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537)
나의 악당들 537화
68. 왕도행(10)
“물론 아무리 교원 신분을 얻는다 해도 운신이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네. 자네가 분해야 할 검호는 엄 연히 제국 서부에서 온 이방인이고, 지금 왕립대학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귀한 핏줄들이 바글거리는 장소니 까.”
나의 침묵을 경청의 자세로 이해한 듯, 에아본 후작은 흥이 난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그래도 두어 달쯤 버티다 보면 경 계는 누그러질 테고, 알게 모르게 친분이 쌓이는 자들도 생기겠지. 그 때 비로소 경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게야. 성 토마시아 수녀원의 담장을 넘을 기회가.”
슬쩍 브랜 경과 오그슐리조를 살폈 으나 동요하는 기색은 찾아볼 수 없 었다.
하긴, 그들이라고 내 목적을 모를 까. 내가 은왕자군을 상속받은 명분 은 첫째가 울카르 왕자의 복수였고, 둘째가 유폐된 유릴 공주의 구출이 었다. 에아본 후작이 두 전령에게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더라도 내가 벌인 그 떠들썩한 선포를 모를 리 없는 것이다.
“……우리 후작님, 생각보다 훨씬 간이 크시네. 이 일, 감당할 수 있 겠어요?”
“왜? 못할 것 같나?”
“후작님이 아무리 왕국에서 손꼽히 는 권력자라도 이건 왕실을 건드리 는 일이잖습니다. 제가- 그러니까, 검호 루도가 왕도에서 개판을 쳐 놓 고 사라져버리면 꽤 무거운 책임을 지셔야 할 텐데요.”
“내가 왜?”
“……예?”
불덩어리 노인은 태연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내가 책임을 지나? 왕립대학의 총장과 학생 대표들에게 경을 소개 한 건 내가 아니라 조비언 백작이라 니까.”
“아니, 하지만……. 후작님의 손때 는 전혀 타지 않았다는 겁니까?”
“왕실과 근왕파가 보기에는 그렇겠 지.”
“……대체 무슨 수를 썼길래요?”
낄낄 웃어대는 걸 보니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오해를 방지하고자 미리 말하네 만, 내가 아무런 위험도 감수하지 않는 건 아닐세. 경이 자카리스에게 붙잡혀 누가 진짜 조력자인지 미주 알고주알 떠들어대기라도 하면 나도 곤란해지거든.”
“그럼 그에 대비한 안배도 있겠군 요?”
“후후, 글쎄……. 지금은 그런 자잘 한 이야기를 떠들 시간이 없네. 내 마법사들이 슬슬 진땀을 흘리기 시 작했거든.”
‘콜비안의 현현’은 수백 킬로미터 의 거리를 격해 사람의 형태와 목소 리를 투사하는,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주문이다.
진귀한 마법 재료들을 갈아 넣는 건 기본이고, 실력 있는 마법사들의 보조가 필요한 게 당연했다. 주문을 유지하는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을 테 지.
“이런 도움이 공짜일 리는 없고. 제게 뭘 원하십니까?”
비술의 유지 시간이 촉박한 탓일 까, 아니면 뜸을 들일 이유가 없어 서일까. 에아본 후작은 조금도 망설 이지 않고 대답했다.
“내 손주를 보호해주게.”
“손주? 오스 말입니까?”
“달리 누구겠나. 내가 경에게 손을 뻗으면서까지 보호해야 할 자손은 딱 하나 뿐일세.”
난 슬쩍 미간을 좁혔다.
“오스 백작이라면 지금 왕립대학에 다니는 중이라고 들었는데요.”
“그렇지. 그 녀석이 왕도로 끌려간 게 벌써 재작년 가을이야.”
순간 노인의 두 눈으로 불길이 몰 려드는 것만 같았다. 저런 걸 두고 쌍심지를 켰다고 표현하는 걸까.
“……아하. 그래서 저를 왕립대학 으로 보내는 거군요? 가까이에서 오 스 백작을 지키라고?”
“왜, 손해 보는 것 같나?”
가만히 팔짱을 끼고 있자니 그는 픽 비웃음을 흘렸다.
“왕립대학에서 담장 두어 개만 넘 으면 성 토마시아 수녀원일세. 경의 입장에서는 그만한 입지가 없어. 게 다가 여차하면 대학에서 도움도 받 을 수 있잖나?”
“무슨 도움이요?”
“경도 잘 알겠지만, 내 손주 녀석 만 거기 끌려간 게 아닐세. 가윈과 아이네스, 유프리아, 바노인 등도 비 슷한 신세지.”
‘황야백’ 가윈은 하이캐슬과 고원 의 영주로 가혹한 수성전을 함께 견 뎌낸 기억이 있고, ‘어린 나가’ 아이 네스는 칼날만을 넘을 때 함대와 병 력을 지원해주었다.
특히 아이네스 백작의 밀그레스터 가문은 이곳 프로스하펜과 아이스보 발트에 대한 지분을 얼마쯤 쥐고 있 는 탓에 현재까지고 깊은 교류를 이 어가는 중이다.
“가윈과 아이네스는 그렇다 치고, 다른 둘은 누굽니까?”
“모른다고? 들어본 적 없나? 바노 인은 코번 백작의 아들이자 데일레 시드 경의 사위일세. 유프리아는 드 리시르 가문의 여식이고. 프릭스 변 경백이 제 아들보다 아끼는 조카 지.”
역시 칼날만 전쟁에서 엮인 인연들 인가.
“그래봐야 다 애들 아닙니까. 제가 무슨 도움을 받는다고.”
“가윈과 아이네스가 평범한 애들 같나? 유서 깊고 강력한 가문의 당 주고, 한 지방을 다스리는 대영주들 이야. 그리고, 다들 애라고 불리기 어색할 만큼 장성했지. 따지고 보면 경도 또래잖나?”
“에이, 또래는 아니죠.”
“내 손주 녀석이 올해로 열아홉일 세. 아이네스가 열일곱, 가윈은 스물 이던가. 경도 끽해야 스물대여섯이 겠고. 그 정도면 또래지.”
정확히 말해, 포이닉스는 스물세 살이다.
하지만 김승수로 산 세월이 30년 에, 김포이닉스로 산 지가 벌써 3년 차다. 굳이 말하자면 서른셋이라는 소리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을 다 밝힐 필 요는 없었다.
“됐어요.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아져 봐야 위험해지기 밖에 더합 니까. 그리고, 다른 녀석들은 얼굴도 모르는데 무슨 도움을 받아요.”
“안면이 문제인가? 그 녀석들도 염 치가 있으면 손을 보태야지. 오든록 과 양 파스트 지방이 울카르 왕자님 께 진 신세가 얼마인데.”
“……뭐, 그에 대한 건 알아서 판 단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십쇼.” 나는 짐짓 귀찮은 기색으로 손사래
를 치다가, 문득 의문스러운 바를 질문했다.
“그런데…… 오스 백작을 지켜달라 고요? 왕립대학은 왕도 한가운데, 그중에서도 영광의 거리에 있잖습니 까. 근데 뭘, 누구로부터 지켜달라는 겁니까?”
“그건 경이 밝혀낼 일이지.”
“예? 그게 뭔 개소- 아니, 엉뚱한 말씀이랍니까?”
하얀 불꽃으로 이루어진 노인은 진 중한 얼굴로 답했다.
“근래 들어…… 아니, 자카리스가 왕좌에 앉은 뒤로부터 왕도의 분위
기가 예사롭지 않네.”
“예사롭지 않다면?”
“징후를 묻는 것이라면 한도 끝도 없어.”
비술을 유지하는 마법사들을 살피 는 것일까, 에아본 후작은 슬쩍 곁 눈질을 하며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영광의 거리에서는 저주인지 주술 인지, 아니면 질병인지조차 알 수 없는 현상이 유행 중일세. 이럴 때 활약해야 할 궁정의 대마법사 켈리 스텔은 대관식 이후로 자취가 묘연 하고, 궁내부장 안토르 백작은 이유 없이 저택이 무너져 본인은 물론이 고 집안 전체가 몰살을 당했어.”
“그게 무슨……. 하나 같이 처음 듣는 이야긴데요.”
“그렇겠지.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 어지고 있는 건 분명한데, 구체적인 정보가 턱 없이 부족해. 오래 전에 심어둔 눈과 귀도 제 밥값을 못하고 있고. 꼭 영광의 거리 전체가 안개 에 삼켜진 것만 같아.”
“오스가 위험한 상황입니까?”
“……확언할 수는 없네만, 이 늙은 이의 촉으로 느끼기엔 그렇네.”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나를 빤히 내 려다보았다.
“왕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 는지는 관심 없어. 오스, 내 손주 녀석만 보호해주게. 그게 내 요구사 항일세.”
“거참……. 구체적인 위험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비싼 값을 치 르는 겁니까?”
“비싼 값? 후흐.”
후작이 코웃음을 흘렸다.
“오스는 내 후계자일세. 멍청하기 짝이 없는 아들놈들과 혈통만 믿고 까부는 손자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제 가치를 증명한 녀석이지. 금은 몇 줌과 사소한 위험부담이 비싼 값 으로 보이나?”
“……뭐, 그렇게 여기신다면야.”
후작의 확고한 의지가 느껴졌기에, 괜히 트집을 잡지는 않기로 했다.
“후작님이 진심이라는 건 잘 알겠 습니다. 그럼 리안 웰에서 뵙도록 하죠.”
“그럴 것 없네. 리안 웰은 위험하 고, 우리가 직접 대면하는 건 더더 욱 위험하니까.” “그럼 어쩌자고요?”
“뮬팅엄으로 오게.”
“뮬팅엄? 마르바의 뮬팅엄이요?”
“그래. 경을 안내할 이들을 이곳에 준비해두겠네.”
또다시 옆을 살핀 에아본 후작은 쯧 혀를 차더니 급히 말을 마무리 지었다.
“‘푸른 둥지’라는 이름의 선술집에 서 찌르레기를 찾아. 그들이 미진한 구석을 설명하고 경을 왕립대학으로 안내할 걸세.”
“어쨌든 직접 볼 일은 없다는 거군 요?”
“왜, 아쉽나?”
난 슬쩍 어깨를 으쓱였다.
“저번에 주신 제안, 지금도 유효하 면 받아들이려고 했거든요.”
“제안?”
어리둥절한 표정도 잠시, 그는 내 가 무슨 말을 하는지 눈치챘는지 웃 음을 터뜨렸다.
“으흐하하, 나는 또 뭐라고! 그건 벌써 물 건너갔지! 너무 늦었네, 경!”
옆에 있던 엘렌이 ‘지금 무슨 소리 를 하고 있는 거야?’하는 표정을 지 었으나, 난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다면야, 뭐. 아쉽게 됐네요.
병력이 궁한 상황이라서요.” “흐흐, 영지를 얻고 나니 알겠지? 그때 내 제안이 얼마나 후한 것이었 는지.”
“네. 땅을 치고 후회 중입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아쉬운 일이 다. 눈 딱 감고 섹스 몇 번 하면 천 오백의 정예병을 얻을 수 있었는데, 그 제안을 대체 왜 거절했을까.
“어딘가 기회가 생기면 꼭 소개해 줌세. 나처럼 경을 높이 치는 노인 네가 드물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러시게.”
내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자, 후작은 유쾌하게 웃었다.
“이만 작별이군! 밝으신 주의 이름 으로, 즐거운 항해 되길 빌지!”
퍼
후작이 멋지게 손 인사를 한 직후 백색의 불덩이가 작게 폭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