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142
142화
‘덜컥.’
“아가씨이이…….”
문을 열자 입은 웃고 있지만, 이마에 심각한 그림자와 함께 머리 위에는 뿔을 단 마야가 매서운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마야….”
우리 마야. 저런 표정을 지을 줄도 알았구나. 험악한 듯 험악하지 않은 마야의 표정에 나는 아리아가 준 종이 가방을 아무렇지 않게 건넸다.
“자, 이거.”
“…….”
“무도회 끝나고 아리아랑 마을로 내려가서 놀다가 늦었어. 마야가 생각하는 그런 거, 없었으니까….”
“제가 생각한 게 뭔 줄 알고요.”
“…몰라.”
“그렇죠. 설마 저희 아가씨께서 가면무도회에서 술을 하도 많이 마셔서 자신도 모르게 공작님을 유혹해서는 공작님의 저택에서 초야를 치르셨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마야도 참……!”
‘어떻게 알았지?!’
정확하게 집어내는 마야의 능력에 나의 입술은 반짝 말라 갔다. 대충 얼버무린 소리가 아니라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한 마야의 말에 나는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것인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처럼 일단 발뺌을 할 것인가 중에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민할 시간은 길지 않았다. 길게 끌면 오히려 날 더 의심하고 들 테니.
“소설을 써, 아주 그냥. 솔직히 말해 봐. 백작 영애의 드레스 자락을 훔친 이야기. 사실, 마야가 작가 아니야?”
“…크흠! 그런 거… 아닙니다.”
‘어쭈? 눈을 피했다? 오케이. 들켰어. 범인은 마야, 너였구나!’
책 이야기와 함께 작가 이야기를 하니 눈을 돌리며 어색하게 웃는 마야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놓칠 일 없는 동체 시력의 엘리자벳이었다.
“하, 내가 말없이 외박한 것보다 자기 주인을 모티브로 성애 소설을 쓴 시녀장이 더 큰 문제인 것 같은데.”
나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마야는 아까의 험악한 얼굴을 치우고선 이젠 반대로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귀엽다고 해야 하나. 본인의 꾀에 본인이 넘어간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리라.
“흐응~ 어떻게 할까.”
이제는 내가 갑이 되어 여유롭게 어깨를 들썩이며 마야를 바라보았고 마야는 여전히 내 시선을 회피한 채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근데…. 이 종이 가방은 뭐예요…!”
어떻게든 말을 돌려 보려는 마야였지만 하필 말을 돌려도 종이 가방 속 내용물이라니. 이건 신이 주신 기회인지 아니면 마야의 운이 나빴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내가 살고 봐야지.
“나보다 마야가 더 잘 알 것 같은데.”
“…??”
“누가 가녀린 백작 영애의 드레스 자락을 훔쳤는가 4권.”
“…….”
마야는 슬슬 얼굴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어깨 손을 올리고선 마저 입을 열었다.
“마야가 좋아할 것 같아서 아리아랑 같이 마을 내려간 김에 샀거든. 근데 필요 없겠네? 마야가 이 소설의 작.가.니.까.”
‘작가’라는 말에 강조한 나의 말에 너무 놀란 것인지 딸꾹질을 하던 마야가 이윽고 제 손에 들린 종이 가방을 놓치고 말았다. 요란한 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제법 묵직한 것이 떨어진 소리가 방 안을 채웠고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던 마야가 서둘러 내게 다가왔다.
“에고, 우리 아가씨. 어서 씻으셔야죠! 자자, 목욕물 받아 놓을 테니까 잠시 기다리세요~.”
라는 말과 함께 욕실로 향했고 나는 그런 마야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마야가 떨어트린 종이 가방을 들어 책을 확인했다. 목욕물을 받는 동안 책을 한번 읽어 볼까. 우리 마야가 얼마나 잘 썼으려나.
목욕 준비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소파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고 이전과 다른 스토리 전개에 눈을 끔뻑였다. 여전히 드레스 자락을 훔친 이가 누구인지는 안 나왔지만, 확실히 진도가 빨라진 느낌이 든단 말이지.
“헉…! 아가씨!”
어느새 목욕 준비를 끝마친 마야가 욕실에서 나왔는지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며 놀란 채 허겁지겁 내게 다가와 책을 내려놓게 시키곤 억지로 욕조에 몸을 담그게 시켰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인데 저럴수록 더 놀려 주고 싶은 걸 모르는 걸까.
‘뭐, 내 외박만 잘 넘어가면 될 일이니 인제 그만 놀려 먹도록 할까.’
“아, 내일 아리아랑 같이 쇼핑 가기로 했어.”
“그러고 보니 아타샨 영애께서 모레면 영지로 내려가신다고 하시더니 마지막은 아가씨랑 놀고 싶으셨나 봐요~.”
“그렇지. 내려가는 김에 아리아 선물도 좀 사 줘야겠어.”
“헤에, 그럼 마담 르쉘 살롱에 가서 옷 선물을 해 드리는 건 어때요?”
“옷?”
“네, 요새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건데 친한 친구끼리 같은 옷을 입어서 친분을 과시하는 의상이 유행이라고 하더라고요.”
‘트윈 룩 같은 건가.’
나는 마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드레스로 어떻게 트윈 룩을 입을 것인지는 매우 의문이지만. 그러고 보니 나 그래도 정식 기사가 된 것 같은데 어째 기사복보다 드레스를 더 많이 입는 것 같단 말이지.
“흐응….”
“왜 그러세요?”
“내일 기사복 입을래.”
“에에? 갑자기요?”
“아리아를 위한 이벤트라고나 할까~ 아, 남성용 가발도!”
“…? 이벤트를 하는데 가발은 왜….”
“그런 이유가 다 있단다.”
남성처럼 꾸미고 거리를 활보해 보고 싶었고 제아무리 아타샨 남작이 새로운 작위를 받는다고는 하나 수도의 사교계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말이다. 특히 귀족파의 탈을 쓰고 있던 아타샨 남작가의 영애가 황제의 히든카드이자 제국 유일의 공녀와 친구라는 사실은 아리아를 곤경에 처하게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날 이제 악녀로 보지 않는다. 그러나 귀족파들에게. 특히 오즈번을 추종하는 그들에게서 난 여전히 악녀여야 한다. 그것도 향락과 사치에 빠진. 그런 악녀 옆에 ‘청렴’을 지키는 아타샨가의 영애가 있다면 보기 좋은 먹잇감이 될 거야.
“하아…. 그냥 폐하께 부탁해서 그 눈 색 변하는 약이라도 받아 놓을걸.”
“아? 그거라면…. 있어요.”
“응?”
분명 황제의 전유물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타국의 사신단이 준 조공품으로. 근데 왜 그게 우리 집에도 있다는 걸까. 설마 카를시아가 그것마저 나에게 선물을 준 건 아니겠지?!
“어제 가면무도회 준비하고 남은 약이 있거든요.”
어제 가면무도회를 위한 가면과 함께 배달되어 온 약병을 기억해 낸 나는 ‘오!!’라는 반응을 보이며 마야를 쳐다보았다. 그런 나의 모습에 ‘요번엔 또 무슨 사고를 치시려고…!’의 눈빛을 하는 마야를 무시하고선 몸을 일으켰다.
“아리아에게 가서 내일 아주 재미난 일이 있을 테니까 각오해도 좋다고 전해 줘~ 그리고…. 디저트 가게에 일러 세상에서 제일 달콤하고 아름답고 맛있는 딸기 케이크도 준비하라 이르고.”
“…?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후후, 그런 게 있어. 그것보다 내가 비운 사이 뭐…. 별다른 일은 없었어?”
“별다른 일이 없었긴요! 다들 아가씨 찾느라 온 저택과 황궁을 다 찾았다고요!”
아니, 그 일을 말한 건 아니었는데 정말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다. 마을 내려간 김에 고생하는 마야랑 제롬의 선물도 하나쯤은 사 와야지. 어차피 돈 많은 엘리자벳이었다. 그녀의 금고엔 늘 돈이 있었고 그녀는 항상 그 돈을 물 쓰듯 썼었지. 다른 소설 보면 투자나 부동산을 하기도 하던데….
‘난 굳이 입지를 다질 필요도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쓰기만 할 것이다. 정말로. 펑펑! 어차피 빈센트가에 들어오는 돈의 절반은 모두 엘리자벳의 용돈이라 말할 정도로 아나이스가 펑펑 퍼 주고 있으니까.
“내일 또, 가 볼 만한 곳이 있으려나.”
“한 번 찾아볼까요?”
“뭐, 찾아서 나쁠 건 없지.”
욕조에서 나와 물기를 닦고 가운을 입은 채 방으로 돌아오자 제법 쌀쌀한 바람이 ‘훅’ 하고 들어왔다. 수확제가 있는 시점이 9~10월이었으니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이다.
모르크 제국의 겨울은 유독 혹독하다고들 하던데. 수도 지역은 그나마 따뜻한 수준이라 하였고 그 따뜻함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만 소설 속의 언급에선 서울 정도의 한파라고 하였다. 그래, 그 서울 한파가 따뜻한 것이라면 다른 지역이나 수도 외의 지역들은 시베리아 수준의 추위일지도 몰라.
“에고, 아가씨 감기 걸리실라. 벽난로에 넣을 장작 좀 들고 올게요~.”
“가는 김에 따뜻한 코코아도.”
“네~.”
이곳에 빙의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겨울이 다가오다니. 그리고 엘리자벳에게 겨울은 그 어느 해보다 춥고 잔인했으며 차가웠다. 비가 내렸다. 지독할 정도의 많은 비가. 그 빗속에서 그녀는 처연하게 걸어 나갔다.
자신의 목이 차가운 단두대의 나뭇결 사이로 들어가고 있음에도 아무렇지 않던 그녀의 마지막은 참으로 비루했다.
“후….”
그러나 이제 그런 죽음은 없다. 그러니 이제 엘리자벳에게도. 나에게도. 올해의 겨울은 따뜻하기를. 차갑고 쓰라린 겨울이 아니기를.
“그것보다 오즈번이 너무 조용하단 말이지. 아직 사라진 벨루아 후작도 못 찾은 것 같고.”
그들이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그건 알 수 없었다. 원작에선 없었던 내용이니까. 그러나 확실한 것은 저 두 사람이 엘리자벳을 죽인 원흉이라는 것과 아울러 내가 죽을 뻔한 모든 것들의 원인이라는 건 분명했다.
“아가씨, 여기 코코아요.”
“고마워.”
어느새 주방을 다녀온 마야가 나에게 코코아를 건넸고 벽난로의 불을 땐 뒤, 방을 나갔다. 타닥거리는 벽난로의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고요한 방 안에서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생각했다. 내가 저들이라면 그다음은 무엇을 했을까.
‘호로록’거리며 코코아를 마시자 진하게 느껴지는 달달함이 내 목을 부드럽게 녹이기 시작했다. 수확제에서 오즈번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엘리자벳은 죽음을 맞이했고.
“그렇다면 엘리자벳이 자객을 보낼 정도의. 정확히는 자신이 스스로 자객이 되어 검을 들 만큼 커다란 일이 요 앞에 있었다는 것일 텐데….”
그래, 단순히 엘리자벳이 황제가 사랑하는 오즈번을 죽이기 위해 살수를 보내진 않았을 터.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계획적으로 움직였으니까.
“이미 수호 기사단이나 그림자 기사단이 오즈번을 감시하고 있을 테니…. 괜한 기우이길 바라야지.”
여전히 코코아는 달달했다. 그저 현실에 안주하기로 한 나는 멍하니 창문을 바라보았다. 지금 당장 생각할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저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던 엘리자벳의 기억을 찾아 신의 힘을 얻는 것. 그래, 가장 중요한 일은 그것이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