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49)
현자의 봉서 쟁탈전 (4) >
화려한 장식이 없는 부분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다.
날아오르는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망토에, 금테가 잔뜩 둘러쳐진 재킷, 볼륨 있게 프릴이 튀어나온 셔츠 아래에는 적갈색 면바지. 옷 구석구석에는 온갖 보석이 잔뜩 달려있었다.
치렁치렁한 보석과 장식품은 대개 그 자의 허영심을 상징한다.
가득한 부와 드높은 명예를 드러내기 위한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 외관을 호화롭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그런 휘황찬란한 복장 속에서조차 근엄하고도 명민해보인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날카로운 턱선과 예리한 눈매. 움직임도 군더더기 없이 절도 있고, 그러면서도 한 켠으로는 부드러운 품위가 느껴지는 기묘한 인물이다.
척 봐도 예사로운 자가 아니라는 점은 한 번에 직감할 수 있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이자, 현 클로엘 제국의 실세 중 하나인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그렇게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주눅이 들게 만드는 기백이 있다.
“오벨 교장께서 직접 자리에 함께 해주지 않으신 점은 유감이군요. 건강이 악화되셨다니 걱정이 큽니다. 빠른 시일 내에 쾌차하셨으면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교장님께는 크레핀 공작께서 안부를 물었다고 꼭 전달하겠습니다.”
품위 넘치는 모습으로 스프를 한입 떠먹은 크레핀은 교장 대리로 자리에 나온 부교장 레이첼에게 유감을 표했다.
크레핀이 직접 행차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두머리가 직접 튀어나오지 않은 것은 결례 중의 결례였다. 그럼에도 유감을 표하는 것만으로 끝내는 이유는, 이 자리에 있는 크레핀보다도 지체 높은 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건강해 보이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폐하께서 타지에 나와 학업에 임하시는 황녀님 걱정을 정말 많이 하셨습니다.”
“고마워요, 크레핀. 아바마마께는 잘 적응해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전해주시길 바래요.”
“분부하신대로. 그리고, 이제는 꽤 시간이 지난 일이지만… 정식으로 사과드리질 못했군요. 저희 가문의 바보 같은 철부지 하나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분부하신대로 파문 처리 한지는 오래 되었지만, 아직도 그 결례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전달하지 못한 것이 참 신경 쓰였습니다.”
“괜찮아요. 크레핀.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페니아 황녀는 어딘지 모르게 굳은 얼굴로 크레핀의 사과를 사양했다.
그 와중에 로르텔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찬 자리에 앉아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크레핀은 로르텔을 신경쓰는 기색조차도 없었다.
실베니아의 부교장, 일국의 황녀, 공작가의 가주.
어디가서 그 이름만 대도 모두 넙죽 무릎을 꿇는 고귀한 자들의 회동이다.
빈민가 천민 출신 로르텔은 이 자리에 앉아 겸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실상 그 고귀함을 모독하고 있는 것임이나 다름없으니,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건 당연했다.
엘테 상회의 최고 실권자라는 직책은 결코 가볍지 않으나, 그것은 공식적인 직함은 아니다.
엘테의 실각은 거의 확실시 된 상황이고, 차기 회주는 전적으로 로르텔의 편에 서게 될 것임으로… 로르텔이 쥐게 될 권력의 무게는 그들조차도 쉬이 여길 수는 없을 터.
허나, 그것은 ‘아직까지는’ 전적으로 상회 내부의 사정이다. 공식적인 발표는 없으니, 아직은 이런 식으로 대우 받는 게 당연하다.
그러므로 로르텔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내리깔고… 손에 쥔 나이프와도 같이 예리한 눈매로 크레핀의 모습을 살필 뿐이다.
바로 그 에드 로스테일러와 한 핏줄을 타고난 남자다.
고귀하고, 품위 있고, 자애로우며, 현명한 가주로 그 이름을 날리고 있는 자였다.
과연, 그 평판은 틀리지 않았는지… 크레핀을 따라온 가신들의 행동거지엔 진심이 서려있다.
시중을 드는 모습 하나 하나에서 모두 크레핀에 대한 존경심이 느껴졌다.
“그 쪽은… 엘테 상회의 대리인인가.”
“로르텔 케헬른이라고 합니다. 불초의 몸으로 동석하게 되어 영광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황금왕 엘테 케헬른의 외동딸이로군. 그의 식견과 도전 정신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네.”
의례적인 칭찬을 던지는 크레핀이었고, 로르텔은 영업용 미소와 함께 그 칭찬을 영광으로 받았다.
엘테가 상회 내부에서 어떤 상황에 몰려 있는지 피차 간에 잘 알고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둘 다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현자의 봉서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줄은 몰랐군. 역시 좋은 매물에는 좋은 식견을 가진 상인들이 몰리는 법인가.”
능청스럽게 이야기하는 크레핀에게 로르텔은 겸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희는 돈 냄새가 나는 곳은 어디든지 향하니까요. 좋은 차익을 남길 수 있는 매물이 있다면 어디든지 가는 법이죠.”
이윽고 오찬이 끝나고, 현자의 봉서 실물이 트릭스관 중앙 회의실로 운반되어 왔다.
잠시간 시간을 투자해서 엘테 상회 측과 로스테일러 가문 측에서 데려온 마도서학 권위자들이 봉서가 실물임을 검증해주는 시간을 가졌다.
그 외, 봉서의 상태와 내재된 마력의 양, 그리고 감응자의 현황을 보고하는 시간을 가진 뒤 이야기는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상황은…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현자의 봉서를 매각해야하는 지금 상황은 실베니아 입장에서는 크나큰 불명예다.
굳이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진 않지만, 그렇다고 구매력도 없는 인간들에게 헐값에 매각할 수는 없다.
“저희 입장에서는 협상이 질질 끌려서 불필요한 소문이 돌게 되는 상황을 꼭 피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어젯밤 미리 보고 드렸던 것처럼, 원하시는 액수를 써서 제출해주시면… 더 비싼 값을 부르신 분께 매각하는 걸로 결정하겠습니다.”
회의석에 멀찍이 떨어져 앉은 로르텔과 크레핀 앞에 양피지가 한 장씩 배달되었다.
조심스럽게 펼쳐진 양피지에는 온갖 보존 마법이 덕지 덕지 부여되어 있었다.
마법 잉크를 이용해 중간에 글씨를 바꿔치기 하는 꼼수를 막기 위함이었다.
크레핀은 턱을 한 번 쓸더니 고민에 빠졌다.
로르텔 또한 지그시 눈을 감았다.
현자의 봉서는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고유한 매물이지만, 비슷한 규모의 서책 거래는 상업의 역사상에 꽤 많았다.
이례적인 규모의 서책 거래는 모두 꿰고 있는 로르텔이다. 그런 시세 지식은 구구단이나 다름없다. 줄줄 외고 있는 게 당연했다.
희대의 연금술사 칼이 연성학 마법을 수십개 넘게 부여해놓은 ‘질서의 마서’, 낙찰가액은 플렌 금화 8100닢.
황실 도서관에 보관된 세계에 단 하나 뿐인 생물 복제 마법 분석서 ‘타성의 책’, 낙찰가액은 플렌 금화 6730닢.
대마법사 글록트가 남방 미지의 대륙을 탐방하며 수기로 적어내린 마법견문록, 낙찰가액은 플렌 금화로 7020닢.
내재된 마법의 가치, 연구되어야 할 학술적 소재로서의 가치, 단순히 사치품으로서의 가치를 모두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
그래서, 얼마의 이윤을 남길 수 있느냐가 핵심이 되는 것이다.
조용히 양피지를 내려다보고 있는 둘을 지켜보면서, 공증인 자격으로 나와있는 페니아 황녀는 조심스레 시선을 내리깔았다.
“낙찰 가액을 전달 받았습니다. 양 측 모두 소중한 의견을 개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학사 측 직원이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잠시 후 부교장 레이첼이 양 측 양피지를 펼쳐보았다.
그 결과는, 페니아 황녀의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입회자 – 크레핀 로스테일러 ( 로스테일러 가문 측)
제시액 : 플렌 금화 8900닢.
입회자 – 로르텔 케헬른 ( 엘테 상회 측 )
제시액 : 플렌 금화 9400닢.
*
“일단 아무렇게나 액수를 높여부르기만 하면 된다. 냅다 질러서 현자의 봉서를 가져오기만 하면 손해 볼 일은 절대 없어.”
“그렇습니까? 근데 그건 모르는 거 아닙니까?”
불가에 나란히 앉아 있던 직스가 다시 수프를 넘겨주었다.
이틀째가 되니 몸에도 어느 정도 기운이 돌아온 느낌이었다. 마력이 꼬인 부분을 풀고 나니 몸도 급속도로 호전되는 것 같다.
“엘테 상회도 땅 파서 장사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매입한 가격보다 더 비싸게 못 팔면 손해보는 건데, 로르텔이 그토록 순조롭게 선배님의 제안을 받아들여 줄줄은 몰랐습니다.”
“어차피 아무리 높여 불러도 로스테일러 가문에서 다시 사 줄 거거든. 어쨌든 적자 날 일은 없는 거지.”
“로스테일러 가문은 그토록 그 봉서에 높은 가치를 두고 있는 겁니까? 얼마를 부르든 다시 사려고 할 정도로?”
나는 직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거짓말이다.
로스테일러 가문이 현자의 봉서에 얼마까지 쓸 작정인지 나는 모른다.
정말 로르텔이 말도 안되는 가격에 봉서를 매입했다고 하면, 로스테일러 가문은 봉서를 포기해버릴지도 모른다.
어차피 크레핀이 연구하고 있는 영생의 마법에 있어서, 성위 마법과 관련된 현자의 봉서는 그 보조가 될 뿐인 연구 소재다. 없다고 해서 연구를 못하는 건 아니란 이야기다.
이런 사항들을 외부인인 로르텔이 알고 있을 리가 없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르텔은 내 충동질에 넘어가 주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로르텔은 내게 이성으로서 흑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로스테일러 가문의 일원이었던 내 입장의 특수성에 걸어본 것이다.
내가 로스테일러 가문의 어떠한 내부 사정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내 의견에 한 번 투자해본 것이다.
거 설명만 들어보면 내가 너무 쓰레기 같을 수도 있겠다.
현자의 봉서 매입 경쟁에서 크레핀을 배제하기 위해, 로르텔에게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낭비하게 만드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뭐, 대부분의 액수는 봉서를 매각하면 되돌려 받을 수 있으니 생각 이상으로 큰 손실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적은 돈은 아니다.
그래도 나를 위해 변호해보자면, 애초에 로르텔은 얼마를 부르든 아무 상관이 없다.
그 돈을 낼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어차피, 현자의 봉서는 매각 시행 일자가 오기 전에 글래스트 교수에 의해 탈취 당한다. 끝끝내 거래는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단지, 이야기의 흐름을 비집고 들어온 크레핀만 어떻게든 배제할 수 있으면 될 뿐이다.
-바스락
문득, 풀숲 한 켠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났다. 나랑 직스가 고개를 돌려보니 익숙한 얼굴을 한 소녀가 캠프로 성큼 성큼 걸어왔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 꽤나 급히 뛰어온 느낌이었다.
“헉, 예니카 선배님. 아직 점심 시간도 안됐는데, 벌써 교수동에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응! 오전 수업 다 끝났어! 출석할 수업도 없구, 과제는 밤에 할 거구!”
“그래도 점심은 드시고 오셔도 괜찮…”
“배 안 고픈걸!”
예니카는 배시시 웃으면서 옷을 털고서, 베베 꼬인 연분홍 빛 머리칼을 휙휙 당기더니 종종 걸음으로 캠프 파이어까지 걸어왔다.
“에드! 정신 차렸구나!”
“어, 예니카. 걱정 시켜서 미안하게 됐다. 자세한 사정은 직스한테 다 들었어. 듣기로는 내가 폐 많이 끼쳤다고 하던데…”
“응? 아니야, 아니야!”
예니카는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휙휙 내젓더니,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내 안색을 살폈다.
“나 정말 걱정 하나두 안했어! 걱정 시킨 것 같다고 미안해 하지마! 정말! 하나도! 전혀 걱정 안했어! 신경도 안 썼어!”
“아니, 예니카 선배님. 학사를 뛰어 다니면서 울먹거리는 통에 실연을 당했다 뭐다 하는 소문까지 돌았잖습니까. 거기다 저번에 학사 회의실까지 쳐들어가서는…”
“와악!! 와아아아아악! 재밌는 얘기를 하네, 직스! 근데 오늘! 날씨가 참 춥다!! 조심해야겠다!! 감기 안 걸리려면!!!!”
가뜩이나 숲을 헤치고 뛰어오느라 숨도 몰아쉬고 있는 주제에, 내가 미안해하는 게 또 미안한 모양이었다.
확실히 정이 많은 소녀다. 걱정하긴 했는데 걱정시켜서 미안하다는 말은 듣기 싫은 것이다.
우왕좌왕 하면서 시선을 이리저리 휘둘러대던 예니카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서는 내 반대 편 자리에 와서 앉았다.
그렇게 되기 무섭게, 예니카의 등 언저리에서 불로 된 박쥐가 하나 튀어나왔다.
[ 죽여 주십시오! 에드 도련님! 저를 죽여주십시오! 이 불초 머그, 이렇게까지 에드 도련님이 무리하고 있었단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뭐, 뭐냐. 머그. 거기에 있었냐?”
예니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 대며 내게 시선을 보냈다.
머그는 휙 날아서 내 무릎 언저리에 착지하더니, 눈물을 머금으며 사죄의 절을 해댔다.
“얘는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에드 선배님 기절해있을 때 몰골 생각해보면 이 정도는 호들갑도 아닙니다.”
직스의 말에 나는 안색이 굳었다. 거의 시체나 다름 없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추태였을까 생각해보니 영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하긴… 열흘이나 기절해 있으면 그럴만도 하지…”
열흘.
“가만 있어봐라… 열흘…?!”
나는 얼른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완전히 힘이 돌아오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느릿한 움직임으로 육류 보존용으로 파두었던 토굴을 체크해보았다.
열심히 훈연해둔 고기들… 부패해서 썩은내가 코를 찔러댔다.
“으, 윽!”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얼른 코를 막았다.
훈연된 고기는 대략 닷새 정도는 무리 없이 보관할 수 있었고, 보존 기간에 따라 차례차례 소비해가는 식으로 여유를 두고 있었는데… 열흘이나 기절해 있던 통에 전부 부패해버린 것이다.
그대로 강가를 나가서 살펴보니, 어망용 그물도 유지보수를 안했더니 찢어져버렸다. 양식되어 있던 생선들도 모두 자유를 찾아 떠났다.
“식량을 다 잃어버렸군.”
나는 한숨을 푹 쉬고 불가에 돌아와 앉았다. 뭐, 몸 관리 제대로 못한 건 자업자득이니 어쩔 수 없다.
당장에 먹을 식량은 저축해뒀던 돈을 쓸 수밖에 없으려나. 큰 손실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생각해보면 뼈아픈 실책이다.
겨울나기를 생각해보면 아직 해야할 일이 잔뜩 남았는데, 이런 퇴보까지 일어나니 한숨만 푹푹 나온다.
“또 무리할 생각이네, 에드.”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예니카가 휙 치고 들어왔다.
“괜찮아, 에드. 내가 도와줄게.”
“저도 다음 시험까지는 일손이 남습니다. 간단한 사냥이나 목공 정도는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에드 선배님.”
직스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부지깽이를 휙휙 놀리며 이야기했다.
“원래 일이라는 게 닥치는 수순대로 해결하다보면 어떻게든 되는 법이잖습니까.”
그리 말하고 피식 웃는 것이, 과연 야생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살아본 경험이 있는 놈 답다 싶었다.
확실히 만사라는 게 일단 닥치는 수순대로 해결하다보면 어떻게든 되는 법이긴 하다.
불가에 앉아서 고개를 들어보니, 예니카와 직스가 골똘히 머리를 맞대고 뭐부터 해결해야 될지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문득 생각나는 광경은 저번 학기 봄이다.
무일푼으로 숲에 눌러 앉아, 아무것도 없이 급조한 목재 쉼터 아래에서 제 몸을 껴안고 잠들어 있던 내 모습이었다.
기댈 대도 없이 홀로 어둠 속에서 벌레에 뜯겨가며 잠들었던 그 모습이, 생각보다 먼 과거는 아니었음을 깨닫고 만다.
그래. 지지부진한 일도 많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생존해오면서 해결해낸 일이 더 많다.
정사의 흐름도 많이 엇나갔지만, 큰 이변은 제깍제깍 해결해왔으니 너무 탄식만 하고 있을 일도 아니다.
생존 활동이야 둘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천천히 몸을 회복하면 될 일이고, 이야기 흐름이야… 크레핀이 입찰 경쟁에서 지면 이렇다 할 다른 변수는 없을테니 큰 문제는 없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방심은 금물이다.
*
엘테 상회의 입찰로 현자의 봉서 매입 협상은 끝을 맞이했다.
크레핀 로스테일러는 당황한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이내 그 표정을 지우고는 로르텔을 미소와 함께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로르텔 또한 미소로 받아쳐 주었다.
이만한 규모의 금전이 왔다갔다하는 서책류 거래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당연히 로스테일러 가문 측도 시세 정도는 가늠해보고 왔을 터.
역대 마도서 거래 증 최고가를 기록한 거래라 해봤자 8000닢 안팎이다.
즉, 엘테 상회의 본질적인 목적이 ‘이윤창출’이라고 한다면, 그 이상의 가격을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크레핀은 최고가 8000닢에 여유를 둬서 8900닢을 호가했다.
그리고, 로르텔은 거기까지 읽고 약간 더 높은 액수를 불러서 크레핀의 뒤를 친 것이다.
처음부터 크레핀이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엘테 상회의 목적이 ‘이윤 창출’이라고 결론을 내려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익이 목표가 아니었다고…?’
페니아 황녀는 참관인 석에 앉아서 그대로 표정이 굳어버렸다.
무릇 상인이란 이윤을 따라 행동하는 자다. 로르텔이 제시한 9400닢이라는 액수는 손익분기점을 생각해보면 말이 안 된다.
마도서 거래의 역사적 가격을 생각해보면, 그 이상의 가격을 받아내서 매각할 수 있으리란 가능성이 너무 희박하다.
로르텔은 희박한 가능성에 돈을 묻는 행위를 할 인간이 아니다.
이윤 창출이 아닌, 다른 의도가 있다.
허나, 페니아 황녀의 눈은 울부짖는다. 로르텔이라는 인간의 본질은 금화를 향한 탐욕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윤 창출이 목적이 아니라고 한다면, 저 여우 같은 소녀가 뭘 위해 행동하겠는가.
애초에 현자의 봉서는 제대로 된 감응자가 아니면 그 힘을 활용하기도 힘들뿐더러, 성위 마법에 대해 제대로 된 이해가 없다면 감응자라 할지라도 아무 의미가 없다.
봉서의 마법적인 힘을 활용할 수도 있는 것도 아니고, 학술적인 가치를 중히 여기는 것도 아니며, 재산상의 이윤 창출도 안 된다.
그런 모든 조건을 무시하고 로르텔이 무리해서 봉서를 입찰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모든 가치를 배제한다면, 봉서를 입찰한다고 해서 뭐가 바뀐단 말인가.
“흠….”
크레핀답지 않은 표정이었다.
어딘가 난처한 얼굴로 정중히 좌중에게 인사를 보내고, 그대로 회의실을 나갔다. 썩 기분이 좋아보이진 않았다.
그제서야 페니아 황녀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뒤통수에 기운이 확 들기 시작했다.
결국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저 현자의 봉서 매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본다면,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도록 견제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페니아 황녀가 그토록 신경 쓰고 있었던 부분이다.
– ‘페니아 황녀님. 이번 건에 한해서 저희는 아군이잖아요. 로스테일러 가문이라는 공공의 적을 일단 이 아켄섬에서 밀어내야지요.’
로르텔의 그 대사가, 다시금 페니아 황녀의 속을 간질인다.
그러나, 아직도 이상한 점은 남아있다.
로르텔이 크레핀을 견제하려 했던 것은 싼 값에 봉서를 매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저리 비싼 값에 봉서를 매입해버리면 크레핀을 견제하는 의미가 없지 않나?
애초에, 봉서의 매입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저 봉서가 그의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하려 했던 것이라면?
그거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윤에 살고 이윤에 죽는 로르텔이 굳이 저 봉서를 저 가격에 매입할 리가 없다.
그러면 새로운 의문이 또아리를 튼다.
대체 왜 로르텔이 크레핀을 견제하는가?
페니아 황녀는 알고 있다. 크레핀은 겉보기에는 품위 있고 자애로운 공작이지만, 그 속내는 어두칙칙한 음모를 숨기고 있는 악한이다.
그러나, 황녀의 권위와 권력을 가지고서도 끝끝내 그 능구렁이 같은 속내를 만천하에 드러낼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
크레핀은 어찌나 용의주도한지 그 꼬리를 밟히는 법이 절대로 없다.
드높은 권세를 이용해도 끝끝내 드러내지 못한 크레핀의 어둠을, 제 아무리 영향력 있다 하더라도 일개 상인된 신분으로 파헤칠 수 있을 리가 없고.
설령 파헤쳤다고 한들, 그런 크레핀의 어둠을 로르텔이 발벗고 나서서 저지할 이유도 없다.
그런 유력한 권력자와 대립각을 세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불의에 대항하는 정의감. 혹은, 악인을 단죄하겠다는 사명감이다.
그런 것들은… 로르텔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 즉, 크레핀을 저지하려는 게 로르텔의 의도는 아닌 셈이다.
“하지만…”
페니아는 폭풍우 치는 생각의 흐름 속에서 말끝을 흐렸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로르텔 마저도 이용하거나 조종하는… 누군가가 배후에 있다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가?
상인으로서는 희대의 재능을 타고난 황금의 딸을… 대체 누가 제 손 놀리듯 주무를 수가 있다는 것인가?
로르텔은 굳이 말하자면 군림하는 존재지, 누군가의 손아귀에 따라 움직이는 부류의 인간은 아니다. 절대로 누군가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야생의 늑대 같은 소녀라고 생각했다.
“페니아 황녀님,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어딘가 불편하십니까?”
페니아는 회의장 구석에서, 조용히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클레르의 말에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크레핀의 손에 현자의 봉서가 들어가는 것을 저지하려고 했던 자가 있다.
그 명제가 성립하려면, 필요한 대전제가 있다.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어두운 본성을 알고 있는 자여야만 한다.
그런 자가 이 실베니아에 있다고 하면…
“페니아 황녀님?”
– ‘주제넘은 말일까 걱정이 되는데, 에드 선배님이 로스테일러 가문 쪽에 붙었다는 건 억측이라는 사실을 꼭 전해드리고 싶었네요.’
에드를 감싸며 로르텔이 내뱉었던 그 말이, 황녀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다.
가문에서 파문 당하고, 야생에 던져져, 과로로 쓰러질 정도로 이 악물고 살아오면서도, 로스테일러 가문의 어둠에 끝끝내 대항하려 했던 자가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런 자를 나락으로 내몬 것은, 페니아 엘리어스 클로엘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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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도 거래 체결 증서 매수인 : 로르텔 케헬른 (엘테 상회 측)
매도인 : 오벨 포시어스 (실베니아 측)
거래가액 : 플렌 금화 9400닢 체결일자 : 증서 서명으로부터 7일 후 감응자 이전.
이하 계약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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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결된 매도 증서를 말아서 품속에 집어넣고, 로르텔은 빙그레 웃음 지었다.
에드의 전언대로라면 아무리 비싼 값을 불러도 어차피 로스테일러 가문에서 되사갈 것이라고 한다. 그 말을 믿고 더 세게 가격을 질렀다.
에드를 한 번 믿어보겠다는 마음이 절반이었다. 일단 그는 로스테일러 가문의 내부자니까.
그럼 나머지 절반은 무엇인고 하니…어쨌든 로르텔의 수완이라면 에드의 전언대로 되지 않더라도 최소 8500닢은 받고 되팔 수 있다.
차액 900닢 정도는 손해라곤 하지만, 에드 자유이용권이라고 생각하면 이 정도는 헐값 아닌가.
“뭐든지… 뭐든지라…”
로르텔은 모처럼 머리를 풀어헤치고 이런 저런 액세서리를 머릿결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협상 자리에서 보여주었던 정체 불명의 여우 같은 모습은 간 데 없고, 거울 앞에서 푸른 장미 모양 머리띠를 가다듬고 있을 뿐이었다.
“…뭐든지? 정말?”
그리고는 괜시리 얼굴을 붉히고 있는 것이다.
협상 테이블 위에선 악마 같이 차가운 얼굴도, 어쨌든 남녀 관계의 줄다리기가 되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소녀의 모습이 되어버리니…
그 괴리에 자기 자신조차도 정신을 못차리고, 새로 받아온 장신구를 머리에 대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황녀가 보면 각혈을 하고도 남을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