곧장 피보라를 연달아 터뜨렸 다. 이어서 검은 얼음을 휘둘러 몰 려든 병사들을 처리한 뒤 왼손을 바 이콘의 목덜미에 얹었다.
손바닥을 감싼 비늘이 꿈틀대며 빈 틈을 만들고, 혈기를 잔뜩 머금은 피가 ‘츠츠츠’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바이콘에게 흘러들었다.
크르르르
바이콘의 온몸에 새겨진 자상이며 절상이며 화상이 눈에 띄게 아물어 갔다. 딱지가 떨어지려면 시간이 걸 리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한껏 의 기양양해진 마수는 연신 콧김을 뿜 으며 젖은 땅을 박찼다.
“……오, 주여.”
위용을 되찾은 적기사와 바이콘의 모습에, 한 병사가 억눌린 목소리로 기도를 올렸다.
“후, 힘들어 죽겠네.”
포이닉스는 비늘 덮인 손으로 머리 칼을 쓸어올리며 화사한 미소를 지 었다.
“얼른 끝내자. 나도 좀 쉬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꽃망울이 터지듯 혈편이 비산했고, 벌이 춤추 듯 긴 칼날이 검붉은 궤적을 그렸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