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39)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9)
2막 3장,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
5층 보스, 메이드 장 엘리스 공략전.
5층 홀 중앙에서서 테일리 일행을 바라보는 모습은 평소처럼 차분하다.
그 어떤 때라도 단정한 몸가짐은 변함이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면 매무새 하나 흐트러진 곳이 없다. 메이드장의 복식은 일반 메이드에 비해서 훨씬 화려하고 장식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 하나 빠뜨리질 않았다.
손에 든 것은 화려한 장미 문양이 잔뜩 세공된 그녀의 레이피어다. 반대 손에는 중위 마법을 위한 마나를 끌어 모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오필리스관을 수호하는 보호 법진들까지 전부 그녀에게로 주도권이 돌아와 있었다. 윌레인이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전투계 재학생들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는 검 솜씨와, 중위 마법까지도 다를 줄 아는 마법 솜씨, 심지어 이 오필리스관의 보호 법진들까지 그녀의 편이다.
법진에 휘둘려 오필리스관을 박살내버린 윌레인과는 다르다. 그녀는 오필리스관의 메이드장 직을 역임하면서 이미 이 보호 법진의 체계와 실질적인 사용 방식까지 전부 숙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일리 일행을 이길 수는 없다. 테일리 맥로어는 주인공이다.
그 사실이 어쨌냐는 듯이, 2막 3장의 최종전은 여지없이 시작됐고.
그 결판 또한, 허무할 정도로 순식간에 마무리되는 것이었다.
*
셰니의 레이피어를 타고 빗방울 하나가 흘러내려갔다.
마나는 거의 바닥났다. 앞으로 쓸 수 있는 기초마법 이래봐야 두세번이 끝이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기억을 되감았다.
셰니의 첫 타는 하복부와 허벅지 사이를 노리고 들어오는 찌르기다. 백 번 천 번을 반복해도 똑같다.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들은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칼을 다루기 때문에, 싫어도 그 패턴이 몸에 익게 된다.
쏟아지는 빗줄기.
셰니의 발이 지면을 차며, 비 사이를 뚫고 나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다.
메이드복의 펑퍼짐한 스커트 자락을 펄럭이며 파고드는 모습을 정면에서 보면, 마치 한송이 꽃이 피어오르는 것 같다.
그러나 순식간에 셰니의 몸이 회전한다. 꽃잎과도 같던 치맛자락은 휘어 감겨 사라지고, 그 행방을 눈으로 좇기도 전에 허벅지엔 레이피어가 쑤셔 박힌다. 아니, 박혔어야 했다.
– 캉!
그러나, 셰니의 레이피어는 내 발에 검면을 짓밟힌 채 바닥에 쳐박혔다.
내 몸은 셰니가 접근하기도 전부터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반응속도가 빠르냐 마냐 이전에 예지의 영역이다.
셰니는 기본적으로 마법을 다루는 동생 켈리와의 합을 맞추는 데에 최적화된 전력이다.
후방 교란 및 직접적인 화력을 담당하는 켈리를 위해 전위에 서서 빠르고 신묘한 몸놀림으로 적들의 빈틈을 끌어내는 역할이지.
직접적인 화력이 거의 없고, 쓸데없이 화려하고 동적인 움직임 또한 시선을 끌기 위함에 불과하며, 몸놀림은 민첩하나 직접적인 근력은 미약하다.
“뭐, 뭣!”
마법을 영창하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일단 빠르게 접근 했지만, 기초 마법을 준비하는 듯한 움직임은 그저 페이크에 불과하다.
마법사는 거리를 내어주면 안 된다. 움직임이 크고, 영창에 시간이 걸리는 마법들은 안전거리 밖에서라야 제대로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근접 전사에 비해 근력과 순발력이 밀리기 때문도 있다. 즉, 마법사를 상대하는 놈들은 하나 같이 거리를 좁히는 데에만 신경을 집중하기 마련이다.
애석하개도 셰니와 나 사이에는 체급의 차이가 있다.
“읏!”
셰니가 화들짝 놀라며 허벅지 사이에 매어둔 단검을 꺼내들려고 한다.
그러나, 단검으로 향하는 손보다 그걸 제압하는 내 손이 먼저 출발한다.
셰니의 한쪽 손목을 휘어꺾으며, 반대쪽 발로 허벅지에 매어져 있는 나이프 다발을 차버렸다.
-카강! 깡!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상비하고 다니는 보조 무기도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허나 순간적으로 셰니의 눈이 불그스름하게 물들더니, 휘어꺾은 손목을 중심으로 마나의 흐름이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쌍둥이 메이드 셰니와 켈리는 서로의 능력을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다. 태어날 때부터 같은 별의 축복을 받아 태어난 쌍둥이 자매의 특권이다.
바닥을 구르던 단검이 느닷없이 허공을 부유하기 시작한다. 켈리가 구사하는 하위 염동 마법. 검이나 창 따위를 움직이며 직접적으로 적을 공격하게 만드는 ‘살아있는 무구’다.
너덧개의 단검이 빙글빙글 돌며 떠오르더니, 나를 조준하며 휙 멈춰선다.
레이피어를 잡은 셰니의 손에 힘이 돌아오면서, 단검들이 나를 향해 돌진한다. 마치 살기를 가진 맹금류와도 같은 돌진이지만, 나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몸을 낮추고, 급소만을 보호하며 그대로 어깨를 셰니에게 밀어 붙였다.
셰니의 마법은 켈리만큼 정교하지 않다. 그 힘을 빌려올 수 있을 뿐, 여전히 시선을 끄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허벅지와 오른쪽 어깨, 팔뚝 쪽에 단검이 하나씩 날아와 박히지만, 박힌다는 표현이 우스울 정도로 쉽게 떨어져 나가 버린다. 마치 어린애가 장난삼아 집어던진 모양새다. 이쪽의 피해는 아주 약간의 출혈이 전부다.
나는 휘어꺾은 셰니의 손목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처음부터 셰니의 목적은 뻔했다. 날아드는 단검은, 상대의 시선을 빼앗고 대처를 강요하기 위한 눈속임이다. 셰니의 전력 대부분은 그녀 특유의 날렵한 움직임에서 나온다.
한 번 움직임을 제압한 이상, 절대로 그 우위를 내어줄 마음이 없다.
나는 피를 주륵주륵 흘리면서, 그대로 팔꿈치를 셰니의 명치에 댄채 바닥에 엎어트렸다.
“컥!”
셰니의 호흡이 일순간 멎었다. 나는 그대로 셰니의 팔뚝에 손톱을 박아넣고 살점을 긁어낼 기세로 힘을 줬다.
-카앙!
“으. 으아아아악!”
“옳지.”
바닥을 구른 레이피어를 발로 차버렸다.
근력의 차이를 민첩하고 날렵한 움직임으로 매꾸는 상대다. 무기도 잃고, 움직임도 제압당했다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여기까지 단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아아아아아아아악!”
그러나 셰니는 빗물이 들어가 충혈된 눈을 부릅 뜨면서 내 가슴께를 잡아 밀었다. 손톱으로 내 몸을 긁어대고, 허벅지로 내 등을 차대며 광기에 가까운 반항을 해댄다.
“여기까지와서, 엘리스 님을, 실망 시킬 수는 없어! 비켜! 비키라고!”
단아하고 예의바른 매무새 따위 이미 진흙 바닥에서 구르느라 옛말이다. 나는 핏물을 훑어내고 셰니의 멱살을 꽉 누른 채 그녀의 안면에 대고 똑바로 이야기 했다.
“엘리스는 질 거야.”
내 안면에서 떨어진 핏물이 새하얀 셰니의 볼에 안착한다. 그녀의 얼굴을 타고 귓가로 흘러내려간 핏방울이 다시금 빗물에 섞여 바닥을 적신다.
“당신이, 뭘 아는데요? 엘리스님에 대해 뭘 알아요?”
솔직히 말해서 잘 모른다.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는 그냥 지나가는 징검다리 이벤트였다. 스쳐지나가듯 토벌한 이벤트 보스가 어떤 속사정을 가지고 있었는지까지는 내 인식 바깥의 일이다.
“엘리스님이 얼마나 고통 받았는지 알기나 해요? 그런 와중에도 자기가 믿은 바 신념을 지키려고 어떤 싸움을 해왔는지 알기나 하냐고요?”
“솔직히 말해서…”
실베니아의 낙제검성에서는 엘리스의 속사정에 대해서 그리 깊이 다루지 않았다.
소화 해야할 에피소드도 많으니, 그런 곁다리 인물 하나하나의 사정을 짚고 넘어갔다간 볼륨이 과하게 커지고 전개가 너무 늘어진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 알 바 아니긴 해.”
그 말에 셰니는 눈을 부릅 떴다. 말문이 막혔는지 대답은 없다.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 쾅!
오필리스관 5층을 기점으로 거대한 폭발이 한 번 일어났다. 늦은 밤의 어둠을 수놓는 백색의 광휘는 분명 테일리의 검성식이 그 근원이다.
메이드장 엘리스의 공략도 막바지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셰니는 그 충격의 틈을 타 충혈된 눈을 부라리면서 내 얼굴에 손을 뻗었다.
손톱의 날을 세우고 힘을 줘가면서 내 팔에 힘을 풀게 만들어볼 심산이지만, 이미 나는 그녀의 목 언저리를 움켜쥐고 꽉 누르기 시작했다. 조금씩 호흡이 가빠져오면서 이내 오래가지 않아 기절할 것이다.
셰니는 그렇게만은 될 수 없다는 듯이, 미친 듯이 내 뒷목과 쇄골 언저리를 긁어대기 시작했다.
“알지도 못하면서! 엘리스님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 악녀의 편에 붙을 수가 있지…!”
컥컥대며 손을 뻗는 셰니의 목소리엔 증오가 가득하다.
“엘리스님이 얼마나 많은 고아들을 구원했는 줄 알아?! 나도 그 중 하나였어! 엘리스님이 아니었다면 이런 멀쩡한 직장에서 일을 할 수도, 내 힘으로 돈을 벌 수도, 애초에 살아갈 수도 없었어!”
“안 물어봤다.”
“커, 헉!”
얼굴과 목 언저리에 생겨나는 생채기들에 아랑곳 하지 않고, 나는 계속해서 셰니를 찍어 눌렀다. 충혈된 눈에서 피어오르는 증오감이 나를 엄습하지만,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용서, 안해… 로르텔의… 편을.. 들다니… 에드, 에드 로스테… 커, 윽…”
내 얼굴을 움켜쥐고 있던 새하얀 손에 조금씩 힘이 풀렸다. 그대로 양팔은 고꾸라져, 진흙탕에 쳐박혔다.
나는 손에 힘을 풀고, 완전히 기절해버린 셰니를 내려다 보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진흙탕이 되어 버린 채 나자빠진 셰니의 몸을 시야에 담았다. 충혈된 눈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던 얼굴이 기억에 각인되어 있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엑스트라들의 이야기 따위는 모른다. 모르는 걸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
셰니와 켈리가 엘리스에게 어떤 식으로 구원 받아, 어떤 경위를 통해 오필리스관의 메이드로 일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엘리스가 얼마나 경외 받을만한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을 턱이 없다.
실베니아의 낙제 검성은 그 쪽 이야기엔 스포트라이트를 주지 않았다. 시나리오에도, 설정집에도 그들을 조명한 이야기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세상엔 조명받지 못한 이야기가 훨씬 더 많다.
문득 고개를 돌려서 반파된 오필리스관을 올려다 봤다.
그 꼭대기 층엔 이 사태의 주요 주동자 중 하나인 엘리스가 테일리에 의해 제압당하고 있을 터다.
그래도 반파된 오필리스관은 돌아오지 않는다.
날아간 금전적 피해도 고스란히 남아 학사의 압박이 될테다. 몇 몇 학생들은 당장에 거주할 곳이 없어 발을 동동 굴러야 할테고, 파편 따위에 깔려 다친 학생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학사의 재정 압박은 학생을 향한 혜택이나 복지의 축소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장학금의 규모도 줄어들테고, 기숙사 지원 방침에 대대적인 변화가 올지도 모르며,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학업을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르지.
그 모든 피해들과 엘리스의 구휼 활동 사이에서 저울질을 해, 무엇이 더 옳고 그른가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엘리스가 뭔데 그 선악의 경중을 저울질 하는지, 그 의도가 선했으니 과정의 악함은 어느 정도 눈 감아줘도 될지, 아니면 로르텔이나 엘테와 같이 그녀를 악인으로서 바라봐야 할지…
그런 철학적인 이야기를 술술 내뱉으며 행동방침을 결정하는 인간들은, 다 당장에 배부르고 먹고 살만한 인간들이다.
허나, 내 행동 방침과 궁극적인 목표는 이 몸뚱아리에 빙의된 이후로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다.
이 세계가 어떤 엿 같은 시나리오를 향해 뛰어가고 있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살아남으려고 로르텔의 편을 들었다. 그냥 그 뿐이었다.
애석하게도 그 결정 안에 심오한 철학적 고뇌나 도덕적 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리는 결정들이 으레 다 그렇듯이.
[ 식기 관리 담당 셰니를 쓰러트렸습니다! ] [ 전투계 스킬 ‘고통 감내’를 깨우쳤습니다. ] [ 전투계 스킬 ‘전장 시야’를 깨우쳤습니다.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해주고 체력의 소모를 나중으로 유예시키는 고통 감내 스킬과, 순간적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느릿느릿하게 포착할 수 있는 전장 시야 스킬이었다.
“이걸…. 이제서야 배우냐….”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나는 몸 여기저기에 난 생채기를 갈무리했다.
어쨌든, 처리할 일은 남아있었다.
근처에 돌아다니던 돌을 주워들고서 다시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어쨌든 지금은 로르텔의 방으로 진입해야 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다.
-쨍그랑!
나는 로르텔의 방으로 이어져있을 창문을 깨고 안으로 몸을 굴렸다.
하필 또 2층 방이라 건물 외벽을 따라 나있는 홈을 밟고 올라오느라 죽을 뻔 했다. 비바람까지 몰아쳐서 시선을 가리는 통에 정말 손에 식은 땀이 다 났다.
-후두둑.
떨어지는 유리 조각 사이를 굴러서 들어오니, 로르텔의 방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오필리스관의 방 답게 으리으리하게 넓지만, 한 켠으로는 어색한 느낌마저 들었다.
기억 속 예니카의 방은 분명 아기자기한 프릴이나 예쁜 장식품, 여러 생활 내음 가득한 소녀의 방 그 자체였건만… 동년배인 로르텔의 방은 기묘할 정도로 사무적인 느낌이다.
호화로운 원목 가구도, 여러 장식품들도 어쩐지 필요에 의해 배치된 느낌이었다. 책상 위는 여러 서류들로 가득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각이 잡힌 책들은 도열해 있는 군사들처럼 보인다.
로르텔과 예니카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쓴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 나온다.
“걔 답다.”
혼잣말을 흘리고는, 로르텔의 책상 밑에 있는 커다란 원목 상자를 끌어냈다. 그 안에 들어있는 건 새장이고, 새장 안에는 당연히 새가 들어있다.
새장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고, 책상 구석에 있던 깃펜을 뽑아들었다. 책상 위에 있던 종이 중 아무거나 하나 뒤집어서 이면지 삼아 휘갈겼다.
‘엘테가 실베니아에 있다. 상회 본점까지 돌아가려거든 최소 3일은 걸릴 것.’
‘확보된 모든 장구류를 매각하라.’
종이를 둘둘 감아서, 비둘기의 한쮹 다리에 매어져 있는 자그마한 통에 말아 넣었다.
그 뒤, 비둘기를 꺼내어 두 날개에 자유를 선물해줬다.
빗줄기를 헤치며 밤하늘을 유영하는 전서구는, 돌아올 때는 엘테의 목을 들고 올 것이다.
큼지막한 일을 하나 끝냈다고 생각하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
북쪽숲이 반가운 건 오랜만이다.
하루 하루 처절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생존의 공간이었던 북쪽숲이지만, 이런저런 일을 겪다보니 결국 또 이 숲만한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만다.
역시 아무리 비루하고 못난 집일지언정, 일단 내 집인 이상 거기가 제일 편한 건 어쩔 수 없나보다.
비는 거의 그쳐있었다. 아니, 아예 그쳤다.
막 비가 그친 뒤의 숲에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비는 내리고 있지 않지만, 피부를 꾹꾹 누르는 묵직한 습기는 여전히 남아 거동을 무겁게 만든다.
그러나 그런 끕끕함조차 기분 좋게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 초목의 신비다. 습기 덕에 한층 짙어진 풀내음 사이를 유영하고 있으면 나 또한 숲의 일부가 된 기분이 든다.
허나, 나 또한 그들의 일부라고 주장하기엔… 외관이 너무 수상쩍다.
셔츠는 피범벅이 되어 있고, 허벅지나 어깨에는 상처가 벌어져 있다. 출혈은 멈췄지만 핏자국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다리까지 절고 있으니 마치 좀비 같다.
그래도 이 정도 상처는 그간의 경험을 생각해보면 금방 회복할 수 있다. 멧돼지에 받히거나 나무에서 열매를 따다 떨어지는 것보단 낫다. 그래도 자상은 살이 붙기만 하면 금방 아무니까.
“후우…”
한숨을 푹 내쉬고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오솔길… 이라기보단 그냥 산길에 가까운 동선을 따라 풀을 헤치며 나아간다.
모든 계획이 원만하게 이루어졌다면, 오두막에서는 로르텔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엘테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그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식은 땀이 흐를 것이다.
전서구가 도달하고, 매각안이 통과되기 전에 로르텔을 찾아내서 모든 진상을 털어놓고 인정하게 만들어야 한다. 다소 폭력적이고, 잔혹한 방식이 될지라도.
원래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엘테 상회의 회주가 이런 시기에 이런 곳에 나타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다. 나도 못했고, 로르텔도 못했다. 그 정도 되는 인간이면 행차하는 곳마다 며칠 전부터 소문이 돌기 때문이다.
직스와 예니카의 도움, 그 외 적절한 임기응변이 없었다면 로르텔은 얄짤 없이 몰락의 길을 걸었을테지.
그래도, 이젠 제법 승산 높은 승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은 로르텔의 편이기 때문이다. 아마 오늘 밤에서 내일 오후까지가 마지노선일 것이다.
로르텔의 마차가 아켄섬 밖으로 뛰쳐나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엘테는 절대로 가만히 있지 못한다.
당장에 한 시가 급한 상황에서 차분히 아켄섬 내부부터 수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뛰쳐나간 마차를 추격하고, 마차의 동선을 따라 로르텔의 행적을 유추하려다가 시간이란 시간은 다 낭비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재빠르게 마부를 잡아서 로르텔의 행적을 실토해내게 만든다 한들, 다시 아켄섬까지 돌아와야 하는 시점에서 아웃이다. 오필리스관에서 승부를 보지 못한 것이 결국 통한의 실책이 된 셈이다.
부디, 오두막으로 돌아가면 로르텔이 기다리고 있기를 빌자.
그리 생각하면서 나아가고 있자니, 나즈막한 언덕길의 끝자락에 한 소녀가 보였다.
간밤의 고생 때문인지, 타오르는 불꽃같던 적갈색 머리칼엔 윤기가 없다.
한쪽으로 묶어 내린 머리칼도 풀어헤쳐져 있고, 온통 젖어버린 몸은 비가 그친지 꽤 됐는데도 마를 기색이 없어 보인다.
금화 위의 세상에서 평생토록 이해와 타산을 계산하며 살아온 소녀, 이르기를 황금의 딸이다.
로브 모자를 눌러쓰고 있어서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뭐야, 마중 나왔냐? 친절도 하네.”
툭, 하고 던졌으나 되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소녀는 꽤 지친 상태인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오솔길을 따라 내려왔다.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혀, 떠오른 달빛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때문에 소녀의 표정은 더더욱 보이지 않는다.
ㅡㅡ이내 품속에서 소녀가 꺼내든 것은, 예리하게 날이 선 은제 단검이다.
한줄기 소름이 내달린다.
“….뭐?”
셰니가 다루던 단검들 중 하나를 주워온 것인가. 내가 셰니를 제압한 뒤에 후문으로 나왔다고 하면, 충분히 챙겨올 수 있었을 것이다.
마력을 쓰는 건 너무 눈에 띄니 호신용 수단으로 단검을 챙겨놓은 것 뿐일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신을 차려라. 그건 너무 희망적인 해석이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려했으나,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 상태로는 충분한 보폭을 내딛지 못한다.
그래. 내가 좀 안일했던 것인가.
상대는 바로 그 황금의 딸 로르텔이다.
이용할 수 있는 자는 모두 이용하고, 내다버릴 때는 누구보다도 잔혹하고 정이 없는 자다.
그래, 로르텔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지금은 에드 로스테일러를 제거해야할 때다.
엘테가 어찌됐든 간에, 이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의 진상이 엘테 상회와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자는 되도록 줄여 놓아야만 했다.
그녀가 매수한 인간은 다섯이다.
엘리스, 셰니, 켈리, 윌레인, 그리고 나 에드.
설령 엘테를 실각시키는데 성공한다고 할지라도, 저 다섯 명의 입은 단단히 막아두어야만 한다.
엘리스는 돈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이다. 설령 한 번 배신한 인간이라 마음을 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충분한 돈을 쥐어주면 입을 다물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부류다. 애초에 그녀가 배신한 이유도 돈의 액수가 문제일 가능성이 컸다.
뿐만 아니라 엘테가 실각해버린다면, 엘리스는 로르텔의 손을 잡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권이 없게 될 테지. 그 처지가 명확히 보이는 이상 얼마든지 이용해 먹을 수 있다.
셰니와 켈리는 엘리스의 말에 충성하는 메이드들이다. 엘리스를 설득하기만 하면 둘은 자연히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열등생 대표 윌레인은 애초에 처음부터 돈에 매수되었던 자다. 원래부터 열등생들의 목소리를 내고 싶어했던 입장인데, 돈까지 쥐어주니 얼씨구나 하고 휘둘려주는 가장 다루기 쉬운 존재다.
결국 통제불가능한 마지막 변수는 에드 로스테일러다.
처음에는 돈으로 매수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돈으로 매수할 수 있을지 어떨지 확신할 수 없다.
그 속내를 억지로 가늠해보려다가 한 번 더 뒤통수를 맞는 위험까지도 감안해야만 한다.
장소는 북쪽 숲의 외진 곳이다.
오필리스관 사태로 혼란한 와중에,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다.
상대는 만신창이다. 지칠대로 지쳐있고 상처도 많아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태다.
손에는 웬 걸, 예리한 흉기가 들려있다.
그 어떤 사소한 기회조차도 무조건 채가는 탐욕의 화신과도 같은 소녀다.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내칠 인재가 절대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침착하자.
대처할 수 있다.
나만큼이나 저쪽도 지쳐있는 상태일뿐더러, 아직 완전히 숲 깊숙이 들어오지 않았으니 한 번만 따돌리면 교수동까지는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이 숲에는 내게 호의적인 정령도 꽤 많다.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한 타이밍 정도는 로르텔의 움직임을 훼방 놓을 수 있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하자. 내가 좀 안일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수많은 변수에 대처하느라 이후 상황까지 감안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로르텔 케헬른이라는 인물의 본질에 대해서는 잊지 말았어야지.
2막 3장 오필리스관 점거 사태로 인하여 일어나게 될, 2막 10장 현자의 봉서 쟁탈전.
그 클라이막스에서 봤던 로르텔의 모습을, 벌써 잊어버린 건가.
로르텔 케헬른은 그 누가 뭐라해도, 어떤 인간인들 이용해먹다 버릴 수 있는 악녀 중의 악녀다.
양부의 뒤통수를 치고, 테일리 일행의 움직임을 손아귀에 움켜쥔 채, 마지막에는 모든 판돈을 쥐고 달아나는 자.
현자의 봉서를 받아든 채로 학사의 앞에서 비릿하게 웃어보이던 그 악녀의 모습이, 엘테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내리깔고 미소를 흘리던 그 장면의 잔재가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뇌를 굴려라.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을 가다듬으며, 제법 그럴 싸한 도주 계획을 확정지으려는 순간.
– 부욱.
로르텔은 단검을 이용해, 비싸보이는 자기 로브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걸음 걸이로 다가와서는,
“이렇게까지…. 다칠 일이었냐고요…”
찢어진 천으로… 내 상처를 동여매는 것이었다.
이제야 보이는 그 표정은… 울 듯한 얼굴이었다.
“부축해드릴게요. 비가 그쳤길래 모닥불을 피워놨어요. 우선 몸부터 녹여요 우리.”
– 타닥, 타닥.
“그래서, 계획대로 다 처리됐냐?”
“에드 선배님도 참. 저.. 로르텔 케헬른이에요.”
달도 별도 평소처럼 떠올랐다. 비가 그친 뒤의 하늘은 오히려 포근한 느낌이다.
타닥대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머그잔을 쥔 채 베시시 웃는 것이, 드디어 여우같던 그 모습으로 돌아온 것만 같다.
“마부한테는 단단히 약속 받아 놨어요. 목숨을 걸고서라도 최대한 시선을 끌고 시간을 벌겠다고 하던걸요.”
“그렇게까지 충성을 한다고? 무슨 수를 쓴 건데?”
“알고 싶어요?”
빙그레 웃는 모습만 봐도 떳떳한 방법은 아니라는 걸 알 것 같아서, 더 캐묻지는 않기로 했다. 설마 가족을 인질로 잡아뒀다던가 하는 건 아니겠지.
…맞나?
“뭐어, 계획과는 엄청 달라지긴 했는데… 어쨌든 에드 선배님 신세를 엄청 지게 됐네요. 고마워요, 선배님.”
“그래.”
“선배님, 그거 알아요? 이번 계획이 잘 마무리 되면 저 엘테 상회의 실권자 반열에 든다구요.”
회주의 자리는 다른 원로 상인이 먹게 되겠지만, 사실상 지금의 회주를 만들어낸 인간이니 만큼 상회 내 실세 중의 실세가 될 테다.
“이런 저한테 빚을 지워뒀다는 거, 이거 엄청 대단한 일이잖아요? 어때요. 어깨에 힘이 막 쑥쑥 들어가지 않아요? 나 좀 대단하다 하는 느낌 안 들어요?”
“…”
“와아, 반응 너무 재미없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 빙긋빙긋 웃는 것이, 음흉한 속내를 감추던 평소의 미소와 다를 바 없어서 안심했다.
로르텔은 그렇게 장난스럽게 웃다가, 머그잔에 담긴 허브티를 한 모금 머금고서는… 조용히 어조를 내리깔았다.
“고마워요, 선배님. 절대 안 잊을게요.”
“약속했던 20닢이나 제 때 내놔.”
“아하하, 그거야 뭐… 당연한 거구요.”
뭐가 그리 좋은지, 방긋거리는 표정을 지우지 않는다. 눈을 깜빡깜빡 대며 내 얼굴을 슥슥 쳐다보는 것이, 속내를 꿰뚫어보려고 드는 것 같아 나만 썩 불편했다.
“그건 그거고, 선배님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있었어요.”
“뭐? 아직도 처리해야할 거 남아있냐? 엘리스에 대한 거야?”
“아니, 그런 거 말고요. 이제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이고… 제 말은 예니카 선배에 대한 건데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화두를 넘기는 건 상인에게는 호흡보다도 자연스러운 기술이다.
“에드 선배님은 예니카 선배님이랑 많이 친하잖아요. 그쵸?”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대답했다.
“응, 친하지. 좋은 애야.”
“확실히 착하고 좋은 선배님이라 존경하고 있거든요. 항상 남을 배려하고, 마음씀씀이도 좋고.”
“그래. 그게 왜?”
그 말에 로르텔은 허브티를 내려다보던 시선을 거두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북쪽 숲의 강가에서 쳐다보는 하늘은 여느 때와 같이 높고도 맑다.
비는 그쳤다. 그 사실이 기쁘다는 듯, 혹은 누구에게 들으라는 듯.
“저는, 그렇게 착하지가 않아서요.”
그런 말을 읊조리며, 조용히 머그잔을 감싸 쥐고선 눈을 지그시 감은 것이다.
– 콰아아아앙!
오필리스관 1층은 반파 수준이 아니라 이미 완파 상태다.
직스 에펠슈타인은 전투를 마무리하고 몸을 가다듬었다. 엘테가 데려온 용병들은 생각보다 별 거 없었다.
애초에 엘테 상회와 직속으로 계약된 용병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 정도 급 용병들이 우루루 몰려오면 직스라고 해도 고전을 금치 못한다. 질도 질이지만 양 앞에는 장사 없다.
그러나, 직스와 예니카만으로도 충분히 오필리스관을 수비할 수 있을 정도로 용병의 훈련 상태가 조잡했다.
‘급하게 공수해온 용병대들인가? 아무래도 급박한 상황이었거나 자리를 비웠다는 걸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나 보군.’
그런 유추를 하며, 직스는 근처 잔해에 주저앉았다.
‘왠지… 또 싸우게 될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메이드장 쪽도 좀 신경 쓰이고. 분명 뭔가 있을 것 같아.’
썩 후련한 기분이 들진 않았으나, 당면한 상황이 이렇다면 어쩔 수는 없었다.
“에휴, 고생하셨습니다. 예니카 선배님.”
에드의 갑작스러운 부탁에 상황 파악도 못하고 도와주러 나왔지만, 어쨌든 일 자체는 잘 마무리 된 것 같다.
엘테는 중간에 갑자기 부하로부터 어떤 보고를 받더니 쏜살 같이 달려나갔다. 이제 오필리스관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투였다.
이 정도면 에드 선배의 계획대로 된 것일까. 다음에 자세한 사정 설명이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을 하며, 직스는 예니카 쪽을 바라보았다.
“…”
중위 정령의 군단 틈바구니에 소녀가 있다. 처음에는 뭔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더니, 전투가 지속될수록 정령들의 기세가 말도 안 되게 드세졌다.
이러다가 사상자라도 나오는 거 아닐까 싶어서 직스는 예니카에게 손대중을 하라고 계속 말려야만 했다.
“예니카 선배님?”
직스의 시선에선 예니카의 등 밖에 보이지 않는다. 어딘지 모르게 귀기어린 모습처럼 보여서, 직스는 순간 숨을 집어삼키고 말았다.
“…예니카 선배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혹시 화 나셨습니까?”
“아니.”
소녀는 지그시 웃고 있었다.
“화 안 났어.”
다만, 비죽 튀어나온 십자 핏줄 탓에 직스는 더 말을 걸기가 무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