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ess's Shield Protects the Kingdom RAW novel - Chapter (289)
제289화
율란 공작의 회신은 생각보다 굉장히 빠르게 왔다.
사흘 후. 그 후에 마하슈트라의 입구에서 만나자는 담백한 문장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도 이 상황이 늘어졌다가, 자칫 수도에서 왕과 해후를 풀던 이슈바르가 마키즈로 다시 돌아오기라도 하면 낭패였을 테니까.
“살라딘, 그럼 미르온이랑 미샤를 잘 부탁해.”
짧은 시간이 지나고, 떠나가는 제롬과 람팡을 위해 살라딘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지인들끼리 편하게 시간을 보내라는 불칸 후작의 배려에, 주변에 다른 후작가의 인물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알겠어, 인마. 내가 무슨 보모도 아니고….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기나 해. 사고 치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며 살라딘이 손을 휘휘 저었지만, 제롬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농담이 아니야. 만에 하나, 정말 만에 하나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차라리 아이들과 함께 피해. 베라스 밑의 적들이 얼마나 올지 모르는 일이니까.”
함께 싸워왔던 세트의 가문이다. 그 가문을 등지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남으라고 말하는 제롬의 말에, 살라딘 역시 표정을 바로 했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여차하면 독정도 아직 남아 있고 말이야. 오히려 너랑 람팡 님이 조심해야지. 둘 다 옥좌에 올랐다고 하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니까.”
벅벅!
말을 하던 살라딘은 괜히 쯧, 하고 혀를 차며 뒷머리를 긁었다.
“어휴, 아니다. 괴물들 상대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 어련히 알아서들 하겠지. 그래도.”
늘 촐싹거리지만,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던 친우가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친다.
“인간들 상대로는 나도 제법 쓸 만해. 그러니까, 후딱 가서 베라스 자식 엉덩이 걷어차 주고 돌아와라.”
“…그래.”
맞는 말이다. 살라딘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믿었다.
“사제, 이제 출발하자.”
먼저 말 위에 올라탄 람팡이 재촉했다.
그녀의 눈에는 기이한 열망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 곧, 스승을 해했던 베라스에게 복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일까.
평소와는 조금 다른 그녀의 분위기를 보며 한 마디 하려 했지만, 살라딘이 어깨를 툭툭 치며 먼저 말했다.
“이제 가라. 여긴 걱정하지 말고.”
살라딘의 말을 끝으로 제롬과 람팡은 남쪽의 마하슈트라 석굴로 향했다.
“…자, 그럼. 곧 있으면 적들이 밀려온다는 말이지.”
율란 공작이 바보도 아니고, 사흘이라는 시간을 아무 이유 없이 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흘 후, 제롬과 람팡이 석굴에 진입하는 시점.
바로 그때가, 율란 공작가가 불칸 후작가를 공격하는 적기이리라.
즉, 살라딘이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사흘뿐이라는 의미였다.
“자, 미르온 꼬맹이는 아직도 늘어져 자는 중이고. 미샤 고것이랑 얘기나 좀 해봐야겠네.”
제롬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도주하라 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싸움을 이겨야만, 오시리스 왕국이 친(親)제롬의 국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앞으로 그 녀석이 걸어갈 가시밭길을 생각하면, 지지해줄 우군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만 했다.
“진짜, 이 자식은 친구 잘 둔 줄 알아야 해.”
살라딘은 스스로의 배려심(?)을 칭찬하며 미샤를 만나기 위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 * *
불칸 후작가의 연무장.
중앙에서 자미르가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군살 하나 없는 몸으로 수려한 검술을 펼치는 그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명화와도 같았지만.
어째서인지, 그 검의 움직임에는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벌써 열흘 가까이 연무장 구석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거구가 신경이 쓰였으니까.
-저 아이는 필사적으로 수련 중입니다, 형님. 아무것도 모르시면서 그리 모욕하지 마시지요.
사흘 전, 동생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세트가 이종의 힘을 익히고 철이 들어, 가문의 평판이 바뀌기 시작한 시점부터 자신은 세트를 동생이 아닌 경쟁자로 대했다.
자신이 차갑게 대했던 이후,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던 세트였다. 그 모습이 신선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강하게 든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잠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팔자 좋게 늘어져서 힘을 얻는다고 생각했다.
이종의 힘을 익힌 자들은 하나같이 쉽게 강해지는 것이지 않았나.
그런데 ‘필사적’으로 수련을 하는 중이라니.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저자를 보살피는 시종을 통해 살짝 알아봤다.
돌아온 대답은 놀라웠다.
-이슈바르 님께서 시련을 내리셨답니다.
그래, 거기까지는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만약 이겨내지 못하면, 저대로 목숨을 잃을 거라고 하시네요.
‘…뭐?’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이었다. 저 거구는, 세트가 말한 것처럼 목숨을 걸고 훈련을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자미르는, 어째서 저자의 누이가 오랫동안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는지 비로소 납득할 수 있었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만약 동생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다면 당연히 그럴 테니까.
‘아니, 그건 아니겠지.’
과거라면 모를까, 자신은 더 이상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기 시작한 동생은 더 이상 동생이 아닌, 쓰러뜨려야 하는 경쟁자일 뿐이었으니까.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낸 자미르가, 다시금 구석에 잠들어 있는 미르온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목숨을 걸고 수련 중이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과연 본인은, 지금까지 목숨을 바쳐서라도 강해지고자 한 적이 있었는지.
없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자신이 마키즈의 주인이 되지 못하리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 너희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인정해주지. 하지만.’
그뿐이다. 흑사자들의 이질적인 힘은, 그 불평등한 시작은.
역시, 인정할 수 없었다.
* * *
대황강(大荒江).
오시리스 중앙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며, 왕국 남부와 북부의 기준점이 되는 거대한 강.
이 강은 신성제국과의 경계점부터 시작하여, 그 끝은 남해 바다까지 연결되어 있는 왕국의 젖줄이었다.
오시리스 왕국 전 국민들과의 삶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 강을 건너서, 남해 바다로 이어지는 길목의 끝을 향하다 보면.
그 끝을 알 수 없을 것처럼 깊은 어둠을 품고 있는 석굴이 나타나게 된다.
너무나 깊어 석굴 내부에 한 점의 빛조차 허락지 않는 그 광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무섭다는 느낌보다는 경건함이 먼저 떠오르는 이 신비한 석굴이 바로 마하슈트라 석굴이었다.
악신, 샤바가 오시리스의 신화 속 주신인 루에게 패하여 그 다친 몸을 뉘었다고 전해지는 그 석굴에는 부외자의 출입을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그 금지(禁地)의 앞에 놓인 작은 바위 위에, 두 사람의 인영이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바로 마키즈에서 찾아온 제롬과 람팡이었다.
까딱까딱!
람팡의 다리가 풍이라도 걸린 것처럼 계속해서 흔들렸다.
“사제, 오늘이 약속했던 사흘째 아닌가?”
“예, 맞아요.”
“이것들, 알고 보면 다 사기 친 거 아냐?”
주변을 어정거리는 람팡의 심리 상태는 누가 봐도 불안해 보였다.
‘뭐, 그럴 만도 하지.’
율란 공작가의 서신을 받고 나서, 람팡과 제롬은 곧장 마하슈트라로 향했다.
느긋하게 도착했다가, 무슨 판을 깔아 놓았을지 모를 일이지 않은가.
어젯밤 미리 도착한 두 사람은, 석굴의 주변과 입구 주변을 샅샅이 조사했다.
혹시 모를 함정이나 매복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피기 위해서 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석굴의 입구에서는 아무런 수작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유추할 수 있는 바는 둘 중 하나였다.
귀곡자가 잠든 석굴 내부에 함정을 파두었거나.
아니면, 가능성은 낮지만.
‘애초에 사저와 나를 불러낸 것 자체가 함정이었거나.’
“그렇잖아! 어차피 사제랑 나만 불칸 영지 밖으로 빼돌리면, 율란 공작이 마키즈로 진격할 것 같다며. 그럼, 베라스까지 모조리 불칸 후작가를 박살 내러 움직였을 수도 있는 것 아냐?!”
제롬 역시 저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아도, 역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침착해요, 사저. 베라스 입장에서, 불칸 후작가는 언제든지 치울 수 있는 작은 돌멩이에 지나지 않을 거예요.”
지류(支流)인 블라디미르만으로도, 청류 계파의 변경백인 아부다르 백작가를 무너뜨릴 만큼 막강한 베라스의 세력이다.
그들이 겨우 불칸 후작가에 애를 먹진 않을 터.
그렇기에, 그들은 불칸 후작가를 건드리지 않는다.
불칸 후작가와 청류 계파가 허무하게 무너지면, 제롬과 람팡은 곧장 올리비아로 돌아가 전열을 가다듬을 테니까.
그럼, 베라스는 또다시 우리를 마주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인내해야만 한다.
‘그런 바보같이 답답한 선택을 할 리가 없어.’
생각을 정리하자 자연스럽게 첫 번째 가능성에 무게추가 실린다.
‘역시 석굴 내부에 함정을 파둔 건가… 율란 공작도 과감한 결단을 내렸군.’
무려 제롬과 람팡을 잡는 일이다. 옥좌에 오른 그들을 잡을 함정이, 결코 가벼울 리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내부에서는 제롬과 람팡, 그리고 베라스가 한데 어우러져 싸움이 일어날 터.
현 대륙에 손꼽히는 강자들의 대결이다.
주변 환경이 남아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당장 제롬과 발락이 부딪혔던 코란토스 해전 역시 수많은 배를 부숴먹고, 협곡의 지형을 바꾸어놓지 않았던가.
한데, 그런 위험한 장소에.
제롬과 람팡뿐만이 아니라, 율란 공작의 둘째 아들 ‘파록 슈 율란’이 함께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아마, 율란 공작의 차남은 목숨을 잃게 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아니, 시신이라도 찾으면 다행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리라.
이슈바르 님의 육성을 물려받을 후보로 거론될 정도니, 그 재능은 마치 밤하늘에 빛나는 별과 같이 반짝일 터.
“저….”
그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겨우 마하슈트라에 자신과 람팡을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사용하다니.
“저….”
‘율란 공작의 베라스에 대한 충성심이 상상 이상이다. 이 정도로 충성심이 깊을 줄은 몰랐는데….’
“저….”
“사제, 할 말이 있으면 시원하게 말을 해. 왜 아까부터 자꾸 정신 사납게 저… 저… 그러면서 말을 더듬는 거야?”
“음? 무슨 말씀이세요. 말을 하다 마신 건 사저시잖아요?”
답지 않게 할 말을 못 꺼내고 주저하는 것 같길래, 도대체 왜 이러나 했더니.
“……?”
“……?”
작은 침묵. 사저도, 나도 말을 안 하고 있었다면 대체 누가 했단 말인가?
“저….”
“?!”
람팡과 나의 고개가 일제히 돌아간다.
시선이 교차하는 곳에는, 로브를 한껏 뒤집어쓴 정체불명의 사람이 서 있었다.
품이 넓어 정체를 알 수는 없었지만, 로브의 높이가 왜소한 것으로 보아 분명 건장한 체격의 사내는 아니었다.
자박, 자박.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인영이 조심스럽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작게 울려 퍼지는 발소리에 람팡과 내 입이 다물어졌다.
‘아무리 둘 다 생각이 많은 상태였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은밀하게 접근한 거지?’
착각이었다. 인영이 은밀하게 접근한 게 아니었다.
걸어오고 있는 와중에도 그 존재감이 흐릿했다. 딱히 스스로를 숨기려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존재감이 압도적으로 희미한 사람이다, 라는 판단이 훨씬 더 합당하리라.
자박! 스으윽!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인영이, 우리의 앞에서 천천히 후드를 걷어냈다.
그러자, 로브 안쪽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브로 몸을 가렸던 이는 소년이었다.
그것도, 곧 쓰러질 것처럼 병약해 보이는 창백한 인상의 소년.
“실례합니다. 저어… 혹시 람팡 님과 제롬 남작님…이 맞으실까요?”
소년이 주저하며 우리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맞긴 하다만. 율란 공작가에서 보낸 시종이니? 여긴 오시리스 왕가에서 출입을 금한 마하슈트라 석굴이란다. 아무리 수행원이라도, 부외자들은 함부로 들어오면 안 돼.”
람팡의 부드러운 충고에 소년이 당황하였다.
“예? 아니, 그게….”
“괜찮아. 위에서 시켰다면 그럴 수도 있지. 못 본 걸로 해줄 테니, 어서 내려가렴.”
당황한 소년을 안심시켜준 람팡이 짐짓 표정을 굳혔다.
“그나저나, 너희 가문의 공자는 대체 어디 있는 거니?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아직도 얼굴 하나 비치지 않고 시종 아이만 보내오다니. 대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이리 뻣뻣하게 나오는 건지 모르겠네.”
람팡의 분노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아무리 재능이 충만한 동량이라고 해도, 이쪽은 이미 현 대륙의 초강자였다.
대접을 받으면 받았지, 감히 뻗댈 수준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람팡의 분노가 전해진 걸까.
“제, 제가!”
아까보다 더욱 당황한 소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파, 파록 슈 율란…인데요….”
“……?”
“…뭐?”
제롬과 람팡은 지금 소년의 말에 잠시간 사고가 멈추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 그렇게 빤히 보시면… 부담스러운데….”
꼼지락, 꼼지락!
우리 둘이 빤히 바라보는 시선만으로도 부담스러워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이 내성적인 소년이.
이슈바르의 뒤를 이어 육성의 힘을 이어받을 후보이자, 그 재능이 별처럼 반짝인다는.
바로 그, 파록 슈 율란이라고?
이게 말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