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44
044화
단호한 아렌의 태도 때문인지 트리안과 네이던은 더 이상 말을 건네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 나도 꽤나 거친 수행을 했다고 생각은 했지만 ······.”
“확실히 실전이 도움이 되기는 하지.”
생각이 많아 보이는 둘이지만 아렌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뛰어난 신공절학과 고차원의 마법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결국 강해지는 것은 사람이다.
열망, 독기, 목표 등등.
단순히 강해지겠다는 것을 넘어선 구체적인 목표가 필요했고, 이들은 아직 그것을 찾지 못했지만 아렌이라는 강자의 강함을 동경하고 막연히 배움을 청하고 있는 것이다.
나름대로 단단한 각오를 한 것이겠지만, 아렌에게는 설익어보였고, 그런 사람에게 가르침을 베풀 만큼 아렌은 한가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렌의 몸과 정신은 끝없이 변해가고 있었다.
* * *
여느 때와 같은 날이었지만, 트리안과 네이던은 뭔가를 깊게 생각하는 얼굴이었고, 레티시아는 그런 둘의 모습에 의문을 느꼈다.
그렇다고 레이디가 먼저 물어볼 수는 없는 법이다.
아렌도 별 반응이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며 식사 후 차를 즐기고 있는데, 콜레트가 슬며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품에 리본으로 장식한 주머니를 소중히 안은 콜레트가 주눅 든 모습으로 인사를 건넸지만, 애석하게도 받아준 것은 레티시아 뿐이었다.
“네!”
보통의 영애라면 모욕감이라도 느낄 만하지만, 이들은 보통 일행이 아니었고, 콜레트도 일반적인 귀족가의 영애가 아니게 되었다.
조심스레 아렌에게 다가선 콜레트가 손에 든 주머니를 내밀었다.
“수고했다.”
예전보다 두툼한 주머니를 보면서 안을 열어본 아렌이 손을 집어넣더니 쿠키 하나를 꺼내서 입에 물었다.
아작.
천천히 맛을 음미하는 아렌을 긴장한 표정으로 콜레트가 바라보았고, 이내 차를 마시며 입가심을 한 아렌이 입을 열었다.
“거래는 끝났다.”
콜레트의 얼굴이 환해졌다.
“가. 감사합니다!”
위급한 순간에 이루어진 황당한 부탁이었고, 거기에 타린과 아카데미 감찰단, 심지어 제국 공안까지 나타났던 대환장 파티였다.
아마 가문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한다고 해도 믿지 않을 거라는 것에 콜레트는 내기라도 걸 수 있었을 정도로 믿기 힘든 사건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콜레트와 코린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수많은 귀족 자제들과 아카데미 교수까지 얽혀있는 마당에 딱 봐도 무해해 보이는 외모의 콜레트와 평민 출신인 코린은 간단한 질의응답만으로 감찰단과 공안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그렇게 정식으로 ‘모임’에서 나올 수 있었어요. 저는 물론이고 코린도.”
이런 귀족들 간의 모임은 들어가는 것도 힘들지만 나오는 것도 힘들다.
서로 간에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음습한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깊이 관여되면 그 모임은 평생을 가는 것도 모자라 대를 이어서 활동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모임의 초창기였기 때문도 있지만, 콜레트와 코린에 학을 뗀 모임이 둘을 놔줬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렇게 콜레트가 만족하고 있을 때, 아렌의 시선이 콜레트의 그림자로 향하더니 가볍게 발을 굴렸다.
웅.
은은한 파동이 지면을 훑었고, 콜레트의 그림자가 크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큭.”
짧은 비명과 함께 일렁이는 콜레트의 그림자에서 무엇인가가 빠져나왔다.
“허어!”
“······ 이건 대단하군.”
“······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네요.”
코린이 마치 그녀의 그림자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나타난 것이다.
아렌이 워낙에 쉽게 잡아내서 코린을 쉽게 보았지만, 코린도 아카데미에 들어올 정도의 인재다.
일행의 눈을 감쪽같이 속여 버린 코린의 능력은 확실히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실례했습니다.”
허리를 숙이는 코린의 모습에 네이던과 트리안이 위화감을 느꼈다.
“분위기가 꽤 변했군.”
“······ 하긴 짧은 사이에 사건을 많이 겪었지.”
처음 기숙사의 방에서 아렌에게 잡혔던 코린과 지금의 코린은 어른과 아이라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아이는 잠깐 사이에 크는 법이지.”
본인이 꼬마인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내용은 꽤나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며 레티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지?”
잠깐이지만 자신마저도 속여 버린 은신술에 흥미가 돋은 아렌이 코린을 향해 물었다.
뭔가 결심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막상 아렌을 눈앞에 두니 말을 잊은 코린을 콜레트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 주군으로 모실 수 있겠습니까.”
학생들 사이에서는 나오지 말아야 할 내용의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고, 좋은 상관을 만나는 것도 능력이다.
서로간에 친분을 떠나서 군신관계를 맺는 것은 아카데미에서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다.
오독.
심각한 분위기가 흘렀지만, 아렌은 말없이 쿠키를 들어 씹었다.
허리를 피지 않은 코린과 그런 코린을 앞에 두고 한참을 오물거린 아렌이 이내 입을 열었다.
“나는 하인을 함부로 두지 않는다.”
무신경한 목소리에 코린의 고개가 들렸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아렌을 쳐다보았다.
“······ 이분들은 곁에 두시고 있는 거 아닌가요?”
하인은 절대 아니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트리안은 참았다.
“억지로 만들어진 인연이 아니다.”
아렌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친분은 반드시 파탄이 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그렇기에 트리안과 네이던, 레티시아가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하고 있는 것이었고, 콜레트와 코린은 이에 해당되지 않았다.
“······ 인연은 쌓아가는 것이라고 배웠습니다.”
단호함까지 담긴 목소리에 코린이 반발하며 말하는 그때였다.
“억지는 부리지 마라. 코린. 신념에는 신념으로 부딪쳐야지 고집으로 맞서는 게 아니다.”
환한 미소와 함께 도리안 드 피렌사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 * *
환한 미소와 단정한 은발, 훤칠한 자태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호감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는 아니었다.
“······ 도리안 공자.”
“그래. 코린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다. 레이디 콜레트도 편안해 보이는 군요.”
아무런 감정도 없는, 친절하기까지 한 답변에 콜레트와 코린이 주춤거리며 한 발자국 물러섰다.
도리안의 태도에 본연적인 공포를 느낀 것이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아렌의 맞은 편에 앉은 도리안의 모습에 트리안과 네이던의 얼굴에 경계심이 떠올랐다.
‘갑자기 웬일이지?’
‘······ 피렌사 공작가라. 확실히 그 정도면 교수한테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지.’
아렌의 추종자에 가까워진 레티시아만이 평온한 표정으로 도리안을 바라보았다.
“맛있어 보이는군요.”
도리안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콜레트가 준 쿠키를 우물거리고 있는 아렌이 그제야 반응했다.
“안 줄 거다.”
“······ 괜찮습니다.”
별 거 아닌 한마디였지만, 도리안은 뭔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통제하고 있는 자신을 한마디 말로 흔들었으니 과연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도리안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운이 좋았더군요.”
주어도 없는 말이었지만, 이곳에 모인 이들 중에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동기생들과 상급생, 타린 교수에 이어서 감찰단과 공안까지 등장한 대 사건이었다.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하지만, 건물 하나가 반파되어버린 사건인데 중요 인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아렌은 별다른 제재가 없었으니까.
“타린 교수는 공안과 꽤 깊은 대화를 나눈다고 하더군요. 아쉽지만 그분을 더 이상 뵙는 것은 힘들 것 같습니다.”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콜레트와 코린의 어깨가 움츠려들었고, 트리안과 네이던, 레티시아도 얼굴을 구겼다.
그 정도로 공안의 악명은 제국에 널리 퍼져있었다.
“혹시 공안과 관련이 있습니까?”
야무지게 쿠키를 먹어치울 뿐, 아무런 반응이 없는 아렌을 보면서 도리안이 회심의 질문을 던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싱그럽게 웃으며 도리안이 답했다.
“그야 공안이 아렌 공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으니까 그렇죠. 불리한 증언들을 묵살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축소시키더군요.”
의외의 말에 모두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도리안이 공안의 일을 알고 있다는 점도 놀랍니다, 공안이 아렌을 보호하려는 것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이 떠오른 것이다.
“······ 그건 나도 이해가 안 되는군.”
드물게 아렌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아렌은 공안과의 접점 따위는 없었고, 그렇다고 가문에서 손을 쓴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닐 것이다.
시간도 맞지 않았고, 베로아의 이야기에 따르면 가문의 여론은 갈라진 상황이었으니까.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하지만 어느새 표정을 정돈한 아렌의 답변에 도리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관련되었다는 이야기를 평민이 들었으면 심장마비가 왔을지도 모르고, 어지간한 귀족가도 얼굴을 창백하게 만드는 것이 공안이다.
그런 공안의 이야기가 나왔는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넘겨버리는 아렌의 모습에 알 수 없는 질투가 끓어오른 것이다.
“그나저나.”
하지만 아렌은 그런 도리안의 반응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왜 벌써 내 앞에 왔지?”
“······ 무슨 말이죠?”
최대한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는 도리안에게 아렌의 무심한 한 마디가 박혔다.
“장난은 이제 끝인가? 아니면 장난을 칠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나. 어찌되었든 기대 이하구나.”
도리안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고.
“그럼 이제 셈을 치러야지.”
아렌의 손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 * *
쩌정!
뭔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도리안이 앉은 자세 그대로 뒤로 날아갔고, 갑작스런 사태에 일행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님.”
어느새 콜레트를 뒤로 숨긴 코린과 냉엄한 기세를 풍기는 트리안과 네이던, 차가운 눈으로 뒤에 서있던 도리안의 일행을 경계하는 레티시아였지만, 정작 아렌은 차분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손을 털었다.
아렌의 손속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이들이니만큼 아렌이 무엇인가를 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입만 산 것은 아니구나.”
“······ 이래 보여도 가문의 기대주라서.”
아렌의 말에 호응하듯 들려오는 도리안의 목소리에 일행의 얼굴에 놀랍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 막았나?”
“······ 과연 피렌사. 제국 제일의 인재라고 하더니만.”
아렌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도리안의 양손에 푸른색 오러가 넘실거렸고, 각종 보조 마법이 인첸트 되는 모습이 보였다.
“······ 마검사의 재능이라더니 상상이상이네요.”
레티시아의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도리안이 환하게 웃었다.
“결국 모든 것은 제 손으로 해결하는 것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으면 조금 더 일찍 나서는 것인데요.”
도리안이 숨겨두었던 강대한 마나와 오러가 사방으로 기세를 넓혀나가는 모습에 일행의 얼굴이 굳었다.
아렌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라면 도리안도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괴물임을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스르릉.
도리안의 손에 검이 들렸고, 동시에 정련된 예기가 무엇이든 잘라버릴 것처럼 솟아올랐다.
눈으로 보일만큼 겹겹이 쌓인 방어마법과 각종 버프, 몸 전체를 돌고 있는 오러의 향연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전의를 잃어버리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럼 해볼까요?”
자신 만만한 표정으로 검을 앞으로 내미는 도리안의 모습에서 장엄한 기세가 일어나는 그 때.
“고작 이 정도로 말이냐?”
“뭐?!”
쩡!
지척에서 속삭이는 아렌의 중얼거림과 함께 거대한 충격이 도리안의 전신을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