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91)
긴 밤이 끝나고 (1)
“끄으허아으아어아아아악――!”
기지개 하는 소리라 하기엔 기괴한 느낌이었다.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면서 트릭스관 정문의 유리문을 개방한 클레어 조교수는, 새벽의 공기가 어찌나 반가웠는지 눈물이 핑 돌았다.
1인분 하려는 흉내조차도 안 내는 칼레이드 교수를 끼고 길고 긴 당직의 시간을 끝마친 것이다.
밤을 새느라 푸석푸석해진 금발 머리칼은 여기저기 잔머리가 삐져나와 있었다. 퀭한 눈은 완전히 부스스 해져서, 차라리 훈제된 생선 요리의 눈매가 더 생기 있을 듯 하다.
꼴사납게 아저씨처럼 기지개를 하는 모습에 품위라는 건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다.
분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클레어 조교수 또한 실베니아 학사에서 함부로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를 풍기는, 학사의 우등생 미소녀 아니었던가.
몇 년 만에 사회의 물에 찌들대로 찌들어서, 예쁘장한 화장은 커녕 떡진 머리를 티 안나게 묶어 올리고 있는 모습에 이른바 현자타임이 올라왔다.
교편을 잡겠다는 선택은 역시 너무 무모했던 것일까.
눈물이 핑 돌아서, 폐를 시원하게 만드는 상쾌한 아침 공기에도 솔직하게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새벽에 의무 인력 출동 기록이 남아있네요?”
“아, 네… 북쪽숲 근방에서 학생이 다쳤거든요.”
“헉. 학생이 다쳤다고요?”
“네. 경위 보고는 일람 작성해 놨으니까 확인하시면 돼요. 부교장 라인까지는 이미 보고가 된 사항이니까 새로 조치를 취할 필요는 없으세요.”
인수 인계 과정을 거치고 있는 다음 근무자는, 빼곡하게 가득 차 있는 일람들을 확인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이렇게…”
“사건 사고가 참 많았죠. 생활동 쪽에서 엘테 상회 건물이 무너져 내리기도 했고요. 교수동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인지하고는 있어야죠.”
“에, 엘테 상회 건물이요? 어쩌다가요? 경위 파악은 끝났나요?”
댕기머리를 늘어뜨린 다음 근무자가, 안경을 밀어올리며 당황스러운 듯 이야기 했다.
클레어 조교수는 환기를 위해 열어놓은 문들을 싹 다 다시 닫은 다음, 당직 근무실 안으로 들어오며 이야기 했다.
“위험 재고 관리 미숙으로 인한 폭발 사고라고 하던데요.”
제법 시원스러운 대답이었다.
“위험 재고요?”
“폭발식이 각인된 마법 물품들이 엘테 상회 창고에서 연쇄 폭발을 일으킨 모양이에요.”
교대자는 일람들을 확인하면서 당황스러운 듯 이야기 한다.
“어지간한 물품들은 다 유통해봤다던 엘테 상회도 그런 실수를 하는군요.”
“뭐어, 심각한 부상자나 사상자는 안 나왔다고 하지만… 금전적인 손해는 상당하겠죠.”
클레어 조교수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그리 이야기 했다.
엘테 상회 건물이 반파된 이유는 물품 유통 중에 일어난 사고다.
“인수인계 끝났냐? 이제 퇴근이야?”
근무실 끄트머리의 의자에 발을 뻗고 앉아서, 얼굴에 책을 덮고 있던 사내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뿌드득 비명을 지르는 관절을 풀어주며, 비틀거린 채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죽어있다 깨어난 시체 같다.
“우하, 길었다 길었어.”
거의 제 자리에만 앉아서 밤을 보냈으면서 피곤한 기색은 제일 역력하다.
애초에 칼레이드 교수는 언제나 피곤해 보이는 몰골이다.
“으아아, 방에 돌아가서 쉬어야지. 생활동 쪽 잡화점에 맥주가 남아있으려나.”
“아, 네에… 잘 들어가세요. 칼레이드 교수님.”
“클레어 너는 안 들어가냐?”
이걸 확인 사살을 한단 말인가. 분명 보고 서류를 올렸을 터인데.
클레어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참고 이야기 했다.
“내일 개학식 일정 잡혀있거든요. 오전 중에 학생회관 강당 쪽 정리 지시하고, 사용인들이 개학식 준비 잘 마무리 했는지 체크하고 돌아가야 해서요.”
“저런…”
밤샘 근무를 하고 나서 오전까지 일이 쌓여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칼레이드 교수는 그런 클레어 조교수의 한 쪽 어깨를 잡고 반대 쪽 주먹을 꽉 쥐어보였다.
“화이팅이다! 클레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했다!”
그리 말한 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정문 쪽을 향해 나아가는 칼레이드 교수의 뒷모습.
새하얀 백의의 주머니에 손을 쑤셔넣고 비틀거리는 주정뱅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딱밤 한 대만 시원하게 때려갈기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부상당한 학생은 어디에 있나요? 제가 인수인계 받았으니 한 번씩 체크해야 될 것 같은데…”
그 때, 다음 근무자가 클레어 조교수에게 물어왔다.
“아… 에드 로스테일러 학생이요? 지금은 트릭스관의 의무실 병상에 누워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긴급한 조치는 다 끝났다고 하니까 아마도…”
“걔 지금 거기 없다.”
“…네?”
확 열린 정문 앞에서 연초를 하나 꺼내든 칼레이드 교수가 이야기 했다.
“클레어 네가 안전 위험 지역 마지막으로 체크하러 나갔을 때, 루시 메이릴이랑 같이 트릭스관을 떠났다. 내가 당직 근무실에 앉아서 확실히 봤지.”
“아, 아니… 나갔다고요? 그걸 그냥 보내주시면 어떡해요! 척 보니까 크게 다쳤던데!”
“걱정 마라.”
연기를 피어올리던 칼레이드 교수는 문득 동쪽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검붉은 기운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지만, 그 어둠을 밀어내고 태양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부교장 레이첼 선에서 허가가 떨어졌어. 그 녀석 손대지 말고, 마음대로 하게 놔두라고.”
*반파된 엘테 상회 건물을 보고 벙찐 상태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애초에 부서진 건물이라는 건 늘 사고의 맹점을 찌르고 들어오는 광경이다.
몇날 며칠이고 언제나 그 자리에서 굳건하게 서있을 것 같았던 구조물이, 하릴없이 무너져 내려있는 광경이다. 일상이 붕괴된 듯한 느낌이 들거나, 세상이 일변한 듯한 느낌이 드는게 당연하다.
상회 건물을 수습하러 온 인부들도 모두 비슷하게 생각을 하는 것인지, 이제는 형체가 절반 밖에 남아있지 않은 건물을 보며 모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름 방학의 마지막 날이다.
귀교하자마자 이런 대형사고를 접한 학생들은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그래도 일상 그 자체가 무너져 내리진 않았다.
“너답지 않게 화려한 계획을 짰네.”
“아니, 이 정도까지 커질 줄은 몰랐는데…”
엘테 상회의 철장 밖에서 내부를 보고 있던 나와, 팔뚝을 감싸쥐고 매달리듯이 서있는 루시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는 것 같다.
애초에 엘테 상회 건물이 무너진 것 자체가 무슨 폭발 사고에 의한 것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단순한 오해는 아닌 것 같고, 윗 사람의 입김이 닿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복구 공사에 착수한 인부들의 모습까지도 전부 위화감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쯤이면 됐다. 캠프로 가자.”
“응.”
발걸음이 불안정한 나를 꽉 움켜쥔 채로, 그렇게 루시와 나란히 걸었다.
생활동에서 북쪽숲 캠프까지의 거리는 짧지 않다. 전력 질주 한다면 금방 도착할 수 있겠지만 그럴만한 몸 상태는 안된다.
괜시리 돌아다니는 내 모습을 루시가 퍽 걱정스럽게 쳐다봤지만, 굳이 나를 말리려 들진 않았다. 좋을대로 하라고 말하는 듯 하다.
내 옷깃을 꽉 움켜 쥔 채로 숲까지 따라들어온 루시는, 한 번씩 드리워진 덩굴이나 나뭇잎이 나타날 때마다 슥슥 마력을 발현해서 베어주었다.
내가 고맙다는 듯이 마녀 모자위로 손을 푹 누르고 꾹꾹 눌러서 쓰다듬자, 루시는 퍽 기분이 좋은지 제 머리를 내 팔뚝에 부벼왔다.
그러다가도 썩 부끄러운 일이라는 자각은 있는지, 이따금씩 커흠대면서 자세를 다잡는 것이 썩 대하기 까다로웠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 새벽녘의 숲을 헤쳐나갔다.
지난밤에 로르텔과 함께 이 길을 지날 때에는, 한 치 앞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어둠 속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씩 떠오르는 아침의 태양 빛이 숲 사이로 스며들면서, 은근하게 서린 안개가 신묘한 느낌으로 빛을 흘리고 있었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자니, 은은한 백발을 띠는 루시의 머리칼도 덩달아 신비하게 빛난다.
루시의 머리칼은 마치 스펀지처럼 빛을 머금는 듯 하다. 해질녘에는 붉게 물들고, 해뜰녘에는 은은하게 빛이 난다.
“있잖아. 난 이 숲이 좋아.”
언제가 되었든, 루시의 말은 뜬금 없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전조 없이 갑자기 휙 꺼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벽녘에 걷고 있다보면 느껴지는 풀내음이 좋거든.”
이른 아침부터 울려퍼지는 숲 속의 풀벌레 소리에, 루시의 목소리 또한 은근하게 스며드는 느낌이다.
“그러니까, 안 없어졌으면 좋겠어.”
“숲이라는 게 그리 쉽게 없어지겠냐.”
“숲 말고, 풀내음 말이야.”
“숲이 있으면 풀내음도 나는 법이지.”
그렇게 단정하는 내 말에, 루시는 팔뚝에 고개를 묻고서는 코를 킁킁댄다.
그리고는 눈을 지그시 감고서는 은은하게 이야기 한 것이다.
“꼭 그렇지도 않아.”
루시의 미묘한 표정 변화에서 그녀의 기분을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캠프에서 한참을 부대끼며 살아온 나조차도,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이 기본 상태인 그녀의 기분을 가늠하는 건 어렵다.
표정만으로 분간하는 건 힘들 때가 많으니, 결국에는 하는 말의 어조나, 행동 따위를 통해 분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눈을 마주한다고 해서 언제나 똑바로 교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고, 고양이는 꼬리를 빳빳이 세우는 것처럼. 기분 좋을 때 하는 행동도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인 법이다.
그러나, 내 팔에 고개를 묻고서 코를 킁킁대더니, 숨을 푹 내쉬고는 얼굴을 부비는 일련의 행동은 그 저의를 해석하는 게 썩 어렵진 않다.
한없이 흡족해 보이는 모습. 그 이유까지 분석하는 건 더 시간과 이해력이 필요한 일이지만, 어쨌든 흡족한 모습을 보이니 나 또한 누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루시 아가씨.”
그 흡족한 얼굴이 삽시간에 어둠으로 물들었다.
캠프에 도착하자 보이는 것은… 모닥불을 먼저 피워놓고 그 옆에 앉아 있는 메이드, 벨 마이아였다.
오필리스관의 메이드 장.
대마법사 루시 메이릴의 천적이었다.
방금 전까지 보였던 세상 다 가진 듯한 흡족한 얼굴은 간 데 없고, 고양이처럼 가로로 죽 짖어진 눈매를 한 채 식은 땀을 흘리기 시작한 모습.
…꽤나 귀한 광경이었다.
*
“내일부터 개학식 일정이라서 오늘 내로 방 배정 항목들 체크해달라고 부탁드렸는데요.”
“하, 하려고 했어. 오, 오늘 할 거야.”
“다행입니다. 혹시 올해 개학식에도 행사장에 안 나타나시고, 어디 가서 낮잠이라도 주무시는 건 아닌가 걱정했거든요.”
“그, 그런 생각 안했어.”
벌써부터 모닥불을 피워놓고, 난장판이 된 캠프 여기 저기를 기본적으로 정리해둔 모습이다.
분명 어제 새벽 늦은 시간에 오필리스관으로 돌아간 것 같은데, 해 뜰 무렵에 캠프에 도착해서 기본적인 정리를 끝마쳐놓은 상태라니.
두 눈을 뜨고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기에, 나는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너, 진짜 잠은 자냐. 벨?”
“일과 중간 중간에 쪽잠도 자고, 일정 없는 날엔 늘어지게 낮잠 자는 일도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기계도 아니고…”
벨은 다소곳한 자세로 몸을 일으킨 뒤, 고개를 꾸벅 거리며 인사를 보냈다.
“지난 밤 평안하셨습니까. 에드 도련님. 그렇게 보이진 않습니다만…”
“크게 다쳤지.”
“이런 저런 정황은 캠프에 도착하고 나서 대충 감을 잡았습니다. 그래도 목숨에 위협은 없으신 것 같으니 다행이군요.”
사실상 몇 시간만에 본 느낌이다.
그 와중에 벨은 오필리스관에 돌아가서 얼른 휴식을 취하고, 몸을 씻고, 얼른 옷도 새 것으로 갈아입고, 매무새도 완벽히 단장한 채 돌아온 것이다.
그러고는 캠프에 굴러다니는 여러 도구들을 정리 해두고, 난리가 난 흔적들도 지우고 있었다.
“너는 그냥 좀 돌아가서 쉬어라. 이제 슬슬 학생들 귀교해서 바빠질 때잖아.”
“네. 오필리스관 소속 학생 분들도 대부분 귀교한 상황이라, 이제 좀 여유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애초에 오필리스관 관리일을 하면서 남 캠프까지 돌보는 게 말이 안되는 거야. 몸이 두 개도 아니고.”
“그런고로, 당분간은 긴 시간을 캠프에 할애할 수는 없긴 합니다. 뭐, 그런 사항들을 보고 드리러 온 것이기도 하고, 무사하신지도 한 번 확인하고 싶기도 했고, 또 전해드릴 말씀도 있었습니다.”
벨은 모닥불 위의 거치대에 철제 냄비를 거치한 다음 물을 끓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할 생각인 것이다.
나는 한사코 손을 저으며 그냥 오필리스관으로 돌아가라고 그녀에게 지시했다.
뭔가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벨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할 말이라는 게 뭔데?”
“오늘 타냐 아가씨가 귀교하십니다.”
타냐 로스테일러.
로스테일러 가문에서 일어난 대참사의 중심에 서있는 인물이었다.
나를 실베니아로 먼저 돌려보내고, 현장에 남아 세력을 규합하거나 뒤처리를 도맡았다고 했다.
사실상 차기 가주로서의 행적을 밟고 있는 와중인 것이다.
정치적으로 굉장히 미묘한 위치에 있는 입장인데,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자기 세력을 규합하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블룸리버 가문의 가주나, 캘러모어 가문의 가주까지도 타냐의 편을 들었다고 하는데…
대체 어떤 수완을 쓴 건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한 번 만나 보심이 어떨까 합니다.”
“당연하지. 오필리스관 쪽으로 찾아간다고 전해둬.”
그렇게 이야기한 뒤, 벨은 루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 팔뚝을 감싸안고 있던 루시는 날카로운 물건에 찔리기라도 한 듯,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럼, 루시 아가씨. 내일 개학식 준비하려면 지금부터 요청 사항들 체크 해주시고, 몸 단장 준비도 하셔야 하고, 숙지사항도 일러드려야겠습니다.”
“아니야, 나 혼자서 할 수 있어.”
“아닙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야! 나 혼자서 할 수 있어!”
같은 대사를 두 번 말한 루시가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어느샌가 벨은 루시의 양 겨드랑이에 손을 꽉 넣고 잡아든 상태였다.
대롱대롱 메달린 루시는 그대로 벨에게 붙잡혔다. 눈물이 핑 도는 것인지, 저항의 기색조차 없었다.
“이젠 정말 많이 바빠져서, 일단 오필리스관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실상 루시를 잡으러 온 거 아니냐?”
“설마요. 루시 아가씨가 이런 데에 나타날 거란 예상을 제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지…”
벨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이야기 했다.
“운과 시기가 딱 맞아 떨어졌을 뿐이지요.”
“…”
그렇게 벨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인사 했다. 아직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잔뜩 남아 있었지만, 꼭 벨에게 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지금은 개학 시즌이다. 이제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은 제대로 본업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캠프를 돌봐준 것도 방학 기간 동안의 겸업 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게 낫겠지.
벨이 캠프를 봐주는 건 참으로 편한 일이지만, 거기에 익숙해지면 나까지 늘어지고 만다.
야생 생활을 이어나가려거든 날 선 감각을 잃어선 안된다.
“그나저나, 로르텔은?”
떠나려던 벨의 등에 대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간밤의 엘테 상회 탈환전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만 꺼내온다면, 결국 로르텔의 행방이 문제였다.
“제가 이른 아침에 캠프로 출근 한 것을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벨은 친절한 어조로 이야기 했다.
“그녀는 제 고용주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요. 부디 이야기를 잘 마무리 하시길.”
그리 이야기하고, 벨은 루시를 낚아챈 그대로 숲 사이로 사라졌다.
버둥거리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루시를 보면서, 나는 아련한 기분이 되었다.
이 학사에서 저 루시를 제대로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역시 벨 밖에 없는 것일까…
*어두운 밤이 길어도 해는 뜬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고개를 내민 아침해가 내게 인사한다.
조금씩 밀려올라오는 새벽의 빛이 캠프를 비추자, 그토록 우중충하던 어둠도, 사람을 음울하게 만들던 빗줄기의 기색도 없다.
이따금씩 남아있는 물웅덩이에서 반사된 빛이 눈을 간질이지만, 거슬릴 정도까진 아니다.
그렇게 캠프의 전경을 보고 있으면 일상의 때로 돌아온 것인가 하는 착각마저 들고 만다.
그러나, 아직 결론 나지 않은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안다.
간밤에 너무 많은 세력들이 얽혀서,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결국 가장 중요하게 체크해야될 사실은 딱 두 개다.
테일리는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로르텔은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간 밤에 이 난리를 피워가며 고생을 해댄 나의 노력에 성과가 있었는지는 결국 그 두 질문의 답으로 귀결된다.
나는 잠시 고개를 들어 모닥불 너머를 본다.
빗줄기 속에서, 끝까지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키던 테일리의 모습이 겹쳐보이는 듯 하다.
일단은 로르텔의 별장 지하를 확인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통증이 좀 남아있는 몸을 이끌고 로르텔의 별장 쪽으로 향했다.
문을 슬쩍 당겨보니 잠겨있진 않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벨이 왔다 갔다.
문을 열고 보이는 풍경은… 예상대로였다.
“어머… 일찍 오셨네요, 선배님.”
“…”
“많이 다치셨을텐데 더 쉬지 그러셨어요.”
많은 사람들이 들이 닥쳐서 내부를 수색한 흔적.
가구가 이리 저리 넘어져 있고, 책이나 잉크병 같은 잡동사니들도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내가 열심히 막아놓은 와인 저장고 입구 또한 깔끔하게 뚫려 있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그 공간의 끝에는, 로르텔이 횡령한 정황이 뚜렷해보이는 금은보화가 가득 쌓여있을 것이다.
황실 호송대가 와서 전부 수색한 것이다. 그리고 아마 저 금화의 산까지도 전부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로르텔 케헬른은 호송당하지 않았다.
별장 중앙에 있는 업무용 책상에 걸터 앉은 채, 은은하게 여우처럼 웃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근처에 굴러다니는 의자 하나를 세워서 앉았다. 더 이상 서있기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물어볼 게 많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요?”
“당연하지.”
“경위부터 천천히 말씀 드릴까요, 아니면 결론부터 말씀드릴까요?”
몸에서 통증이 올라왔지만 괜시리 티를 내진 않았다. 굳이 로르텔을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결론부터.”
“세가지 결론이 있네요.”
로르텔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검지 중지 약지였다.
“테일리는 아일라가 데리고 돌아갔어요. 아일라의 표정이 떨떠름 해 보였는데, 사정 설명은 그 쪽 차원에서 하겠죠. 아마 제대로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겠지만… 다소 생각이 복잡해 보이던데요.”
내가 궁금해 할 부분을 정확하게 캐치하고 있다. 일단은 루시가 일러준 부분이긴 하다.
심지어 로르텔은 벨브로크에 대한 사실은 알고 있지도 못할텐데, 놀라운 직감이다.
그렇게 로르텔은 약지를 접었다.
“엘테 상회 쪽 횡령 건은 완전히 듄이 뒤집어 썼어요. 이건 저도 좀 의아한 부분인데,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된 건지 아직 파악이 안 됐어요. 누가 봐도 제가 제일 먼저 의심 당해야할 상황인데 말이죠. 상회 건물 정리가 끝나면 체크해봐야 겠어요.”
그건 내게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는 부분이 있다. 아마 예상대로 흘러간 것 같다.
그렇게 로르텔은 중지를 접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편 검지를 든 채 휙 접무용 테이블에서 내려오더니,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는 내게 다가와서 입술을 쿡 찌른다.
요염한 미소에 흡족함이 피어오른다.
“….뭐냐.”
“마지막은, 내가 그 쪽 사람이 됐다는거요. 어찌보면 제일 중요한 결론이죠.”
그렇게 말하곤 순식간에 내 머리를 감싸 안는 것이다.
입술이 포개지는 감각에, 나조차도 당황하고 만다.
하여튼, 사람이 방심하는 틈을 타 기습하는 데에는 도가 튼 소녀다.
내가 머리를 뒤로 뺄 틈조차 주지 않은 채, 로르텔은 그렇게 길게 입을 맞췄다.
기습적으로 입을 맞춰대는 것이야 처음 경험하는 것은 아니건만, 이번에는 그 시간이 길다.
꽉 머리를 감싸안고, 한동안 그렇게 입술을 마주댄 끝에서야 로르텔은 고개를 떼어냈다.
음흉하게 웃는 얼굴이 이제야 내가 알던 그 로르텔 같다.
간밤 내내 유약해져 있던 그 모습은 간 데 없다. 오히려 그런 모습에 안심이 되는 느낌이다.
이윽고 로르텔의 입에서 나올 대사는 왠지 모르게 예상이 됐다.
“두 번째도 저네요?”
“…”
귀부인 같은 미소를 짓기에, 나도 대답해주었다.
나는 나대로 고생을 잔뜩 한 와중이기에, 미묘한 심술이 밀려올라오는 건 또 어쩔 수 없었다.
“두 번째 아닌데.”
“…네?”
난공불락의 능구렁이 같던 그 요염한 얼굴이 삽시간에 무너지더니, 로르텔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
“…. 그럼 두 번째는 누군데요?”
그 말에 뭐라 대답할까 하다가, 나는 조용히 로르텔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어쨌든, 무사한 걸 확인했으니 다행인 일이다.”
로르텔은 어깨에 올라온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쥐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한 동안 그 온기를 느꼈다.
인적 없는 캠프의 별장. 이른 아침의 숲에 잔잔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손의 온기를 주고 받으며,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피차 간에 묘한 충족감이 밀려 올라왔다.
이윽고, 로르텔은 눈을 지그시 뜬 다음 다시 물었다.
“그래서… 두 번째는 누군데요…??”
의외로 집착이 강한 소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