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89
89화
오스스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고 호수가 있을 들판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기자 정말로 커다란 호수가 중앙에 떡하니 박혀 아름다움을 물결 사이로 반사시키고 있었다.
햇빛이 호수에 일렁거리자 잔잔하게 머금고 있는 호수의 색과 하나 되어 오묘한 색깔을 내고 있었다. 녹주석이라 불리는 에메랄드. 그 보석의 색과 똑 닮은 호수의 색은 너무나도 이뻤다.
“우와, 이뻐…!”
웅장하게 펼쳐진 호수는 너무나도 잔잔했다. 산들바람에 약간 일렁이는 물결이 햇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고 호수 건너편의 벨루아 숲의 녹음도 에메랄드 색인 브렌치아 호수와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다가가면 갈수록 웅장한 브렌치아 호수의 크기에 압도당한 나는 수심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순간 멍했다.
‘아니, 호수를 알아보려고 온 건 맞는데…. 이렇게 클 줄은 몰랐지!!’
아르텐이 말한 이 세계의 문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호수로 들어가 물속을 봐야 하는데 호수가 너무 컸다. 이 정도로 클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너무 커…!
“…내가 아무리 수영을 배웠다지만 전문가는 아니라고….”
잠수를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잠수 도구도 없는데 어떻게 저 커다란 호수에 잠수하겠는가. 크기만 크고 수심이 별로 깊지 않다면 다행이지만 그건 모를 일이었다. 나는 미처 이곳을 정리하지 못한 누군가가 하나쯤은 치우지 않았을 돌멩이를 찾기 위해 호수 주변을 맴돌았고 그 결과 주먹만 한 돌멩이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물론 이걸로 수심을 얼마나 알 수 있겠냐마는 무작정 들어가는 것보다야 낫지. 나는 돌멩이를 호수에 던져 보았다. 묵직하게 떨어진 돌멩이의 주변으로 커다란 물결이 일렁였다. 역시나 돌멩이로는 수심을 알 수 없었다.
“그래, 이렇게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면 소설 속이 아니지!”
원래 소설 속 악녀는 뭐든 쉽게 쉽게 했었다. 오죽하면 죽는 것도 쉬웠으니까. 하지만 그 원래라는 게 나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으니 깊은 한숨을 쉬며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냥, 잠깐 몸만 담그고 대충 감만 잡고 나올까.’
확인만 하는 거다, 얼마나 깊은지. 너무 깊다 싶으면 헤엄쳐서 나오면 되지 않을까. 수심을 확인할 수도 없고 확인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냥 일단 잠수를 감행하기로 한 나는 신발과 양말을 잠시 벗어 놓았다.
“…검은.”
잠수할 때 거추장스러울 것 같아서 빼 버리려고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헤엄칠 때 불편할 것 같아서 빼 놓으려고 했지만 내가 마법이라도 쓸 줄 알면 버리고 들어갈 텐데. 만약 저 안에 마물이라든가. 사냥감이 나타나면 그길로 문은커녕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이 검 비싼 재질이라던데, 누가 훔쳐 가면 어떡해. 물론, 내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금방 찾겠지만, 왠지 들고 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불안하게 든단 말이지.
“그래, 마물이 판치는 사냥터인데 호수 안에 마물이 없다는 보장도 없고, 뭣 하면 상어라도….”
‘아, 호수인데 상어는 너무 앞서갔나…?’
그러나 이제껏 나의 촉이 보여 준 미래를 보건대 기필코 검은 들고 가야만 한다고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나중에 불편하면 그때, 생각하도록 하자’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진 채 검을 허리춤에 찬 채로 호수로 ‘풍덩’ 뛰어들었다.
양 볼 가득하게 공기를 머금은 채 주위를 살펴보자 생각 외로 호수 안은 맑았다. 바다도 아닌데 해초 같은 것도 보였고 물고기에 바람에 흘러들어 온 나뭇잎들도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자 순간적으로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을 인지한 나는 서둘러 고개를 들어 수심을 가늠하고 있었다.
일렁이는 물결 사이로 햇빛이 강렬하게 보이는 걸 보니 그렇게 깊게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벌써 숨이 막힌다는 것은 이 밑에 더 깊은 수심이 있다는 뜻이겠지. 그걸 깨달은 나는 숨이 더 막히기 전에 서둘러 호수 위로 헤엄쳤다.
그러나 헤엄칠수록 제자리인 것처럼만 느껴지는 탓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도 잠시.
‘내가 이렇게 깊게 내려왔다고?’
그럴 일 없었다. 수영을 배우긴 했어도 잘하진 않았다. 그냥 2~3분 정도 숨을 참고 잠수를 할 수 있다는 정도였고 실제로 시간이 그렇게 지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아무리 헤엄쳐도 하늘이 보이지 않았다. 투명한 물결만이 일렁일 뿐.
“쿠흡…!”
정말 더는 숨을 못 참고 양 볼 가득히 머금고 있던 공기를 뱉어 내자 공기 방울이 뽀글거리며 내 위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젠장!! 이러다가 죽겠어…!! 왜! 왜, 하늘이 안 보이는 거야!’
겨우겨우 숨을 참으면서 허우적거리는 것도 이제 슬슬 지칠 때쯤. 내 발아래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굉음을 내며 폭발하였고 나는 덕분에 제자리걸음 수준이었던 헤엄을 벗어던지고 호수 위로 날아가 그토록 바라던 공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아니!! 공기를 맞이하는 건 좋은데 왜 이런 방법이냐고!!’
폭발의 여파로 인해 호수를 벗어난 나는 들판에 떨어진 채 ‘캑캑’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콜록…!! 콜록…. 뭐야… 큽….”
물을 꽤 먹었는지 계속해서 헛구역질과 함께 물을 토악질하고 나자 기력을 소모한 내가 지친 눈동자로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호수 위로 떡하니 떠 있는.
“…저건 뭐냐.”
생긴 건 곰 같기도 하고 덩치는 코끼리 같기도 하고. 아무튼, 세상 무섭고 덩치 큰 동물들을 죄다 오합지졸로 붙여 놓은 것처럼 생긴 이상한 놈이 ‘푸르릉’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저 이상한 놈이 ‘마물’이라는 것쯤은 금방 깨달았다.
“허…. 저기요? 음. 제가 악녀로 죽으려고 할 땐 잘 안 죽더니 왜 이상한 포인트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까요…?”
진지하게 물어보지만 저 마물이 나에게 답해 줄 일은 없었다. 커다란 코끼리 같은 덩치에서 내가 어떻게 도망칠 수 있을까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궁리를 눈치챈 듯, 마물이 나를 향해 ‘푸르릉’거리더니 이내 매서운 눈빛과 함께 돌진하기 시작했다.
“…!!! 아니, 선생님!! 갑자기 몸통 박치기를 하시면…!!”
놀란 나머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고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뒷걸음쳤다. 아무리 연습을 했다고 하지만 실전은 처음이고 저런 커다란 놈을 이 얇은 검으로 잡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위협하듯 검을 휘적였다.
“저리 가아…!”
이렇게 휘둘러서 저리 갈 마물이라면 애초에 몸통 박치기를 하진 않았겠지. 그렇게 무작위로 휘두르던 검 끝에 무언가가 베이는 느낌이 들었다.
“꾸엑!”
그리고 나의 검에 피부라도 스친 것인지 괴상한 소리를 내는 마물이었다. 그 소리에 질끈 감았던 눈을 슬며시 뜨자 내가 무의식적으로 휘두른 검이 마물의 다리를 겨냥했는지 마물의 다리에선 보라색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 폭발의 원인이 저 마물이라는 걸 깨닫게 하려는 것인지 파다다닥거리는 디*몬의 필살기 ‘공기 팡!’처럼 마물이 입을 벌려 공기를 내뱉자 이내 들판에 커다란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아니, 그래. 호수에서 날 구해 준 건 고마운데……!!! 이건 좀 아니지 않냐?! 너랑 나 오늘 처음 보는 사이인데…!!”
“꾸에엑!!”
“하긴, 마물이 인간 말을 할 수 있으면 마물이 아니겠지…. 하하….”
폭발 소리에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기엔 이미 가까이 온 마물의 모습에 깊은 심호흡을 하던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엘리자벳의 몸에 검을 맡기기로 했다. 내가 백날 연습한다고 하여도 이 몸은 엘리자벳의 몸이었다.
이미 검술의 감각을 지닌 검술의 영재, 엘리자벳의 몸. 그리고 지난 일주일간 엘리자벳이 왜 검술의 영재라 불렸는지 대충 짐작은 갔다. 군더더기 없는 자세와 흐트러짐 없는 호흡. 검 끝을 바라보며 집중하는 오라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언니, 수련 꽤 열심히 했구나?”
눈을 지그시 감자 예민한 청력은 마물이 움직이는 소리를 정확하게 들었다. 마물의 움직임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나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고 뛰어난 후각은 마물의 피 냄새로 마물이 얼마큼 나의 근처로 왔는지 그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눈을 감고 있지만, 눈앞에 그려지듯 훤하게 보이는 마물의 움직임은 단조로웠다. 아까처럼 공기파를 내뱉으려는 심산인지 숨을 크게 들이쉬는 소리까지 미세하지만 내 귀엔 다 들렸다.
그리고 눈을 뜨는 동시에 아까와 같은 폭발을 내기 위하여 공기를 내뱉는 마물의 모습에 나는 재빨리 옆으로 피해 폭발을 피했다.
“기껏 귀족 몸에 빙의해서 마물이랑 한판 떠야 하냐고!! 이런 건 원래 남자 주인공이나 용사가 해야 하는 포지션 아니냐!!”
‘쿠왕!’ 역시나 커다란 굉음을 낸 폭발의 자리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나는 꽤 깊게 파인 구멍으로 마물을 유인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멍의 뒤에 서서 마물이 나를 향해 들이박기를 기다리며 움직임을 관찰했다. 내가 가만히 있자 공기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다리로 땅을 긁으며, 마치 말이 점프하기 위해 발돋움하는 자세로 도약할 준비를 하는 마물이었다.
그 모습이 보이자마자 나는 뒷걸음치며 마물이 뛰어오거나 점프했을 때의 거리를 대충 계산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의 움직임이나 이후 움직임에 대한 계산은 오롯이 엘리자벳의 몸에 의한 것이었다.
“하아…. 어서 와 보렴.”
이제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한 나는 마물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말이 기폭제가 된 것처럼 마물은 나를 향해 점프하였고 그때를 놓칠 일 없던 나는 검을 고쳐 들고 마물이 내 앞이 아닌 구멍을 향할 수 있게끔 조금씩 앞쪽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내가 공격할 수 있을 거리쯤은 만들 수 있도록. 점프한 마물은 조금씩 움직이는 나를 발견했는지 아까와 같이 공기파를 쏘려 하였고 미묘한 마물의 움직임을 읽은 엘리자벳의 동체 시력 덕분에 난 재빨리 뒤로 점프해 뒤로 달렸다.
순식간에 덮친 공격의 커다란 굉음. 그리고 또 구멍이 나 있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폭발에 휘말려 다쳤을 정도의 아슬아슬한 거리. 물론 구멍의 중심은 아까 내가 서 있던 위치였고 그곳에 빠진 건 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