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ess's Shield Protects the Kingdom RAW novel - Chapter (103)
제103화
넓디넓은 지평선.
날이 선선해짐에 따라 노랗게 익어가는 곡식들은 드넓은 들판을 황금빛으로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농민이든, 지나가던 여행객이든 그 장관을 보고 있으면 절로 기분이 좋아질 만한 따사로운 풍경이었지만.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축조된 성 위에 있는 위정자만큼은 그 풍경을 보고도,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모자라다.”
위정자는 이 나라의 왕이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고결한 존경과 가장 많은 것들을 차지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왕.
하지만 이 왕국은 오랜 세월, 그 당연한 일을 해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이 왕국의 당대 왕으로 군림하는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성벽의 창문에 기댄 위정자의 손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비록 나의 대에서는 불가능했지만….”
그러나 주름이 알려주는 세월의 흐름이 무색할 정도로, 위정자인 노인의 눈에는 불같은 욕망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내 후대에는 반드시 왕가가 우뚝 서게 할 것이다.”
노인은 들판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왕이, 왕으로서 존재하는 나라를 만들지니.”
* * *
몽마르트 국왕의 도주를 우려하여 서둘러 달려온 것이 무색하게, 국왕은 자신의 자리에 담담히 앉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는가.”
오히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다.
“자네들이 이곳에 왔다는 말은, 제국에서 파견 나왔던 리비아 대주교가 패배했다는 뜻이겠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전하.”
내가 대표로 나서 국왕의 말에 답하자, 국왕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네는, 이케니아 왕국에서 온 친구군. 카르비어트 백작가의 삼남이라 하였던가?”
“맞습니다, 전하.”
“후후! 우리 필라도르 왕국이 오랜 세월 계획한 계략을 깬 자가 설마 자네와 같은 애송이일 줄은 몰랐군.”
내 대답에 몽마르트가 허탈하다는 듯이 의자에 등을 묻었다.
“이리 와서, 편히 앉으시게. 어차피 후작이 도착할 때까지 딱히 할 것도 없지 않은가?”
나는 몽마르트 국왕의 제안에 대답하는 대신 마크를 바라보았다.
“공자님, 저는 이 앞을 지키며 후작님께 편지를 보내러 가 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마크의 의견에 동의했다.
몽마르트 국왕과 마주 앉는 나를 향해 국왕은 손수 차를 대접했다.
후룹!
“음? 들게나. 독 따위는 타지 않았으니.”
왕성을 제압당한 왕치고는 지나치게 평온한 태도였다.
“…전하, 외람된 말씀이지만. 혹시 지금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계신지요?”
엊저녁, 성벽 앞에서 편안하게 미다스 후작과 이야기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어 그러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국왕의 믿는 구석인 제국의 끄나풀들은 모두 처리했다.
그 믿는 구석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이런 여유라니.
‘급변한 상황에 압박을 느낀 나머지 미친 건가? 아니면, 혹시 마지막 한 수를 감추어두고 있나?’
경계를 늦추지 않는 나를 향해 국왕이 말했다.
“음? 당연히 알고 있다네. 원군으로 왔던 제국의 끄나풀들도 몽땅 도망쳤고, 이제 남은 건 미다스 후작이 왕성에 나타나 내 머리채를 끄집어 잡은 채 끌어내리는 것뿐이지. 한마디로 좆된 상황 아닌가?”
정확하다. 할 말이 없을 만큼.
“…잘 알고 계시는군요.”
이런 멍청한 대답밖에 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후룹!
“…….”
“…….”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 끝에 내가 먼저 입을 열려 했다.
목마른 놈이 우물 파듯이, 궁금한 놈이 물어보는 게 이치에 맞았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몽마르트 국왕의 입이 조금 더 빨랐다.
“궁금한 모양이군. 내가 왜 이렇게 평온한 것인지.”
“…솔직히 말하면, 그렇습니다.”
딸칵!
찻잔을 내려놓은 몽마르트 국왕이 되레 나에게 물었다.
“어디, 자네가 한번 맞혀 보겠는가? 똑똑한 아들놈의 계획까지 모두 망가뜨린 자네라면 분명 알 수 있으리라 보네만.”
수수께끼와 같은 말이었다.
믿고 기대었던 제국이 물러난 지금, 몽마르트 국왕에게 더 비빌 것이라고는 없을 텐데….
아.
“…전하께서는, 제국을 끌어들이는 것에 반대하셨군요.”
몽마르트 국왕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총명하군. 도대체 어떤 자가 자네를 보고 벌레라 평했는지 모를 일이야.”
“…딱히 지금은 아무도 벌레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눈가를 찌푸리며 대답하자 몽마르트 국왕이 유쾌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후후후! 이런, 이런. 내가 실언을 했군. 사과하지.”
하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힘이 없어 보였다.
“자네가 추측한 대로야. 본 왕은 신성제국과 손을 잡는 것에 반대했다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은 베르사유 일왕자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필라도르 왕가와 후작가 모두를 끌고 갈 수도 있을지 몰랐다. 하나, 몽마르트 국왕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닐세. 나 역시 후작가를 누르고 필라도르 왕가를 진정한 왕가로 우뚝 세울 생각은 있었으니까. 하나.”
갈증이 심한지 몽마르트 국왕은 계속해서 차로 목을 축였다.
“내가 구상했던 왕국은, 왕이 왕다운, 왕이 우뚝 서는 국가일세. 신성제국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괴뢰정부라니, 생각하기도 싫군.”
결국 이런 말이었다. 몽마르트 국왕도, 베르사유도 필라도르 왕가가 우뚝 서길 바란 것은 분명했다.
하나, 그 방식에서 아주 큰 차이를 보였던 것뿐.
어떻게든 자력으로 일어나려 한 몽마르트 국왕과 달리, 베르사유는 외세의 손을 잡는 것을 택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외세의 손을 말이다.
“녀석이 왕세자가 되었을 때까지도, 난 눈치채지 못했어. 나라의 근본이라는 놈이, 설마 왕국 주적의 손을 잡았을 줄이야….”
쓴웃음을 짓던 국왕의 입가에서 한 줄기 핏물이 흘렀다.
“커헉!”
“!?”
급변한 몽마르트 국왕의 안색에 내가 일어나 그를 부축했지만, 국왕은 나의 손을 거부했다.
“이, 이미 독에 중독된 상태야. 몹쓸 후레자식 놈이 지속적으로 해독약을 주지 않으면 발작이 되게끔 만들어진 독이지. 흐흐. 그놈, 권력 다툼 하나는 아주 제대로 배웠어.”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음에도 몽마르트 국왕의 안색은 편해 보였다.
“후후! 와, 왕가를 바로 세우지는 못했지만. 이 나라가 제국의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꼴은 보지 않고 가니. 편히 갈 수 있겠군. 아 참, 자네.”
앉은 채로 잠시 품을 뒤적이던 몽마르트 국왕이 내게 작은 열쇠를 던졌다.
“이건…?”
“가져가게나. 비록 반란군 편에 선 것은 괘씸하지만 이 땅이 제국의 손에 넘어가는 것은 막아 주었으니, 그 보답일세.”
몽마르트 국왕은 나에게 열쇠를 사용하는 법을 알려준 후, 왕성 창밖에 보이는 베르티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너른 들판에는 곡식들이 익어가고 있었다.
“매, 매번 보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로다. 이 땅의, 제대로 된 군주가 되고 싶었건만. 아쉽도다… 아쉬워.”
몽마르트 국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황금빛 들판을 바라보던 상태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미다스 후작이 도착하기 1시간 전의 일이었다.
* * *
밤새 왕성에서 벌어진 전투, 그리고 리비아가 펼쳤던 신성 마법 등등 일어난 소란으로 왕도의 국민들은 잠에서 깨어난 지 오래였다.
“무, 무슨 일이지?”
“왕성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미, 미다스 후작군인가?”
이런 소요는 베르티의 성벽까지 전해졌고.
마크를 필두로 한 후작가의 기사단은 왕성의 기사, 병사, 그리고 사용인들을 포박한 채 성벽으로 향했다.
“전쟁은 끝났다! 더 이상의 무의미한 저항을 멈추고 성문을 열어라!”
“웃기지 마라! 네가 누군 줄 알고!”
“자, 잠깐. 저분들, 얼마 전 복귀하신 근위기사단분들 아닌가?”
“저, 정말?”
후작가의 기사들의 말을 믿지 못했던 이들이 잠시 반발했지만, 근위기사단이 진짜로 포박된 것을 확인하자 그 또한 금방 잦아들었다.
크르릉!
성문이 열리고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왕도로 입성한 미다스 후작은 곧장 왕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내 마주할 수 있었다.
수십 년간 보필해왔던 주군, 몽마르트 국왕의 싸늘한 시신을 말이다.
“국왕 전하….”
미다스 후작이 천천히 의자에 앉아 있는 몽마르트 국왕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후작의 눈빛은, 무어라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감정을 담고 있었다.
“…혹, 국왕 전하께서 남기신 말씀은 없던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괘씸하나, 이 나라가 신성제국의 괴뢰정부가 되지 않게 해준 것에 감사하다 하셨습니다.”
“그런가….”
미다스 후작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가만히 몽마르트 국왕의 시신을 바라보던 미다스 후작이, 국왕의 얼굴에 손을 대었다.
국왕의 얼굴이 조금 더 밝고 편안한 미소를 띠도록 말이다.
“…자네라면, 내가 어찌하였으면 좋겠나?”
“그거야 후작 각하께서 정하실 일이지요.”
나는 후작의 말에 냉정할 만큼 명확히 선을 그었다.
여기서부터는 필라도르 왕국 내부의 일이었다. 내 한마디 첨언조차 내정간섭이 될지도 모르는 일.
따라서 이 일을 어떻게 마무리할지는, 전적으로 미다스 후작이 정할 일이었다.
“그렇지….”
후작 또한 그 사실을 알기에, 저렇게 금방 수긍하는 것이고 말이다.
“…….”
눈을 감은 채 사색에 빠진 후작은 잠시 후 눈을 떴다.
그 눈에는, 확고한 결심이 어려 있었다.
수도, 베르티의 중앙 광장.
거대한 십자가의 중앙에 한 남자가 꽁꽁 묶여 있었다.
남자의 주변에는 수많은 왕도 시민들이 몰려와 거센 야유를 보내며, 돌과 계란 따위를 던지고 있었다.
“우우! 죽여라!”
“아버지를 죽이다니!! 짐승도 더러워서 먹지 않을 놈이다!!”
“태워라! 태워라! 태워라!”
군중은 정제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악의(惡意)를 뿜어내며 남자를 속히 처형할 것을 요구했다.
십자가의 바로 아래 서 있던 미다스 후작은, 그런 군중들의 악의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미다스 후작님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란의 수괴로 왕도 시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후작은, 지금 시민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고 있었다.
“모두 조용!”
음성 확장 마법에 실린 후작의 목소리는 멀리멀리 뻗어 나갔다.
웅성거리던 광장이 후작의 말에 조금씩 조용해져 갔다.
어느 정도 군중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후작이 다시금 외쳤다.
“고한다!! 죄인, 베르사유 왕세자는 신성제국과 내통하여 국가를 혼란케 하였고, 그도 모자라 몽마르트 선왕 전하를 중독시켜 붕어하시게 하였다. 이것은!!”
잠시 말을 끊은 후작이 신호를 보내자, 광장 주변의 건물에서 수많은 종이들이 군중에게 흩어져 내렸다.
“베르사유 왕세자가 제국과 내통했던 증거들이다! 왕세자는 본 후작과 선왕 전하의 군신 관계를 이간하여 공멸케 만든 후, 이 왕국을 제국에 팔아넘기려 하였다!!”
“우우우우우!!”
“죽여! 죽여!!”
“저 빌어먹을 매국노!!”
“빨리 뒈져!!”
군중들이 악을 쓰며 베르사유의 죽음을 원했다.
“이에, 판결을 내린다!! 베르사유 전(前) 왕세자를, 화형에 처한다!”
미다스 후작이 판결을 내리고 주변을 바라보자, 이내 집행인들이 베르사유가 묶여 있는 십자가에 불을 붙였다.
화르르르륵!
불은 천천히, 하지만 정확히 베르사유가 묶여 있는 십자가를 향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향했다.
뜨거움이 느껴진 것일까.
여태 정신을 잃고 있던 베르사유가 눈을 뜬 후 미친 듯이 웃으며 외쳤다.
“흐, 흐하하하하하!!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읽지 못하는 어리석고 우매한 백성들이여. 네놈들은 오늘의 선택을 반드시 후회할 날이 올 것이다!!”
“우우우우우우우!!”
하지만 군중들은 그런 베르사유의 한 맺힌 저주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그가 완연히 타올라 잿더미가 될 때까지 야유를 보냈다.
베르사유의 처참한 형벌이 끝나자, 미다스 후작이 재차 입을 열었다.
“베르사유의 명을 받들었던 미하일 경과 융켄 경, 이하 근위기사단은 일의 전모를 모른 채 왕가의 명을 받들었다! 하나, 아무리 몰랐다 하더라도 죄를 지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 이에, 이들에게도 형벌을 내린다!”
군중들은 베르사유에게 했던 것처럼 야유를 보내는 대신, 두 귀를 열고 판결에 집중하였다.
미하일과 융켄은 필라도르 왕국에서도 능력을 인정받는 유능한 기사들.
그런 왕국의 인재들이 자칫 형장의 이슬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인 것이다.
군중들의 집중도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미다스 후작이 외쳤다.
“이들 모두는! 다음 국왕에 대해서도 변함없는 충성을 바치는 것으로 형벌을 대신한다!”
후작의 판결과 함께 광장 곳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렀고, 이내 그 안도는 의문으로 바뀌었다.
선왕 몽마르트는 붕어하였다.
그리고 왕세자였던 베르사유는 살부(殺父)와 매국(賣國)의 죄로 화형당했다.
그렇다면 누가 다음 왕이 된단 말인가?
반란에 성공한 미다스 후작 본인이 왕위에 오른다 하여도 말릴 방법은 없었다.
가장 기름진 영토인 나일과 더불어, 그에 조금 뒤떨어진다고는 하나 대륙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땅인 베르티까지 손에 쥔 미다스 후작을 막아낼 이는 국내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대부분의 군중들이 미다스 후작 스스로 왕위에 오를 것이라 예상하는 가운데, 후작의 입이 열렸다.
“다음 국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