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536)
나의 악당들 536화
68. 왕도행(9)
일행이 숙소로 삼은 곳은 ‘황제의 다락방’이라는 이름의 숙박시설이었 다.
프로스하펜의 도심 구역 한가운데 자리 잡은 황제의 다락방은 여관보 다는 살롱 내지는 카페에 가까운 장 소였다. 3, 4층에 크고 작은 고급객 실이 들어차 있긴 하지만 주요 고객 은 2층의 응접실을 채우는 자들이었 다.
아마 이전에는 겔란족 귀족, 부호 들이 주된 이용자들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앙스트를 점령한 누데인족 중에서도 신분이 높은 자들이 정주 민 귀족 흉내를 내고자 단골로 드나 들었다.
“하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경은-아니, 아니지, 백작 각하께서는 여전 하시군요.”
“브랜 경.”
손님들을 모두 쫓아낸 것일까. 한 적한 응접실을 채우고 있는 건 내 일행과 부하들, 그리고 두 손님이 전부였다.
난 호쾌하게 웃으며 나를 맞이한 호인과 손을 맞잡으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경이 여기까지 어쩐 일로.”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후작 각하 께서 서신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만.”
“후작 각하? 에아본 후작님 말입니 까?”
질문을 던진 나는 브랜 경이 대답 을 하기도 전에 대충 사정을 파악했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더니, 그게 경이었군요?”
브랜 경은 몇 대째 앤트럼 지방에 터를 잡아 온 향사 집안의 사내다. 칼날만 전쟁에서 공을 세운 덕에 ‘어린 여우’ 오스 백작의 서임을 받 아 기사로 승작했다. 그의 ‘란카벨 가문’은 당당한 귀족 가문이 되었 고.
가진 영지라고는 오백 가구도 채 되지 않는 고을 하나에 자잘한 마을 몇 개가 전부지만, 자신의 영지 안 에서만은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 는 전형적인 토호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브랜 경의 진정한 가치는 그의 쓸만한 기량이 나 보잘 것 없는 가문, 아담한 영 지, 한 줌의 군대 등에 있는 게 아 니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브랜 경 의 백부에게서 생명의 구함을 받은 이후, 근 10년째 란카벨 가문의 수 호자를 자처하는 노인이었다.
“어르신도 오랜만에 뵙네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던 노인은 나름 백작 나리의 행차임에도 느긋 이 수염만 쓸어내리고 있었다.
“허허, 오래 기다리긴.” 그럴 자격이 있는 노인이다. 왕국 서부를 대표하는 전투마법사이자, 자신만의 주문을 창시해 대마도사의 칭호를 얻은 자가 아닌가. 아무리 내가 제국의 방백이라도 고개 숙여 인사할 짬은 아닌 것이다.
오그슐리조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 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 엘렌 양과 담소를 나누느라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몰랐지 뭐요.”
“……그렇습니까?”
믿기 어렵지만, 먼저 기다리고 있 던 두 손님을 대접한 건 테오도라 도, 이오피야도 아닌 엘렌이었다.
오그슐리조와 나란히 앉아 남방식 과일음료를 홀짝이고 있던 녀석이 나를 슬쩍 흘겨보았다.
“한 바퀴 돌아보고 금방 온다더니, 왜 이렇게 늦어? 족히 두 시간은 기다렸다고.”
“나라고 늦고 싶어서 늦었냐, 갑자 기 귀찮은 일이 생겨서……. 아니, 브랜 경이랑 어르신은 괜찮다는데 왜 네가 난리야?”
콧대 높기가 하늘을 찌르는 엘렌이 다. 어지간한 귀족은 모조리 제 아 래로 보고 상종하지 않는 녀석이니 말 다했지.
전설적인— 아니, 신화에 가까운 대 마법사의 후예라는 자부심과 어릴 적 또래들 사이에서 괄시를 받은 기 억, 그리고 위기와 역경을 통해 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힘을 거머쥔 경험까지……. 그런 것들이 뒤섞이 는 와중에 싸가지를 잃어버렸다고 할까.
그래서인지 엘렌은 은연중 주변인 들의 ‘격’ 내지는 ‘급’을 나누곤 했 고, 이러한 성향은 궁전의 하이마스 터가 된 이후 더욱 짙어졌다.
워낙 속내를 읽기 쉬운 녀석이라, 엘렌이 비슷한 급으로 여기는 게 나 와 헤일라, 테오도라 공녀를 비롯한 극소수임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 았다.
지금 눈치를 보니, 오그슐리조도 그 극소수에 속하는 모양이다.
하긴, 독창적인 길을 통해 경지에 이른 종사(宗師)인데다 엘렌의 나이 에 두세 배에 해당하는 세월을 수련 에 쏟았을 사람이다. 마법사로서 존 중하지 않을 수 없겠지.
혹은 자글자글한 주름과 하얀 수염 을 가진 노마법사의 모습에 자신을 보호하다 목숨을 잃은 스승, 그랜드 마스터 제마르를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엘렌답지 않은 공손하고 살 가운 태도를 보니 이편이 더 정답에 가까운 것 같다.
엘렌의 타박을 한 귀로 흘린 나는 두 손님을 돌아보며 헛웃음을 터뜨 렸다.
“후작님이 사람을 보낼 거라고 하 기에 믿을 만한 전령이나 보내겠거 니 했는데……. 두 분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란카벨이 아리아가를 모신 세월이 벌써 반백년입니다. 저만큼 믿을 만 한 전령이 흔하겠습니까?”
“뭐, 그렇긴 하네요.”
칼날만 전쟁을 함께한 반가운 얼굴 들을 보니, 개판이 된 프로스하펜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단박에 날 아가는 기분이다. 난 궁금증을 미뤄 두고 간단히 회포부터 풀었다.
그간의 안부와 신변잡기, 거품 넘 치는 맥주와 향긋한 포도주가 오가 기를 잠시. 오그슐리조가 본론을 꺼 냈다.
“음, 술이 과해지기 전에 일부터 끝내는 게 좋겠구먼.”
“일이요?”
“그렇소. 그쪽에서는 며칠째 기다 리는 중일 테니, 일단 대화부터 나 눠보시구려.” 영문 모를 소리를 한 노마법사는 끄응, 힘주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한쪽 벽을 차지한 벽난로에 다가섰 다. 그러면서 잿빛 수증기 같은 것 이 담긴 유리병과 그을린 나뭇가지, 반짝이는 가루 따위를 품에서 꺼내 자 난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엘렌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 챈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 서 일어났다.
“설마 그거 ‘영원의 연기’인가요?”
“눈썰미가 좋군. 과연 궁전의 동량 이시오, 엘렌 양.”
“맙소사. 지금 그걸 쓰시려고요?”
“왜, 저게 뭔데?”
내가 팔꿈치로 툭 건드리며 질문하 자, 녀석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말했잖아, 영원의 연기라고. 돈 주 고도 구할 수 없는 귀한 이계의 재 료야.”
“허허, 나도 그런 줄 알았지. 헌데 후작 나리쯤 되니 돈으로 구하지 못 하는 것이 없더군.”
“가루는 백금인가요? 그건 느릅나 무죠? 이계의 불길에 탄.”
“이런.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는 데, 벌써 의도를 다 들킨 모양이군.” 내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도 전 에, 오그슐리조는 꺼낸 재료들을 벽 난로에 털어 넣으며 무어라 중얼거 렸다.
“Ex ignis, ut aromus ayair.”
투두두둑!
그을린 나뭇가지와 반짝이는 가루 가 불에 삼켜지자 요란하게 불똥이 튀었다.
퍼
갑작스럽게 터진 굉음에 오해를 한 걸까, 응접실 문이 터지듯 열리며 무기를 꼬나쥔 부하들이 우르르 쏟 아져 들어왔다.
“주군, 엘렌 님!”
“뭐야! 무슨 소리야!”
엘렌과 나는 불길에 정신이 팔려 있었기에, 놀란 경호대원과 친위기 병들을 만류한 건 응접실 한쪽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골만과 미라 등 의 몫이었다.
이어서 하얗게 물든 불길이 크게 솟구치며 벽난로에서 넘쳐날 찰나, 노마법사의 주름진 손이 작게 손부 채질을 했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꽃 을 누그러뜨렸고, 이를 신중한 눈으 로 지켜보던 오그슐리조는 유리병의 코르크 마개를 뽑아 연기를 쏟아내 었다.
후웅, 후우웅!
연기는 사방으로 흩어지는 대신 하 얀 불을 머금고 허공에서 휘몰아쳤 다. 오그슐리조의 눈높이로 옮겨간 백색 화염은 이리저리 일렁이며 사 람의 흉상얘剛象) 형태로 변모해갔 다.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었기에, 흉 흉한 기세를 뿌리며 들이닥친 부하 들도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놀라기는 일렀다. 웬 중년 인을 모사한 화염의 흉상이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기 때문이 다.
“오, 드디어. 오그슐리조 님이십니 까?”
“달리 누구겠나. 후작님은?”
“지금 바로 모셔 오겠습니다. 잠시 만 기다려주십시오.”
사람의 형태가 흩어지며 도로 일렁 이는 불덩이로 화했다.
‘‘……하.”
숨마저 억누른 채 그 광경을 지켜 보던 엘렌이 신음 같은 소리를 흘렸 다.
“지금 앤트럼과, 리안 웰의 에아본 후작과 이어진 건가요?”
“음, 앤트럼은 아니오. 아마 ‘뮬팅 엄’이겠지. 후작님은 여행 중이거 “이거, ‘불의 현현’이죠? 실전된 주 문인 줄 알았는데.”
경악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오그슐 리조는 쓴웃음을 머금고 수염을 쓸 어내 렸다.
“허허, 엘렌 양이 이 늙은이를 과 대평가하는군. 이건 ‘콜비안의 현현’ 이오. 그런 전설 속 주문과 비교할 바는 못되지.”
“아, 콜비안의 현현……
두 마법사의 대화 속에서 내가 이 해할 수 있는 건 ‘콜비안’이라는 이 름뿐이었다. 지난 세기, ‘백면왕’ 시 절의 대마법사로 마법진에 쓰이는 물감과 캐러멜을 이용한 감속 주문 등 특이한 유산을 여럿 남긴 자라고 들었다.
아니, ‘불의 현현’도 언젠가 들어봤 다. 어떤 네임드가 쓰는 기술 같은 데…….
화르륵-
내가 기억을 되살리기도 전에, 일 렁이던 불덩이가 도로 사람의 형태 를 취했다.
오!” 깔끔하게 정리한 수염과 빗어 넘긴 머리칼, 그리고 곱게 주름진 얼굴이 인상적인 노인이었다. 감탄사를 흘 리며 응접실을 돌아본 그는, 웃음기 섞인 말투로 인사를 해왔다.
“신기한 광경이군. 마치 염계처럼 모두 불타고 있어. 어이, 다들 괜찮 은 겐가?”
“괜찮습니다. 각하는 꼭 불의 정령 같으세요.”
“내가?”
“네.”
아리아가의 늙은 여우라 불리는 앤 트럼의 대영주, 에아본 후작은- 아 니, 그의 모습을 취한 백색 불덩어 리는 신기하다는 듯 제 손을 내려다 보았다. 그것도 잠시, 그는 껄껄 웃 음을 터뜨렸다.
“하하, 들켜 버렸나! 내가 바로 불 의 정령왕 이프리트다! 하찮은 인간 들아, 고개를 조아려라!”
이 할아버지는 여전하구만.
난 그 한심한 모습에 실소를 머금 었다. 그러나 허공에 뜬 불덩이가 폭소하며 가슴을 부풀리는 모습은 썩 위협적인 것이었다.
무기를 내리고 있던 부하들은 도로 전투태세를 취했고, 그들을 말리던 골만 등도 긴가민가한 기색으로 나 와 엘렌의 눈치를 살폈다.
“됐어. 별일 아니니까 다들 나가 봐.”
“주군, 하지만.”
“뭐. 내가 저 조그만 이프리트한테 먹히기라도 할까 봐?”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난 이마를 짚 었다.
“ 나가.”
짜증을 억누르며 손짓하니 그제야 부하들이 물러섰다. 에아본 후작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낄낄거리고 있 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으십니까?”
“그럼, 재미가 없겠나? 그 유명한 적기사의 부하들이 이 몸의 위용을 보고 벌벌 떠는데. 어제 내 잠자리 를 데워준 숫처녀도 그 정도는 아니 었단 말이지.”
내가 가만히 얼굴을 구겼으나, 노 인네는 아랑곳 않고 유쾌한 기색으 로 말을 이었다.
“거,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데 반갑 지도 않나?” “아, 예. 반갑네요. 듣자 하니 이것 때문에 돈깨나 쓴 모양인데. 장난이 나 치려는 건 아니죠?”
“금화 좀 썼지. 경의 죽상도 봤으 니 이 정도면 본전은 쳤다 싶네.”
“허허- 농담일세, 농담.”
표정을 고친 에아본 후작은 짐짓 진지한 투로 말했다.
“나를 믿고 칼날만을 넘는 것 아닌 가? 내용 부실한 서신 몇 통으로 적기사를 끌어들일 수야 없지. 이 정도 성의는 보여야 예의라 여겼 네.” “전권을 쥔 심복 정도가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직접 대화를 나 누는 편이 훨씬 낫긴 하죠.”
브랜 경과 오그슐리조가 온 것 역 시 만족스럽다. 나 한 번 속이겠다 고 아끼는 가신과 가장 강력한 마법 전력을 미끼로 던졌을 것 같지는 않 으니까.
“그럼, 이렇게 귀찮은 일을 벌인 건 정확한 설명을 해주기 위해서겠 죠?”
“바로 그렇네.”
“그럼 한 번 들어보죠.”
난 소파에 몸을 묻으며 후작에게 물었다.
“저를 어떻게 왕도에 들여보내 줄 생각이십니까?”
“아주 간단하네. 내가 경을 위해 괜찮은 신분을 하나 마련했거든.”
“신분이요?”
“미테르게란트 제국의 명문 검가, 오히트 가문에서 수련한 검호일세. 이름은 ‘루도’. 아수베르크 출신이 고, 부와 출세에 대한 욕망이 대단 한 작자지.”
“검호, 라고요? 제국에서, 아수베 르크에서 온 검호?” “그렇네.” 난 말문이 막혀서 가만히 눈썹을 긁었다.
“……제국의 검호가 왕도에 어떻게 들어간다는 겁니까? 아니, 성문은 어떻게 넘는다고 쳐요. 영광의 거리 는요? 영광의 거리까지 들여보내 줄 수 있다고 했잖습니까?”
불덩어리 노인네가 어깨를 으쓱였 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왕립대학에 드나들게 해준다고 했네.”
“그러니까 제국에서 온 검호가 도 대체 어떻게 왕립대학에,”
“교사가 대학에 드나드는 게 이상 한 일인가?”
“예?”
내가 멍청한 소리를 내자, 늙은 후 작은 이글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아수베르크에서 온 검호, 루도는 국왕 자카리스의 칠촌인 조비언 백 작의 신원보증을 받은 뛰어난 기량 의 검술스승일세.”
조비언 백작.
왕실의 방계이자 오크델리 지방의 대영주. 에아본 후작의 어린 부인, 파나벨의 가짜 아버지.
내가 조비언이라는 이름을 더듬는 사이,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칼날만 전쟁을 통해, 제국의 검술 에 대한 관심이 한창 늘어난 요즘일 세. 근왕파의 측근이라 불리는 검호 가 왕립대학의 초대를 받은 것도 이 상한 일은 아니지.”
에아본 후작이 태연하게 늘어놓는 말에, 나는 쩍 입을 벌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