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67)
나의 악당들 467화
66. 은왕자(22)
아빌람버스 공작을 천막에서 쫓아 낸 뒤, 루일릭스 2세는 즐거운 기색 을 그대로 드러내며 울카르 왕자를 돌아보았다.
“봉신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건 황제의 의무지.”
칠십을 훌쩍 넘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건강한 중년의 얼굴을 가진 중 간계의 최고 권력자는, 손자에게 옛 날이야기를 하는 노인처럼 나긋한 말투였다.
“허나 선제후는 평범한 봉신과는 달라서, 승계든 분할이든 독립이든 나 혼자서 결정할 수는 없네. 제국 의 중대사이니만큼 다른 선제후들의 의견도 충분히 수렴해야 하지.”
“제 질녀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 시는 겁니까?”
왕자의 물음에 황제는 휘휘 손을 내저었다.
“그런 뜻은 아닐세. 테오도라에게 는 분명 계승권을 주장할 자격이 있 어. 그녀는 전대 공작인 구엘람버스 의 적녀이고, 숙부에 의해 수녀가 되었음은 잘 알려진 바니까. 또한 성기사로서 주님의 뜻을 입에 담으 며 제 권리를 주장하는데, 어찌 감 히 묵살할 수가 있겠나.”
“송구하오나 폐하,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정당한 권리자의 요청 을 받아들이는 것은 마땅히 폐하의 권리가 아닙니까?”
“그건 그렇네. 정당한 계승권자를 새 선제후로 지정하는 것 정도는 나 혼자 결정할 수 있지. 헌데 말일세,” 황제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 갔다.
“지금 선제후 위를 획득하려는 건 테오도라 공녀, 즉 정당한 계승권을 지닌 당사자가 아니잖나. 선제후든 앙스트와 오브도르프 양 지방의 영 주든 세속의 작위인 건 매한가지라, 성직을 내려놓지 않는 한 그녀는 한 뼘의 땅도 얻을 수 없네.”
그의 시선이 홍의주교 아라모스와 테오도라 공녀를 오갔다.
“……보아하니 그럴 의도는 전혀 없는 눈치로군. 안 그런가?”
“말씀대로입니다, 폐하.”
아빌람버스 공작이 쫓겨나며 안색 을 회복한 테오도라 공녀가 슬쩍 고 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여 저는 성자 오론이 3세기 전 에 보인 선례를 따르고자 합니다.”
“……성자 오론의 선례?”
루일릭스 2세가 흥미를 드러내며 앉은 자세를 고치자 공녀의 이야기 가 이어졌다.
“당시 큰 전쟁의 여파로 성자 오론 은 ‘제이리아’의 적법한 후계가 되 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의 이끄심 에 따라 서품을 받은 몸이었고, 이 에 따라 고대제국의 변경사령관 직 위를 계승해 온 가문에 대공(大公) 의 위를 이양하였습니다.”
“그렇게 대공이 된 사내의 손자는 홍의주교들의 도움을 받아 제국을 세웠지.”
붉은 수염을 쓸어내리던 황제가 말 을 거들었다.
“루드빅 1세와 안타시카 가문의 이 야기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안타시카 대공가는 미테르게란트 제국의 초대 황제인 루드빅 1세를 포함, 황제를 셋이나 배출한 가문이 다. 당연하게도 제국의 손꼽히는 명 문가이며 현 황가, 즉 눈앞의 루일 릭스 2세가 속한 스담테르크 가문의 강력한 라이벌 중 하나로 여겨진다.
아니, 이제는 유일한 라이벌이 될 것이다. 지난 반세기간 덩치를 불리 며 제위를 넘보던 스트롬 공작가는 곧 둘로 쪼개질 테니 말이다.
“제국 역사상 이미 여러 차례 쓰인 적이 있는 선례지. 이번과 같은 경 우에는 특히 잘 먹힐 이야기이겠 고.”
황제는 계산을 하며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일단 안타시카와 블리히비트 를 설득하기에는 충분하겠군. 스트 롬과 알첸버그는 동의할 리 없으니 제외한다 쳐도, 나머지는 어찌저찌 설득할 수 있겠지. 있을 테지만 그렇게 중얼거리던 루일릭스 2세 는, 이내 울카르 왕자를 똑바로 바 라보며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래도 안 되겠는걸. 그 어떤 경 우에도 그대는 안 될 것 같아.”
왕자는 표정 없는 얼굴로 침묵을 지켰고 황제는 상관없다는 듯 말을 보태었다.
“일단 명분부터가 턱없이 부족하 네. 그대가 테오도라의 외숙이라 해 도 스트롬 가문의 피가 이어진 건 아니잖나.”
“성자 오론과 루드빅 1세 역시 친 인척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황제도 선제후도 없었으니 까. 개국 이전, 그 야생과 다를 바 없던 세상에서, 감히 누가 주인 없 는 변경사령관에게 토를 달았겠나? 응?”
황제는 빙글거리며 왕자가 선제후 위에 앉을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를 들었다.
“게다가 그대는 밀라놀의 왕자가 아닌가. 보통의 왕자도 아닌, 바로 그 이름 높은 영웅이자 군벌인 은왕 자. 그대를 선제후 자리에 앉혔다간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날 제위에서 끌어내리려고 할걸. 봉신의 영토를 적국에 팔아넘겼다며 배신 운운하겠 지. 안 봐도 뻔해.” “그리고 말일세. 이건 비밀인데.”
루일릭스 2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지막 이유를 속삭였다. 말이 속삭 임이지, 천막 안의 열네 사람 중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할 만큼 귀가 어두 운 자는 없었다.
“설령 중간계의 모든 인간이 은왕 자가 선제후 자리에 앉는 것에 동의 하더라도,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 지 않을 걸세. 왜인지 아나?”
“……폐하께서 그걸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맞추었네. 난 내 손으로 침 실에 맹수를 들일 만큼 바보가 아니 거든.”
황제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왕자는 싱긋,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는 생각이 다르신 모양입니 다.”
“다르다? 어떻게 말인가?”
“저는 맹수를 좋아합니다. 고분고 분 꼬리를 살랑이는 사냥개보다는 길들지 않는 맹수가 매력적인 법이 니.”
“으-흠. 멋지군. 젊은이답구먼.”
루일릭스 2세가 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이자, 울카르 왕자는 미 소 지은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또한, 저는 처음부터 선제후 위에 앉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생각이 없었다?”
“예, 폐하. 저는 엄연히 제오레 왕 가의 일원이니, 어떻게 외국의 작위 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건 또 무슨 개소리냐’ 하는 기 색으로 슬쩍 미간을 좁히는 황제에 게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왕자는 테오도라 공녀를 돌아보며 눈짓했 다.
“성직에 있는 저를 대신해 계승권 을 행사할 자는, 제 칠촌입니다.”
“ 칠촌?”
“루얀.”
그녀의 부름에, 말석을 차지하고 있던 어린 남작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츨링’?” 루얀을 돌아본 루일릭스 2세는 헛 웃음을 터뜨렸다.
“테오도라와 그대가 혈족이라고?”
“그렇습니다, 폐하.”
적갈색 눈동자의 미소년은 어떤 감 훙도 느껴지지 않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조모는 스트롬 가문의 사람으 로, 테오도라 공녀의 증조부인 프시 노스 공작의 누이 되는 사람입니 다.”
“……허. 그래. 이제야 알아보겠 군.” 황제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왜 얼굴이 익숙한가 했더니, ‘팔 리고노스 공녀’의 손주였군.”
“제 조모를 아십니까?”
“하, 알다마다. 소싯적 제국 제일의 미녀로 불렸던 여인인데.”
그는 추억을 회상하는 듯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그래. 그녀가 결혼한 상대가 밀라 놀의 백작이었지. ‘트럼 웰’의 어스 기치 가문……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닮았군. 눈 과 머리카락만 아니면 팔리고노스 공녀 본인이라고 해도 믿겠어……
잠시 기억에 빠져있던 황제는, 이 내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말을 이었 다.
“스트롬 가문의 피를 이었다는 건 잘 알겠네. 하지만 그대는 밀라놀의 영주가 아닌가. 먼 친족에게서 작위 를 상속받아 양국에 영지를 둔 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송구하오나, 폐하.”
감히 황제의 말을 중간에서 가로막 은 루얀 남작은, 고저 없는 말투로 부정했다.
“더 이상은 아닙니다.”
루일릭스 2세가 눈짓으로 던지는 의문에 답한 것은 울카르 왕자였다.
“그는 모든 작위와 영지를 저에게 증여했습니다.”
“……그대에게?”
“예. 델리로드는 물론, 어스기치 가 문의 본성인 체더 성 역시 두 달 전부터 제 소유가 되었습니다.”
“허, 허허……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황제에게, 루얀이 말을 덧붙였다.
“오늘부터 저는 어스기치의 루얀이 아닌, 스트롬의 루얀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데 이어, 소 년은 한쪽에 멍하니 앉아있는 홍의 주교를 돌아보며 공손한 투로 말했 다.
“또한 지난 14년간의 죄를 고백하 고 싶으니, 아무쪼록 주교께서는 제 개심을 받아주십시오.”
손등에 새긴 야만의 문신을 장갑으 로 가린 채, 루얀은 목에 건 고리십 자가를 꼭 쥐며 간절한 투로 말했 다.
“……진심인가?”
“물론입니다, 폐하.”
소년은 양팔을 펴 보이며 썩 당당 한 자세로 말했다.
“거리낄 게 무엇이겠습니까? 제 아 비인 알더 백작은 왕가의 반역자로 목이 잘려 죽었고, 가문의 명성은 땅에 처박혔습니다. 궁벽한 곳에 빌 붙어 누추한 가문의 이름을 이어가 느니, 대국의 제후로서 이름을 떨치 고자 합니다.”
황제를 제외한 제국의 육인방은 순 식간에 성과 교단을 갈아치운 루얀 을 보며 벙 찌고 말았다. ‘저 어린 놈이 뭘 알고 말하는 건가?’하는 표 정이다.
“은사자 대신 어린 용이라……
반면 황제는, 이마를 감싸 쥔 채 크게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주 재밌군. 나쁘지 않아.”
밀라놀 깡촌의 영주 루얀이 미테르 게란트의 선제후가 되는 순간이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