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65)
나의 악당들 465화
66. 은왕자(20)
호위기병 몇과 함께 주둔지로 돌아 간 아야넬 자작과 궁중백 루피르투 스, 그리고 황실 서기관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동안 울카르 왕자는 회담장이 펼 쳐진 언덕을 한 바퀴 산책하더니 도 로 천막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테 이블에 멀뚱히 앉아 건너편에 있는 이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이다.
수호경과 원수, 검백은 하나같이 경지에 이른 무인이거나 피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은 군인이라 눈을 맞추 기 부담스러울 텐데, 왕자는 면접관 이라도 된 것처럼 그 셋을 빤히 살 펴보기만 했다.
수호경 파비오는 마치 석상처럼 묵 묵히 자리를 지켰고, 검백 투아셀로 는 슬쩍 북쪽으로 돌아앉으며 저 멀 리 흐르는 강물을 눈에 담았다. 좀 이 쑤시는 듯 엉덩이를 들썩이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얼굴 뚫리겠구만.” 제국의 야전원수, ‘일천 전투의 나 딤’이 못마땅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거, 계속 산책이나 하지, 왜 그러 고 앉아있는 거요?”
나딤은 먼 방계라고는 해도 황가의 일원이며 제국군의 정점에 위치한 지휘관이다. 하지만 그의 말투는 귀 족 지휘관이 아니라 평민 병사나 하 사관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리 살가운 물음은 아니었으나, 울카르 왕자는 반갑게 미소를 지으 며 대답했다.
“귀하와 같은 외국의 고위 인사들 과 만날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풍 문이야 이후에도 종종 듣겠소만, 오 늘 이후 우리가 다시 만날 일이 있 겠소? 언젠가 벽난로 앞에 앉아 과 거를 추억하자면 얼굴이라도 잘 기 억해 두어야지.”
“홍. 또 쓸데없는 소리군. 그리고 아직은 확신할 때가 아닌 것 같소 만.”
“확신할 때가 아니다?”
“그래, 전하와 나는 당장 내일 전 장에서 맞닥뜨리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는 운명이잖소.”
젊은 원수의 말에 그보다 젊은 왕 자가 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귀하는 충직한 군인이 틀림없소. 황제 폐하에 대한 충성과 군무 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제기, 또 비아냥거리는-”
“비아냥이 아니라 귀하와 같은 지 휘관을 가진 황제 폐하가 부러워서 한 말이오. 용맹과 성실을 모두 갖 춘 군인이란 언제나 귀한 존재잖 소.”
나딤이 흉터 가득한 얼굴을 구긴 채 의심 어린 시선을 보내자, 왕자 는 팔걸이를 따닥 두드리며 말을 보 탰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칼을 겨눌 일은 없을 거요.”
“자신감이 넘치시는군.”
“귀하야말로 의구심이 지나친 것 같소만. 대체 무엇이 그리 마음에 걸리는 게요?”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오?”
원수는 의자를 당겨 앉으며 왕자와 눈을 맞췄다.
“밀라놀의 은왕자. 당신은 야심가 요.”
“……당신? 이 씹새-”
왕자는 욕을 퍼부으려는 나를 손짓 으로 만류하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오, 이런. 들킨 모양이군.”
“태연한 척 굴어도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어. 당신은 야심가야. 도저히 만족할 줄 모르는 야심가.”
“끊임없이 위를 향해 발버둥을 쳐 야만 하는 유형의 인간이지. 보잘것 없는 왕자 신분에 만족하지 못해 전 쟁영웅이 되었고, 혼자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걸 알고 군벌을 만들었 어. 앙스트와 오브도르프도, 선제후 자리도 결국 야욕을 위한 발판에 불 과해. 그 욕심은 옥좌에 이르러서야 멈출 테니까.”
나딤의 적개심이 듬뿍 묻어나는 말 에도 울카르 왕자는 태연할 뿐이었 다.
“오랜만에 듣는 이야기인데. 궁정 과 브리스트의 귀족들이 늘 속삭이 던 이야기. 이제는 차라리 정겨울 지경이야.”
“북부인들도 사람 보는 눈은 있는 모양이오. 하기야, 야욕이란 숨기려 야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황 제께서도 그 본모습 정도는 꿰뚫어 보고 계시니, 오늘 이곳에서 당신의 뜻은 이루어질 수 없소.” “그렇단 말이지……. 그럼 내기라 도 해 보겠소?”
“••••••내기?”
젊은 원수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왕 자는 흥겨운 듯 또다시 팔걸이를 두 드렸다.
“그래, 내기 말이오. 황제 폐하께서 내 진언을 가납하여 새 선제후를 봉 하리라는 것에 이 손을 걸지. 귀하 는 무엇을 거시겠소?”
매끈한 은빛 의수가 주인의 뜻에 따라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유명한 라오 가문의 명인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마도구는, 단단한 금속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손만큼이나 유연하게 움직였다.
나딤은 번쩍이는 은빛 의수와 왕자 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을 번갈아 살 피다가 코웃음을 쳤다.
“흥, 됐소. 나는 두 팔 모두 멀쩡 한데 그딴 걸 받아서 어디에 쓰겠 소?”
“그 팔이 언제까지 멀쩡할지는 모 르는 일 아니오?”
“……아주 태연히도 악담을 하시는 군.”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작게 벌리 던 것도 잠시, 그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제국에는 사제가 수도 없이 많아 팔 하나 돋아나게 하는 것쯤은 전혀 어렵지 않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사 양하겠소.”
흥미롭게 흘러가던 이야기가 그렇 게 재미없이 마무리되자, 난 속으로 젊은 원수를 쫄보새끼라 욕하며 천 막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언덕 한쪽에서는 아까부터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만개하는 꽃의 홍의주교’ 아라모스와 테오도라 공 녀가 그 주인공이었다.
홍의주교나 테오도라가 무언가 조 치를 해둔 듯 목소리는 전혀 흘러나 오지 않았다. 그러나 성이 난 듯 얼 굴이 벌게진 노인과 단호한 표정으 로 고개를 젓는 공녀를 보아하니 대 화가 그리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 지는 않았다.
난 가만히 턱을 괸 채 안력을 돋 웠다. 테오도라 공녀의 입술을 읽기 위해서였다.
타고나기를 몸의 색소가 적은 듯 밝은 상아색 피부에 머리카락도, 눈 동자도 색이 옅은 테오도라였지만 입술만은 장밋빛이었다. 덕분에 집 중하기가 더욱 수월하다.
‘……꼭 필요한…… 지상의 법으로 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말이 워낙 빨라 모든 문장을 이해 하는 건 어려웠지만, 대충 맥락 정 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홍의주교 아라모스는 아무리 스트 롬 가문의 피를 이었다고는 해도 엄 연히 칼란다리 교단의 성기사인 그 녀가 지금과 같은 문제에 끼어든 것 에 분노하여 책망하는 중이었고, 테 오도라는 이에 항변하고 있는 것 같 았다.
테오도라 공녀가 주름진 손을 잡고 간곡한 표정을 짓자 홍의주교는 이 마를 감싸 쥐며 푹 한숨을 내쉬었 다.
조금 걱정스러운 상황이긴 했지만 외부로 대화가 새어나가지 않게 조 치를 해둔 것이나, 아라모스의 반응 을 보아 회담이 파투가 날 만큼의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저 멀리 서쪽에서 기병 하나가 달 려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황제군의 주둔지에서 온 기병이 언 덕 아래에 대기하고 있던 호위대의 지휘부에 무언가 소식을 전하자, 제 국기사로 보이는 열댓 명이 대번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소란스럽군.” 투아셀로의 중얼거림에, 파비오는 언덕 아래를 흘긋 살피더니 울카르 왕자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뜻대로 하시오.”
수호경과 검백, 원수가 천막을 나 서 호위대 쪽으로 다가가자 제국기 사 중 하나가 부리나케 언덕 위로 달려왔다. 그는 말로 소식을 전하는 대신 조그만 쪽지를 수호경에게 건 네주었다.
쪽지를 확인한 직후, 수호경과 검 백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나무울타 리에 걸어둔 말에 올라타 언덕 아래 로 달려가 버렸다. 홀로 남은 원수 는 똥 씹은 얼굴을 한 채 천막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울카르 왕자의 질문에, 나딤은 툭 뱉듯이 대답했다.
“황제께서 친림하실 것이오.”
소식이 전해진 지 30분이 채 지나 지 않아, 서쪽 벌판에서 먼지구름이 일어났다. 그렇게 달려오는 병력이 대충 훑어봐도 이천은 훌쩍 넘어 보 였다.
나는 일행과 나란히 서서 언덕 아 래를 살피다가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참나, 호위병은 백 명으로 제한한 다더니.”
“그럼 어떡해. 황제가 직접 오겠다 는데.”
“황제가 뭐? 황제면 약속이고 뭐고 다 씹고 제맘대로 해도 되는 거야?”
“안 될 줄 알았어?”
내가 입을 다물자, 아탈란테는 조 금 긴장된 얼굴로 몰려오는 제국군 을 연신 훑어보았다.
“그나저나, 저 새끼들 좀 봐. 군대 에 아주 돈을 처바른 모양이야.”
그녀의 말대로 황제를 호종하는 호 위병들은 휘황찬란한 위용을 뽐냈 다.
이천여 명의 대군은 하나같이 붉은 색 천으로 짠 전투용 외투를 걸쳤는 데, 외투의 앞섶에 머리 셋 달린 용 을 금실로 수놓아 움직일 때마다 황 금빛이 번쩍였다.
개중 태반은 중장병인 듯 그 귀하 다는 판금갑주를 입고 있었고, 길쭉 한 양손검이나 도끼창을 어깨에 걸 치고 있었다. 일반적인 전투에서 무 적의 방호력을 자랑하는 판금갑옷을 갖춘 만큼, 거추장스러운 방패 따위 는 챙길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언뜻 보면 말에서 내린 기사 일천 명이 행진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중장병을 제외한 일천여 병력 중 절반은 쇠뇌수, 절반은 기병이었다.
흉갑과 사슬갑옷, 쇠투구로 무장한 쇠뇌수들은 권양기가 달린 묵직한 중쇠뇌를 들고 있었다. 게다가 허리 춤의 장검 옆에는, 놀랍게도, 마법의 두루마리가 하나도 아닌 두 장이나 꽂혀 있었다. 무슨 주문이 담긴 두 루마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백여 명이나 되는 인원이 마법의 두루마 리를 두 장씩이나 소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경악스러운 일이 었다.
가장 압권은 기병들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중기병 삼백과 경기 병 이백이 섞인 것 같았으나,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나는 그들 의 정체를 눈치채고 입을 쩍 벌렸 다.
“……뭐야, 씨발. 마법사잖아.”
경기병 부대로 착각할 만큼 안정적 인 승마술을 뽐내는 이백여 기수는, 다름 아닌 전투마법사였다. 가죽갑옷에 판금흉갑으로 무장하고 안장에는 도끼나 도리깨 등 마상용 무기를 걸었지만, 그들은 분명히 마 나를 품고 있었다. 척 봐도 알첸버 그의 마법병 같은 반쪽짜리가 아니 라 제대로 된 전투마법사임을 알 수 있었다. 안정된 자세나 호흡으로 보 아 말 위에서 주문을 외는 것도 문 제가 없어 보였다.
마법기수들이 뽐낸 존재감 때문에 임팩트가 조금 덜하긴 했으나, 삼백 여 중기병은 척 봐도 정예부대였다. 아마 전원이 제국기사겠지. 판금갑 주를 걸친 중장병과 마법의 두루마 리로 무장한 쇠뇌수, 경기병 행세를 하는 전투마법사보다 앞에 서려면 그 정도 수준은 되어야 할 테니 말 이다.
쿵, 쿵, 쿵, 쿵_
산보다 큰 거인이 걸음을 옮기는 것 같은 굉음이 벌판에 울려 퍼졌 다. 이천여 전사들은 북소리도 없이 호령만 듣고도 발걸음을 정확히 맞 추었다. 얼마나 가혹한 훈련이 있었 을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었다.
“하……. 저런 부대를 꾸릴 돈이면 도시 하나쯤은 사겠는데.”
“하나는 무슨. 다섯 개도 사겠다. 홍정 없이.”
나와 아탈란테가 그런 이야기를 나 눌 즈음, 황제의 군대가 언덕 아래 에 멈춰 섰다.
하사관인지 장교인지 모를 자들이 우렁차게 고함을 지르자, 대열의 전 면에 선 부대가 일사불란하게 좌우 로 거리를 벌렸다. 판금갑주와 양손 무기로 무장한 중장병들이 낸 대로 를 따라, ‘신성한 백인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성한 백인대의 선두에 선 자는 두 마리의 일각수, 즉 유니콘이 끄 는 전차(Chariot) 에 타고 있었다. 마 법의 판금갑옷으로 무장한 신성한 백인대의 기수들과는 달리, 그는 자 락이 풀밭에 쓸릴 만큼 기다란 보라 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크고 작은 열두 개의 황금뿔을 원 형으로 둘러 마치 왕관처럼 보이는 투구를 썼으며, 그 아래로 황금빛 가면이 보였다.
“……황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나를 포함한 대다수가 미테르게란 트 제국의 황제, 루일릭스 2세의 위 용에 정신이 팔린 人}이. 홍의주교 아라모스와의 대화를 끝내고 막 언
덕에 선 테오도라 공녀가 숨을 삼켰 다.
“저자가 왜 저기에……
그녀의 신음을 듣고서야, 나는 황 제의 전차를 뒤따르는 자들 중에서 특이한 행색을 한 장한을 발견했다.
사내다운 인상에 수염을 깔끔하게 손질한 중년인이었다. 은빛 흉갑에 자락이 긴 코트, 그리고 은은한 마 력의 광채가 흘러나오는 온갖 장신 구를 보아 지체 높은 귀족이 분명했 다.
근데,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 같 은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대신해, 차가운 미소를 지은 루얀 남작이 중 얼거렸다.
“하, 발 하나는 빠른 놈이라니까.”
“누군데요, 저게‘?”
“아빌람버스 공작이잖소.”
“……예? 아빌람버스 공작이라고 요? 저 아저씨가?”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뜬 사이, ‘오 만한’ 라이암 경이 굳은 얼굴로 울 카르 왕자에게 속삭였다.
“전하, 괜찮겠습니까?”
“무엇이 걱정이오?”
“저자가 뭔가 수작이라도 부렸다 면.”
라이암 경은 물론 아탈란테와 테오 도라 공녀 역시 불안한 얼굴로 시선 을 모으자, 왕자는 쓴웃음을 지어보 였다.
“걱정들 마시오. 황제의 악취미에 휘말리는 건 충분히 고역스럽겠으 나, 그만한 가치가 있을 테지.”
“예? 전하, 그게 무슨.”
라이암 경의 질문이 이어지려던 찰 나. 언덕 아래에서 얼굴이 새하얗게 물든 신하들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 던 황제가 힘찬 구령과 함께 채찍을 휘둘렀다.
두 마리 일각수가 이끄는 전차가 언덕 위로 오르자, 여섯 기수가 황 제를 따라 고삐를 쳤다.
재빨리 황제의 전차를 추월해 선두 로 나선 것은 코트 자락을 휘날리는 검백 투아셀로, 그리고 코뿔소를 닮 았지만 그보다 다리가 길고 덩치가 작은 괴생물체를 탄 거한이었다.
제국의 수호경 파비오는 창을 빗겨 든 채 황제의 전차에 바짝 따라붙었 다. 반투명한 암석질 피부 위에 비 늘이 박힌 로브를 두른 여인과 베일 달린 고깔모자를 쓴 노파, 그리고 아빌람버스 공작은 전차의 뒤를 따 랐다.
유니콘들은 내 바이콘보다 덩치는 작아도 속도는 손색이 없어서, 황제 의 전차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천막 앞에 이르렀다.
“미테르게란트 제국의 선출된 수호 자이시자 정당한 지배자이신 루일릭 스 2세 황제 폐하께 예를 갖추시 오!”
한발 앞서 달려온 투아셀로가 호통 을 치자 천막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국의 젊은 원수, 나딤은 즉시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반면 울카르 왕 자는 미동도 없이 황제를 바라보기 만 했다.
라이암 경과 아탈란테 등이 엉거주 춤한 자세로 눈치를 살피자, 전차에 서 내린 황제는 되었다는 듯 슬쩍 손짓을 했다. 이어서, 기이한 모양의 이목구비를 새긴 황금 가면 아래에 서 듣기 좋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덥군. 일단 해부터 피하세.”
“예, 폐하.”
검백은 애써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 기며 앞장섰다. 수호경은 이전의 석 상 같은 태도 대신 금방이라도 창을 휘두를 듯 온몸을 긴장시킨 채 우리 쪽을, 특히 내 쪽을 빤히 노려보았 다.
다른 이들도 별만 다르지 않아서, 우테콰이에 버금가는 덩치를 자랑하 는 사내는 칼인지 기둥인지 헷갈리 는 뭉툭한 대검을 어깨에 짊어지고 주변을 연신 훑어보았다. 암석질의 여인과 베일을 두른 노파는 짐짓 태 연하게 천막으로 향했으나, 주변의 마나가 휘몰아치는 것으로 보아 나 름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음이 분명 했다.
“자, 들어가지.”
그러거나 말거나, 울카르 왕자는 담담한 얼굴로 천막에 들어서 황제 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나는 전처럼 왕자의 옆자리에 앉으 며 슬쩍 혀를 내둘렀다.
“……살벌하구만. 이거, 얘기는 둘 째치고 숨이나 제대로 쉬겠나.”
별 뜻 없이 뱉은 말에, 황금가면의 틈으로 난 시선이 곧장 내게로 향했 다.
“그대가 적기사인가.”
“예? 아, 네. 그런데요.”
“듣던 대로 미남이군.”
“……아. 감사합니다.”
내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하자, 황제는 건너편에 앉은 우리 측 인원 들을 슥 돌아보았다.
“일단,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양해 를 구해야겠군.”
지고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 러운 말투가 이어졌다.
“먼저, 이 분위기는 부디 이해해 주길 바라네. 내가 멋대로 움직인 탓에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거든. 특히 나의 친애하는 수호경이 말이 야.”
그리 말한 황제는 슬쩍 파비오를 돌아보았고, 그의 우묵한 시선과 눈 이 마주치자 ‘어이쿠’하고 놀란 척 을 했다. 그리고 얼른 고개를 돌리 며 말을 이었다.
“약속을 어긴 것도 유감스럽게 생 각하네. 대륙에 위명을 떨치는 은왕 자와 그의 막하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이리 달려왔는데, 이 고상치 못한 사람을 걱정해 주는 이가 과분 할 정도로 많아서 미리 정해둔 바를 조금 어기게 되었네. 다만, 회담장에 앉는 인원은 관습대로 일곱으로 맞 추었지.”
황제가 자랑스럽게 양손을 펼쳐 보 이기에, 난 울카르 왕자의 눈치를 보다가 눈썹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 다.
“저기,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 면 아홉 명 같은데요.”
말을 뱉자마자 황제의 부하들이 뿜 어낸 살기가 얼굴 가죽을 저밀 듯 쏟아져 왔다.
근데 뭐, 어쩌라고. 사실인데.
건너편에는 홀로 자리에 앉아있는 황제 주변으로 수호경과 검백, 젊은 원수, 대검을 짊어진 거한, 암석질 피부의 여인, 베일을 두른 노파까지 여덟 명이 서 있었다.
내가 이를 지적하자 황제는 준비했 다는 듯 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아라모스 주교는 내가 아닌 주의 뜻을 대변하는 자이니 제외일세. 아 빌람버스 공작은 말할 것도 없지. 내 의견이 어떻든 임의대로 전쟁을 일으키는 위인인데.”
“……아, 예. 그러시군요.”
솔직히 개소리라고 생각하지만, 황 제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말꼬리를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입을 다물 기로 했다.
“좋아. 이제 불만 없나? 그럼 대화 할 준비가 된 것 같군.”
황제는 들뜬 기색으로 착, 박수를 치더니 왕관을 닮은 투구와 황금 가 면을 한꺼번에 벗어 책상에 올려놓 았다.
“자. 앙스트와 오브도르프, 그리고 두 나라의 운명을 결정해 보자고.”
붉은 수염과 시원시원한 이목구비 가 인상적인 장년인, 루일릭스 2세 는 얼핏 순수함이 느껴질 정도로 활 짝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