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8
8화
누가 봐도 아라한이었다. 무려 어제 나와 첫 춤을 춘!! 아라한이 분명했다. 목소리가 익숙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나는 혹여나 아라한에게 나의 모습이 들킬까, 서둘러 모자를 눌러썼다.
“……하?”
그러나 이미 나를 알아본 것인지 아라한은 의문이 섞인 한숨을 내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이럴 땐 아무렇지 않은 척,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척하면 의문을 표했던 아라한도 ‘잘못 봤나?’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서 서둘러 화제를 돌리는 나였다.
“아, 참! 아가씨께서 의상을 찾아오라고 하였는데… 얼른 의상실로 가 봐야겠다!”
“…….”
“…….”
어색한 침묵이 몇 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긴 침묵이 싫었는지 먼저 말을 뱉은 건 나였다.
“저… 이미 들킨 거죠.”
“당연하죠.”
“…….”
“하아. 그 꼴은 또 뭡니까.”
“예…?”
“제가 설마 당신 얼굴을 못 알아볼 거로 생각했습니까? 아르엘시아 영애.”
“…….”
대놓고 들으니 조금 마상인데. 나름 잘 변장했다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허무하게 들키다니. 마야, 미안해. 바로 들켰어.
“어떻게 알았느냐, 라는 눈빛인데…. 제국에 단 한 명밖에 없는 은안을 모를 리가 없죠. 게다가 첫 춤을 춘 상대이지 않습니까.”
“……하. 하하, 참 대단하시네요.”
“그래서 왜 그런 복장으로 마을에 나선 겁니까. 호위도 없이요. 게다가 아이를 위해서 뺨까지 맞으시다니.”
“…….”
“침묵하는 것을 보아하니 나름의 사정이 있나 보군요.”
그는 나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고개를 휘저으며 짧게 혀를 찼다. 내 모습이 그렇게도 이상한가 싶어 요리조리 옷맵시를 확인하던 나는 무언가 달라진 느낌에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시트러스 향이 안 느껴졌는데.”
“…….”
내가 작게 중얼거리던 소리가 들렸는지 아라한은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일부러 안 뿌린 것일까.
“안 그래도 영애의 저택에 방문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뿌리지 않은 것이니 오해하지 마세요.”
“……오해는 하지 않았지만, 굳이 공작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후, 그 이야기는 됐고, 저에게 하고 싶은 말…. 없으십니까?”
“뭘요?”
“…신문의 내용 말입니다. 설마 신문도 안 읽으시…….”
“아, 그 대서특필된 악녀, 엘리자벳 아르엘시아 이야기 말입니까? 대단하던데요. 공작님을 유혹해서 춤을 춘 것부터 시작해서 공작 부인을 노리고 공작님을 협박했다, 까지- 아주 거하게 이용하셨던데.”
“…….”
내가 신문의 내용을 직설 화법으로 뱉어 내자 부끄러운 것인지 아니면 민망함인지 모를 당혹함으로 얼굴을 붉힌 아라한이 그만하라며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만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아, 그런가요. 밑에 있던 소소한 내용도 다 들려드려야 하나 고민했는데, 잘됐네요.”
“…죄송합니다. 저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뭐, 자주 있는 일이니 괜찮습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내 대답이 더 안쓰러워서일까, 아라한은 제 어깨에 올린 손을 치우곤 고개를 숙인 채 나에게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아뇨, 정말 죄송합니다. 빈센트 후작님을 뵐 면목이 없네요.”
음, 그건 인정. 빈센트 후작. 아나이스 빈센트는 지독한 손녀 바보다. 해서 엘리자벳이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그것을 케어하고 뒷수습하는 것은 모두 빈센트 가문의 일이었다. 그런 손녀 사랑이 지극한 아나이스에게 오늘 대서특필된 신문의 내용은 어떤 생각을 들게 할까.
“사실, 아침에 다녀가셨지만 말이죠.”
“…할아버지가요?”
“예. 아직도 그 말이 생생하네요.”
“그 말이라뇨.”
아라한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아나이스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너냐? 내 손녀를 건드린 놈이?』였던 것 같습니다.”
“…….”
하아, 손녀 바보 할아버지 아니랄까 봐. 으앙, 그런 말 낯간지럽다고.
“하…. 하하하, 할아버지께서 워낙 저를 사랑하셔서… 하하하….”
‘그래도 그렇지 제국 유일의 공작에게 놈이라니. 아, 주여. 저에게 왜 이러한 설정의 캐릭터에 빙의하게 하셨나요.’
사실, 가족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않은 나에게 아나이스나 호른의 과분한 사랑은 어색했다. 가족들을 듬뿍 받고 자랐더라면 하루빨리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빨리 돌아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일단 뭐든 닥치는 대로 악행을 행해서 어제 당장 목이 댕강 날아갔을 수도 있을 일이었다.
그냥 목적 없이 나오긴 했지만 나온 김에 오즈번이 자주 드나드는 의상실 위치나 알아보려고 했건만. 일이 이미 틀어진 탓에 그냥 집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나는 아라한에게 물었다.
“…하하, 이제 공작님은 저택으로 돌아가실 건가요.”
“일정이 다 끝났으니 이제 다른 일정을 만들 생각입니다.”
“……?? 다른 일정이요?”
“예, 당신과 함께 거리를 둘러볼 생각입니다.”
“아? 갑자기……?”
당신이랑 제가 얼마나 친하다고 그러세요. 제 목적은 안전하게 악녀가 되어서 되도록 빨리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거랍니다. 당신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 엮이려면 황제랑 엮여야 한단 말이오!
“이런, 아까 뺨을 맞으시면서 고막이 나가셔서 귀가 잘 들리지 않는 건 아닐 테고- 다시 한번 말씀드릴…….”
“어머, 제가 다른 일이 있다는 걸 깜빡했네요!!”
“지금 절 차신 겁니까?”
“…거하게 이용하셨으니 이 정도는 양해 부탁드립니다.”
“흠, 그렇군요. 영애만 괜찮다면 제도에서 가장 유명한 디저트 가게를 들를 생각이었는데.”
“…….”
엘리자벳은 디저트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건 빙의한 나도 마찬가지였다. 돈이 없어서 못 먹는 것이 디저트니까!! 하필 많고 많은 것 중에 왜 디저트로 꾀는 거야!! 사실 오즈번이 자주 가는 의상실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 디저트 가게나 좀 더 마을을 둘러보며 지리를 좀 익히려고 했건만……!
“아쉽게 됐군요.”
그리고 아침을 먹지 못한 나의 몸뚱이는 아라한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절대로 배고파서가 아니다. 디저트 가게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도 외출의 목적이라서 그런 거다. 아마.
“……다음에는 디저트로 절대로 안 넘어갈 겁니다.”
“……풉, 알겠습니다. 명심하도록 하죠. 자, 그럼 가시죠.”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민 아라한의 손길을 나는 거부했다. 그것에 황당해하는 아라한을 보며 내 의상을 보라는 듯 손으로 옷을 가리켰다. 그제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아라한은 나보다 먼저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보폭을 맞추며 걸어갔다.
“근데 마을은 웬일이세요.”
“살롱에 들를 일이 있던 차에 나왔다가 아까 그 장면을 목격해서요.”
나는 아까부터 궁금했던 사실을 물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을 터. 분명 오즈번에게 보낼 선물을 사기 위해서 하는 것을.
나는 도중에 무도회를 벗어났지만 기억했다. 나와 첫 춤을 끝내자마자 황제와 춤을 추고 있던 오즈번을 향하던 그의 발걸음을.
수많은 사람 속에서 황제와 아라한,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오즈번은 그 누구보다 빛났다. 가장 화려한 옷을 입고 가장 튀는 머리카락 색을 가진 내가 아닌. 그들이 가장 빛났으니 말 다 한 것이리라.
나야, 황제의 사랑을 얻기 위해 원치 않는 애정 공세를 황제에게 보내며 오즈번을 괴롭혀야 하는 상황이지만 아라한은 오즈번을 지키고 오즈번과 사랑에 빠져야 할 인물임이 분명했다. 그러니 그가 살롱에 간 이유도 오즈번 때문이리라.
“그것보다 뺨은 괜찮으십니까.”
“아, 뭐…….”
나도 모르게 ‘익숙해서요.’라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다행히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할아버지와 아빠의 사랑을 잔뜩 받은 엘리자벳에게 뺨 맞는 건 익숙한 일이 아닐 테니까.
“그럼 공작님이야말로 누구에게 선물을 주시려고 살롱까지 다녀오신 겁니까?”
“설마, 그걸 정말로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예?”
아니, 그럼 아는데 묻겠니. 당연히 모르니까 묻지.
“제가 분명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원래 영애 저택에 방문할 예정이었다고.”
“아…? 그건 그냥 아빠한테 볼일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었어요?”
내가 천진무구한 표정으로 되묻자 깊은 한숨을 쉬던 아라한은 고개를 살짝 젓고는 이내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영애의 의상입니다. 그러니 영애께 말하러 가는 길이었고요.”
“…네? 제가 지금 매우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다시 말하기 부끄러우니 되묻지 마십시오.”
살짝 붉어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아라한의 모습에 난 직감했다. 아, 틀어졌다. 그것도 거하게. 엄마, 나의 재채기 한 번으로 원작 스토리가 파괴되었어요. 어쩌죠.
그래, 이건 단지 신문에 대서특필된 이야기에 대한 사과의 의미일 터. 그럼 저 정도의 의상은 받아도 되지 않을까.
“그래도 부탁드립니다만, 부디 옷을 찾으러 갈 때 지금 그 모습으로 와 주십시오….”
“구설에 오를까 봐요?”
“…그것도 있지만, 또 신문에 대서특필이 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어쩜 배려심이 이렇게나 철철 넘칠까. 뒤에 있을 우환도 만들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 요번에 대서특필이 되면 아마 나와 아라한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품고 이 시대의 파파라치들이 특종을 잡으려 눈에 불을 켜며 나에 대한, 혹은 아라한에 대한 뜬소문과 조작된 스캔들을 폭포수처럼 쏟아 낼 터였다.
나야 늘 욕을 먹던 악녀 이미지지만 아라한은 그렇지 않으니 자신을 위해서라도 단 하나의 우환도 남겨 놓지 말자,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니 지금 이 모습으로 변장을 해서 옷을 받아 가라, 이 소리 같은데. 어쩐지 날 이용한 저 사내를 나도 골려 주고 싶지만, 더 이상의 틀어짐은 만들 수 없으니 그의 제안에 따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