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96
96화
아르텐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카를시아는 그의 미소가 긍정임을 인지하곤 깊은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렌 벨루아. 그 이름을 어찌 잊겠는가. 오즈번이 있는 자리엔 늘 아렌 벨루아가 있었다.
그 시작이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자신들이 오즈번의 사형에 대해 논할 때, 오즈번이 범인이 아니라고 달려오지 않았던가. 그때만 해도 그는 자신에게 벌벌 떠는 여타 귀족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자가 아스칼이라니.
이제야 아르텐이 말한 ‘각오’의 의미를 깨달은 카를시아가 조금 착잡한 얼굴로 아르텐을 바라보았다.
“이 모든 사실을 말해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되돌릴 것이다.”
“모든 것을….”
“그 아이가, 나의 아이가 원하고 있거든.”
아르텐이 그 말을 내뱉자마자 하얀빛의 물체가 또다시 나타나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리고 카를시아를 발견했는지 이내 그 움직임을 멈추고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듯 정지한 채로 그를 향해 빛을 내비쳤다.
카를시아는 영문 모를 빛이 자신을 비춤에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나타난 빛하며 그 빛이 자신을 비추는 것이 여간 당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르텐이 신이라면. 아르켈미스라면 저 하얀 빛은 그에게 귀속된 천사임이 분명했다. 그런 자가 자신을 향해 빛을 내는 이유가 뭘까.
아르텐은 그 물체가 엘리자벳이라는 걸 밝히지 않았다. 그건 엘리자벳이 원하기도 하였지만 지금,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엘리자벳에게 미안한 일이기에 침묵하기로 하였다. 엘리자벳도. 이세화도. 모두 자신이 사랑하는 자신의 아이임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 발칙한 계집이 너에게 범인을 찾을 수 있다며 자리를 마련해 달라 하였겠지.”
“…그걸 어떻게…. 아….”
그냥 아르텐이었다면 어떻게 알았냐며 의구심을 표했겠지만, 그가 신이고 신의 현신이라면 모르는 게 이상할 일이었다.
“함정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 꽤 영리한 아이구나.”
“…….”
도대체 아르켈미스는 자신을 어떻게 보기에 저런 말을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졌지만, 그것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카를시아였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그리하도록 하라.”
“예…?”
“그 발칙한 계집의 판에 기꺼이 응하라. 세상 만민이 그 계집이 마몬이고 그 위에 아스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지만….”
“나의 아이가 위험할 것을 염려하거든 먼저, 아가. 그대의 안위부터 걱정하거라.”
“…….”
“이것은 비단 인간들의 권력 싸움뿐만 아니라 신의 싸움이기도 하니까.”
아르텐의 말에 엘리자벳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과 그 발칙한 계집이라 불리는 오즈번의 판에 놀아나야 한다는 생각에 카를시아는 분노했다. 그런 카를시아의 이글거리는 눈을 바라보던 아르텐이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마저 입을 열었다.
“다른 이에게 내가 아르켈미스라는 사실은 말하지 말거라.”
“…그렇다면 어째서 저에게만 보이는 것입니까.”
“그대는 나의 아이에게 빚진 것이 있으니까.”
‘그러니 갚아야지.’라는 말과 함께 아르텐은 홍차를 홀짝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해는 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떠오르는 해는 찬란하게 빛날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니까.
‘자, 이제 너희들의 판에 기꺼이 뛰어들어 줄 테니 어디 맘껏 놀아 보거라. 그럴수록 그 모든 것들이 너희들의 발목을 옭아맬 터이니.’
* * *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붉은색 망토를 마야에게 던지다시피 건넸다.
“얼레…? 이건 뭐예요?”
“사냥제 우승 상품.”
“…받았어요? 누구한테요?”
“누구긴 제국의 황제 폐하한테 받았지. 그것보다 친구가 온다는 소식은 들었지?”
“아가씨한테 친구라니 그 친구는 분명 복 받을 거예요!”
“후, 아리아. 제가 집에서 이런 취급이라니까요?”
“하하, 그만큼 애정이 느껴지는걸요.”
“저희 아가씨를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씨 방에 다과를 준비해 놓긴 했는데…….”
마야는 나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더니 이내 한숨을 쉬며 먼저 씻을 걸 권유했다. 나는 아리아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씻으러 가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마야. 제롬에게 일러서 나 기다리는 동안 아리아에게 저택을 안내해 주도록 해. 당분간 우리 집에서 머물 테니까.”
“헉…! 엘리, 그렇게까지는 할 필….”
“아무렴요! 아가씨의 첫 친구인데요!! 저는 엘리자벳 아가씨의 유모이자 시녀장, 마야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아…. 저는 아리아 아타샨입니다.”
“하, 이 얼마나. 크흡, 저희 아가씨에게 멀쩡한 친구가 생겼어요…!”
“…뭐라니. 아리아, 제롬이 저택을 안내해 줄 거예요. 아, 참. 짐은 수호 기사단에게 말해 뒀어요. 가지고 오라고.”
“역시 권력이 좋긴 하네요.”
“아리아, 이럴 땐 ‘권력 좋은 친구를 둬서 좋다’라고 하는 거예요.”
나의 너스레에 ‘피식’ 웃음을 짓던 아리아가 나의 말투를 따라 했다.
“그렇네요~ 권력 좋은 친구를 둬서 정말 좋네요.”
그 모습에 감동한 듯한 마야……는 도대체 날 뭐로 본 거야!! 아니, 도대체 엘리자벳을 어떻게 본 거야!! 눈물까지 글썽거릴 정도였냐고!! 하아, 마야의 그런 눈물에 고개를 휘저으며 난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나서야 기분이 좋아진 나는 얼른 옷을 갈아입고 저택 구경을 끝낸 아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내 방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방에 들어서자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티 세트와 기사단이 가지고 온 짐에서 꺼낸 책을 읽고 있는 아리아였다.
“오래 기다렸죠?”
“아니에요~ 아, 이 책이에요.”
아리아는 자신이 읽고 있던 책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떡하니 적혀 있는 ‘누가 가녀린 백작 영애의 드레스 자락을 훔쳤는가’라는 제목에 실소하고 말았다. 정말 있는 책이라는 게 놀랍다. 그리고 나의 예상이 맞았는지 책 표지 위엔 빨간색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19라는 글자는 없었지만 대충 그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고마워요. 근데 제가 읽고 있던 책을 빌려 달라고 한 건 아니죠…?”
“저는 이미 여러 번 읽었는걸요.”
“근데, 책이 한 권이 아닌가 봐요?”
“맞아요. 아직 완결은 안 났고 현재 나온 건 3권까지예요.”
드레스 자락을 훔치는 데 3권이나 소요되다니. 심지어 아리아의 말을 들어 보면 아직 드레스 자락을 훔친 사람이 누구인지 안 밝혀진 것 같은데.
“고마워요~ 잘 읽을게요. 아, 수도에 있는 동안은 저택에 계속 머물도록 해요. 수확제까지 있는 거죠?”
“그렇죠? 보통 사냥제와 수확제를 같이 보내고 내려가긴 하니까요.”
“좋네요. 마음 맞는 친구가 생겨서.”
진심이었다. 마야의 말대로 엘리자벳에게 친구란 그런 존재니까. 일단 수확제를 누가 인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는 아르텐을 만나서 이야기도 나눠 봐야 하고 신전도 가 봐야 했다.
“근데 엘리.”
“응? 왜 그래요?”
“결혼식은 언제 해요?”
“…쿨럭!”
잠시 홍차를 마시고 있던 나는 아리아의 질문에 저도 모르게 홍차를 뿜을 뻔했다.
“어머,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하하….”
잊고 있었다. 곰끼리로 생긴 오해!
“하하…. 그게…. 아리아.”
그렇게 나는 장장 30분 동안 아리아가 오해한 대목들을 설명해 주고 나서야 아리아가 ‘아니, 공작님은 제대로 된 만남도 안 가지고 대뜸, 고백했다고요?! 만인의 연인이란 타이틀 압수시켜야 해요! 당장!!’라는 말을 내뱉으며 ‘타도 아라한’을 외치고 있었다.
만인의 연인, 라트 아라한. 그것이 아라한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몸에 밴 매너와 예절. 원작의 엘리자벳은 그것을 싫어했지. 뭐, 이젠 별 필요도 없는 원작의 내용이었지만. 그럼 과연 나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나중에 읽어 봐야겠어요. 지금은….”
나는 눈앞에 놓인 홍차를 한 모금 마시곤 딸기 케이크가 올려진 접시를 잡았다. 물에 빠지고 죽을 뻔했다. 곰끼리의 폭발이 아니었다면 익사했을지도 모르지. 그러고 보니, 이 세계로 향하는 문을 못 봤네. 그것 때문에 들어간 거였는데. 여기는 왜 잠수 장비 같은 게 없을까. 하긴…. 깊이 잠수할 일이 없어서 그런가.
또, 디저트 하니까 아라한에게 받은 디저트 가게가 생각나네. 받은 뒤로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정확하겐 할 수가 없었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점포를 늘려야 할 정도로 그 규모가 커졌다고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하긴. 원래도 수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큰 규모의 디저트 가게였지.
“아 참! 엘리!”
“응? 왜 그래요?”
“아까 집사님이 저택 내 도서관을 안내해 주셨는데…. 나중에 거기 가서 책 읽어도 돼요?”
“아아, 뭐. 그런 건 굳이 안 물어봐도 돼요. 지내는 동안은 편하게 있어요.”
“헉…. 고마워요! 정말로…. 숙소도 그렇고 이렇게 절 친구로 대해 줘서요…!”
“친구끼리 무슨 빚이에요.”
“나중에 제가 필요할 때 꼭 불러 주세요!! 꼭 도와드릴게요.”
‘저 말, 조금 위험한 발언이지 않나?’
꼭 소설에 보면 저런 말을 했던 악녀의 친구는 악녀를 대신하여 죽음을 맞는 경우가 많았다. 왠지 아리아가 그렇게 될 것 같아 조금 불안한데. 뭐, 난 지금 악행을 딱히 저지르고 있는 것도 없고 애초에 그런 일 없도록 잘 막으면 되지 않을까.
“고마워요.”
무엇보다 내가 과연 아리아의 도움이 필요한 날이 올까. 부족한 건 없었다. 아나이스가 알아서 채워 주고 아라한이 도와주고 카를시아는 자신의 서명을 기꺼이 휘갈기며 나의 모든 것을 지원해 줄 것이다. 그것을 무어라 한다면 든든한 방패막이로 수호 기사단이 앞장설 것이다. 딱히 아리아가 나설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