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42)
나의 악당들 442화
65. 봄의 절정(17)
호프컨 성백은 경악에 눈을 홉뜬 채 허무하게 쓰러지고 말았다. 포위 망을 펼친 제국기사들도, 아빌람버 스 공작과 사벨라드 방백을 포함한 선제후군의 수뇌들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휘관 하나 죽었다고 겁먹 고 움츠러들거나 패배를 떠올리기엔 군세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적기사를 죽여라!”
갑주를 화려하게 치장한 어느 귀족 기사의 우렁찬 외침에 제국기사들이 더욱 박차를 가했다.
흙먼지를 피우며 말을 달린 기수들 은 정면으로 돌격하는 대신 적기사 를 돌며 화살을 날려댔다.
활과 쇠뇌만이 아니었다. 질긴 밧 줄 내지는 쇠사슬로 만든 갈고리를 돌리며 틈을 노리는 자도, 가죽 그 물을 쥔 자도 부지기수였다.
“미친놈들이, 아주 마적이 따로 없 네.”
최후의 검호마저 베어 넘긴 포이닉 스는 재빨리 혈기를 끌어올렸다.그 를 억누르던 반마력장은 늙은 검객 의 목숨과 함께 스러졌기에 마력의 수발은 자유로웠다.
차라라락.
왼손 끝부터 일어난 검붉은 비늘 조각들이 순식간에 손등과 완갑을 뒤덮었다. 그렇게 ‘철혈갑주’가 번져 가는 와중, 적기사의 팔뚝에서 조그 만 원판이 돋아났다.
츠츠츠.
호프컨과 그 제자들이 흘린 피가
허공으로 역류하여 원판에 들러붙었 다.
검붉은 원판은 급격히 덩치를 불렸 고, 제국기사들이 마상에서 쏜 화살 들이 닿을 즈음엔 어지간한 원방패 만큼이나 커진 채였다.
“이럇-!”
포이닉스가 ‘피의 방패’로 화살을 막는 동안, 흙먼지와 함께 원을 그 리던 제국기사들 중 이십여 기가 튀 어나왔다. 그리고 머리 위로 돌리던 갈고리를 일제히 집어던졌다.
피보라나 피바람 따위의 혈조술로 대응하면 간편하겠으나, 철혈갑주와 피의 방패를 한창 전개하는 중이라 혈기를 돌릴 수가 없었다. 몸으로 때워야 했다.
“흡,”
까강!
적기사는 칼을 휘둘러 갈고리들을 쳐내는 동시에 옆으로 몸을 던졌다. 그는 땅을 구르면서도 본능적으로 어깨를 비틀었고, 틈을 노린 화살 세례는 검붉은 비늘이나 견갑 등에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제국기사들이 헛친 갈고리들을 회 수하고 포이닉스가 혈기를 갈무리하 는 사이, 어느덧 강가까지 접근해 온 스트롬의 가병들 사이에서 한 전 투마법사가 주문을 쏘았다.
“Jaun—lacus! Yispelilo!”
가느다란 완드 끝에서 충격파가 터 졌다. 형체 없는 마력 덩어리가 공 기를 흔들며 날아들어 포이닉스를 덮쳤다.
두웅.
“크윽,”
‘해소’, 흔히 디스펠이라 불리는 주 문이었다.
활발히 운용하던 혈기가 턱 멈춰 버리자 적기사는 짧게 비틀거렸고, 그를 뒤덮고 있던 혈조술의 산물들 은 핏물이 되어 쏟아졌다.
해소는 일회성 주문이기에 숨 몇 번 고르면 그 여파에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제국기사들은 기회를 놓치 지 않았다. 재빨리 시위를 당기고, 갈고리를 던졌다.
쐐애액!
웬만한 장한은 당기지도 못할 고장 력의 활로, 불과 삼사십 미터의 거 리에서 직사로 쏘아진 화살은 무시 무시한 위력을 선보였다.
판금갑옷에 부딪쳐 까아/ 하고 경 쾌한 금속음을 낼 때마다 강철판이 우그러질 정도였다.
푹
“아윽, 씹-”
이리저리 피하고 급소를 보호하던 포이닉스는, 팔꿈치 아래를 정확히 파고든 화살촉에 욕지거리를 삼켰 다.
그가 전신을 두드리는 둔중한 충격 과 팔에서 전해지는 격통에 움찔거 리는 사이, 예닐곱 개의 갈고리가 사지에 휘감겼다.
“놔, 이, 개새끼들아!”
적기사가 거칠게 몸부림쳤다.
“ 엇,”
“으헉!”
웬만한 거인과도 맞먹는 힘에, 갈 고리를 당기던 이들이 전투마와 함 께 땅을 굴렀다.
그 광경을 본 다른 제국기사들은 얼른 줄을 놓거나 기민한 승마술을 발휘해 균형을 유지했다.
“오른팔! 오른팔을 노려라!”
기창을 겨눈 귀족기사의 명령에, 적기사의 오른팔을 노리고 화살이 연거푸 내리꽂혔으며 갈고리가 복잡 하게 휘감겼다.
뿌드드득-
“끄윽!”
덩치 큰 전투마에 탄 초인 아홉이 기다란 화살이 너덧 발이나 박힌 팔 을 잡아끌었다.
날카로운 갈고리에 완갑이 형편없 이 구겨졌고, 소가죽보다도 질긴 피 부 역시 길게 찢기거나 꿰뚫렸다. 포이닉스는 끝끝내 칼을 놓치진 않 았으나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장사라도 땅을 딛지 않고는 힘을 쓰지 못하는 법이라, 적기사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며 아홉 줄기의 밧줄과 쇠사슬에 끌려갈 뿐이었다.
“지금이다, 그물!”
갈고리를 쥔 자들 사이에서 기회를 노리던 제국기사 너덧 명이 투구 틈 으로 눈빛을 번뜩였다. 그리고 숙련 된 어부와도 같은 솜씨로 그물을 던 져 포이닉스를 덮어버렸다.
“제길-”
평범한 그물만큼 가볍지만 지극히 질긴 물건이었다. 와이번의 속가죽 이나 트롤의 힘줄을 비롯한, 온갖 괴물의 산물로 만든 귀물이기도 했 다.
그런 물건이 너덧 겹이나 휘감겼으 니 암만 적기사라도 옴짝달싹도 못 하는 건 당연했다.
갈고리와 그물로도 모자랐는지, 선 사의 죽음에 분노한 파괴술사들이 허연 빛기둥을 마구 날려댔다.
오른팔이 묶인 채 그물 아래서 허 우적거리던 포이닉스는 멍석말이라 도 당하듯 ‘힘의 창’ 세례에 전신을 얻어맞았다.
꽈과광!
“어헉.”
훤히 드러난 얼굴, 가슴, 허벅지 등을 빛 덩어리가 연달아 두드렸다. 얼굴은 코뼈와 광대가 내려앉아 순 식간에 피범벅이 되었고, 우그러진 흉갑이 마침내 깨지며 철근처럼 단 단한 갈비뼈도 두 개나 부러졌다.
“끄으혹.”
적기사는 분명 일당백, 아니, 일기 당천의 기사다. 하지만 대륙 최고 수준의 권력자들이 내놓은 정예병력 을, 그것도 오직 적기사만을 염두에 두고 준비한 참수부대를 당해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오오오오!
거대한 형상을 취한 오그슐리조가 그를 도우려 할 때, 아빌람버스 공 작의 심복이자 사령관인 부아칸 대 장이 취해둔 조치가 빛을 발했다. 알첸버그의 사백여 마법병단에서 차 출되어 티 나지 않게 전방으로 나선 마법병들이 일제히 주문을 쏟아낸 것이다.
시퍼런 냉기를 뿜는 공이 서른 개 도 넘게 날아들었다.
‘결빙구체’는 그리 수준 높은 주문 이 아니었지만 그 수효가 워낙 많았 기에 허공에 뜬 거인은 급격히 쪼그 라들었다.
아무리 오그슐리조라도 마나가 마 른데다 제때 휴식도 취하지 못했기 에, 결국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추락 하고 말았다.
“기병대, 돌격! 모조리 짓밟아라!”
선봉장 노릇을 하던 귀족기사가 달 을 꿰뚫을 기세로 높이 기창을 치켜 들었다.
보병대열 사이에서 불도 켜지 않은 채 대기하고 있던 기병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강가로 내달렸다. 전원 제국기사로 이루어진 참수부대 는 임무를 마무리하려는 듯 적기사 에게 돌진했다. 활과 쇠뇌를 내던진 뒤 자루가 기다란 철퇴나 도끼 따위 를 꺼내 드는 모습이 흉흉하기 짝이 없었다.
“으으- 씨, 발.”
포이닉스가 드디어 안정된 혈기를 바탕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다 섯 겹의 그물은 여전히 질겼고 오른 팔은 단단히 묶인 상태였다. 쇄도하 는 기사들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때, 숨겨진 패가 적기사의 위기 에 인내심을 잃고 모습을 드러내었 다.
장수를 잡자면 말부터 쏘아야 하는 법이라는 듯, 마구 쏟아지는 화살 세례를 피하느라 바이콘은 강가에서 껑충거리고 있었다.
그 마수가 달빛 아래로 드리운 그 림자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검은 인영이었다.
잡다한 형체가 겹쳐진 듯 윤곽이 흐릿하고 불분명했다. 광택 없이 몸 에 착 달라붙는 얇은 갑옷이나 갈기 를 휘날리는 흰 가면만이 어렴풋이 보였다.
어둠에 녹아내릴 듯한 형체라, 달 려들던 제국기사들 중에서도 눈이 특출 나게 밝은 서넛만이 강가에 나 타난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건?”
그들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인영 이 땅을 박찼다. 그렇게 3미터도 넘 게 뛰어오르더니 허공에서 허리를 뒤로 꺾었다.
그리고 비명.
“젠장, 이건 또 뭐-”
인영이 ‘하울링 마스크’를 통하여 만들어낸, 쇳소리처럼 날카로운 소 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고막을 깊숙이 찔러오는 음파에 제 국기사들은 얼굴을 구기며 귀를 틀 어막았고, 기병들은 전정기관이 흔 들려 헛구역질을 해댔다. 그러나 가 장 크게 반응한 것은 기수들이 아니 라 그들이 탄 말이었다.
히히힝-
“이 녀석이, 진정해!”
“으아악, 피해!”
말들이 놀라 날뛰거나 갑자기 제자 리를 도는 정도는 아주 양반이었고, 내달리다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는 경우도 흔했다.
뒤를 따르던 기수들도 속도를 이기 지 못해 넘어진 말들과 뒤엉킨 통에 곳곳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육백에 이르는 제국기사 그리고 기 병들이 아주 잠시 멈춰선 사이, 비 명을 지른 인영은 적기사를 향해 달 려갔다.
“너, 검은 창녀야!”
간신히 전투마를 진정시킨 귀족기 사가 인영- 이른바 ‘검은 여인’으로 알려진 암살자를 향해 마주 돌진했 다.
하얀 가면 속에서 까만 사백안이 번뜩이더니 송곳을 닮은 단검 세 자 루가 빛살처럼 쏘아졌다. 개중 둘은 화려하게 치장된 투구에 막히고 말 았지만, 하나는 정확히 면갑의 눈구 멍에 틀어박혔다.
“끄어윽!”
눈에 단검이 박힌 귀족기사의 목이 부러질 듯 젖혀졌다. 그러나 그는 선봉다운 결기로 이를 악물었고, 투 구 아래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기 창을 고쳐 쥐었다.
W 으 하
■才、9
라넌은 잽싸게 땅을 굴러 돌격을 피해 냈다.
하지만 귀족기사는 하나 남은 눈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기창을 꺾었고, 그녀의 옆구리에 창끝을 박아넣었 다.
아니, 박아넣은 것처럼 보였다.
검은 여인은 순간적으로 목에 차고 있는 장신구에 흘러들던 마력을 차 단했고, ‘흐릿함’ 주문이 끝나며 잔 상이 남자 ‘소(?)’의 수법으로 소리 없이 앞으로 쏘아져 나간 것이었다.
“이 창녀 같은 것이-”
간단한 속임수로 귀족기사를 빗겨 낸 라넌은 발버둥 치는 적기사에게 달려들며 소검을 뽑아 들었다.
아니, 소검이 아니었다. 반 토막이 난 고검(古劍), ‘거궐’이었다.
판금도 버터처럼 자를 수 있는 예 리한 칼날이 순간 네 차례나 번쩍거 렸다.
포이닉스의 오른팔에 휘감겨 있던 쇠사슬과 질긴 밧줄들은 물론이고, 다섯 겹의 그물도 단숨에 조각났다.
“포이.”
“뭉치야, 끄응-”
가면을 쓴 암살자의 부축을 받은 적기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숨을 돌릴 새도 없이 기창을 겨누며 돌격 해 오는 귀족기사를 향해 손을 내밀 었다.
쾅!
용맹한 선봉장은 투구 아래로 붉은 반죽을 흘리며 낙마했다.
“아, 안 돼-!”
“주군!”
그가 쓰러지자 참수부대를 구성하 고 있던 제국기사들이 경악하여 입 을 벌렸다.
“주군께서 쓰러지셨다!”
“방백 각하를 보호하라!”
“일단 적기사부터 처리해!
“복수를!”
몇몇 제국기사들이 쓰러진 선봉장, 아니 ‘피코어드 방백’에게 달려가 코 윗부분이 완전히 날아간 머리통 에 값비싼 마법물약을 쏟아부었다.
나머지는 눈이 뒤집힌 채 적기사와 검은 여인에게 덤벼들었다.
“씨발— 야!”
포이닉스의 다급한 고함에 이각수 가 바람처럼 달려왔다.
검은 여인의 부축을 받으며 바이콘 을 향해 달리면서도 적기사는 끊임 없이 마력을 운용했다.
혈기를 가득 머금은 ‘끓어오르는 피’가 전신을 맹렬히 흐르며 상처를 수복했다. 덕분에 그는 불과 두어 호흡 만에 홀로 달릴 수 있을 만큼 몸 상태가 호전되었다.
분노한 기사들의 말발굽에 밟히기 직전 바이콘에 올라탄 포이닉스는, 벼락같이 허리를 돌리며 검은 얼음 을 휘둘렀다.
파캉!
그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들던 빛 줄기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튕겨 나 가, 어느 제국기사의 가슴을 짓뭉개 버렸다.
포이닉스의 품에 안기다시피 몸을 실은 라넌이 질문했다.
“포이, 작전은.”
“텄어.”
적기사는 그리 말하며 뒤를 돌아보 았다.
적진 어딘가에서 부드러운 충격파 가 터졌다. 암살자의 습격에 대비해 ‘탐지’ 주문을 뿌려대고 있는 것이 었다.
“저기가 수뇌부인가……
“가까워요.”
“위험해. 지금도 저 정돈데, 네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야말로 이 잡 듯이 뒤지기 시작할걸.”
포이닉스의 미련 없이 고삐를 쳤 고, 제국기사들과 순식간에 거리를 벌린 바이콘은 날듯이 도약해 강을 넘었다.
내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다.
일단 뭉치를 적진에 잠입시키고, 그녀에게 ‘동화’를 걸어 시야를 공 유받은 이오피야가 ‘노예들의 목줄 을 쥔 자’를 찾으면 암살하거나 목 줄을 빼앗을 속셈이었다.
그런데…….
“완전 조졌네.”
난 말끔히 비워낸 물약병을 내던진 뒤, 제자리를 되찾은 코뼈와 광대뼈 를 매만지며 이를 갈았다.
호프컨 성백을 예상보다 훨씬 쉽게 잡아서 활로가 보인다 싶었는데, 웬 ‘방백 각하’라는 새끼가 이끄는 제 국기사들에게 탈탈 털렸다.
기사씩이나 되는 놈들이 마적떼나 용병들처럼 비열하게 구니, 혼자서 는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더라고.
“끝까지, 맞서라!”
랭볼트 경의 목소리였다.
그는 방어선 안쪽에서 최후까지 온 존해 두었던 기병 전력을 모조리 끌 어다 적에게 마주 돌격했다.
그 인원이 고작 오십여 기에 불과 했기에 육백도 넘는 적 기병들에게 맞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랭 볼트 경과 소수의 기사들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 분투를 벌여주었다.
“괘, 괘, 괜찮으세요?”
판초를 입은 소녀, 이오피야가 창 백해진 얼굴로 질문했다.
뭉치와 감각을 공유하던 이오피야 는 정신없는 몸놀림에 잠시 기절했 다가, 온몸이 엉망이 된 내가 돌아 오자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고 치료 의 주술을 펼쳐댔다.
“안 괜찮은데, 어쩔 수 없지. 아직 목줄 주인은 못 찾았고?” 소녀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 였다.
“그게, 사슬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요.”
“……일단 뭉치를 통해 잘 살펴줘. 그게 마지막 희망이니까.”
한가하게 대화를 나눌 여유는 없었 다. 적들은 이미 랭볼트 경 등을 포 위한 채 방어선에 돌진해 오고 있었 다.
나는 이오피야를 아이네스 백작 등 도주를 준비하고 있는 일행에 합류 시킨 뒤, 바이콘에 탄 채 전방으로 달려 나갔다.
“불을 질러라! 어서!” 참모 포건의 고함에 최후까지 자리 를 지키던 병사들이 횃불을 던졌고, 기름에 젖은 목책 더미와 흙에서 불 이 치솟았다.
“씨발……. 막아!”
내 거친 고함에 엎드리고 있던 병 사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켜 창을 내 밀었다. 불길을 뛰어넘은 기병들은 그대로 아군 병사들을 짓뭉개고 한 몸이 되듯 엉켜들었다.
악전고투가 시작되었다.
하사관 고트롭이 이끄는 백오십여 명의 항병들 중 절반은 적 기병들이 돌격을 시작하자마자 도망쳐 버렸 다.
나머지 놈들도 무기를 놓아버리고 싶은 눈치였으나, 내가 피의 칼날을 휘둘러 말과 기수를 한꺼번에 동강 내는 기예를 일곱 번 연속 선보이자 억지로라도 무기를 휘둘렀다.
밀그레스터의 가병들은 정예병다운 기세로 적에 맞섰고, 기병들과 맞닿 은 직후엔 오히려 훌륭한 교환비를 내었다.
뛰어난 실력을 보이던 궁수들 역 시, 화살이 떨어져 작은 도끼나 칼 한 자루만 들었음에도 여느 중갑병 못지않은 용맹을 선보였다.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용병들 역 시 물러섬 없이 싸웠다. 아이네스 백작이 가족에게 큰 보상을 내리리 라고 약속한 것을 믿는 것인지, 아 니면 전문 용병다운 신의성실을 다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 만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얼쇼어의 바다사나이들은 사지가 떨어져도 자리를 지켰다. 저 앞에서 그들의 우상이 적들을 베어 넘기고, 또 호쾌한 고함을 터뜨릴 때마다 괴 성으로 화답하며 작살을 닮은 창을 내질렀다. ‘고함치는 파도’만 멈추지 않는다면 그들 역시도 싸움을 그치 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가장 용맹하게 싸운 건 누데인 족이었다. ‘특별한 차’를 마시고 광신에 몸을 맡긴 하 레스 키스들은 혼자서 제국기사 서 넛도 너끈히 상대했다. 일반 전사들 역시 ‘나피닷 어쩌구’ 하는 구호를 합창하듯 내지르며 무기를 휘둘렀 다.
그 모든 분투 끝에 기병들을 격퇴 한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하지만 선제후군은 이 기적으로 전 투를 마무리할 생각이 없는 듯, 스 트롬의 가병들과 노예군단을 곧장 들이밀었다.
제기랄.” 적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무너진 목책과 토루 대신 펼친 화 염의 장벽 너머로, 수천의 인파가 일렁였다.
제국기사가 다수 섞인 기병들을 쫓 아내는 동안 모든 기력을 소진한 아 군 병사들은 지쳤거나 멍한 눈으로 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앞에 펼쳐진 화염의 벽이 주홍빛으로 물든 것은.
화르륵!
높이 솟아난 불길 속에서 웬 그림 자가 비쳤다. 이어서 주홍빛 화염이 조금 사그라들자, 거기엔 웬 인영이 하나 서 있었다.
근처의 바위에 주저앉아 숨을 고르 던 늙은 마도사, 오그슐리조가 작게 입을 벌리며 중얼거렸다.
“‘홍염에서의 강림’……. 설마?”
주변의 병사들이 화염 속에서 모습 을 드러낸 마법사를 보며 무어라 고 함을 질러댔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 도 들리지 않았다.
“……어?” 내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 이, 불꽃을 망토처럼 두른 마법사가 허공을 계단처럼 밟고 내려왔다.
“어, 어어?”
풍성한 금발 끝으로 불티가 튀겼 고,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는 신비롭 게 빛났다. 어린 여인은 불타는 전 장을 배경 삼아 옅게 미소를 지었 다.
“오랜만이야.”
엘렌의 인사에, 난 어안이 벙벙해 져 눈만 끔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