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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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당들 538화
68. 왕도행(11)
텅텅.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듯한 묵직한 노크 소리. 난 미간을 좁힌 채 무거 운 눈꺼풀을 비볐다.
“어으씨, 추워.”
두툼한 솜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 려 했으나, 훅 밀려오는 냉기에 저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찬 공기에 감각이 먼저 깨어나니 몽롱하던 정신도 덩달아 맑아진다.
“우으음.”
가슴팍에 매달리듯 안겨 있던 뭉치 역시 초점 없는 눈을 끔뻑이고 있 다. 이불 속으로 흘러든 냉기 때문 일까, 녀석은 몸을 꿈틀거리며 내게 더 바짝 달라붙었다.
더운 체온과 은은한 과일향, 말랑 한 촉감과 부드러운 살결이 품 안 가득 넘실거린다. 습관적인 손장난 으로 녀석의 등을 척추를 따라 엉덩 이까지 길게 쓸어내리니. 가늘지만 탄력 있는 근육들이 살짝 조여드는 것이 느껴진다.
그 은은한 즐거움에 혈기 넘치는 육신이 즉각적으로 반응하자, 이를 눈치챈 뭉치는 잠이 덜 깬 얼굴로 헤헤 웃음을 흘렸다.
“따뜻해요.”
“난 추워 죽겠다.”
입술을 맞추고 더 끈질기게 엉겨 붙어오는 녀석을 적당히 밀어내었 다. 이제 보니 발치에 놓인 석탄 난 로는 싸늘해진 지 오래였다.
텅텅.
“주군. 기침하셨습니까?”
두꺼운 나무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주의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 을 만큼 작은 소리지만 날로 예민해 지는 청각 덕에 콜의 목소리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기다려. 지금 나간다.”
뭉치는 게으른 나무늘보처럼 내 가 슴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내가 몸을 벌떡 일으키니 맨 살에 닿는 찬 공기에 놀랐는지 얼른 이불 속으로 숨어버렸다.
바지를 꿰어 입으며 살펴보니, 청 동제 난로는 잉걸불마저 사그라진 채였다. 질 낮은 이탄을 쓴 탓에 불 이 금방 꺼진 모양이다.
옆에 놓인 도기 그릇을 들어 석탄 조각을 난로에 얼마쯤 쏟아 붓고 탁 자 위의 나무갑에서 점화 도구를 꺼 냈다. 말굽 모양의 부시와 부싯돌이 부딪치며 연신 불똥이 튀더니 풀어 헤친 새끼줄에 불이 붙었다. 일단 양초부터 켠 다음 불쏘시개를 난로 에 털어 넣었지만, 싸늘한 석탄 조 각은 좀처럼 불을 머금지 않는다.
“이런 씨-”
비록 내가 초인적인 육신을, 아니, 웬만한 괴물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육 신을 얻었지만 여전히 피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바로 갈증과 허기, 그 리고 추위다.
엄밀히 말해 갈증과 허기는 전보다 더욱 가혹해졌다. 평범한 인간의 수 십 배에 달하는 근력, 체력, 내구력 등을 얻은 대가로 섭취하는 물과 음 식의 양도 엄청나게 늘어난 것이다.
물론 연비로 따지자면 탁월한 수준 의 경제성을 자랑한다고 볼 수도 있 겠으나, 하루에 고기만 20킬로씩 먹 어 치우는 자신을 보고 있노라면 괜 히 죄책감마저 들곤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추위로 인한 고 통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강건한 육신에 깃든 냉기에 대한 내성은, 한겨울에 얼음장 같은 호수를 헤엄 쳐도 상쾌함을 느끼게 해주었으니 까.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의 얘기다. 잠에서 깨어난 직후 예기치 못한 냉기가 턱 밑을 파고들면 아무리 나라도 어깨 가 움츠러들고 이가 달달거리는 것 이다.
“아이씨, 짜증 나게.”
검불을 몇 줌이나 썼지만 난로에는 좀처럼 불이 붙지 않았다.
다이얼만 돌리면 온 방을 훈훈히 데워주는 보일러가 사무치게 그리워 지는 순간이다.
지구의 과학기술을 떠올리고 있자 니 나도 모르게 침대 쪽으로 눈이 돌아간다. 이 세상엔 발전된 과학기 술 대신 마법이 있지 않나.
M 99
••••••
너른 침대의 한구석을 차지한 건 둥그런 이불 더미였다. 그 속에 새 끼 캥거루처럼 몸을 말고 있는 엘렌 이 주문 한 마디만 외면 순식간에 방을 데울 수 있다.
……에이, 됐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 없지.
난로 좀 켜달라고 깨웠다가 자신처 럼 알몸으로 이불만 휘감고 있는 뭉 치를 발견하면? 아침부터 피곤해질 게 뻔하다.
물론 뭉치 녀석의 습격이야 지난 2년간 늘 있었던 일이긴 하다. 나와 동침하던 상대가 잠들 즈음, 경지에 이른 은신술로 방에 스며들어와 긴 장감 넘치는 놀이를 즐긴 일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다만 그 뒤처리가 항상 완벽하지는 않아서, 꼬리를 여러 번 밟혔더랬다. 심지어 행위 중에 들킨 적도 몇 번 있고.
아탈란테야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 를 지은 다음 도로 잠들거나 자연스 레 놀이에 합류할 따름이었고, 틸로 리아의 경우엔 칼부림 몇 번 나누고 끝이었다. 헤일라에게는 애초에 들 킨 적이 없고.
반면 엘렌의 반응은 아주 심각해 서, 실내고 뭐고 화염구를 마구 쏘 아댄 탓에 건물이 주저앉을 뻔했다. 이후 녀석의 화를 가라앉히는 데 일 주일도 넘게 걸렸던 것 같다.
잡생각을 하며 계속 부시를 쳐댄 끝에 드디어 난로에 불이 붙었다. 하지만 그 노고가 무색하게도, 완전 히 잠에서 깬 육신은 이미 객실에 스민 냉기에 적응한 뒤였다.
“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타닥.
빼꼼히 문을 열고 내다보니 콜과 스티드먼을 비롯한 몇몇 부하들이 소리 나게 발꿈치를 붙이며 예를 취 했다. 대충 손을 휘저어 답례를 대 신하자, 빡빡이 스티드먼이 헛웃음 을 머금은 채 속닥거렸다.
“주군, 꼭두새벽이라뇨. 곧 식사하 실 시간입니다.”
“ 벌써?”
녀석의 말대로, 문틈 사이로 보이 는 복도에는 부드러운 아침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직 2월 중순도 되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그리 이른 시간은 아니었다.
“어제 주신 임무에 대해 보고드릴 겸 방침을 확인하고자 합니다. 기침 하실 때까지 기다리려 했으나 오늘 안에 도시의 일을 마무리하라 명하 셔서,”
“그래, 일은 어떻게 됐는데?”
콜과 스티드먼이 맡은 임무는 각각 항만과 성문을 폐쇄하고 병력을 모 아 도시의 불순분자들을 솎아내는 일이었다.
간밤이 평안했던 것을 보아 별일 없이 마무리되었겠거니 여기던 참이 었는데, 이렇게 보고를 하겠다고 찾 아온 것이다.
“주군께서 명하신 대로 원수의 권 위를 내세워 병력을 장악하고 성문 과 항구를 폐쇄했습니다. 고분고분 하지 않은 자들이 여럿 있었으나, 누데인이든 겔란이든 수뇌들이 전부 영주성에 갇혀있어서인지 조직적인 저항은 없었습니다.”
“깡패랑 사병들은 다 잡았고?”
“대부분 잡았습니다.”
“ 대부분?”
“산발적으로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자들이 스물너덧 정도 됩니다. 또한 항구를 봉쇄했음에도 묘박지를 벗어 나 도주하려는 자들이 여럿 있었습 니다. 추격하여 대부분 붙잡았으나 소수는 바다에 뛰어드는 바람에 놓 치고 말았습니다.”
“그 정도는 어쩔 수 없지……. 참 나, 내가 뭘 한다고 그렇게까지 도 망을 가냐.”
프로스하펜에 주둔 중인 군대-도 시경비대, 성문수비대, 항만수비대-는 칼날만 전쟁 때 잠시 해체되었다 가 아탈란테에 의해 부활했다.
다시 말해 그 구성원이 겔란족이든 누데인족이든 내 이름이 충분히 통 하는 놈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에게 어필하는 포인트가 칼날만 전쟁에서 쌓아 올린 전공인지, ‘후나피’라는 칭호인지, 이웃한 대영주의 권위인 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 덕으로 근 2천에 달하는 도시 주둔군은 내 권위를 빌린 기사들의 명령에 기꺼이 복종했다.
어쩌다 그런 오해가 퍼졌는지는 모 르겠지만, 내가 영주좌에 앉는 줄 알고 환호하는 병사들도 적지 않았 다고 한다.
겔란족들은 누데인족만 아니면 통 치자가 누가 되든 지금보단 나으리 라고 여겼다. 누데인족들은 아탈란 테의 짝인 내가 잠시 도시를 다스리 는 게 무슨 문제냐는 입장이었고.
“……그게 무슨 개소리래. 헛소문 퍼지기 전에 절대 그럴 일 없다고 공언해둬. 괜히 발목 잡힐라.”
“예. 지휘관과 위사들에게 주군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잡을 만 한 놈들은 다 잡았으면 항구와 성문 을 열어달라는 몇몇 상인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지랄, 누가 들으면 한 달쯤 봉쇄 한 줄 알겠네. 하루만 더 참으라고 해.”
상황이 벌어지는 중 의외의 조력자 도 있었는데, 다름 아닌 프로스하펜 의 항만수비대장 고트롭과 아이네스 백작의 참모 포건이었다.
“아, 맞다. 고트롭과 포건이 있었 지? 지금 어딨어?”
“안 그래도 찾으실 것 같아서 이리 로 데려왔습니다.”
고트롭은 본래 프로스하펜 항만수 비대의 하사관으로, 칼날만 전쟁 중 내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항복한 병사들의 대표 내지는 지휘관이 되어 종전까지 나를 도왔 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내 회유에도 불구하고 프로스하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아탈란 테의 호의로 프로스하펜의 항만수비 대장이라는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 다.
포건은 밀그레스터 가문의 가신으 로, 아이네스 백작의 명령을 받아 프로스하펜과 아이스보발트에 설치 된 가문의 거점 및 교역소를 총괄하 는 자다.
두 도시에서 여러 특혜를 받아 영 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정당하게 거 느린 사병이 200에 이른다. 그럼에 도 최근 도시가 혼란스러워지며 제 거점들만 간수하느라 급급했다나. 그래서 그는 내가 부하들을 통해 명 령을 전하자마자 사병들을 거느리고 도시 봉쇄에 협조했다고 한다.
“이야, 오랜만이야.”
간밤에 병사들과 함께 동분서주하 느라 고생 좀 한 듯, 친위기병의 안 내를 받아 올라온 고트롭과 포건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고, 어쩌면 좋냐. 너는 그새 더 못생겨졌네?”
“……흐흐. 나리는 여전하시군요.”
“그러냐‘?”
문틈으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 자, 고트롭은 손을 맞잡으면서도 달 랑 바지만 하나 걸친 내 모습에 짐 짓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방백 위에 오르시고도 이리 격식 이 없으시다니. 가신들이 꽤 골치 아파하겠군요.”
“왜? 도망간 게 다행이다 싶냐?”
“ 약간은요.”
콜과 스티드먼이 ‘네까짓 게 농담 따먹기를 해?’하는 싸늘한 시선을 보냈으나 고트롭은 아랑곳하지 않았 다. 그 둘이 기사라지만 고트롭도 지금은 나름 높은 지위를 까진 자였 다. 여기서 자신이 눈치를 봐야할 건 나뿐이라는 태도였다.
난 그 당당한 태도에 픽 웃음을 터뜨리며 포건과 악수를 나누었다.
“간밤에 우리 애들이 신세를 졌다 고?”
“신세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제 미 력한 힘이 각하께 도움이 되었다면 저뿐만 아니라 밀그레스터 가문 모 두가 즐거울 일입니다.”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고. 안 그래 도 또 부탁할 일이 있었거든.”
“예? 무슨……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 시, 그는 얼마 전 내가 전달한 서신 을 떠올렸는지 살짝 고개를 끄덕였 다.
“어떤 부탁인지 짐작이 가는군요. 혹시 브랜 경도 관련된 일입니까?”
“그걸 어떻게……. 아, 브랜 경이 밀그레스터의 정기선을 타고 왔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각하. 제가 직접 부두 로 마중도 나갔지요.”
포건은 슬쩍 주변에 모인 내 부하 들과 고트롭을 훑어보고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당장 급한 건 도시의 일 같으니 외부인인 저는 물러나 있도록 하겠 습니다, 각하. 저녁에 다시 찾아뵙지 요.” 내 허락을 받은 포건이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남은 고트롭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 다.
대충 눈치만 봐도 인사나 건네러 찾아온 것 같지는 않았다. 문틀에 어깨를 기대고 있던 난 가만히 그를 내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뭔데? 할 말 있으면 해.”
“저는, 그게……
“그게, 뭐‘?”
“그것이, 영주성에서 도시참사회를 구성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도시참사회?” 의아한 눈빛으로 콜을 돌아보자, 녀석은 내게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 다.
“누데인 장로들과 겔란 유력자들에 게 통치방식을 재검토하라 명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도시참사회를 결성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모양 입니다.”
“그래?”
하기야, 애초에 영주성을 차지하고 있던 누보아 공동체인가 뭔가 하는 조직도 대장로를 중심으로 한 참사 회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거기에 겔 란족까지 끼어 참사회를 만드는 게 그리 이상할 일은 없지.
“그런데, 그게 왜?”
“겔란족들의 대표로 들어가 있는 자들에 대해 들었습니다. 아이먼 님 이야 오랜 세월 이 지방을 다스려온 허크 가문의 당주이시니 그 자격에 손색이 없지만, 다른 놈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 같이 누데인과 별다 를 바 없는 승냥이 떼죠.”
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트롭이 원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도시참사회 의원이 되고 싶은 거 구만?”
“예? 어, 저는.”
“아니야‘?”
“그게. 아시다시피 저는 프로스하 펜에서 십 년 가까이 복무해온 무관 입니다. 가진 건 쥐뿔도 없지만 이 지방과 도시를 위해 몇 번이고 목숨 걸고 싸웠고, 짧게나마 각하의 막하 에도 몸을-”
“아이씨, 또 말 길어지네. 도시참사 회 들어가고 싶은 거 맞지?”
그가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이자, 난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그냥 예, 아니오로 대답해.”
“예, 예. 맞습니다. 저는 도시참사 회의 일원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 알겠어. 나는 한숨 더 잘 니까 이만 가봐.”
“예?”
나는 스티드먼을 향해 턱짓했다.
“이놈 따라서 영주성으로 가. 프리 츠, 그 새끼에게 말하면 알아서 상 황정리 해줄 거야.”
자신이 방금 프로스하펜 도시참사 회의 의석을 얻었다는 사실을 깨달 은 고트롭은 작게 입을 벌렸다. 난 그 멍청한 얼굴에 낄낄 웃음을 흘리 며 객실문을 닫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