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ess's Shield Protects the Kingdom RAW novel - Chapter (188)
제188화
세계수의 잎.
몇 년 전, 마나 역행에 빠져 목숨이 다할 날만 기다리던 미샤를 완쾌시킬 수 있었던 엘프들의 명약이었다.
세계수의 잎 덕분에 미샤는 마나 역행이라는 천형(天刑)에서 벗어난 것도 모자라, 인간이 다룰 수 없다고 알려진 정령과 계약까지 맺을 수 있게 성장하지 않았던가.
‘분명히 세계수의 잎은 명약이야. 하지만….’
나는 람팡의 생각에 다분히 회의적이었다.
필라도르 왕국의 반란을 수습하고 세트의 부탁을 들었을 때, 나 역시 이슈바르를 치료하기 위해 세계수의 잎을 가장 먼저 떠올렸었다. 패오니아와 다르게 구하는 데 상대적으로 수월했으니까.
하지만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세계수의 잎으로도 베라스의 광물독을 치유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시사철 군도를 둘러싼 대해(大海)의 정기를 한껏 흡수하여 자라난 패오니아는 모든 독을 씻어낼 수 있는 약이다.
그에 반해 세계수의 잎은 뒤틀린 마나를 바로잡는 데 특화된 약이었다.
분명 두 가지 모두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대륙 최고 수준의 명약임에는 분명했지만, 카르마가 당한 독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패오니아가 훨씬 더 적절했다.
두 번째 이유는 세계수의 잎은 엘프들에게도 매우 귀중한 자원이었기에, 단순히 교역을 하는 정도로는 얻는 것이 불가능했다.
미샤를 치료하기 위해 받았던 세계수의 잎 또한 내가 파울로의 딸, 밀리아를 구해낸 공로가 있었기에 겨우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엘프들이 순순히 세계수의 잎을 나눠줄까? 거기다 그 귀한 잎을 가져가도 제대로 나을지도 모르는 판국이라면, 더더욱 잎을 주는 걸 꺼려할 텐데.’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엘프들에게 거절당한 람팡이 엘룬하임에서 난동을 부리는 상상을 하니 등줄기에서 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아, 보인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휘젓는 가운데, 엘프들의 성지인 엘룬하임이 어느새 보이기 시작했다.
‘벌써 도착했나?’
예전, 아니 불과 몇 년 전이었다면 지금보다 한참을 더 가야 도착했을 텐데. 하긴, 지금은 그때와 달리 튼튼하고 넓은 관도가 깔려 있었으니 기동성에서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잘 닦인 관도를 보니 봄의 축제가 끝나고 처음 엘룬하임으로 찾아갔던 때가 마치 아득히 먼 옛날 같았다.
엘룬하임의 경계 근처로 좀 더 다가가자, 영지에서 파견된 상단의 마차들이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데, 상단의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마치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마차들 가운데에는 황금 거북이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걸고 있는, 가문의 직속 마차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
즉,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메트 준남작?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겁니까?”
“헛, 삼공자님을 뵙습니다.”
“인사는 생략하기로 하고, 무슨 일인가요?”
나를 향해 즉시 예를 표하려는 메트 준남작을 만류하며 여기서 이러고 있는 연유를 물었다.
메트 준남작은 영지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부 게이블 남작의 직속으로, 카르비어트 백작가의 상단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이였다.
최근 게이블 남작은, 이황자가 파견한 신성제국 상단주들과 교역 물품을 산정하느라 밤낮이 없을 만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혹여나 제국으로 반입되었을 경우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물건은 없는지, 거꾸로 제국에서 가져온 물건 중 전략적으로 써먹을 수 있는 건 없는지.
모든 신경이 그쪽에 몰려 있기에, 현재 엘프와의 교역은 메트 준남작이 전권을 위임받고 있었다.
반텐과 엘룬하임을 왕복하며 영지 내의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엘룬하임 입구에서 이러고 있단 말인가?
“으음… 그게, 최근 들어서 갑자기 엘프들이 엘룬하임에 상단들이 출입하는 걸 틀어막고 있지 뭡니까.”
“엥?”
메트 준남작의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교역을 막았다구요? 아니, 이런 중요한 사건이 있는데 왜 아직도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죠? 영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이런 중차대한 문제가 보고되지 않았다면, 그건 그것대로 엄청난 문제였다. 가문의 보고 체계가 박살 났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대답하세요, 메트 준남작. 영주님께서는 뭐라 하시던가요?”
“다, 당연히 지체 없이 보고드렸습니다. 하지만 일공자님께 전권을 위임했으니, 이제부터는 모두 알아서 해결하라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영지가 무너질 정도의 위기가 아니라면 나서지 않으시겠다는 의미인가.
“그래서, 형님은 뭐라고 얘기하던가요?”
“그, 그게. 아직 엘프들의 교역품은 그동안 미리 쌓아둔 재고도 충분하고, 게이블 남작님과 함께 제국 상단들을 상대하시느라 신경을 쓰실 수가 없는 상황이신 것 같아서… 결과만 보고드릴 수 있도록 제가 최대한 해결해보려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삼공자님.”
고개를 숙이는 메트 준남작을 보며 나는 더 뭐라 말하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어찌 되었든 메트 준남작은 아버지께 보고도 드렸고, 다른 업무로 과중한 형에게 부담도 지우지 않으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엘프들에게서 매입한 교역품 재고는 얼마나 남았나요?”
“아직 2개월 치 정도는 남아 있어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만, 엘프들이 계속해서 접근을 불허하고 있어서… 이 사태가 장기화된다면, 기껏 확보한 판매처들이 다시 막힐지도 모릅니다.”
메트 준남작의 말에 나는 지끈거리기 시작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현재, 엘프들과의 교역품은 에디르네의 왕도 귀족들과 반텐 인근의 북부 귀족들을 상대로만 천천히, 조금씩 물건을 풀고 있었다.
물론 한 번에 많은 양을 풀어버리면 판로를 좀 더 확보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야 물건의 희소성이 유지가 되지 않는다.
애초에 엘프들의 물건이 그렇게 대량생산이 가능한 것들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렇기에 시간을 들여 차근차근 물량을 모은 후, 내가 올리비아로 떠나면. 반텐에서 5국 연합을, 올리비아에서 남부 귀족들과 필라도르 왕국을 상대로 교역을 시작하려던 것이 밑그림이었는데.
왕국 수도와 북부 귀족들에게 풀 물량마저 동난다면 입소문을 내줄 이들이 사라져 버린다.
즉, 판로를 다시금 확보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었다.
“메트 준남작, 엘프들이 교역을 갑자기 막은 연유는 뭐죠? 파악되었습니까?”
“그게, 아무리 알아보려 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경비를 서는 엘프들에게 이유를 캐물어도 그저 지금은 교역이 불가능하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어서….”
메트 준남작이 송구하다는 듯이 재차 사과를 했지만, 사실 이는 메트 준남작의 탓이 아니었다.
메트 준남작도 그렇지만, 경계를 서는 엘프 또한 위에서 지시한 대로 말하는 것뿐 아니겠는가.
‘아무래도 직접 밀리아를 만나 봐야겠네.’
결국 지금 이 명령을 내린 이는, 파울로를 대신하여 엘룬하임을 다스리고 있는 밀리아일 테니까.
* * *
엘프 경비병들은 지금은 교역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밀리아를 만나보고 싶다고 부탁하자, 못 이기는 척 알프헤임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여전히 알프헤임은 한 그루의 나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웅장한 크기였다.
입구에 도착하자 과거에 그랬듯이 나를 안내해준 엘프 경비병은, ‘여기서부터는 손님들끼리 가라.’고 말한 후 돌아갔다.
‘손님, 손님이라.’
나는 이 일련의 과정에서 두 가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하나. 나를 알아보고는 밀리아에게 못 이기는 척 별다른 저항 없이 길을 안내해 주었다. 아니, 오히려 내심 나를 반기는 듯한 기색까지도 읽혔던 걸로 볼 때, 엘프들 다수가 교역을 반대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둘. 과거, 파울로가 지배하였을 때는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프헤임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나와 함께 온 람팡이 같이 들어감에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게다가 엘프 경비병들은 시종일관 내게 ‘손님’이라는 표현과 존대를 하며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즉, 밀리아가 다스린 이후부터 과거와 달리 인간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인 분위기가 기저에 깔리기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교역을 하면서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을 체감했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교역을 하지 않는다라….’
그렇다는 것은, 과거와 달리 파울로가 실각(失脚)되고 밀리아가 잘 다스리고 있던 엘프들의 세상에 무언가 중차대한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엘프 대다수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말이다. 그게 뭔지는 일단 가보면 알게 되겠지.
스르륵!
우리를 인도하였던 나무줄기들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나무 문 앞에 우리를 살며시 내려준 후 움직임을 멈추었다.
무엇 하나 과거와 바뀌지 않은 모습이었다.
가볍게 문을 밀자, 과거와 마찬가지로 부드럽게 열리는 문 안쪽에서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여전히 내부에는 거암들과 나무줄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고, 허공에는 요정들이 뛰놀고 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다만, 과거와 차이가 있다면.
중앙에 나무줄기들이 얽혀 만들어낸 옥좌에 앉아 있는 이가, 파울로가 아닌 밀리아라는 점이었다.
“어서 오세요, 제롬 공자. 오랜만이네요.”
밀리아는 낯선 이인 람팡과 함께 왔음에도 나를 순수하게 반겨주었다.
그런 밀리아의 감정을 눈치채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엘프들의 분위기, 알프헤임에 들어올 때의 호의적인 태도. 그리고 지금 밀리아의 반응….
이 모든 상황들이 내게 말하고 있었다. 엘프들이 교역을 멈춘 것이 자발적인 선택이 아님을 말이다.
그렇다는 건.
‘외부에서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거겠지.’
그럼 누구일까. 누가 밀리아의 정책에 반대를 하는 걸로 모자라, 강제로 중단시킬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을까.
우선 파울로는 아니었다. 3년 전, 오크와의 싸움에서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대다수 엘프들의 신임을 잃은 그녀였다. 게다가 지난번 죽음의 계곡에서 돌아올 때 애쉬가 말하지 않았던가. 그녀 역시 느낀 게 많았는지 바뀌었다고 말이다.
그렇게 조용히 지내는 그녀가 문제를 일으킬 것이었다면, 이미 터져도 진즉에 터졌을 문제였다. 이제 와서 뒤늦게 그녀가 갑자기 훼방을 놓을 이유도, 명분도 없었다.
파울로가 아니면서, 밀리아가 추진하던, 무난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정책에 급제동을 걸 수 있는 자라 한다면….
쾅!
내가 범인(?)을 유추하고 있을 때, 일련의 엘프들이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살짝만 밀어도 부드럽게 열릴 문을 뭐 하러 저렇게 세게 여는지 모를 일이었다.
“공주님! 인간들을 엘룬하임에 들이셨다는 게 사실입니까!”
격앙된 목소리의 붉은 머리 엘프와 그 뒤를 따르는 엘프들.
이들은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었다. 얼굴에 지나온 세월의 흔적, 즉 주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긴 수명과,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하는 엘프들의 특성상 주름이 생기는 경우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최소 파울로와 비슷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을 때뿐이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인간들과의 교류 때문에 지금 세계수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인간을 멀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트리스탄 장로님.”
밀리아의 호칭에서, 저들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3년 전, 엘룬하임을 찾아왔을 때 밀리아가 지나가듯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장로님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칩거에 들어가신 후로, 엘프들은 어머님을 제외하고는 마땅한 강자가 없게 되었어요.
바로, 칩거에 들어갔다던 장로들이었다.
“이 신성한 엘프들의 성소에 자꾸만 인간들의 잡스러운 물건들을 들여오니 가뜩이나 아픈 세계수가…!!”
“트리스탄 장로, 말을 가리시오! 외인들의 앞이지 않습니까!”
트리스탄이라 불린 붉은 머리 엘프가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이자, 그의 뒤에 있던 다른 여성 엘프 장로가 황급히 트리스탄의 말을 제지했다.
“…크흠! 아무튼, 저 인간들을 속히 돌려보내시길 바랍니다! 인간들과의 교역, 저희가 돌아온 이상 절대로 인정할 수 없음이니!”
제 할 말만 마치고 트리스탄을 포함한 중년의 엘프들이 떠나가자, 밀리아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제롬. 못난 모습을 보였네요.”
“별말씀을. 그보다, 어떻게 된 건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대강은 알 것 같습니다만… 그래도 조금 자세히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네, 가급적이면 제가 알아서 수습한 후 말씀드리려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네요. 전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한숨을 쉰 밀리아의 입에서 길고, 긴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세계수, 위그드라실.
엘프들이 신성시하는, 이 대륙이 탄생했던 시기부터 함께해 왔다는 전설이 있는 나무였다.
이 세상의 자연 그 자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생명력이 충만한 이 나무는, 엘프들의 긴 수명과 정령들의 친화력을 유지할 수 있는 근원이었다.
그렇기에 엘프들 또한, 세계수를 어머니라 부르며 신성시해 왔다.
한데, 그런 세계수가 어느 날부터 서서히, 아주 서서히 조금씩 말라가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엘프들의 사회는 난리가 났다.
엘프들은 어떻게든 세계수를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몇 십년간 이어진 각고의 노력 끝에, 최선안은 아니지만 차선책은 찾아낼 수 있었다.
엘프 육대장로가 소환한 최상급 정령들의 기운을 동시에 불어 넣은 결과, 세계수가 말라가던 증상이 멈춘 것이다.
자연히, 엘프 장로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엘룬하임의 대소사에서 손을 떼고 칩거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계수를 유지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사명이었으니까.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현재.
어렵사리 유지해오던 세계수가 다시금 시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