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ess's Shield Protects the Kingdom RAW novel - Chapter (192)
제192화
수련을 마친 파울로와 함께 움직이던 중, 갑작스럽게 느껴진 이질적인 기운.
그 기운은 생명력이 넘쳐나는 숲에서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낯선 기운이었다.
“이 기운은…?!”
세계수의 외곽지대가 있는 방향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파울로는 대답을 하는 대신 이동에 박차를 가했다.
“밀리아! 당신은 레나와 함께 천천히 와요!”
나 또한 다급하게 밀리아에게 외친 후 월보의 속도를 높였다.
슈욱! 슈욱!
마치 근거리 이동 마법인 블링크를 연달아 펼치는 것처럼, 숲속을 노니는 파울로의 보법은 신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월보를 쓰는 나나, 수왕(獸王)의 힘을 끌어온 람팡조차 쉽사리 쫓아가기 어려울 만큼 말이다.
숲에서만큼은 옥좌에 오른 이들도 그녀에게 한 수 접어주어야 한다는 말이 결코 헛소문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속도를 내는 파울로의 굳어진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세계수, 위그드라실을 정령계로 역소환한 외곽지대에서 불길한 기운이 점점 진하게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꿀렁, 꿀렁.
기묘하다. 그 말 이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 최상급 정령과 장로의 쏟아진 공격으로부터 남자를 완벽하게 보호한 구체는 기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언뜻 보면 은과 같았지만, 은이라 말하기에는 흐르는 물과 같이 흐느적대고 있었다.
“으음… 이거, 뭔가 내 몸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가. 생전의 내가 남겼던 사념이 구현화된 건가.”
남자는 눈앞의 장로나 정령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뭐, 상관없나? 어쨌든 간에 다시 한번 바깥 공기를 맛보니 좋기는 하구만.”
만족스러운 듯이 킬킬대며 웃는 남자. 남자의 표정은 마치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아는, 흡사 성인(聖人)과도 같았다.
남자의 정신이 다른 데 팔려 있는 지금이야말로, 가장 완벽하게 공격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남자의 여유로우면서도, 좀처럼 빈틈을 찾을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장로들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억제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불의 최상급 정령을 다루는 장로, 도디넬이었다.
“감히, 우리를 앞에 두고 여유를 부려!”
화르르르르!
도디넬의 화살에 불의 최상급 정령, 피닉스의 기운이 와류를 이루며 깃들었다.
정령의 기운을 화살에 담아 날리는 방법이었지만, 그 위력은 과거 레나가 제롬에게 쏘았던 화살과는 격을 달리하였다.
핑!
짧은 소성과 함께, 도디넬이 쏘아낸 화살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남자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흔적도 없이 박살을 내주마!’
도디넬은 화살이 코앞까지 도달했음에도 미동도 않는 남자를 보며, 곧 어깨 위의 물건이 흔적도 없이 날아가리라 예상했지만.
쉬잉!
남자의 옆에 있던 구체가 잠시 꿈틀거리더니, 도디넬이 쏘아낸 화살을 순식간에 갈라버렸다.
“헛…?!”
자신의 힘을 가득 담은 화살이 순식간에 무력하게 쪼개지자, 도디넬이 대경했지만 남자는 그저 살짝 눈살을 찌푸릴 뿐이었다.
“쯧, 기다림의 미학도 모르나? 아까부터 계속 성가시게 말이야. 상도덕을 모르는 아이에게는.”
딱!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자, 은빛 구체가 꿀렁이기 시작했다.
“…벌을 줘야겠지?”
쐐애애애애액!
마치 나무에 매달려 먹이가 떨어지길 기다리던 뱀처럼, 꿀렁이던 구체가 길쭉하게 늘어나 도디넬을 덮쳐갔다.
“헉! 피닉스!”
대경한 도디넬이 피닉스를 부르자, 피닉스가 구체를 향해 불꽃을 토해냈다.
화르르르륵!
지금까지 저 구체가 막아낸 공격을 볼 때, 이 불꽃 역시 막아낼 가능성이 컸다. 단지 피하기 위한 약간의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런 도디넬의 예상을 비웃듯이, 구체는 쭉 뻗어나가던 모양을 뱀이 먹이를 조이는 것처럼 바꾸었다.
구체가 노리는 먹이는, 도디넬이 아니라 바로 피닉스였다.
콰아아아악!
-끼루루루루룩!
구체의 어마무시한 압력에 칭칭 감긴 피닉스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퍼어엉!
최상급 정령인 피닉스가 구체의 똬리 안에서 무참하게 터져 나갔다.
“저, 저…!”
푹!
당황한 도디넬은 미간이 따끔함과 동시에, 순간 뇌를 후비는 고통을 느꼈다.
그걸로 끝이었다.
슈르르르르!
구체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가늘고 길게 뻗어져 도디넬의 미간을 관통한 촉수를 회수했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트리스탄은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방금, 장로 도디넬이 죽었다. 그들과 함께 100년 이상을 동고동락하며 칩거해왔던 이가.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흐음. 뭐지, 이거?”
당황한 것은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볼을 긁적였다.
“날 없애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소환한 것치고는 너무 약한데? 아, 혹시 너희, 나 잘못 소환했니?”
마치 길을 지나가다가 개미 한 마리를 잘못 밟은 것과 같이 태연한 남자의 태도에, 다른 장로들이 격분하여 움직였다.
“네 이노오오옴! 감히, 도디넬 장로를!!”
“죽여 버리겠다!!”
고오오오오!
숲의 정령을 다루는 루칸과 얼음의 정령을 다루는 카도르가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넋이 나가 있던 트리스탄이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안 돼! 이런, 젠장!”
트리스탄이 다급하게 진의 바람을 더해 남자를 향해 화살을 쐈다.
하지만 남자를 보호하던 은빛 구체는 칼처럼 변해, 어느새 카도르를 회쳐버리고 루칸마저 난도질하려 하고 있었다.
쿠르르르릉!
바로 그때, 루칸의 앞에 일어난 토벽(土壁)이 은빛 구체를 막은 틈을 타 이베인이 루칸을 안은 채 옆으로 굴러 구체의 칼날을 피해냈다.
“커헉!”
다만 완벽히 피한 것은 아니었는지, 이베인의 등이 쩍 벌어져 있었다.
“이베인! 이런, 빌어먹을…!”
어느새 진의 가호를 두른 채 이베인의 옆으로 온 트리스탄이 이베인과 루칸을 보호하며 이를 갈았다.
“커헉… 그러니… 내가 얘기했잖소…. 우리끼리, 이리 함부로… 결정하면… 안 된다고….”
선혈을 가득 토해내며 이베인이 자신을 탓했지만, 트리스탄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보기에도 저건 괴물이었으니까.
너무, 쉽게 생각했다. 진의 만류와 이베인의 우려에 귀를 기울였어야만 했다.
“후회는 언제나 빨라도 늦는 법이지.”
꾸물, 꾸물.
뒷짐을 진 채 산보라도 나온 것같이 여유를 부리던 남자가 장로들을 향해 다가가자, 남자의 옆에 있던 구체 역시 슬금슬금 기어왔다.
그저 둥그런 물건일 뿐인데, 지금은 그 어떤 몬스터보다도 몸서리치게 두려웠다.
“뭐, 걱정하지 마. 다른 귀쟁이들을 몽땅 죽이거나 하진 않을 테니까. 내 목적은 세계수를 망가뜨리는 거지, 너희 귀쟁이들을 죽이는 게 아니니깐. 아, 그래도 너희는 살려둘 수 없는 거 이해하지? 내 잠을 깨운 데다, 기운들을 보아하니 그동안 네놈들이 세계수를 지켜온 것 같거든.”
스윽!
남자가 손을 들자, 구체가 다시금 일렁이기 시작했다.
‘…너무나 오만했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최상급 정령들과 교감하며 느낀 충만함, 그리고 여기에 얽매여 있다는 권태로움이 합쳐져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한 번의 잘못된 판단이 가져온 결과는, 너무나 참혹했다.
“뭐, 그럼 잘 가라. 내 직감에 니들만 없으면 세계수를 시들게 하는 건 금방일 것 같으니깐.”
딱!
남자의 손가락 신호에, 은빛 구체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마치 맹수의 이빨처럼 장로들을 향해 날아갔다.
이대로라면 세 장로들이 모조리 찢겨 나갈 것 같은 상황에서.
“포기하지 마요!”
퐁! 퐁! 퐁!
리오넬이 소환한 정령, 네레이드가 만들어낸 물방울들이 구체의 속도를 더디게 만들었다.
그 짧은 찰나의 시간이, 세 장로의 목숨을 살렸다.
세 장로들이 몸을 피한 것이 아니다.
콰아앙! 콰앙! 콰콰쾅!
저 멀리서 날아온, 장로들의 화살과 격이 다른 화살이 구체를 쳐낼 수 있는 시간을 번 것이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열 발의 화살은, 적을 죽이겠다는 똑같은 의념을 가득 담은 채 구체와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어이쿠, 이런. 이건 좀 무섭네.”
장로를 향해 움직이던 구체의 촉수들이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어 화살로부터 남자를 보호했다.
그 틈을 타 장로들의 앞에 두 인영이 나타났다.
제롬과 람팡이었다.
“다들, 괜찮으십니까?”
“그대들은…?!”
“뒤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몸을 피하십시오.”
“하지만…!”
밀려오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트리스탄이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자, 화살이 날아왔던 방향에서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애송이의 말대로 하도록. 이번 일에 대한 처분은 나중에 내리도록 할 테니.”
처억!
어느새 남자의 구체에 튕겨 나간 화살들을 회수해 등 뒤에 두른 화살통에 수습을 마친 파울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히 이 엘룬하임에서 분탕질을 친 적도를 처리하는 것이 먼저니 말이다.”
남자는 파울로와 람팡, 그리고 제롬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이건 대단한데? 벽을 넘은 놈이 둘에, 벽을 넘기 직전인 놈이 하나라…. 얼씨구? 두 놈은 동종업계네? 그래, 이 정도는 돼야지.”
옥좌에 오른 이가 둘이나 나타났음에도, 남자는 긴장하기는커녕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저기 저 허접한 귀쟁이들과 달리, 너희정도라면 내 이름을 들을 자격이 있어. 인사하지. 나는 마야. 오래 전 탁류(濁流)를 이끌었던 몸이다.”
“마야… 마야?!”
세계수를 중독시킬 정도의 독을 쓴 흑사자였다 들었기에, 범상한 인물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남자는 생각보다 훨씬 더 거물이었다.
마야. 오랜 세월 흑사자들의, 탁류의 패왕으로 군림하던 자다. 그가 살아 있을 당시의 경험 때문에 신성제국이 흑사자들을 경계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악명을 떨친 이였다.
“호오, 후배님들. 날 알아? 이야, 나도 아직 안 죽었네.”
드높은 악명과 달리 경박해 보이는 어투. 그리고 마야의 옆에 놓인 은빛 구체. 모든 것이 흑사자의 역사서에 남은 기록과 동일한 모습이었다.
‘이제야 알겠네. 저자가 어떻게 세계수를 오염시킬 수 있었는지.’
마야가 가진 이종의 힘. 그 힘의 상징인 저 은빛 구체는 자연의, 생명을 가진 것들과 완벽하게 상극인 힘이었다.
“뭐, 간만에 후배님들을 봐서 반갑지만. 딱 봐도 우리 쪽도 아닌 것 같고, 나 퇴치하려 깨운 것 같으니까 그냥 죽일게? 너무 슬퍼하지는 말고.”
꿈틀!
남자, 마야가 의지를 품자 은빛 구체가 진동을 일으키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구체야말로 마야의 힘이자, 상징. 수은(水銀)이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이들도, 마야가 장난처럼 처리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파울로와 람팡은 당금 대륙을 뒤흔드는 열한 명의 절대자들이었으니까.
스윽!
파울로가 화살을 재차 활시위에 걸었다.
“과거의 망령 따위가,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꼴을 보니 역겹기 그지없구나. 자연으로 돌아가게 해주지.”
츠츠츠츠츠!
람팡 역시 수왕의 힘을 끌어 올리며 코웃음을 쳤다.
“하! 탁류의 왕? 재밌네. 현 대륙의 청류를 이끌고 있는 게 바로 나야, 늙은이.”
두 명의 절대자를 눈앞에 두고도 마야의 눈에는 긴장감이 없었다.
“뭐, 그럼 어디 한번 막아 보려무나.”
짜우우우우!
은빛 구체, 수은이 번개같이 움직여 파울로의 몸을 내리치자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며 굉음이 터져 나왔다.
마야가 다루는 수은은 결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마야, 본인의 능력으로 말이다.
그렇기에, 창조자인 마야를 제외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결코 수은의 독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닿기만 하여도 몸 내부로 수은의 독성이 번졌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과거, 탁류의 거친 흑사자들의 정점에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야는 파울로가 피하거나 어설프게 화살로 받아치다 중상을 입었으리라 생각했지만.
먼지구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자리에서, 일순간 푸른빛이 맴돌았다.
번쩍! 푸욱!
푸른빛은 이윽고 섬전이 되어 마야의 어깨를 꿰뚫었다. 파울로의 화살이 날아온 것이다.
“컥?!”
당황한 마야가 피를 내뿜는 어깨를 붙잡으며 주춤주춤 물러났다.
이게 얼마 만의 상처인가.
‘수은을 이겨냈단 말인가?! 어떻게?!’
스스스스스!
이윽고 먼지구름이 사라진 자리.
끼긱! 끼긱!
마야의 수은이 내리친 장소에는, 파울로가 아닌 다른 이가 수은을 정면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황금빛이 너무 짙은 탓인지, 검게 물든 두 팔을 교차하며 말이다.
“그 힘은…?!”
제롬의 힘에 대해 무언가 아는 바가 있는지, 마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마야가 멍하니 감탄하게 기다려줄 만큼, 지금 여기에 있는 이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리폰, 익(翼)!”
등 뒤로 그리폰의 날개 환영이 생긴 람팡이 순식간에 마야와의 거리를 좁혀 들어갔다.
“짐승 따위가!”
쐐애애애액!
수은에서 뿜어진 다발의 촉수가 람팡의 몸을 꿰뚫으려 했지만.
쾅! 쾅! 콰쾅!
람팡이 귀신같은 절묘한 비행으로 마야의 수은을 피해내자 애꿎은 지면만 부술 뿐이었다.
“감히 날 무시하나?”
피이이이잇!
파울로의 화살이 재차 마야를 노리고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흥!”
수은의 일부가 방어벽을 형성하며 파울로의 화살을 삼키고, 흘려냈으며, 튕겨냈다.
파울로의 화살이 수은벽을 뚫지 못하자, 람팡이 공격을 보조했다.
“그리즐리, 완(腕)!”
쿠우우우웅!
대륙에서 가장 위험한 짐승의 앞발이 수은벽을 처참하게 짓뭉갰다.
마야의 부서진 수은벽. 그 뒤에 서 있던 마야의 시야.
두 팔에 황금색 기운을 두른 제롬이, 마야의 망막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