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ignity of the Chaebol RAW novel - chapter (57)
뭔지는 모르겠지만 정훈이 놈이 하늘이 이 아이에게 뭔가 상당히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 준 게 틀림없다.
난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동생은?”
아까 거실에서 본 가족사진 속엔 하늘이보다 한참 더 어려 보이는 남자아이도 함께 있었다.
“태양이? 태양이는 지금 군대에 있어. 곧 전역이야.”
“아… 그래? 수고가 많네.”
“그러니까. 동생이지만 참 든든해, 그런 거 보면. 기특하지 않아? 내 주위에도 그렇고, 태양이 말 들어 보면 자기 주위 친구들은 어떻게 하면 군대에 안 갈 수 있을까, 누구처럼 빽까지 써 가며 어떻게든 군대를 뺐다던데, 태양이는 입대하겠다고 미국 시민권도 포기했잖아. 누구랑은 완전 다르지?”
그 누구가 혹시 정훈이 놈인가?
어째서 아까부터 계속 “누구처럼.”, “누구랑은” 이런 표현을 강하게 할 때마다 날 콕 찝어서 쳐다보는 것일까?
“그렇네. 누구랑은 많이 다르네.”
분위기가 어색하게 흐르기 시작하자, 결국 영석이가 “크흠.” 하며 분위기를 잠시 진정시킨 뒤, 태산이를 향해 “아버지, 식사하시지요.”라고 말했다.
* * *
식사하는 동안 난 태산이와 영석이가 나누는 대화를 통해, 태산이가 현재 회장으로 있는 미래금융의 대략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태산이가 회장으로 있긴 하지만, 실질적인 경영은 부회장인 영석이가 하고 있고, 그 밑에서 딸 하늘이가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미래금융 쪽에서 재경모직의 지분을 상당수 확보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지분이 홍준이 놈을 불안하게 만드는 거 같았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이 부분은 어느 누구의 편을 드는 게 아니라, 객관적인 관점에서만 봐도 홍준이 놈이 충분히 불안을 느낄 수 있는 내용이다.
하물며 그 관계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지금처럼 틀려 있는 상황이라면, 그 불안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리고 태산이의 둘째 아들 영진이는 미래금융과 관련된 모든 사업에는 일체 관여를 하지 않고, 따로 건물 임대업을 하고 있는 중인 거 같은데, 영진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식사 자리에서 나오지 않았다.
식사를 끝내고 거실로 나갔다.
나는 태산이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태산이가 영석이를 함께 부르면서 자리는 어쩔 수 없이 셋이서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난 오늘 이 자리에 미래금융이 확보하고 있는 재경모직의 지분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순수하게 내 친구 태산이를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거뿐이다.
물론 정엽이의 소식도 얻어 갈 수 있음 얻어 갈 계획이고.
“식사도 끝났으니까, 이제 편하게 용건을 말해 봐. 왜 그간 안 하던 명절 인사까지 해 가며 날 만나고 싶었던 건지.”
“부끄러운 짓이라는 걸 알면서, 염치없게도 정엽이 형에 대한 소식을 좀 얻을 수 있을까 싶어 회장님께 뵙기를 부탁드렸던 겁니다.”
내 말에 태산이와 영석이는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태산이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사촌 형 소식을 왜 여기에 와서 물어?”
“…….”
“네 아버지한테 가서 물어봐. 아님 네 형 정태한테 물어보든지. 그게 훨씬 더 수월하고 빠르지 않겠어?”
“그렇게 한다면 제가 정엽이 형 소식을 궁금해하는 것 자체를 탐탁지 않게 여기겠죠.”
실눈을 뜨고 날 쳐다보던 태산이가, 결국 한발 물러나 주겠단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정엽이 소식은 알아서 뭘 하게?”
“궁금합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가족으로서 궁금합니다.”
그 말에 태산이가 콧방귀를 끼며 웃었다.
“그렇게 더는 한국에서 못 살게끔, 회장님, 사모님 제삿날조차 찾아오지 못하게끔 외국으로 쫓아낼 땐 언제고, 이제 와 가족으로서 소식이 궁금하다? 말에 앞뒤가 안 맞잖아.”
홍준이, 이놈!
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가족 제사에 참석조차 못 하게 외국으로 쫓아내?
그것도 남도 아닌 제 조카를?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다.
정말 지금 당장이라도 홍준이 놈을 찾아가 종아리를 내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정말 그랬습니까?”
“정말 그랬다니, 뭐가?”
“정말 제 아버지가… 정엽이 형과 숙모님을 외국으로 내쫓은 겁니까?”
정말 화가 많이 났다.
표정을 숨기는 것조차 힘들만큼 화가 많이 났다.
화를 억지로 참으며 물어본 그 말에 태산이는 물론이고 영석이까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몰랐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몰랐습니다.”
“허, 허….”
“정말 몰랐습니다.”
난 더 이상 내가 하는 말에 그런 비웃음을 보이지 말라는 뜻으로 태산이를 강하게 쳐다보았다.
그러자 태산이는 내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하는 거 같았다.
“제가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무슨 낯짝으로 회장님을 찾아와서 정엽이 형의 소식을 묻겠습니까?”
“…….”
“제 아버지와 제 가족이 그런 결정을 한 것일 텐데, 그냥 아버지한테 왜 그런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는 게 정상이지, 회장님을 찾아와 정엽이 형의 소식을 물을 순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정말 몰랐다?”
태산이.
정말 미안하네.
내 지금부터 자네한테 작정을 하고 거짓말을 좀 해야 할 것 같네.
그러지 않고서는 정엽이 놈의 소식을 자네 입을 통해 들을 수가 없을 것 같아.
아무래도 자네는 날, 아니 정훈이 놈을 믿지 못하는 거 같고, 그런 자네를 나 역시 충분히 이해하기 때문에 지금부터 내가 하는 거짓말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는 거짓말이야.
그렇게 이해를 좀 해 주게.
* * *
그걸 좀 다시 가져와야겠는데요?
“추석 전날 제가 전화를 드렸을 때, 회장님과 제 할아버지 두 분이서만 알고 있을 이야기를 제가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물으셨지요?”
이야기를 꾸며 내기 시작했다.
“혹시 제 할아버지가 틈틈이 일기를 쓰셨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물론 내가 지어내고 있는 말이다.
난 일기 같은 걸 쓰는 사람이 아니다.
난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항상 앞만 보고 달렸던 사람이지.
실패를 통해서도 배울 게 있다?
아니.
난 그렇게 감성적으로 기업을 키우지 않았다.
실패는 실패.
난 실패를 붙잡고 되짚어 보는 걸 혐오했던 사람이다.
대신 작은 성공을 통해 더 큰 성공을 만들어 나가는 걸 즐겼다.
“일기? 회장님이? 글쎄… 난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얼마 전 본가에 들렀다가, 본가 창고에서 스무 권도 더 넘는 할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매일 쓰신 건 아닌 거 같고, 특별한 일이 있으셨을 때나 꼭 기록에 남길 만한 일이 있으셨을 때마다 일기처럼 쓰셨던 거 같습니다.”
태산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는데, 본바탕 자체가 남을 의심하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라 여기에서 내가 조금만 더 이야기를 잘 꾸며 내면 금방 넘어올 것도 같았다.
“그 일기의 첫 시작이 1952년이었습니다. 그때 제 할아버지는 당시 합당포 쪽 어딘가에 있는 포목점에서 옷감 만지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고, 거기에서 그 포목점 주인의 아들이셨던 회장님을 처음 만났다고 적어 놓으셨더라고요. 회장님의 첫인상을 태어나 제대로 된 고생 한번 해 보지 않은 샌님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정작 이 대화에 가장 관심을 보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영석이었다.
자기 아버지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라서 그런 것일까?
곧 태산이도 웃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은 나의 일기장을 믿기 시작했다.
“허, 허, 허… 그래, 맞아. 나보다 키도 이만큼이나 작으셨던 분이, 친구가 된 뒤부터 꼭 날 장난처럼 샌님이라고 부르셨지. 회사가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밑에 직원이 많아진 뒤에야 그런 농담을 그만두셨는데, 그래도 가끔 단둘이 친구처럼 편하게 술을 마실 땐 다시금 날 샌님이라 놀리곤 하셨어.”
“그리고 제가 지금 당장 기억이 나는 내용은… 아저씨 계신 자리에서 꺼내도 될 내용인지 모르겠습니다.”
난 자리에 함께 있는 영석이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영석이는 이미 다 지난 일들인데, 어떻냐며 궁금하단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1984년에 중동 건설 붐이 불었을 때 중동에 나가 있던 재경건설 기술자 한 명이 사고로 현장에서 죽었던 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태산이는 숨을 들이켰다.
“그때 할아버지께선 그룹 임원들이 다 있는 앞에서 당시 건설 총괄 관리를 맡고 계셨던 회장님의 촛대뼈를 사정없이 걷어차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흠….”
“임원들 앞에서 그런 감정적인 모습을 보여야만 했던 당시 제 할아버지의 심정은 너무 가슴이 아프고 또 회장님께는 정말 미안했지만, 정말 속이 상했던 건 회장님께 미안했던 그 마음을 나중에라도 솔직하게 전달하지 못했던 거라고 일기에 적어 놓으셨습니다.“
“그런 걸 뭐 꼭 말로 해야 아나. 그때 회장님이 임원들 다 있는 앞에서 그렇게 안 하셨음 그 책임은 내가 다 짊어지고 회사를 떠나야 했을 텐데, 그걸 막겠다고, 그 책임을 본인이 지시겠다고 일부러 그런 연기를 하셨던 걸 내가 모를 리가 있나.”
“…….”
“그릇이 큰 분이신 거 같다가도 그런 거 보면 참 마음이 여렸던 분이야.”
고맙네, 이 친구야.
이렇게라도 내 마음을 조금은 가볍게 만들어 주어서.
“분명 제 할아버지는 지금의 재경 꼴을 원하셨던 게 아닐 겁니다.”
난 다시 한번 태산이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리고 말했다.
“가정에 대한 정보다는 회사와 사업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한 분이셨던 거 같은데….”
이제야 나 스스로 나란 사람이 객관적으로 보인다는 게 모순이었다.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도 난 손중길이라는 인물 자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거 같다.
“많이 늦었지만, 저라도 정엽이 형을 만나 보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회장님.”
“내가 떨어뜨려 놓은 게 아닌데, 여기 와서 나한테 도와 달라고 하면 어쩌나, 이 사람아.”
“정엽이 형이 계속 눈에 밟힙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동안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가능하다면?”
“최소한의 것들은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아야겠단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원래의 자리로?”
“정엽이 형은 집안의 장손입니다. 큰아버지가 아무리 무책임하게 그런 선택을 하셨다고 해도, 집안의 장손이 할아버지, 할머니 제사도 못 챙기고 있고, 그 세는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아직 재경의 계열이 몇 개나 남아 있는데 집안 장손이 바깥에서 저렇게 따로 돌고 있다는 게 저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뭔가 착각을 해도 단단히 하고 있구만.”
갑자기 태산이가 눈에 힘을 주며 내게 말했다.
“착각이라니요?”
“홍명이가 무책임했다? 누가 그러던가? 자네 아버지가 그러던가? 자네 어머니가 그러던가? 아니면 당시 그 일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일방적인 보도를 내보낸 언론 기사를 보고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건가?”
태산이는 주먹을 말아 쥐며, 마치 살까지 달달달 떨리는 모습으로 내게 말했다.
“홍명이는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했고, 그런 홍명이를 그렇게 만든 건….”
“아버지.”
재빨리 영석이가 태산이의 말을 막아 세웠다.
그래서 난 영석이에게 괜찮다고 말한 뒤 태산이에게 하려던 말을 끝내 달라고 했다.
“바로 자네 아버지란 인간이야.”
그럴 거란 예상은 이미 확신처럼 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을 태산이의 입을 통해 확인을 받고 있자니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바로 자네 아버지, 손홍준이. 그리고 자네 어머니 장혜란이, 그리고 자네 외가 쪽 부경 그룹 인간들… 그 인간들이 자네 큰아버지 손홍명이가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궁지로 내몬 거라고.”
부경 그룹 쪽에서 그 당시 어떠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말이 되는 건가?
“아버지. 그만하세요. 그게 언제 적 이야기에요? 다 지나간 일 이제 와 들춰내 뭐 하시려고요?”
영석이가 손을 뻗으며 태산이를 말렸다.
“누가 들춰내겠다고 그래? 정훈이 이놈이 물어보잖아.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다시 한번 날 쳐다보는 태산이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모릅니다. 그리고 부경 그룹이… 뭘 어떻게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태산이는 자신의 아들을 향해 기가 막힌다는 듯,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거 봐. 정말 아무것도 모르잖아. 모르는 게 맞겠네. 아니, 모르는 게 확실하네. 뭘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렇게 날 찾아와서 정엽이 소식을 묻는 게 아니겠냐고.”
결국 영석이는 자신의 아버지를 말리기엔 역부족이란 판단이 섰는지, 이번엔 날 말리며 이미 지나간 옛날 일이라는 식으로 그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하자고 말했다.
“전 좀 더 듣고 싶은데요.”
부탁하듯 영석이에게 말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저씨.”
결국 영석이는 자신은 크게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일이라, 자리를 비켜 줄 테니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라는 말만 남겨 놓고 한숨을 내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큰아버지가 그런 결정을 내린 데에, 제 아버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부경 그룹이 뭘 어떻게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태산이의 입에서 아주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자네도 영 헛방이구만.”
“네?”
“최근 자네가 회사에서 기특한 일을 몇 번 해냈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하긴.
어쨌거나 현재 태산이는 재경모직의 대주주 중 한 명이다.
노조 문제로 세상이 시끄러웠는데, 그에 관한 회사 내부 정보 정도야 얼마든지 챙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영 실망스럽네. 재경 역사의 기본적인 내용도 모르고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 내가 이걸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