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ess's Shield Protects the Kingdom RAW novel - Chapter (277)
제277화
대륙 연맹은 신성제국이 북대륙을 평정한 이후, 역사상 단 한 번도 완전히 깨진 적이 없는 굳건한 동맹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가까운 동맹국이라고 해도, 그 본질은 엄연한 타국이었다.
그러니, 국경지대에 위치한 영지들은 만에 있을 하나의 사태를 대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제국의 핵심 요충지 중 하나인 발리스타 요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반텐과 같은 영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얀 영지 역시 필라도르 왕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엄연한 국경지대의 영지였다.
자연히, 변경백 중 하나인 아부다르 백작의 영주성은 여타 평범한 영지들보다 훨씬 더 크고 탄탄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콰아아아아아앙!
흡사 포탄 수십 개가 한꺼번에 터져 나가는 것만 같은 굉음.
폭음과 함께 일어난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자 보이는 광경은, 바로 치즈처럼 힘없이 터져 나간 아부다르 영주성의 성문이었다.
마수의 숲에서 자란 탄탄한 목재에 기름을 수십, 수백 번 이상 덧대 발라 정성껏 제작한 성문은 투석기나 충차와 같은 공성 무기에도 거뜬히 버틸 만큼 튼튼한 방어력을 자랑했지만.
어지간한 몬스터들조차 한 수 접어준다는 흉포한 야수, 샤벨 타이거의 날카로운 앞발에는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하물며 그 샤벨 타이거가, 대륙에서 가장 강한 11명 중 1명이 사용하는 특별한 힘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무지막지한 광경의 아래, 성문은커녕 나뭇가지조차 꺾지 못할 것 같은 가냘픈 여인이 팔을 휘저으며 휘날리는 먼지들을 밀어냈다.
“에잇, 퉤! 퉤! 아우, 먼지 좀 봐. 이 정도로는 아직 준비 운동도 안 되는데. 베라스, 그 쓰레기 밑에 있는 버러지들은 뭔데 코빼기조차 안 보이는 거야?”
입이 쩍 벌어질 공격을 선보인 것과 달리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태연한 모습.
오직 강자만이 선보일 수 있는 느긋함에, 영주성을 지키던 파이샬 자작의 병사들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괴, 괴물…!”
“어머나. 숙녀한테 아주 못 하는 말이 없네. 이곳 병사들은 에티켓도 없나?”
“람팡 님, 보통 숙녀는 그런 공격 못 해요.”
“쓰읍.”
“죄송합니다.”
괜히 말대꾸를 하던 살라딘이 본전도 못 찾고 쭈그러든 사이, 제롬이 람팡을 독촉했다.
“사저, 괜히 엄한 병사들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빨리 갑시다. 지금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요.”
지금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베라스의 부하들이 아부다르 백작의 목숨을 노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쳇, 알았다고.”
람팡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이미 전의를 상실하여 우리의 한 걸음에 두 걸음씩 물러나는 병사들을 뒤로한 채 곧장 지하 감옥을 향해 바삐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이 병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자작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 가엾은 이들이었다.
이런 이들의 목숨을 굳이 빼앗는 걸 즐길 만큼 정신 나간 사람은 일행 중에 없었다.
때문에 병사들의 느슨해진 어설픈 포위망을 뒤로한 채, 곧장 백작이 구류된 지하 감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그때.
“…….”
스으윽!
감옥의 입구 앞을 틀어막으며 제롬 일행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이런, 이런. 몹시 반가운 얼굴들이 보이는군요.”
반가운 건커녕, 일면식조차 없는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처음 보는 이였음에도, 그는 마치 오랜 지기라도 만난 것처럼 진한 반가움을 보였다.
그가 보이는 기묘한 분위기를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제롬이었다.
“…이 진한 피 냄새. 블라디미르인가?”
“오! 이런, 세상에. 남부의 철권이라 불리는 대륙의 영웅께서 이 미천한 흑사자를 기억해주고 계시다니. 실로 영광입니다, 남작님.”
과장된 몸짓과 표현으로 감사를 표하는 블라디미르의 몸짓은 짐짓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일행들을 둘러본 블라디미르는 이내 입구를 막고 있던 몸을 옆으로 비키며 말했다.
“자, 이곳을 따라가시면 지하에 아부다르 백작님께서 자리하고 계실 겁니다. 공황 상태에 빠진 파이샬 자작이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시간이 많지 않으니, 부디 서두르시길.”
“…….”
하지만 블라디미르의 말에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경계심만 더욱 높아졌다.
“…흐음. 이건 진짠데. 시간이 많이 없….”
“블라디미르, 무슨 생각이지?”
눈살을 찌푸리는 블라디미르의 말을 끊어내며 직접적으로 물었다.
“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되묻는 블라디미르.
“네 상황이라면, 처음부터 아부다르 백작을 죽이고 떠나는 것이 훨씬 편할 텐데, 왜 굳이 이런 행동을 보이는 거지?”
“하하하! 재밌는 농담을 하시는군요.”
블라디미르가 정말 웃긴 것처럼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하얀 날개, 비스트 마스터와 더불어 새롭게 떠오르는 남부의 철권. 이 둘이 한데 모여 있는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목숨이 몇 개나 있다면 모를까, 저는 살고 싶습니다.”
“…….”
틀린 말은 아니었다. 만약 블라디미르가 아부다르 백작을 죽였다면, 곧장 흔적을 찾아 추적에 나섰을 테니까.
하지만 백작이 아직 붙잡혀 있는 이상, 백작의 구출이 당연히 먼저였다.
과거, 공간을 격하고 도주에 성공했던 블라디미르의 능력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시간이면 도주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을 터.
“혹시나 몰라 분신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지금도 공간을 격하고 심장이 떨려오는 기분입니다. 아무래도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후후후.”
쿡쿡 웃음을 흘리던 블라디미르는 나와 람팡의 뒤편에 있는 미르온을 발견하자 눈을 빛냈지만, 특별히 다른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다.
“자, 그럼 누가 오시리스 왕국에 귀한 발걸음을 하셨는지 확인도 끝났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부디, 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길.”
블라디미르가 그의 주인이 시켰던 명을 지키기 위해 떠나려 하자, 람팡이 수왕의 힘을 끌어 올렸다.
“가긴 어딜 가, 베라스의 개.”
우우우우웅!
람팡의 어깨 뒤로 떠오른 그리폰의 형상. 순식간에 공간을 격하고 블라디미르에게 접근한 람팡이 블라디미르의 가슴을 후려쳤다.
퍼어어어어엉!
“커허억!”
움푹 파이며 갈비뼈가 모조리 박살난 채 튕겨져 간 블라디미르.
입가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흘렸다.
“큭, 큭큭큭! 이거, 역시나 제 선택이 옳았군요. 아부다르 백작 따위의 목숨은 있으나 마나 한 것. 그의 목숨을 담보로 우리의 주인이 제일 원하는 두 사람의 행보를 확인했으니, 이보다 좋은 거래는 없을 터.”
제 가슴팍을 내려다본 블라디미르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자, 그럼 오늘은 이만. 근시일 내에 또다시 만나기를 기원하지요.”
“놓칠 줄 알아?”
람팡이 재차 거리를 좁혀 블라디미르의 목줄을 틀어쥐었으나, 그의 모습은 이미 대화를 나누던 블라디미르의 얼굴이 아니었다.
피투성이가 된 남자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는 상태였다.
아마, 블라디미르의 휘하 중 하나겠지.
“놓칠 수 없어, 지금 당장 놈을 추적해야….”
“사저, 진정해요. 지금은 아부다르 백작을 구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 정도는 사제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잖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람팡이 소리를 질렀지만, 제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정하세요, 사저. 탁류 계파의 힘이 훨씬 강한 지금, 오시리스는 이미 반쯤 적지나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만약, 저자가 함정을 파놓고 사저를 유인한 거라면? 그 자리에 베라스가 기다리고 있다면? 그때는 어떡하실 생각입니까?”
“……!!”
“저와 미르온은 저자와 싸워본 경험이 있어요. 블라디미르라 불리는 녀석은 베라스의 부하들 중에서도 지류를 담당하고 있는 녀석입니다. 그런 놈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나타나진 않았을 거예요.”
“…….”
“머지않아 베라스와 필연적으로 조우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지금은 조급한 마음에 무리를 할 때가 아니라, 침착하게 하나씩 바로잡아갈 때입니다.”
“…쳇!”
쿠웅!
그제야 람팡은 고집을 꺾었다. 물론 흑사자의 시신을 거칠게 던지며 불편한 심사를 내비쳤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뚜벅, 뚜벅!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길은 바깥과 달리 고요했다.
이미 경비병들은 모두 도망간 지 오래. 제롬 일행의 발걸음 소리만이 지하 감옥의 폐쇄된 공간에 반사되며 울려 퍼졌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흐, 흐으윽!”
마침내 도착한 감옥에서,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마라! 하,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온다면, 아부다르 백작의 목숨은 없느니라!”
악을 쓰며 인질의 목을 향해 단검을 가까이 가져다 대는 중년의 남자.
쉬지 않고 떨고 있는 그의 손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그에 반해 목에 검이 닿아 피부가 갈라져 핏물이 흐름에도 호흡조차 흔들리지 않는 인질의 모습은, 그가 범상치 않은 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저자가 바로 아부다르 백작인가.’
그렇다면, 자연히 인질극을 벌이는 자가 파이샬 자작이리라.
추측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트가 준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파이샬 자작! 신성한 영지전에 다른 이의 힘을 빌려 비열한 승리를 가져가다니! 한때나마 청류 계파의 귀족이었던 자로서 부끄럽지도 않소!”
“닥쳐라, 이놈! 누가 청류라는 것이냐! 나는 탁류 계파의 귀족이다!”
파이샬 자작의 외침에 세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외부인인 우리 앞에서 왕국의 치부를 들킨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리라.
“…오시리스 왕국의 귀족으로서 자긍심을 버린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소! 당장 백작님을 풀어드리고 죗값을 치르시오!”
“헛소리 집어치워라!”
세트의 말에 파이샬 자작이 발악하며 외쳤다.
“가라앉는 배인 청류 계파 따위에 희망은 없었다! 영지전은 내가 이겼다! 내 선택이 옳았단 말이다! 그러니, 이제 얀은 나의 영지란 말이다!”
파이샬 자작은 지금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은인이었던 불칸 후작을 배신하면서까지 살아남으려 했다.
길러준 이의 뒷덜미를 물어뜯었으니, 짐승만도 못한 자라 곳곳에서 손가락질을 받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 대가로, 변경백의 하나인 아부다르 백작의 얀 영지를 통째로 집어삼키지 않았던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부귀를 누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오욕이라도 뒤집어쓸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각오를 율란 공작에게도 충분히 보여 주었었다.
그가 내민 독을 단숨에 마시며 충성을 맹세했다.
한데, 그렇게 충성을 바친 자신이.
왜, 이렇게 비참한 꼴에 처해져야 한단 말인가!
스스로의 분을 이기지 못한 걸까. 파이샬 자작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아니,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얼굴을 포함하여 파이샬 자작의 몸 전체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마치 폭탄처럼.
“크으… 그르륵…!!”
불룩! 불룩!
자작의 혈관들이 마치 살아 있는 벌레처럼, 미친 듯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까뒤집은 자작의 표정이 문득 요사스럽게 변해갔다.
그리고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이것 참,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까 백익한테 얻어맞은 게 너무 아프더라구요. 그리고, 그냥 꼬리를 말고 가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요?”
씨익!
찢어질 듯 올라간 입꼬리가 더없이 불길해 보였다.
“제 작은 답례이니, 부디 이 정도는 귀엽게 봐주시길.”
부우우우우우!
점차 빛나기 시작하는 파이샬 자작의 몸.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제롬은 가타부타 할 것 없이 움직였다.
순식간에 자작을 제압해 멀리 밀어낸 제롬이 아부다르 백작을 감싸며 외쳤다.
“다들 엎드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 * *
영주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야산.
오래된 고목의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은 블라디미르는 영주성에서 들려오는 굉음에 피식 웃음 지었다.
“어떻게, 선물은 마음에 들었을지 모르겠군요.”
비록 옥좌에 오른 괴물이 둘이나 있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러나긴 했지만, 그에게도 순정이라는 것이 있었다.
제롬과 람팡이 이런 식으로 그의 순정을 짓밟는다면, 그 역시 선물을 쥐여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쿡쿡쿡! 기대되는군요. 머지않아 다시 보게 될 그날이.”
블라디미르가 위험을 무릅쓰고 람팡과 제롬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유.
그건 단지, 세트와 함께 온 강자들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람팡과 제롬, 둘 모두 온 것은 확실히 의외긴 했다만. 그의 목표는 그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을 해머로 뭉개버렸던, 쥐새끼 같은 애송이.
그 애송이가 나타났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정말 다행이야, 네놈이 함께 찾아와서 말이지.”
제롬의 뒤에 있던 우람한 덩치의 사내를 보고,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억누르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비록 무기는 해머에서 대검으로 바꾸었지만,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잊지 않고 놈의 얼굴을 떠올렸으니까.
“곧 다시 보게 될 겁니다, 우리는.”
무려 옥좌에 오른 이가 2명이나 포함된 일행이었음에도, 블라디미르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흑익의 날개 아래 모인 흐린 물줄기는 강하다.
자신을 포함한 다섯 지류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한 힘을 손에 넣었다.
자신들의 힘은, 옥좌에 오른 이들이라고 하여 무조건 위축될 만큼 나약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의 날개는 거대하지. 우리 전부를 묶을 만큼.”
흑익은, 이미 옥좌라는 말로 묶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인물이었다.
“다시 만날 그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즐거이 보내시기를.”
휘이이이이잉!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나뭇가지 위에 있던 블라디미르의 모습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