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54
54화
“……!!!”
자신이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점들이 모두 해결되는 듯한 아나이스의 말에 아라한은 제 머릿속에 있던 퍼즐 조각들을 하나하나 맞춰 가고 있었다.
자신도 생각하지 않았던가. 고작 5살짜리 아이가 위협을 해 봤자 얼마나 위협을 했다고 아이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놨을까에 대한 의문을 말이다. 그저 엘리자벳이 검술의 영재라 생각하고 넘길 문제가 아니었음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녀가 신의 가호를 받은 자라는 것을. 그저 엘리자벳을 죽이기 위해 그리도 처참히 상처 입힌 줄 알았다.
하지만 아나이스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명백히 그들과 싸웠던 흔적이며 저항의 흔적이리라. 어린아이가 저항한다고 하여서 그리 무참히도 상처 입히진 않았을 터. 그 말인, 즉 카를시아와 엘리자벳을 납치한 범인은 그녀가 신의 힘을 가진 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답은 하나겠지.”
“…그래서 그들은. 그러나…! 왜 폐하까지…!”
만약 아나이스의 말대로라면 신의 가호가 있는 엘리자벳만 납치하여 번제물로 드리는 것이 마땅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굳이 카를시아까지 납치하면서까지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진 않았을 터. 그렇다면 그 당시 황태자였던 카를시아가 납치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애초에 먼저 실종이 되고 납치된 것은 카를시아였다.
“범인은 그 당시 황태자였던 망할 꼬맹이를 납치하면 당연히 이 내가, 황태자비라 거론되었던 엘리자벳을 어딘가에 숨길 것이라 확신했던 놈이겠지. 평소엔 엘리자벳의 곁엔 내가 붙어 있으니까.”
“그 말은 즉, 아나이스 님의 동향과 황제 폐하의 의중까지 파악이 가능한 사람이라는 것이군요.”
“그래. 거기에 엘리가 신의 힘을 가진 자라는 걸 아는 자의 소행일 가능성이 크지. 짐작되는 범인은 있으나 물증이 없구나.”
“…혹시 그래서 말씀하신 것이 벨루아 후작과 루시엘라 후작입니까?”
“…….”
아나이스는 대답 대신 침묵하였고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는 아라한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아라한은 아나이스에게 카를시아가 현재 그 사건을 비밀리에 조사한다는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카를시아의 신신당부이기도 했고 이건 카를시아, 자신이 엘리자벳에게 할 수 있는 사죄의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재 카를시아도 물증이 없지만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
‘벨루아 후작.’ 그리고 ‘아르텐’.
누구보다 황제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자신들이 견제하고 있는 아나이스의 동태를 살피며 일을 꾸밀 수 있는 자는 ‘그’밖에 없었다. 게다가 신전이 개입된 문제라면 현재 엘리자벳의 옆에 알짱거리고 있는 ‘아르텐’밖에 없으니 카를시아는 그 점을 먼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물론 아르텐이 14년 전, 신전의 개입 때. 사제로 신전에 있었는지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하아, 일단 대사제의 축복 없이도 즉위식과 계승식은 진행할 것이다. 신전에 그리 전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럼 이틀 뒤, 재판에서 뵙도록 하죠.”
“엘리와의 약혼 건은 엘리의 마음을 얻은 뒤 내가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발표될 것이야.”
“예, 명심하도록 하죠.”
자신을 향해 능글거리는 미소를 지은 채 물러나는 아라한의 모습에 기가 찬 아나이스였다. 조그마한 아이였던 애가 벌써 제국의 흐름을 읽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엘리자벳의 비밀까지 알고 있었다니.
“모르아나 빈센트처럼 만들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대외적으로 모르아나 빈센트는 그저 황궁에 입궁하는 날 사살당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은 매우 비참했다. 빈센트가의 역사서에 따르면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신전의 신탁이 내려와 그녀를 제물로 삼으라는 내용이었고 그것을 막기 위해 황궁에 입궁시키려 하였지만, 그녀 역시 납치되어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온몸에 남은 사제의 징표. 그리고 저항했던 무수한 많은 흔적. 납치되는 과정에서 생긴 일들을 그녀는 온몸에 새기고 또 새겨 빈센트 가문에 알렸다. ‘신의 가호를 이어받은 자’의 비참한 말로를.
해서 빈센트가에서는 그들의 존재를 숨겼었다. 그리고 엘리자벳이 태어났을 때. 아나이스는 직감했다. 그녀 또한 ‘신의 가호를 이어받은 자’라는 것을.
“이번엔 기필코 그 범인을 잡아 모조리 죽일 것이다. 제국과 황가에 대적하는 행위라 할지라도.”
* * *
“으아아! 심심해…!”
오늘은 귀족 재판이 있는 날이라고 해서 아라한의 수업도 없고 아나이스도 호른도 모두 출타 중인지라 매우 심심한 상태로 방에서 뒹굴뒹굴하고 있는 나였다.
“음…. 근데 일정이 너무 빡빡한 거 아냐…? 바로 이틀 뒤에 즉위식이랑 계승식이 있으니까….”
아라한의 말에 의하면 원래 다음 날이어야 하는 즉위식과 계승식은 신전의 일정과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이틀이 연기되었다고는 하지만 생각 외로 그 준비는 빠듯했다.
계승식과 즉위식 이후 엘리자벳인 나의 이름은 ‘엘리자벳 아르엘시아 빈센트’가 되고 제국 유일의 공녀가 되겠지. 또 축하 연회도 연다는 것 같던데…. 윽, 귀찮은 일투성이야.
“아가씨? 뭐 하세요?”
“음…. 어떻게 하면 날려 먹을 수 있나 고민 중이야.”
“뭘 날려요…?”
“내 목.”
“……? 아이, 참. 큰일 날 소리 하시네요. 아가씨 목이 날아가는 날엔……. 음- 이 제국이 사라지지 않을까요?”
“그렇겠지? 네 생각도 그렇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선생님. 저는 분명 악녀로 죽으려고 발도 밟고 독도 먹이고 비아냥거리고 별짓 다 한 것 같은데요. 성공한 게 하나도 없어요.
“그것보다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손님? 오즈번은 아닐 거고…….”
“그때 아가씨를 치료해 주시던 사제님 같던데요?”
“…!!! 아르텐!!!”
내가 최애캐의 존재를 잊고 있었구나!!! 신전에 가서도 못 보던 히든 캐릭터 같은 녀석 같으니라고!! 역시 나의 최애캐다워!!
“그런 건!! 진작 말해 줬어야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아르텐을 만날 생각에 싱글벙글거리며 옷을 고르고 있었다. 화려한 옷보단 역시 수수한 옷이 낫지. 일단 코르셋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라고 하기엔 이미 편한 바지의 형태로 되어 있는 기사복을 입은 나였다.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보다 당분간은 이런 기사복을 입을 것 같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나서 응접실에 있는 아르텐을 만날 생각에 절로 지어지는 미소는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작중 등장이 제일 적은 만큼 만나기도 어려운 아이라고!!
“아가씨, 너무 헤벌쭉한데요.”
“마야는 모를 거야, 이 애끓는 덕질의 마음을.”
“…덕? 뭐요? 어휴, 아가씨가 점점 이상해지시는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에이~ 걱정하지 마!”
나는 호탕하게 웃으며 마야를 안심시키고선 응접실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독살 사건 이후로 처음 맞이하는 아르텐이기에 더 설레는 기분은 뭐지!!
크으, 아무리 생각해도 빙의돼서 제일 좋은 점을 꼽자면 권력과 재력도 아닌 최애캐 덕질이라고 자부할 수 있다! 저 윤기 있는 머리카락은 맑은 강물을 보는 듯 투명한 물색이었다는 표현이 적절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모양새가 정말 강물을 보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 아래에 자리 잡은 영롱한 청안은 푸르른 하늘을 바라보듯 올곧고, 정직했으며 햇빛을 머금은 싱그러운 아침을 보는 듯했다고 서술했었는데.
정말이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더 잘생겨 보인다. 아아,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 엄마, 저는 정말 성공한 인생을 산 것 같아요.
“영애, 몸은 괜찮으십니까?”
얼음을 녹이는 봄날의 바람처럼 따뜻하고 나긋한 목소리라 표현했던 작중 아르텐의 목소리는 늘 듣고 싶을 정도로 황홀할 지경이었다.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나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고 조심스레 아르텐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내가 드레스가 아닌 기사복을 입은 것을 확인한 것인지 아르텐은 ‘잘 어울리십니다.’라는 말과 함께 나에게 이곳에 온 용건을 말해 주었다.
“음, 괜찮아 보여서 다행입니다. 일단…. 이렇게 급하게 방문하게 된 것은 신전에서 영애께 전해 드릴 게 있어서요.”
“……? 할아버지가 아니라 저한테요?”
“예.”
자신의 가슴팍에서 봉투 하나를 건네는 아르텐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전 방문은 물론 내가 하였지만 나한테 서신을 썼다는 아르텐의 말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들이 편지를 보낸 목적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즉위식과 계승식 관련 내용임이 분명할 것이고 그건 아무래도 아라한이 말했던 ‘대사제의 부재’ 때문이리라.
그러니 더더욱 내가 아니라 아나이스에게 가야 할 서신임에도 불구하고 아르텐은 ‘나에게’ 전해 줄 것이라 하였다.
어서 뜯어보라는 듯 나를 쳐다보는 아르텐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바로 개봉한 나는 편지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반갑습니다. 아르엘시아 영애. 부사제를 통해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의 부재로 인하여 비록 부사제가 내리는 축복이지만 신전의 인장이 찍힌 이 편지를 대사제의 축복으로 대체하실 수 있다면 부디 지엄하신 카를시아 세닐 모르크 황제 폐하께 전해 주십시오.
영애께서는 그 누구보다 잘 해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모든 발걸음 안에 모든 진실이.
그 진실을 향해 검을 겨눌 때 한 치의 흔들림이 없기를 기원합니다.
영애의 검은 곧 빈센트, 제국을 수호하는 검이 되어 제국을 지킬 것입니다.
엘리자벳 아르엘시아 빈센트 공녀께 찬란한 아르켈미스의 축복이 깃들기를.
신탁의 주인인 엘리자벳 아르엘시아 빈센트 공녀께
-아르켈미스의 사자 올림』
대사제의 편지인 듯 보이는 글엔 무언가 이상한 점이 몇 가지 있었지만, 아르텐이 무얼 알겠냐며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다. 정확히는 대충 이 글의 이상한 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렸다고나 할까. 신전에 간 적이 없는 엘리자벳의 기억 속에, 신전에 대한 기시감과 꿈의 내용을 생각한다면.
‘신탁의 주인’이라는 단어가 조금 신경 쓰이지만, 이걸로 됐어. 확실하게 엘리자벳은 어릴 적에 신전에 간 적이 있는 거야. 그게 아니더라도 그녀의 과거에 신전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이겠지.
‘그리고 이 신탁의 주인이 엘리자벳이란 걸 대사제는 알고 있다는 것이고.’
나는 읽어 내렸던 편지를 다시 곱게 접어 봉투에 넣고는 고개를 들어 아르텐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