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ess's Shield Protects the Kingdom RAW novel - Chapter (104)
제104화
미다스 후작가 반란 진압의 눈속임을 위해 초빙되었던 각국의 귀빈들은, 급변하는 왕국의 상황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주제넘게 지원이니 뭐니 나대다가, 이 먼 외국 땅에서 재수 없게 칼 맞고 죽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게다가 외교적인 문제 또한 마찬가지. 이렇게 어수선한 상황에서는 가급적이면 몸을 최대한 낮추고 웅크리고 있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었다.
그 말인즉, 대부분의 귀빈들은 요 며칠간 일어났던 왕가와 후작가 사이의 내전 때문에 자국으로 돌아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었다.
즉, 나 외에도 각지에서 몰려온 귀빈들 또한 베르티 내에 있다는 말이었다.
미다스 후작은 이들에게 새로운 국왕의 즉위식에 참석하여 증인이 되어줄 것을 청했다.
이미 필라도르 왕국의 최고 권력자가 된 미다스 후작이다.
굳이 후작의 심기를 거슬러 필라도르 왕국과 외교적으로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싶은 귀빈은 아무도 없었기에, 모두들 큰 반대 없이 후작의 청을 승낙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 내 옆에, 아리아 폰 웬디널이 앉아 있는 이유였다.
“…….”
“…….”
“…얼굴 뚫어지겠습니다, 영애. 왜 자꾸 그렇게 바라봅니까?”
참다못한 내가 아리아에게 물었지만.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예요, 예?”
돌아오는 것은 핀잔뿐이었다.
“거참, 일이 좀 있어서 살짝 나갔던 것뿐이라니까요.”
“무슨 일이 얼마나 조금 있었으면 왕세자 살해 혐의를 입을 수가 있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아리아는 내게 마구 쏘아댔다.
“뭐 잘 해결돼서 즉위식도 하고 있잖아요. 아니, 그 전에. 영애가 왜 이렇게 잔소리를 하는 겁니까?”
내 말에 뜨끔했는지 아리아가 짧은 침묵 후 얼버무렸다.
“…공자랑 같이 왔으니까, 혹시 내가 쓸데없는 오해를 살지도 모르잖아요.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요?”
제법 고초를 겪어 서러웠는지, 얼굴이 꽤나 붉었다.
음, 사과라도 해둬야 할까.
“그건 내가 미안하게….”
빰빰빰빰빰-
사과를 하려는 찰나, 즉위식의 시작을 알리는 트럼펫의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지금부터! 돌아가신 선왕 전하의 뒤를 잇는 즉위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왕성의 모든 일을 총괄하던 총집사가 크게 외치자, 붉은색 양탄자가 길게 바닥에 늘어졌다.
킹 오브 로드(king of road).
왕의 길을 상징하는 붉은 양탄자의 위를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 저 옥좌 위에 앉으면, 비로소 진정한 왕위 후계자가 된다.
양탄자의 끝에 서 있던 미다스 후작을 보자, 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검가와의 식량 경합에서 이기기 위해 제시했던 마나 연공법 하나가, 걷잡을 수 없는 태풍으로 성장하여 결국 필라도르 왕국의 역사마저 바꾸게 되었다.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선택이 있을 것이고, 그때마다 일이 어디로 튈지를 모르니 나 역시 조금은 걱정도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선택하고 또 바꿀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 결국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로 가는 단초가 될 테니까.
짝짝짝짝짝!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미다스 후작은 킹 오브 로드의 거의 끝에 다다랐다.
그리고 바로 그때.
후작이 양탄자의 위를 끝까지 걷지 않고 옆으로 빠졌다.
후덕하고 옆으로 퍼진 미다스 후작이 옆으로 빠지자, 비로소 가려져 있던 왕위 계승자가 옥좌까지 세 걸음만 남겨두고 있었다.
미첼 칸 필라도르.
베르사유와의 왕위 경쟁에서 밀린 비운의 일공주.
베르사유가 제국의 도움을 받아 왕세자로 책봉된 이후, 정략적으로 결혼하여 사용될 외교상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그녀가.
오늘, 즉위식의 대상이었다.
며칠 전.
몽마르트 국왕의 시신 앞에서 생각에 잠겼던 미다스 후작은 결심에 찬 상태로 입을 열었었다.
“…미첼 공주님을 다음 국왕으로 책봉하도록 하지.”
“후작님께서 직접 왕위에 오르지 않으시는 겁니까?”
필라도르 왕국의 나일과 베르티를 모두 집어삼킨 지금이라면, 왕위에 오른다 하여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현 상황에서 누가 감히 후작에게 반기를 들 수 있겠는가?
하지만 후작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난 겁이 많은 사람이야. 지금 여기까지 온 것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판국일세.”
후작이 자신의 떨리는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물며 왕위에 오른다니. 왕가를 따르는 귀족들이 정당한 후계자도 아닌 나를 받아들일 리가 없네.”
어림도 없다는 듯이 손사래를 친 미다스 후작이 착잡한 눈길로 쓰러진 몽마르트 국왕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선왕 전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지 않았나. 이 왕국을 제국에 넘기지 않아 고맙다고. 그렇다면 그 뜻을 따라야지.”
망토를 펄럭이며 방향을 튼 미다스 후작은 그길로 미첼 일공주를 옹립하기 위해 움직였었다.
“필라도르 왕가와 미다스 후작가는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사이. 견제 없는 독재는 통제 불가능한 마차나 다름없다네.”
‘의외였지.’
사실 꽤나 놀랐었다.
미다스 후작이 그런 올바른(?) 선택을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으니까.
“세상사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설마 미첼 공주가 다음 국왕의 자리를 이어받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리고 그 느낌은 나만 받은 것이 아닌 모양인지, 아리아 역시 비슷한 소감을 이야기했다.
“오히려 잘된 일이지요. 이미 불타 죽은 베르사유 일왕자는 음험한 속내가 있다는 평이 많았지만, 그에 반해 미첼 일공주는 사려 깊고 배려심 많은 성정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니까, 아마 훌륭한 통치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다음 세대에서야말로 필라도르 왕가가 미다스 후작가를 추월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리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미첼 일공주, 아니 미첼 칸 필라도르 여왕의 머리에 오색찬란한 왕관이 씌워졌다.
이윽고 뒤로 돌아선 미첼 여왕이 큰 소리로 외쳤다.
“선왕 전하가 그러하였듯이, 나 또한 이 나라를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노라!”
확성 마법의 덕인지, 미첼 여왕의 선언은 수도 베르티 전역을 향해 울려 퍼졌고.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왕도민들의 우레와 같은 환호 소리, 그리고 박수가 광장 전체를 뒤덮었다.
미다스 후작은, 그 가운데서 가장 열성적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 * *
얼마 전 왕성에서 벌어진 전투의 흔적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어전.
“카르비어트 백작가의 제롬 공자, 이번 일을 수습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지요?”
공주에서 여왕이 된 미첼은 나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가 아니었으면 왕국에 무수히 많은 희생과 미다스 후작가라는 봉신 가문을 잃을 뻔했어요. 또한, 제국에 이 나라를 빼앗겼을지도 모르죠.”
사실은 나라를 빼앗기는 수준이 아니라 왕국 연맹 전체가 몰락하지만 그것까지야 말할 필요는 없겠지.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공자, 혹시 무언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세요. 가능한 선에서 무엇이든 들어 드리겠어요.”
내 덕(?)에 왕위에 오른 탓인지, 미첼 여왕은 내게 호의가 가득했다.
그나저나.
‘원하는 거라.’
올리비아 영지로 이전했을 때를 대비한 농법과 철광석은 이미 미다스 후작에게 약속받은 상태.
특별히 왕국에서 더 받아갈 만한 것은 없었기에 무엇을 요구할지 잠시 고민하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 혹시 이 열쇠의 보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호주머니에서 몽마르트 국왕이 서거하기 직전, 내게 주었던 작은 열쇠를 내밀었다.
“그건…?!”
열쇠를 본 미첼 여왕과 미다스 후작의 눈이 커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열쇠의 정체는 필라도르 왕궁 보고의 사용권이었으니까.
몽마르트 국왕은 죽기 직전 내게 이 열쇠의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왕성 어전에서, 다음 국왕이 된 자에게 이 열쇠를 보이라고.
그리하면 왕궁 보고를 한 번 사용할 수 있으리라고 말했다.
‘필라도르 왕성까지 찾아올 일이 얼마나 있겠어. 그냥 있을 때 써먹어야지.’
보고의 문을 열 수 있는 만큼, 어지간한 공을 세워서는 받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열쇠였기에. 저 둘의 눈이 저렇게 휘둥그레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미첼이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롬 공자라면 그 열쇠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죠. 허가하겠어요. 왕궁 보고를 열도록 하지요.”
내가 한 개고생이 빛을 발했는지, 미첼은 선선히 보고를 개방하는 데 승낙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아 참, 거기에 하나 더.”
그걸로 끝인 줄 알고 인사를 했지만, 미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쩔렁!
미첼에게 내밀었던 열쇠는, 두 개가 되어 내게 돌아왔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셈은 정확해야지요. 나라 안에 암약하던 매국노를 처리한 것이 첫 번째 공이요, 이 나라의 왕실과 백성을 지켜준 것이 두 번째 공입니다. 모두 왕궁 보고를 개방하기에 충분한 공이지요.”
나를 바라보며 빙긋 웃은 미첼이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내밀었다.
“왕궁 보고에서 두 가지 물품을 꺼내오는 것을 허락하겠어요. 자세한 규칙은 문지기에게 들으실 수 있을 거예요.”
‘세상에, 이게 웬 떡이냐?’
개고생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말을 마친 미첼 여왕이 옥좌에 몸을 묻었다.
명백한 축객령의 제스처.
“감사합니다, 전하.”
나는 그녀의 마음에 바뀔까 두려워 얼른 인사를 마친 후 어전을 빠져나갔다.
제롬이 어전을 빠져나간 자리.
옥좌에 몸을 묻었던 미첼이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설마 베르사유, 그 개자식의 병신 짓거리를 막은 공자가 저렇게 어릴 줄은 몰랐네요.”
그러고는 미다스 후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공자가, 예전에 미다스 후작한테 식량을 탈탈 털어갔던 그 공자가 맞죠?”
“허허. 예, 맞습니다. 저 친구가 저희한테 자기네 마나 연공법을 주고 가져갔었죠. 그래서 이번에 큰 홍역을 치를 뻔했지만요.”
미다스 후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실, 제롬이 나일에 방문하지 않았다면 미다스 후작은 돈 몇 푼을 손에 더 쥐는 대신 무력을 손에 쥘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미다스 후작이 무력을 쥠에 따라, 그에 조급함을 느낀 베르사유가 신성제국을 끌어들이는 무리수를 펴게 되었고.
그 결과, 지금 미첼이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이니까.
“후작님께서 절 여기 올려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아시죠?”
“하하. 물론이지요, 전하.”
미다스 후작이 살짝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공식적으로 제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 해프닝이었던 걸로 종결만 지어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계속해서 왕가에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좋아요, 그렇게 거래 성립하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미첼에게 미다스 후작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이제 서로 간에 어지간하면 간자는 밀어 넣지 마시지요. 밥 먹을 때도 불편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정말.”
“흐음, 난 그게 더 좋던데?”
“…….”
“농담이에요, 농담.”
“…농담이라도 끔찍합니다, 전하.”
미다스 후작은 장난으로라도 생각하기 싫은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지요.”
“그럼요, 후작. 앞으로도 왕가에 대한 충성을 부탁해요.”
정치적 입장을 위해 대타협을 이룬 두 위정자들은 서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왕궁 어전을 빠져나온 나는 곧장 왕궁 보고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 피곤한 일정이었어. 빨리빨리 챙겨서 돌아가자.’
이미 다른 나라에서 온 귀빈들도 즉위식이 끝난 후 대부분 떠날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다들 한가하게 놀고먹는 이들이 아니었으니,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함이리라.
나 역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올리비아 영지를 하사받을 때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2년.
그 안에 모든 준비를 끝내야만 했다.
베스킨은 블리자드 기사단과 함께 해전을 대비한 훈련을 날마다 호수에서 진행 중이었고.
살라딘은 지금도 아마 미미와 네네에 요상한(?) 장치를 덧붙이며 수련 중이겠지.
사실 단순히 올리비아 영지를 받기 위함이라면, 대흉년의 시기에 곡식을 구해온 것과 이번 임무에 대한 공로면 차고도 넘칠 일이었다.
하지만 영지를 하사받기 전에 최대한 많은 영지와 왕국들과의 관계를 좋게 만들어 두어야만 했다.
그 외교력은 차후, 나의 힘이 될 테니까.
‘남은 2년간은 어느 곳에 힘을 좀 써볼까?’
“여기 있었군.”
왕궁 보고로 걸어가며 다음 구상을 하고 있는 내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
고개를 들어보니, 강렬한 붉은 머리의 존재감을 뽐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세트 라 불칸.
미래의 태양화(太陽火)라 불릴 남자.
그자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이번, 필라도르 왕국 내전을 네가 거의 조율해냈다 들었다.”
“뭐, 꼭 그렇지만은 않지만, 열심히 하긴 했죠. 한데요?”
“그런 네 실력을 믿고, 부탁할 것이 있어 찾아왔다.”
처억!
“부디, 우리 은사(恩師)님을 도와주길 바란다. 너라면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군.”
오만하기 그지없는 세트가 허리를 숙이며 내게 말했다.
나는 잠시 말없이 이 덩치 큰 남자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세트 라 불칸.
불칸 후작가의 차남.
오만하며 개차반인 그가, 나에게 부탁을 한다라….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군.’
눈앞에 싱싱한 먹잇감이 있다면, 잡아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