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515)
나의 악당들 515화
67. 아이스보발트의 영주(8)
에곤이 짤막한 복도를 허둥지둥 지 나쳐 들어선 곳은 일종의 응접실이 었다. 소년은 눈 앞에 펼쳐진 풍경 에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꼭대기 층에 뜬금없이 자리한 응접 실은 아늑한 동시에 호화로웠다.
벽에는 황록색 염료로 물들인 무명 천이 두껍게 발려 있었다. 그 한가 운데 설치된 벽난로의 헐거운 쇠창 살 너머에서 부드러운 불길이 사과 나무와 체리 나무를 천천히 사르는 중이었다.
에곤의 키만큼이나 큰 창문에 드리 운 벨벳 커튼은 난롯불과 촛불에 은 은히 번뜩였고, 오색의 무늬가 조화 를 이룬 융단이 바닥을 빈틈없이 덮 었다.
눈이 절로 편안해지는 색감, 경직 된 어깨를 녹이는 온기, 마음이 편 안해지는 향기, 발밑의 푹신함…….
송구스러울 만큼 아늑한 방이었지 만, 에곤은 새삼스레 긴장했다. 큼직 한 가죽 소파와 그 건너편의 테이블 에 각각 여인이 한 명씩 앉아 있었 던 탓이다.
그들의 면모를 살핀 에곤은 또다시 입을 헤 벌리고 말았다. 두 여인 역 시 세상에 보기 드문 미녀들이었던 탓이다.
“오, 다들 함께 왔군.”
그리 말한 건 소파에 앉아 있던 쪽이었다.
그녀는 무늬가 없는 백색 더블릿에 짙은 갈색으로 물들인 양가죽 바지 를 입고 있었다. 거기에 단추를 끝 까지 채운 상의와 단단한 느낌의 장 화, 장검이 걸린 벨트까지. 그야말로 평복을 입은 기사의 전형과도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녀의 여성스 러움이 더욱 두드러지는 차림새이기 도 했다.
가느다란 발목까지 이어지는 길쭉 한 다리가 그러했고, 둥글게 틀어 올린 백금발과 그 아래로 곧게 뻗은 하얀 목덜미가 그러했다. 개중에서 도 정점은 꽉 조인 벨트 탓에 드러 난 얇은 허리와 품이 넉넉한 와중에 도 대단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흉부 였다.
그 가슴에 얹혀 있는 펜던트의 은 은한 서기를 확인한 에곤은, 여인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태양의 여기수’, ‘칼란다리의 첫 번째 성기사’, ‘기름 부음 받은 자’ 등으로 불리는 테오도라였다.
스트롬 공작가의 적녀인 동시에 모 계로 제오레 왕가의 피까지 이어받 은 고귀한 몸이나, 세 홍의주교에 의해 서임을 받고 세속 신분을 모두 내던지며 더욱 존귀한 지위를 얻은 여인…….
한편, 그런 테오도라가 이곳에 기 거한다는 건 얼핏 기이해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엘 가노어의 수녀로서 올린 순결 서약을 칼란다리의 성기 사가 된 지금도 굳건히 지키고 있는 그녀가 ‘약혼녀들의 저택’의 주민이 라니.
하지만 그녀는 엘 가노어의 신도였 던 방백이 칼란다리로 개심하도록 설득하고, ‘만개하는 꽃의 홍의주교’ 아라모스를 소개하여 세례를 받도록 한 장본인이다. 붉은 영주의 측근이 자 신앙의 인도자로서, 영주관과 가 까운 저택에 머무는 게 꼭 이상한 일만은 아닌 것이다.
“약초 삶는 일에 또 정신이 팔린 줄 알았는데, 직접 안내를 해오셨군. 잘했소, 엘렌 양.” 응접실로 걸어 들어온 엘렌이 옆자
리에 폭 몸을 묻자, 테오도라는 부 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안내요? 요 앞에서 마주친 건데 요.”
“아. 그럼 실험 중에 인기척을 듣 고 나온 건가? 그래, 불러들인 손님 을 기다리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 지.”
“그게 무슨-”
미간을 찡그린 채 무어라 말하려던 마녀는, 정수리를 쓰다듬는 성기사 의 손길에 불퉁한 얼굴로 한숨을 쉴 뿐이었다. 그리고 테이블 쪽을 향해 턱짓을 하는 것이었다.
“나도 차 한 잔 줘.”
“아, 네.”
진즉 일어나 있던 묘령의 여인이 벽난로 옆 선반으로 향했다.
“여기 있는 셋의 차도 부탁하지.”
테오도라의 자상한 연녹색 눈동자 가 경비대장과 중사, 소년에게로 향 했다.
“왜 멀뚱히들 서 있나. 딜런 경, 경도 앉으시오.”
투구를 눌러쓴 경비대장은 슬쩍 고 개를 숙였다.
“자상하신 배려, 감사합니다. 하나 용무가 있는 건 이 소년뿐이니 저희 는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차나 한잔 들고 가시오. 이 오피야 양의 찻잎 우리는 솜씨가 날 로 늘어 이제는 헤일라 양에 버금가 는 수준이니, 이 기회를 놓치면 분 명 후회할 것이오.”
“아으, 테오도라 님-”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던 여인이 쑥스럽다는 듯 앓는 소리를 내었다.
‘저게 그 ‘하프엘프’구나.’
길고 펑퍼짐한 튜닉 아래 맨 종아 리를 드러낸 그녀는 척 보기에도 이 민족임을 알 수 있는 기이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보면 동방 에서 온 것 같기도 했고, 피부에 감 도는 미세한 적갈빛은 누데인의 그 것을 닮았으며, 키는 여느 겔란족 장정만큼이나 컸다.
거기에 길고 가느다란 팔다리, 작 은 머리통과 호리호리한 몸통, 신비 로운 검푸른 색 머리칼까지 더해지 니 왜 그녀가 하프엘프라 불리는지 이해가 갔다. 낯선 인상에 아름다움 이 깃드니 꼭 인간이 아닌 존재처럼 보이는 것이다.
얼굴로만 판단하자면 끽해야 10대 중반 즈음으로 보였으나 에곤의 턱 밑에 이를 만큼 큰 키나 낯선 생김 새, 신비가 어린 눈동자 때문에 좀 처럼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대초원의 주민들은 다 저런 모습 인 걸까?’
소년은 문득 저 먼 서쪽에 펼쳐져 있다는 대초원이 어떤 곳인지 궁금 해졌다. 눈앞의 아름다운 주술사도, 무시무시한 ‘우레거인’도 그곳에서 왔다고 들었다. 어쩌면 대초원은 요 정과 거인들의 땅일지도 모른다.
“거듭 감사하오나, 맡은 바 책무 탓에 여유를 즐길 형편이 못됩니 다.”
“경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 지. 소년은 잘 살펴볼 테니 물러나 도 좋소.”
경비대장과 중사가 예를 갖추고 돌 아서려던 찰나, 테오도라가 얼른 말 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언젠가 말한 것 같소 만, 종종 찾아오도록 하시오.”
“……찾아오시라 함은?”
“코 말이오.”
“아.”
소파에 눕다시피 한 자세로 이오피 야가 건넨 찻잔을 받으며, 엘렌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 치료 좀 해. 맨날 답답하게 그러고 다니지 말고.”
눌러쓴 투구를 지적하는 말에, 딜 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하찮은 일로 공녀님의 시간과 권 능을 갉아먹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보기만큼 답답하지 않습니다.”
“뭐래. 누가 너 걱정해? 보는 사람 이 답답하다고.”
“아.”
심드렁한 얼굴의 마녀를 눈으로 나 무란 성기사는, 경비대장을 돌아보 며 말을 덧붙였다.
“부담 갖지 마시오. 기한을 육칠 개월 정도로 넉넉히 잡으면 하루에 할애해야 할 노력은 별로 크지 않겠 지.”
“예, 알겠습니다.”
경비대장은 모호한 대답을 남긴 채 중사와 함께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홀로 남겨진 에곤은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여기 앉으세요.”
이오피야가 찻잔을 채우며 소년에 게 눈짓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요. 저희는 그냥 포이닉스 님의 부탁으로 확인 을 하려는 것뿐이니까.”
“확인, 이라고 하시면.”
“아, 그게- 이름이 뭐라고 했죠?”
“에곤입니다. 소반할츠에서 온 에 곤이요.”
“그렇군요. 저희가 에곤 님을 이리 로 불러들인 건, 당신의 피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서예요.”
“……피, 말입니까?”
무엇을 상상했는지, 소년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렌은 차를 홀짝이며 테오도라를 돌아보았다.
“어때 보여요?”
“흠, 글쎄.”
딸각, 찻잔을 내려놓은 테오도라가 신중한 얼굴로 소년을 살펴보았다. 그러기를 잠시, 페리도트를 닮은 그 녀의 눈동자가 하얀 빛을 흘리기 시 작했다.
가뜩이나 연한 금색이던 머리칼과 눈썹은 눈동자가 뿜은 상서로운 빛 에 하얗게 물들었다. 그 순간 테오 도라의 얼굴은 그야말로 순백 일색 으로, 마치 상상 속의 천사와도 같 은 형상이었다.
순진한 에곤은 아름다움에 앞서 공 포부터 느꼈다. 뒷걸음질을 치던 소 년은 이내 엉덩방아를 찧었다.
“허, 허억.” 마음의 밑바닥까지 긁어 올리는 듯 한 감각도 잠시, 테오도라는 마침내 ‘진실을 밝히는 눈’을 거두었다. 평 소의 연녹색 눈동자를 되찾은 그녀 는 다리를 꼬며 어깨를 으쓱였다.
“잘 모르겠군.”
“그렇죠?”
“음. 포이닉스 공이 이르길 골만 군과 비슷한 경우로 여겨진다 했는 데, 나는 잘 모르겠소.”
숨을 헐떡거리는 소년을 일별하며, 그녀는 천천히 말을 덧붙였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저 소년의 ‘특별한 선조’가 신성(神W을 품은 존재는 아니라는 거요.”
“일단 발현된 특질은 없어 보여요. 특이한 마력이 느껴지지 않으니 아 니니 이차원의 피가 이어진 것 같지 도 않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에곤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질문하 자, 엘렌의 냉정한 눈빛이 그에게 향했다.
“너. 혹시 가문 설화 같은 거 들은 적 없어?”
“가문, 설화요?”
“조상으로부터 대대로 전해져 내려 오는 이야기 말이야. 뭐, 고조부의 고조부가 암컷 트롤을 부인으로 들 인 적이 있다던가.”
“예, 에?”
소년의 반응에 그녀는 가만히 고개 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멍청한 얼굴 좀 봐요. 트롤의 후예가 확실하다니 까.” 에곤은 멍청히 눈을 끔뻑이다가 질 문했다.
“제 조상 중에 트롤이, 아니, 뭔가 이상한 게 있다는 건가요?”
“적어도 인간은 아닌 존재가 있노 라고, 네 영주가 그러더구나.”
“방백 각하께서요?”
“그래.”
소년을 안심시키기 위함인지, 테오 도라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 덕였다.
“포이닉스 공은 무명 높은 기사인 동시에 경지에 이른 혈조술사로, 사 람과 사람이 아닌 것을 단숨에 구분 할 수 있는 눈을 가졌다. 그런 그가 보기에 너는 순수한 인간과는 거리 가 멀다더군.”
“그런••••••
“미심쩍어 할 필요 없다. 이종족에 대한 포이닉스 공의 안목이나 식견 은 썩 넓고 깊은 편이니. 그는 선조 의 힘과 특질을 발현시킨 존재를 둘 이나 보았거든. 둘 다 거인의 후예 이긴 했지만.”
“흐. 대체.”
이종족의 후예라니.
상상조차 못 해본 이야기에, 소년 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만 끔뻑거 렸다. 그를 부드러운 눈으로 내려다 보던 성기사는 테이블에 앉은 이오 피야를 돌아보았다.
“신성을 품은 것도, 이차원에 뿌리 를 둔 것도 아니니 이제 네가 나서 야겠구나.”
“어……
하프엘프라 불리는 주술사는 동그 랗게 뜬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게, 괜찮겠죠? 형부가 영혼과 관련된 주술은 함부로 부리지 말라 고 하셨는데.”
“포이닉스 공에게는 그저 영혼을 들여다보는 술수에 불과하다고 들었 다만?”
“어, 그렇긴 한데요.”
“강령술처럼 인간의 영혼을 쥐고 흔드는 짓거리라면 몰라도, 관찰하 는 정도는 괜찮다. 후과는 내가 수 습해줄 테니, 마음 놓아도 된다.”
“……그럴까요?”
주술사의 반짝이는 눈동자가 자신 을 향하자, 소년은 숨을 들이켰다.
“잠깐, 저는 전혀 마음이 안 놓이 는데-”
“안심해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오피 야는 어느새 손끝으로 음울한 은빛 의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다.
“금방 끝나니까.”
속삭이는 목소리가 소년의 귓가에 서 메아리쳤다. 아니, 마치 귓속으로 부터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 기 이한 감각에 에곤은 빽 소리를 질렀 지만 그는 자신의 비명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마음 편히 가지세요, 편안하게-”
‘편하지가, 않아!’하는, 악에 받친 고함은 입술 안에서 맴돌 뿐이었다.
발버둥을 치던 에곤이 우연히 하프 엘프와 눈을 마주친 바로 그 순간, 그는 까무룩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