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73)
나의 악당들 473화
66. 은왕자(28)
숱한 전투를 통해 깨달은 건데, 기 사들은 장비빨을 꽤 심하게 탄다.
물론 기사들의 순수한 기량이 형편 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기사들 중에 서도 꽤 뛰어난 자들은 묵직한 갑주 를 걸친 채 2미터도 넘게 뛰어오르 고, 양손검을 휘둘러 기수와 말을 한꺼번에 자르며, 한 호흡 만에 너 덧 차례의 검격을 쏟아내는 등의 기 예를 선보인다. 그런 걸 보면 기사 들, 그중에서도 소드마스터라 불리 는 이들이 상식을 벗어난 기량을 갖 춘 초인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 가 없다.
하지만, 그래봐야 순수한 인간들이 다.
나처럼 전설적인 혈통을 타고난 것 도 아니고, 우테콰이처럼 신의 가호 를 입은 것도 아니며, 아탈란테처럼 이계에서 힘을 빌려오는 것도 아니 다. 그저 수십 년의 세월에 걸쳐 육 신과 기술을 갈고닦은, 마력 한 줌 다룰 줄 모르는 순수한 인간들인 것 이다.
이러한 한계는 너무나 명백해서, 순수한 육체 능력을 기준으로 소드 마스터들을 나와 비교하면 도저히 상대가 되질 않는다. 그들은 중갑을 걸친 병사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올 릴 수 있는 장사들이지만, 나는 똑 같은 짓을 거대한 전투마에게도 할 수 있으니까.
검백 투아셀로 역시 예외는 아니었 다. 그의 근력이나 지구력, 순발력, 조정력 등은 분명 인간의 평균을 한 참 상회했지만 나에게 위협적일 수 준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만약 루일릭스 2세의 궁정마법사가 설치한 반마력장이 아니었다면 대련 의 흐름이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 다. 검백은 황제의 측근인 만큼 귀 하고 강력한 마도구들을 둘둘 감다 시피 하고 있으니, 그것들이 모두 제힘을 발휘했다면 종합적인 전투력 이 최소 2배, 어쩌면 너덧 배쯤 을 랐을 테니까.
뭐, 그래도 결과까지 바뀌지는 않 았을 것이다. 내 장비들 역시 만만 치 않은데다, 혈조술 봉인은 마도구 제한보다도 강력한 페널티니까.
속으로 대련을 복기하던 나는, 연 단 위에서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고 개를 들었다.
“……좋군. 훌륭해.”
내 옆에 쓰러져 있는 제 봉신은 눈에 뵈지도 않는지, 루일릭스 2세 는 아주 만족스러운 기색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야. 감명 깊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인상적이었 네. 덕분에 눈이 호강했어.”
황제가 그렇게 말할 즈음, 쓰러져 있던 검백이 헉하고 헛숨을 삼키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건, 으. 어떻게.” 그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상황을 파 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 지 않았다.
“치 잇-”
내 칼에 얻어맞고 기절했음을 깨달 았는지, 투아셀로는 분한 숨을 삼키 며 몸을 일으켰다. 씩씩거리며 무어 라 성을 내려던 그는 이내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의 그건, 그리몬스 경 의 기술인가?”
“와.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어찌 그럴 수가. 아무리 은퇴를 했다고는 하나, 제국의 수호경이었 던 분이 적에게 유파의 비기를 전수 했다고?”
경악한 검백에게, 나는 어깨를 으 쓱이며 대답했다.
“전수 받은 거 아닌데요.”
“무슨, 방금 네 입으로 인정하지 않았나!”
“그리몬스 할아버지의 기술인 건 맞는데, 그 어르신이 가르쳐 준 건 아니거든요. 그냥 나 혼자 배운 거 지.”
“뭐라?”
면갑을 열어 올리며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드러내던 검백은 곧 입을 다 물었다.
분명 검은 얼음에 꽤 세게 얻어맞 았음에도 멍 자국이나 생채기 따위 는 보이지 않는다. 몸이 생각보다 더 튼튼하거나, 투구가 아주 제대로 된 물건인가 보다. 물론 둘 다일 수 도 있고.
“……훔친 게로군. 방금 카발니의 비기를 훔친 것처럼.”
“참나, 뭘 또 훔쳤다고까지. 딱히 대단한 비법도 아니고, 대충 보면 따라할 수 있는 거던데요.”
“네놈! 감히-”
재차 성을 내려던 것도 잠시, 검백 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고 는 연단 쪽을 향해 예를 표했다.
“송구합니다, 주군 폐하. 소신의 기 량이 부족하여 그만 추태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허허, 추태라니. 내 평생 참관한 대결 중 단연 한 손에 꼽힐 만한 승부였네. 자, 멋진 분투를 보여준 투아셀로 경에게 모두 격려를 보내 주시오.”
그 요청인지 명령인지 모를 말에 궁중백 루피르투스와 아냐넬 자작을 비롯한 제국의 귀족들이 일제히 손 뼉을 치기 시작했다. 안도한 기색이 역력한 울카르 왕자 역시 등받이에 푹 몸을 기대며 박수를 보태었다.
“절정의 기량을 선보인 두 백작을 치하하며, 그에 어울리는 상급을 내 리겠소. 자, 경들은 이리 올라와서 내 잔을-”
흥겨운 투로 말하며 보석이 박힌 황금 고블렛잔에 술을 따르던 황제 는, 연단을 둘러싼 호위병들 사이에 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 다.
“……카모스 군?”
무심코 뒤를 돌아본 나는, 양손검 을 어깨에 진 중갑병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머리통을 발견했다. 거대 한 체구에 앳된 얼굴을 가진 청년 은, 루일릭스 2세의 호명대로 ‘용 살해자’ 카모스였다.
그의 등장이 의외인지, 황제는 베 일 아래로 수염을 쓸어내리며 질문 을 던졌다.
“허, 무슨 바람이 불어 예까지 나 왔나? 이런 자리는 질색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 적기사랑 붙는다는 얘길 들어서요.”
황제는 물론, 연단 위에 바글거리 는 귀족들과 수많은 병사들의 시선 이 집중되어 부담되는 걸까. 카모스 는 어색하게 몸을 굳힌 채 대답했 다.
“그래서, 어, 구경이나 하려고 나왔 습니다.”
“아하. 헌데 너무 늦어버렸구먼 그 래. 재밌는 장면을 모두 놓쳐 버렸 겠는걸.”
“예. 워낙에 빨리 끝이 나서.”
자존심이 상한 듯 검백의 눈동자가 활활 불탔지만, 카모스는 미처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그 마지막 건 봤습니다. ‘맹금의 비행’이요.” 거구의 사내는 일견 어눌하게 말하 는 와중에도 연신 내 쪽을 살펴보았 다. 나를 향해 보내는 눈빛에 떠오 른 건 분명 호기심과 흥미였다.
“하하, 마지막 장면이라도 건졌다 니 그나마 다행일세.”
카모스의 눈빛을 루일릭스 2세도 읽은 모양이다. 베일 너머의 눈동자 가 잠깐 반짝거렸다.
장난기 가득한 황제가 무언가 수작 을 부리기도 전에, 우물쭈물하던 카 모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 저도 한 번 붙어보겠습니다.”
“……붙어보겠다? 적기사와 말인
가?”
“예, 폐하. 허락을 해주신다면요.”
우물쭈물하면서도 앞으로 나서는 거구의 청년을 내려다보며, 황제는 베일이 무색할 만큼 활짝 미소를 지 었다.
“나야 참관인일 뿐인데, 내게 허락 을 구할 이유가 어디에 있나.”
그러면서 루일릭스 2세는 나를 돌 아보았다. 기대심이 찰랑거리는 노 인의 눈빛에, 나는 속으로 고소를 머금었다.
“뭐.”
아무래도 이 세상에 적응하며 약간 관종기가 생긴 모양이다. 구경거리 가 되는 건 싫지만, 뽐내는 건 꼭 나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저야 좋죠.”
게다가 상대는 또 다른 소드마스터 가 아닌가. 그것도, 무려 ‘용 살해 자’라는 멋진 별명을 가진.
“마침 아쉬웠거든요. 이제야 몸이 좀 풀리려던 참이라.”
내 너스레에 검백은 입술이 허옇게 되도록 이를 악물었다.
“홈, 경의 뜻이 그렇다면야.”
루일릭스 2세는 베일 아래로 수염 을 쓰다듬었고, 울카르 왕자는 다시 금 이마를 감싸 쥐었으며, 수호경 파비오는 우묵한 눈을 희미하게 반 짝거렸다.
마지막으로 근육질의 거구와는 달 리 앳되고 순박한 얼굴을 가진 카모 스는, 가슴을 부풀리면서도 애써 웃 음을 삼켰다.
카모스는 그의 키보다 반 뼘쯤 작 은 거대한 칼을 들고 대련장으로 성 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8, 9미터가량의 거리를 두고 그를 마주한 순간.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어쩐지 어색한 기분에 곧장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나는 검은 얼음을 고쳐 쥐며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좀 전까지 보인 어수룩한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카모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기세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는 더이상 순박한 시골 청년이 아 니었다. 우테콰이에 버금가는 덩치 를 가진, 사냥에 앞서 숨을 죽일 줄 아는 전사였다.
그 위압감은 생각 외로 대단하였으 나, 나는 트롤과 오우거 등 온갖 거 대한 괴물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 다. 고작 덩치 따위에 겁을 먹을 리 가 없는 것이다.
대치가 이어진 지 30초도 지나지 않아, 나는 위화감을 느끼는 이유를 눈치챘다.
“뭐야, 시발.”
온몸을 마도구로 치장한 기사가 반 마력의 영역에 들어오면, 기세가 쪼 그라들기 마련이다. 당연한 소리인 것이, 마도구가 효과를 잃어 신체 능력이 줄어드니 본능을 통해 느껴 지는 기세랄지 위압감이랄지 하는 것 역시도 쪼그라들기 마련인 것이 다.
방금 전에 검백 투아셀로가 그랬 고, 과거 전투 중 반마력의 마도구 를 발동했던 호프컨이 그랬다.
“근데 왜.”
그런데, 눈앞에 선 거구의 청년에 게서는 그러한 변화가 전혀 느껴지 지 않았다.
“후읍,”
내가 어리둥절한 심정에 미간을 좁 힌 사이, 카모스는 미세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거의 동시에, 그는 투석 기로 쏘아 보낸 바위처럼 날아들었 다.
나는 본능적으로 검은 얼음을 들어
올렸고-
쾅
칼인지 기둥인지 헷갈리는 거대한 쇳덩이가 회초리처럼 허공을 갈랐 다. 대검과 검은 얼음이 맞닿은 순 간 충격파에 가까운 굉음이 터졌다.
“그웍- 씹,”
순식간에 뒤로 두어 바퀴쯤 나뒹군 나는,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구우웅-
그 순간 카모스의 대검은 코앞으로 쇄도해 왔고, 난 필사적으로 허리를 비틀었다. 두꺼운 기둥을 닮은 쇳덩 이는 무서운 기세로 가로선을 긋다 가, 물리법칙을 거스르듯 내리꽂혔 다.
“씨팔, 이거 순 미친 색-”
콰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