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겨울의 끝자락에서
‘프룬츠베르크 전선의 서전에서 파견군단의 압도적 승리.’
‘예비역 소집, 전시사령부 출범. 전시 체제 돌입.’
‘제국 의회, 만장일치로 선전포고 의결. 대연정 수립 의논.’]
1월 둘째 주의 신문 헤드라인은 자극적이기 그지없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언론들은 신문 1면에 전쟁에 관한 기사들을 때려 넣었다. 정부의 예산은 전쟁을 위해 재편성되었으며, 전시사령부의 이름으로 전쟁 채권이 발행되었다.
전쟁으로 시중에 돈이 풀리자, 수도는 한층 활기차게 변했다. 수도 동부의 스틸웰 공업을 비롯한 군수 기업들은 호재를 외치며 더 많은 노동자를 구했다. 수도 동부와 남부의 남성들은 공장으로 가 돈을 벌었다. 주가가 요동치며 희극과 비극이 증권 거래소의 한 지붕 아래에서 동시에 펼쳐졌다. 돈 놓고 돈 먹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로피츠 공작가의 저택은 수도의 활기찬 분위기와 달리 착 가라앉아 있었다. 그 누구도 전쟁에 대한 말을 입에 올리는 걸 꺼렸다. 그저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갈 뿐이었다.
그렇게, 1월이 지나고 2월이 찾아왔다. 2월도 어느덧 3일이 되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공녀님.”
아델라인의 평소 기상 시간에 맞춰 침실로 찾아온 나이아와 시녀들은 평소에 하던 대로 아델라인을 도와 아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평상복을 입고 머리 정돈까지 끝나자, 아델라인은 침실에서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뭐야.”
“다음 주에 있을 재건위원회 회의에 맞춰서 재건사업 진척도를 점검해야 합니다. 오전 11시에 현장을 방문하시고, 정오에 오찬 일정이 있습니다.”
“알겠어.”
원래라면 식당으로 향하는 이 복도에서도 잡담이 끊임없이 오갔을 터였다. 그러나 트레포드에서 돌아온 이후로 아델라인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횟수가 확연히 줄었다. 마치 나이아가 알고 있던 아델라인과 다른 사람이 그녀의 자리를 채우고 있는 이질감마저 들었다.
대체 트레포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안드레이는 아델라인을 수도에 데려다준 뒤 곧장 짐을 챙겨서 한 달 동안 휴가를 신청하고 떠나 버렸다.
그 요청을 허가한 아델라인에게 사정을 묻고 싶었지만, 돌아온 직후의 아델라인은 잘못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이 위태했기에 그 어떤 질문도 할 수 없었다.
“공작님께서는?”
“의회에 일찍 출근하셨습니다. 집사장님께서 공작 각하는 늦은 저녁에 돌아오실 예정이라 하셨습니다.”
“알겠어.”
이런 식으로, 대화는 단문으로 시작해 단문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식당으로 가서도 아델라인은 말없이 식사를 시작하고 마쳤다. 식사를 마친 아델라인은 서재를 들른 뒤 발코니로 향했다.
트레포드에서 돌아온 뒤로, 아델라인은 서재보다 더 많은 시간을 발코니에서 보내고 있었다. 한겨울의 발코니는 종종 매서운 찬 바람이 들이쳤다. 그러나 그녀는 케이프 한 장 걸치지 않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앉아 있었다.
아델라인은 의자에 앉아 편지를 내려다봤다. 윌포드가 대신 전해 준 편지를 받은 뒤, 알렉스에게서는 어떤 소식도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저 몇 번이고 읽었던 편지를 다시 읽으며 그의 얼굴을 떠올릴 뿐이었다.
그런 아델라인의 어깨에 숄이나 케이프를 덮어 주는 건 항상 옆을 지키는 나이아의 몫이었다. 아델라인이 편지를 거의 다 읽었을 즈음, 뒤이어 따라온 나이아의 손에 들려 있던 보드랍고 따듯한 숄이 어깨에 얹어졌다.
“날이 아직 춥습니다, 공녀님.”
나이아의 말에도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마당을 바라보던 아델라인의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쟁은 언제쯤 끝날까.”
지금의 프룬츠베르크 공국, 그리고 그 인접국들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신문에서는 연일 승전고를 울리고 있었지만, 그 소식이 전쟁의 전부는 아닐 터였다. 제국의 오랜 숙적이자, 구대륙을 틀어쥔 양대 열강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프랑크 왕국을 상대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돌아올 거예요, 공녀님. 꼭 돌아올 거예요.”
그러나 아델라인에게 중요한 건 전쟁의 승패도, 전쟁의 기간도 아니었다. 그걸 아는 나이아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잡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러자 아델라인은 손에 들린 편지지를 잠깐 본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외출 준비를 해야겠지. 드레스는 뭐가 좋을까?”
나이아의 말에 힘을 얻은 건지, 아델라인의 목소리에는 적당한 힘이 실려 있었다. 비록 그것이 타들어 가는 속마음에 남은 잿가루를 모아 빚은 것일지라도, 다른 사람 앞에 내보이긴 충분했다.
아델라인이 마음과는 달리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것을 아는 나이아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시녀들이 미리 드레스 몇 가지를 골라 두었습니다. 가죠.”
“그래. 아, 이것 좀 서재에 놓고 와 줄 수 있어?”
아델라인이 건넨 편지. 나이아는 조심스레 그 편지를 받아 들며 답했다.
“책상 위에 올려 두겠습니다.”
[미안해요, 아델라인. 상황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서, 당신의 곁으로 돌아가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윌포드 함장을 통해 부쳐진 편지가 아델라인이 있을 수도에 닿을 즈음이면 무슨 이유인지는 이미 짐작할 수 있을 거로 생각해요.
저는 괜찮아요. 이미 많이 헤쳐 왔던 전장이니, 지금까지처럼 잘 헤쳐 나올 수 있을 거예요. 제 레드 코트에 걸려 있는 참전기념장들 봤었죠? 전쟁은 익숙해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고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니, 제가 없어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 주세요. 군사학책은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복습하시고요. 가서 시험 칠 거니까요. 제가 없어도 종종 즐거운 시간을 보내 주세요. 저번에 같이 갔던 극장의 연극이 재미있었으니, 새로운 연극이 나오면 저 대신 봐 주세요. 가서 물어보면 어떤 내용이었는지 알려 주실 거죠? 믿을게요?
그리고… 부탁이 하나 있어요. 안드레이에게 잠시 시간을 주세요. 원래는 제가 해야 할 일이지만, 제가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일을 하나 부탁했거든요. 부디, 그에게 시간을 주세요.
그럼, 이만 줄일게요. 따듯한 햇살이 내리쬐는 날에 다시 만나요. 프룬츠베르크의 이름 없는 어촌에서, 알렉스 매닝햄이.]
* * *
시간이 흐르고, 밤이 깊어 왔다. 하루의 일정을 마친 아델라인은 책상 앞에 앉아 위원회 회의에서 쓰일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인력의 경우 남부 이재민들을 대상으로 장기 계약을 맺은 덕분에 안정적으로 유지 가능. 자재의 경우 이번 연도 상반기 예정 공사는 선물 계약을 통해 확보한 물량으로 문제없이 진행 가능함… 그러나 전쟁의 장기화가 예상되는 만큼, 자재 비용의 상승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자재가 문제였다. 대부분 자재는 제국 내에서도 구할 수 있었으나 가격 경쟁력의 이유로 인해 원자재 중 몇 가지는 수입하고 있었다. 특히 신대륙에서 수입해 오던 목재가 가장 큰 문제로 꼽히고 있었다.
“목재의 경우 원양에서 활동하는 프랑크 해군의 사략선에 의한 통상 파괴 작전의 우선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므로 자재가 부족해 일정에 차질이 전망됨…….”
아델라인이 보고서의 초고가 될 원고를 작성하던 중,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그녀가 원고를 바라보며 허락하자, 나이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공녀님, 공작님께서 서재로 부르셨어요.”
“알겠어, 바로 갈게.”
갑작스러운 공작의 부름에, 아델라인은 펜을 놓고 공작의 서재로 향했다. 무슨 이유일까. 의회 본회의에 참석할 때도 자신을 바라보지조차 않던 공작이 무슨 이유로 부른 걸까.
고민도 잠시, 그녀는 어느새 공작의 서재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제 막 돌아온 듯, 하인에게 외투를 맡긴 그는 입에 물고 있던 여송연을 재떨이 위에 내려놓았다.
“영지로 내려갈 준비를 하거라.”
갑작스러운 공작의 말에, 아델라인은 놀란 눈을 하며 그를 바라봤다. 그는 아델라인의 얼굴을 흘끗 본 뒤,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전쟁으로 인해, 곡물의 가격이 크게 오를 것이다. 아니, 이미 오르고 있지. 이건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다.”
“물론 영지의 집사들은 믿을만하지만, 그래도 누군가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겠지. 가주의 권한을 허락할 테니, 가서 곡식의 유출을 막거라. 비싼 값을 쳐준다며 영지민들을 현혹해 곡식을 수매하는 이들이 있다면 강력히 징계하고, 필요하면 영지에 비축된 곡식을 배분하거라.”
“재건위원회의 업무는…….”
“재건위원회의 위원장인 마일즈 의원은 대연정 내각의 부수상에 내정되었다. 물론 겸임을 하겠다고 자원했지만, 어느 쪽이 우선이 되어야 하는지는 알겠지.”
공작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당연히 임시위원회에 불과한 재건위원회보다 대연정 내각의 부총리로서 수행할 업무가 더 중요했다.
“급한 사항이 발생하지 않는 한, 서신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마. 또한, 구호소의 일은 집사장이 담당하기로 했다. 내일까지 인수인계를 수행하고 사용인들을 추려 모레 아침에 떠나거라.”
공작의 말에,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수행해 온 구호소의 일과 재건위원회의 일을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는 상황이 아쉬웠지만, 공작이 지시한 일도 충분히 중요했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나이아에게 채비하라 하겠습니다.”
아델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작의 서재를 나왔다. 문이 닫히자, 공작은 다시 여송연을 물고 불을 붙이며 의장으로서 검토해야 할 서류들을 꺼냈다.
그사이, 그의 머릿속에서는 몇 시간 전 나눈 대화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 * *
“그 아이를 영지로 내려보내라고?”
“그렇습니다, 의장 각하.”
공작은 필즈먼 대장을 바라봤다. 공작의 시선은 결코 곱지 못했다. 트레포드에서 있었던 일을 들었기에, 아델라인을 낙담시킨 필즈먼의 행동은 좋게 보려 해도 볼 수 없었다.
공작은 여송연에 불을 붙이며 필즈먼을 응시했다. 제국 의회의 의장으로서는 필즈먼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1대대가 노련한 선임대대장의 손에 지휘된다 하더라도, 500명이라는 숫자는 전선의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한참 부족했다. 아직 인근에 남아 있는 파견 중대는 그 수요를 일부나마 충족시킬 수 있는 가장 빠른 선택지였다.
한편 제국 내부에 남아 있는 집단이 ‘보름달 계획’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며, 제국과 프랑크 왕국 양측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불안 요소였다.
제국 쪽에서 이를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포위망을 좁혀나가던 것이 라이플 여단 예하 파견 중대. 이 사실은 필즈먼의 대응에 또 다른 근거를 얹어 주었다.
하나뿐인 파견 중대, 두 개의 사용처.
보통의 사람이라면 둘 중 하나를 포기하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필즈먼은 그 경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듯 문제의 핵심을 짚었다. 제국 본토의 라이플 여단 병력이 전선으로 배치될 때까지만 시간을 벌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필즈먼의 기만 작전은 그 목적을 성공적으로 이뤄 냈다. 지금까지는.
그러나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기만 작전에 이용된 딸아이가 마음 아파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 사용인들의 입으로 전해 듣는 건 쉽지 않았다. 한 달 넘게 계속 아침 일찍 의회에 출근해 밤에 퇴근하길 반복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만약 이 아픔이 또다시 아델라인에게 찾아온다면, 그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공작은 그리 말하며 자글자글한 주름으로 감싸인 눈을 번뜩였다.
“이번에도, 교란이 필요한 건가?”
“교란이 아닙니다. 연속해서 교란 작전을 펼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는 공작에게 서류철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여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서류철을 받아든 공작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필즈먼을 바라본 뒤 내용을 들여다봤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공작은 다시 그를 바라봤다.
“…만약 이것이 또 같잖은 교란 작전이라면.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것이네.”
필즈먼은 묵묵히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답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