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razy Villain Regains His Sanity RAW novel - Chapter 200
200화
사색이 된 천명국이 자리를 벗어나고, 홀로 남은 정주호는 남은 술을 잔에 채워 넣었다.
“참 무서운 세상이란 말이지. 아무것도 모르면 홀라당 벗겨먹는 곳이야.”
천명국은 최준호로 인해 고통받았다. 그가 벌이는 사건사고로 인해 건강하던 장에 이상이 생겨 혈변을 볼 정도로.
하지만 최준호를 초인으로 받아들인 것도 그가 한 것이고, 최준호가 이만큼 자리를 잡게 만든 것도 천명국의 공이었다. 그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각성자 강국이 되었고, 몇 년 사이 눈에 띄게 성장하여 더 많은 시민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국익의 관점에서 천명국은 큰 공을 세웠다. 지금도 언론에서 정부의 가장 큰 업적을 일개 공무원 헌터였던 최준호를 일찌감치 끌어안은 걸 꼽는다.
그 업적 하나로 어떤 조사에서는 대선후보로 거론되었을 정도다.
대통령 입장도 이해가 된다. 대통령이 모든 책임을 지지만 반대로 공을 독식한다. 그가 잘한 것은 천명국을 믿고 권한을 내어준 것. 그러니 자신의 업적을 계승하기 위한 적임자로 천명국을 점 찍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른 여당 정치인들?
같은 당 소속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그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고 정권을 이어가더라도 이전 정권 색을 지울 수밖에 없다.
정치란 건 그런 것이다.
“그래서 난 탈출했지.”
특히 대통령의 인재 욕심이 대단한 것이 보여 한 번 얽히면 빠져나오는 것이 매우매우 괴롭다.
그래서 일부러 평양에서 전심전력을 다해 업무를 처리했고, 대통령이 부담스러워할 정도의 공을 세운 뒤 그만뒀다. 하지만 자신도 청와대에 있었다면? 천명국과 비슷한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천명국이 겪는 괴로움은 자신이 겪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준호로 인해 탈모와 혈변으로 고통 받았다는 공통분모가 존재하는 이상, 당하더라도 알고 당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이건 내 생각이고, 넌 왜 말하라고 한 거냐?”
어느새 정주호 맞은편에는 최준호가 앉아 있었다.
“이사님하고 비슷한 생각입니다.”
오늘 정주호가 천명국에게 진실을 알려준 것은 최준호의 작품이었다.
자신이야 의문을 품고 있었다 쳐도 최준호가 굳이 콕 짚어 이야기 한 이유가 궁금했다.
“이미 그물에 걸려든 상태고, 발뺌하기도 힘들 텐데 알고 당하는 게 낫죠.”
“엄청 잔인한 거 아냐?”
“이 세상에서 당한 사람이 바보인 겁니다.”
피해자가 불쌍한 것과 별개의 문제였다. 냉정한 그 말에 정주호는 입맛을 다시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응.”
“아마 이쯤에서 대통령이 말을 하려 했을 겁니다.”
“왜?”
“대통령 스타일이라면 능구렁이 넘어가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을 테지만 대통령이란 자리는 각오가 필요하니까요. 출마 준비하고 업무도 배우고 하려면 지금이 딱 적기입니다. 결정적으로.”
최준호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천 실장님이 대통령 되면 일 잘할 거 같지 않습니까?”
“하긴, 그 양반이 일 처리 하나는 엄청 꼼꼼하지. 특히 큰 그림을 그리는 걸 잘하면서 실무에 능통하니 자기 갈아가면서 엄청나게 성과를 거둘 걸?”
전형적인 천명국의 스타일이었다. 혹사에 가까울 정도로 일에 집중하여 성과를 내는.
유능하다고 평가받는 정주호도 스스로 저렇게 할 수 없다고 할 만큼 천명국의 업무 능력은 정평이 나 있다.
“그렇게 말하니 잘 어울리는 거 같기도 하고.”
“저도 접하는 사람이 천 실장님이면 편할 거 같습니다. 정책에 큰 변화도 없을 테고.”
“하긴, 널 위해서라도 그게 나을지도.”
대통령과 최준호의 이해관계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처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두 사람의 합작이 한 사람을 대통령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고 있었다.
정치인에게 있어 대통령의 자리는 늘 꿈꿔오던 것이긴 하나, 천명국에게는 가장 피하고 싶던 끔찍한 경우일 것이다.
“이사님도 잘하실 거 같은데요.”
“나? 어우, 말도 마라.”
“좀 무리였죠?”
“어, 내가 어떻게 대통령을 하냐? 그건 나 죽으란 소리야.”
상상만으로도 끔찍한데 현실이 되면 얼마나 힘들지.
잠깐이지만 지옥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최준호도 농담이었던 듯 더 언급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건.”
“이유가 더 있어?”
“재밌잖아요.”
…악마다.
단순히 재미 하나로 가장 강력한 대통령 후보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정주호는 소름이 돋았다.
“…….”
목을 축이기 위해 술을 들이키던 정주호는 최준호의 시선이 자신에게 틀어박힌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
* *
“대통령님.”
“갑자기 무슨 일인가?”
늦은 시간 방문이었음에도 대통령은 순순히 천명국을 맞이해주었다. 마치 자신이 찾아올 걸 알고 있는 듯한 얼굴. 그것은 불안감을 폭발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불콰하게 술기운이 오른 천명국은 평소라면 할 수 없는 날 선 어조로 물었다.
“사실입니까?”
“음?”
“제가 그동안 인수인계를 배웠던 것이 사실 후계자 수업이었던 것입니까?”
“아, 그걸 말하는 거였군.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됐나?”
“저 지금 진지합니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이렇게 물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천명국은 지금 자신의 태도가 잘못된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경황이 없었다.
차라리 대통령이 아니라고 부인해주길 바랐다. 그랬다면 이 모든 걸 사과하고 두 발 뻗고 편하게 잘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대통령 입에서 흘러나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그게 문제라도 있는 건가?”
“어, 어어?”
“자네가 생각한 그대로라네.”
“…….”
사람이 기가 막힌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정주호의 말을 듣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아닐 수도 있다고, 자신이 예민했던 거라고, 대통령이 많은 배려를 해준 거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순간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대통령이라고?
모든 정치인이 꿈꾸는 최종 종착지가 대통령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자신은 맹세코 단 한 번도 대통령의 꿈을 꿔본 적이 없다.
넋이 나간 천명국을 향해 대통령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천명국 실장.”
“예, 예에.”
“지금 이 나라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나?”
“괜찮다고 보고 있습니다. 대통령님의 국정 운영은 훌륭하여 나라는 부유해지고 위상은 하늘 높이 치솟았습니다.”
실제로 대통령의 지지율은 임기 중후반으로 접어들었음에도 역대 대통령 중 최고치를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하고 다르군. 난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허물어질 모래성으로 생각하고 있네.”
“…….”
“나라 곳간이 채워진 건 북한 지역에 투자를 해야 하고, 각 지방에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골고루 분배를 해야 하지. 비난을 감수하면서 이걸 과감하게 제대로 해낼 정치인이 누가 있을까? 욕을 먹지 않고 선심성으로 퍼주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하지만 국익을 위해 큰 그림을 그리고 당장 욕 먹을 일을 과감하게 해낼 수 있는 정치인은 없다고 할 수 있어. 그리고 국가 위상이라는 것도 어떻게 쌓아 올렸는지 과정을 지켜볼 생각은 하지 않고 영향력을 행사할 생각으로 가득해. 전부 자기 정치만 이야기하지. 자칫 잘못하면 인심만 잃을 수 있어.”
“그야 여당 내 능력자들이 많으니 그분이 대통령님의 의지를 잘 계승한다면 국민들도 충분히 이해를…….”
“내가 말하는 인심은 국민보다 최준호를 말하는 거야.”
“…….”
“가장 중요한 건 최준호를 제어하는 일인 걸 알지 않나? 천 실장은 여당 내 정치인 중 누가 나만큼 최준호를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
천명국은 선뜻 이름을 댈 수 없었다. 대통령이 최준호를 대한 방식은 기존 여의도 셈법과 완전히 다른, 파격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정치인들은 다르다. 그들은 각성자를 통제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각종 규제를 들이댈 수 있을지 타이밍을 엿보고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정치인이 대통령이 된다?
최준호와 어떤 충돌이 일어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다른 모든 건 감수할 수 있어도 최준호 문제만큼은 달라. 다음 대통령의 자격 중 가장 중요한 게 최준호와 잡음 없이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느냐니까.”
“…….”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말이 없었다.
“난 그 적임자를 천 실장 자네라고 생각하고 있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는…….”
천명국은 반론할 수 없었다. 대통령의 말이 하나부터 열까지 틀린 게 없었던 것이다.
고된 스트레스에 해방되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
그게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텨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만들어온 성과인가. 그게 산산조각난다고? 최준호는 세심하게 다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엇나가기 십상이고 세상은 그를 빌런으로 내몰 것이다.
만약 최준호가 빌런이 된다?
“……!”
아찔한 현기증이 엄습했다.
“괜찮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단지 상상만으로 이 정도다. 그런데 현실이 된다? 더 잔혹한 결과가 나올 것임이 분명했다.
그날부로 대한민국은 쇠락에 쇠락을 거듭하게 될 테고.
이렇게 생각하니 대통령의 결정이 이해가 되었다. 그로서도 다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적임자는 천 실장, 자네밖에 없네.”
“대통령님 저는…….”
“걸리는 거라도 있나?”
“아무리 그러셔도 저는 당에 아무런 기반도 없고, 주변에 사람도 없습니다.”
“내가 채워주겠네. 뭐가 필요한가? 당의 지지? 싱크탱크? 당의 조직? 필요한 걸 말만 하게. 아니, 준비가 다 되어 있네. 천 실장 자네가 결정만 하면 돼.”
“…….”
천명국은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그물에 걸려들었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자네가 이름처럼 천명을 받은 걸 수도 있겠어. 중대한 기로에 놓인 대한민국 성공의 초석을 내가 닦고 자네가 발전시키는 거지. 기대되지 않나? 우리가 만들어낼 성공이.”
은근한 목소리로 부추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임기를 마치는 거지. 자네는 자격이 있어. 한 번 해보지 않겠나?”
“…생각해보겠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네.”
이걸 뿌리칠 수 있을까.
엄습하는 아찔함에 천명국은 눈을 질끈 감았다.
*
* *
대통령이 굳이 기사까지 붙여줘서 집에 도착할 때까지 천명국은 멍한 기분이었다.
술은 진즉에 깼다. 오전까지만 해도 은퇴 생각에 희희낙락하던 자신이 대통령에 의해 후계자로 낙점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빠!”
“아이고, 우리 딸!”
근심 걱정 잊게 만드는 딸을 보며 천명국은 환하게 미소지었다.
“술 냄새!”
달려들다 멀어지는 딸을 보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이런 미래를 생각했다. 근심걱정 잊고 가족과 오순도순 살아가는 삶.
여태까지 치열하게 살아왔기에 잠깐 쉬어가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 괜찮은 걸까.
자신이 그만두면? 정말 차기 대통령이 최준호를 제어할 수 있을까?
후임으로 양주혁을 둬도 자신만큼 할 거라 확신할 수 없다.
애초에 차기 대통령의 의지에 달린 문제이기도 하고.
거기에 생각이 미치니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빠! 아파?”
“아니, 아프지 않아.”
바로 묻는 딸의 모습에 천명국은 다시 미소지었다.
그래봤자 다시 걱정이 스며들었고.
한 번 자각하니 고민을 떨쳐내기가 쉽지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미 부인에게 청와대에서 나오면 전국을 돌아다니고 해외도 둘러보며 휴식을 취하자고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대통령에게 없던 일로 되돌려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통령이 언급한 우려가 마음에 걸렸다.
그저 나쁜 전망이 아닌 99.9%로 닥쳐올 현실이기에.
아니, 최준호도 점차 바뀌고 있으니 좋게 갈 수 있지 않을까.
“…….”
그럴 리 없다. 기대할 걸 기대해야지. 아무리 바뀌어도 사람의 본질이 바뀔 리가.
자꾸 안 좋은 상상이 천명국을 자극했다.
샤워로 술 기운을 완전히 씻어버리고 서재에 틀어박힌 천명국은 기프트인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현재 유력한 여당 대통령 후보는 셋. 그들 모두 추구하는 바가 약간씩 다르지만 큰 기조는 동일했다.
만약 그들이 대통령이 된다면 최준호와 궁합은 어떨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가졌다. 대선후보로 거론되는 정치인이라면 충분히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기프트 시뮬레이션은 주어진 정보를 통해 예지에 가까운 미래를 그려낸다. 대선후보에 대한 정보는 충분히 숙지가 되어 있다.
그동안 쌓인 정보와 최준호의 행동을 결합하여 그려진 시뮬레이션의 결과는.
…좋지 않았다. 최악으로 치닫지 않았을 뿐, 이건 자신과 대통령이 힘겹게 쌓아온 모든 걸 날려버렸다. 하나만이 그런 게 아닌 모두가 그러했다.
“야, 야당 후보라면 그래도 가능성이…….”
실낱같은 희망으로 야당의 유력한 대선후보 현영미를 대입해본 결과 파국이었다.
각성자를 강력한 통제 아래 둬야 한다는 강경한 현영미와 조금씩 자기 영역을 늘려나가는 최준호와 궁합은 최악 중에 최악이었다.
어쩌면 최준호가 빌런이 된다는 상상이 현실이 될지도.
그렇다면 방법이 하나다.
최준호를 세심하게 다룰 줄 알고 그를 폭발하지 않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그럼 딱 두 사람이 남는다.
정주호.
그리고 바로 자신.
하지만 정주호는 공직을 벗어던지고 탈출한 상태. 더군다나 자신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대통령의 음모를 알려준 사람이다.
그런 정주호에게 대선 출마를 이야기 한다? 은인의 뒤통수에 칼을 꽂아 넣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차마 은인을 배신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남는 건 자신뿐이다.
천명국은 가장 생각하기 싫었던,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는 전제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다.
“…….”
자신 빼고 모두가 행복한 미래가 그려지는 순간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불 꺼놓고 왜 그렇게 있어요?”
그때 서재의 불이 켜졌다. 문쪽을 보니 부인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천명국은 부인이 내민 꿀물을 들이켰다.
“여보.”
“네.”
천명국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아무래도 나 출마해야 될 거 같아.”
“출마? 국회의원이요? 그거 안 한다고 했잖아요.”
“아니 국회의원 말고.”
“그럼 지방선거요?”
“그것도 아니고.”
“그럼…….”
여전히 이해를 하지 못한 부인에게 천명국은 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 대선에 나가야 될 거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