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66)
나의 악당들 466화
66. 은왕자(21)
앙스트 서편의 어느 이름 없는 언 덕, 덩그러니 쳐진 천막 아래.
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치는 쟁쟁한 인물 열여섯이 조잡한 탁자 하나를 두고 모여 앉았다.
의자 뒤편에 시립하기를 자처하였 으나 황제의 거듭된 채근에 못 이겨 동석하게 된 제국 측의 육인방을, 나는 다시금 살펴보았다.
수호경과 검백, 원수는 그새 눈에 익었지만 나머지는 새로운 얼굴이었 다. 하지만 셋 모두 개성 넘치는 외 양을 가진 덕에 그 정체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또한 우리 쪽에 서 속으로 추측을 해 보기도 전에 어째 들뜬 기색의 황제가 소개말까 지 보탰다.
“먼저, 끝에 계신 현숙한 귀부인은 린하우의 종정(宗正)인 ‘이시디린’일 세.”
‘산상의 린하우’는 제국에 위치한 마법학파로 파괴적인 주문을 부리는 소서러, 즉 파괴술사들의 뿌리로 여 겨지는 곳이다. 그러한 린하우의 정 점에 있는 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 노파, 이시디린이다.
베일 달린 고깔모자를 쓰고 얇은 천을 여럿 겹친 듯 하늘거리는 커틀 (Kirtle)을 입었는데, 마법사라면 으 레 들고 있는 지팡이나 완드 따위는 보이지 않아서 겉보기엔 그저 노년 의 여귀족으로 보일 뿐이었다.
“차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춘데 다 취향이 고상하기 이를 데 없어서 최고의 티타임 파트너이기도 하지.”
‘파멸의 이시디린’ 내지는 ‘분쇄의 손’ 등으로 불리는 무시무시한 파괴 술사를 위한 소개말이라기엔 지나치 게 소박한 감이 있었지만, 이시디린 은 별 불만이 없는 듯 잠자코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쪽의 숙녀는 ‘서프밀레즈’. 경지 에 이른 마법사이자, 수완 좋은 사 업가지.”
여인은 서프밀레즈라는 이름만큼이 나 특이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뿌옇게 속이 비치는 반투명한 암석 질의 피부에, 커다란 벌레의 갑각을 뜯어 만든 것만 같은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팔꿈치에 걸쳐진 짧은 소맷 자락 아래로는 돌과 뼈 등을 조각해 새끼줄에 꿴 것 같은 팔찌가 드러났 다.
“뜨거운 열정과 냉정한 이성을 고 루 갖춘 여인이지. 장담컨대, 제국의 그 어떤 미녀도 그녀만큼 매력적이 지는 못할 걸세.”
……글쎄. 냉정이나 매력은 잘 모 르겠고, 열정 하나는 인정할 수 있 겠다. 살과 피부가 마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마나가 담긴 수정으 로 대체해 버린 미친년이니 얼마나 대단한 열정을 품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나의 빈객이자 친구 인 ‘카모스’. 한때 ‘마라그 협곡’과 ‘영원의 산’을 주름잡던 사냥꾼일 세.”
그는 우테콰이를 떠오르게 할 만큼 장대한 체구를 가진 사내였다.
다만 전형적인 장사 체구로 우람한 통뼈를 자랑하는 우테콰이와는 달 리, 카모스는 넓은 어깨나 통나무 같은 허벅지와 대비되는 얇은 허리 를 가지고 있었다. 팔다리도 길쭉한 것이, 아마 덩치에 비해 상당히 민 첩할 것 같다.
가죽과 비늘, 강철 등 여러 소재를 섞어 만든 복합갑옷을 걸쳤으며, 길 이 약 2미터에 폭은 한 뼘 이상으 로 보이는 거검을 땅에 살짝 박아넣 고 어깨에 기대둔 채였다. 그 검은 도저히 실전용으로는 보이지 않는 기물(奇物)이었으나, 카모스의 체구 와 별명을 감안하면 영 못 쓸 물건 은 아닐 터였다.
“요즘은 풍부한 경험을 살려 이 주 책맞은 인간의 말동무 노릇을 해주 고 있지. 워낙 바람처럼 자유로운 친구라 언제까지 머물러 줄지는 모 르겠지만 말이야.”
제국의 몇 안 되는 소드마스터이자 흔히 ‘용 살해자’라 불리는 카모스 는, 그 위명이나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도 썩 순박한 인상의 청년이었 다.
“……카모스요.” 황제의 소개에 솥뚜껑만 한 머리를 긁적이다 입을 여는 모습을 보니, ‘녹룡(綠龍) 마라그’를 참살했다는 그 맹자가 맞는지 조금 의문스러울 지경이었다.
제 부하들의 소개를 끝낸 루일릭스 2세는 이번엔 우리 쪽 인물들 하나 씩 돌아보았다. 난 이미 대충 인사 를 했으니 넘어가고, 테오도라 공녀, 아탈란테, 루얀 남작, 아리아드 경, 라이암 경 순으로 소개를 하자 황제 는 연신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밀라놀 왕국의 영웅들과 만 나게 되어 기쁘네. 직접 군사를 몰 아 나오길 잘했어. 아직 전투 한 번 치르지 않았는데 벌써 성과를 거둔 것 같은 기분이야.”
대륙의 손꼽히는 강자가 몇 명이나 모인 자리였지만, 루일릭스 2세의 태도는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등받 이에 길게 몸을 기댄 채 붉은 수염 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는 것이, 마치 친지들과 휴양을 즐기는 것처럼 여 유가 흘러넘쳤다.
“폐하께서 결정만 내리신다면 그 기분은 지금 당장 현실이 될 것입니 다.”
반면 울카르 왕자는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입가에는 여전히 여유 로운 미소가 감돌았으나 남색 눈동 자는 칼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황제는 풍 성한 수염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 였다.
“뭐, 그렇겠지. 그대의 제안을 받아 들이는 즉시 변경의 전화가 그칠 테 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폐하!”
루일릭스 2세의 오른편에 자리한 수호경은, 무엄하게도 황제 앞에서 언성을 높인 중년인을 사나운 눈으 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빌람버스 공작은 이미 눈 에 뵈는 것이 없는 듯, 수염을 파르 르 떨며 노성을 토했다.
“지난 세기에 주드빅 3세 대제께서 선대 선제후들과 합의하여 칙령을 내리신 이래, 선제후가 영토를 잃은 적은 있어도 그 위(位)가 쪼개진 적 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허무맹 랑하기 짝이 없는 말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폐하!”
공작의 고함에 가까운 진언에, 루 일릭스 2세는 화를 내거나 불쾌감을 표하는 대신 ‘그렇다는데?’ 하는 표 정으로 울카르 왕자를 향해 양 손바 닥을 내보였다. 이에 왕자는 공작을 돌아보며 차분히 말했다.
“언급한 칙령에 명시된바, 선제후 의 위는 가문에 주어진 것이오. 개 인이 소유가 아니라는 뜻이지. 스트 롬 가문이 가진 선제후 위는 변함이 없을 것이오.”
“개-소리!”
아빌람버스 공작의 불 뿜는 듯한 시선이, 이번에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테오도라 공녀에게로 향했다.
“애당초 저 계집에게 계승권이 있 다는 것부터가 헛소리입니다!”
제 친조카를 살벌하게 노려보던 숙 부는, 그녀를 삿대질하며 황제에게 호소했다.
“스트롬 가문의 전 당주이자 선대 선제후이며, 저의 하나뿐인 형제인 구엘람버스는 숨을 거두기 직전 선 제후 위와 가문의 영지를 상속하기 로 결정했습니다!”
“으-홈.”
“배움이 없고, 잔인무도하고, 병약 한 세 아들 그리고 철부지 어린 딸 대신 영지의 일을 함께 돌봐온 동생 에게 모든 것을 맡긴 것입니다! 가 문을 위해서!”
루일릭스 2세는 흥미롭다는 듯한 얼굴로 턱을 괴고 있다가, 테오도라 공녀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러기 무섭게, 평소의 자애로운 분위기는 내팽개치고 얼음장처럼 얼 굴을 굳힌 테오도라가 입을 열었다.
“……더러운 살인자 같으니.”
“말조심해라, 계집아. 나는 네 숙부 이며, 이미 십수 년 전에 정당한 절 차를 통해 당주가 되었다.”
심호흡한 공작은 냉소를 머금은 채 공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넌 수도서원을 하며 속세 와의 모든 연을 끊었지. 그런데 이 제 와서 계승권을 주장한다고? 제발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 저능아 같은 년아!”
들어본 적 없는 폭언에 테오도라가 꽉 쥔 두 주먹을 부들거리는 사이, 아라모스는 나지막이 아빌람버스를 만류했다.
“부디 말씀을 삼가십시오, 전하. 그 녀는 칼란다리 교단의 성기사이며, 저를 포함한 세 홍의주교에 의해 기 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녀를 향한 비방은-”
“주교나 말씀을 삼가시오!”
홍의주교의 말을 끊은 공작은 차가 운 목소리로 연달아 쏘아붙였다.
“주교가 막아야 할 것은 내가 아니 라 저 계집이오!”
“전하, 그, 계집이라는 단어-”
“이미 십 년도 전에 주께 모든 것 을 바치겠노라 서원한 교단의 성기 사가, 탐욕에 눈멀어 영지를 차지하 겠다고 적에 빌붙고 있잖소! 교계의 지도자로서 이를 만류하거나 처벌할 생각은 않고 멀뚱멀뚱 구경이나 하 고 있다니, 부끄러움을 좀 아시오!”
“테오도라 경이 고백한바, 그녀의 첫 서원은 강제에 의한 것이었습니 다. 그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면 마 땅히 세속의 재판에 기대어 마무리 하는 것이.”
“이제 보니 성기사가 저능아같이 구는 까닭은 다 제 상관을 닮아서였 군! 대체 교회법 어디에 강제로 한 서원은 효력이 없거나 되돌릴 수 있 다는 구절이 있소! 교회법도 제대로 모르면서 주교좌에 앉아있었던 게 요?”
잔뜩 흥분하고도 나름 조리 있게 말을 쏟아내는 공작, 얼굴이 벌게졌 으나 애써 침착하게 답하는 주교, 이런 종류의 말싸움에는 약한 건지 주먹만 부들거리고 있는 공녀, 그런 셋을 흥겨운 기색으로 번갈아 살피 는 황제…….
보다 못한 내가 나서려던 찰나, 울 카르 왕자가 한발 앞서 입을 열었 다.
“내 질녀가 계승권을 주장하는 건 탐욕 때문이 아니오.”
“너는 빠져라, 이 북부 야만인, 불 량배의 후손아!”
공작의 우렁찬 고함에, 왕자는 싱 긋 미소를 지었다.
“혀가 길군.”
“무, 뭐라고!”
“그만 닥쳐라, 무능한 패배자야. 제 반의반도 안 되는 군대를 상대로 형 편없이 패한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입을 여느냐.”
“……이, 이익!” 아빌람버스가 수치심에 말문이 막 힌 사이, 울카르 왕자는 루일릭스 2 세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테오도라의 권리행사는 그녀 자신 의 영리가 아니라 정의를 위한 것이 오.”
“정의라.”
황제는 ‘음, 멋진 말이군’하고 중얼 대며 계속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 였다. 왕자는 공녀를 돌아보며 부드 럽게 달래주었다.
“준비한 바를 말하거라. 밝으신 주 께서 너와 함께하고 계시니 망설일 것 없다.”
“……네.”
장밋빛 입술을 꾹 닫은 채 씩씩하 게 콧김을 뿜은 테오도라 공녀는, 홱 고개를 돌려 아빌람버스 공작을 노려보았다.
“내게 권리가 없다고 했느냐?”
“네년, 감히 당주에게 이 무슨 무 례한-”
“그것을 판단하는 건 네가 아니 다.”
연녹색 눈동자에서 작은 불티가 튀 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 권리를 주장 하고, 너에게 정당한 복수를 가하는 것이 정녕 부정한 일이라면.” 작은 불티가 맹렬한 백색 화염으로 변하는 데에는 한 호흡도 걸리지 않 았다.
째앵!
« Q »
공녀를 중심으로, 신성한 광채가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눈살을 찌푸 리며 신음하는 아빌람버스 공작에 게, 풍성한 금발 위에 빛의 관을 올 린 테오도라가 한 걸음 다가갔다.
“주께서 이 미천한 여종에게 하사 하신 모든 것이 거두어질 것이다.”
“이런 미친, 그게 무슨 개소리-”
“날 보아라. 두 눈 똑바로 뜨고!”
허연 불길에 휩싸여 마치 성서 속 천사와도 같은 모습을 한 테오도라 의 모습에, 공작은 숨을 삼키며 뒷 걸음질을 쳤다.
“내가 탐욕에 눈멀어 거짓을 말하 는 철부지 어린애로 보이느냐.”
“……허, 허윽. 제길-”
“대답하라.”
천사의 두 눈 속에서 무엇을 보았 는지 아빌람버스 공작은 연신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기를 잠시, 창백해 진 얼굴로 뒷걸음을 치다가 엉덩방 아를 찧고 말았다.
그 한심한 모습을 내려다보던 테오 도라 공녀는 조용히 신성력을 거두 었다.
짝, 짝, 짝.
“훌륭하군.”
만족감이 느껴지는 박수와 중얼거 림에 이어, 루일릭스 2세는 넋이 나 간 아빌람버스 공작을 향해 손짓했 다.
“아무래도 경의 역할은 끝난 모양 이군. 이만 물러가도 좋소.”
그 손짓에, ‘용 살해자’ 카모스는 공작의 목덜미를 들어 천막 바깥으 로 휙 던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