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were bigger than I thought RAW novel - Chapter 98
98화 마지막 편지
날짜는 어느새 12월 3주 차에 접어들었다. 이번 해는 눈이 별로 안 내리는 건지, 아니면 제국이 따듯한 건지. 수도의 하늘은 여전히 시리고 맑을 뿐이었다. 아델라인은 자신의 눈동자와 비슷한 색의 하늘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귀에 의사봉의 소리가 들리며 마일즈의 선언이 이어졌다.
“이걸로, 수도 남부 재건위원회의 올해 마지막 회의를 마치겠소. 그동안 고생 많았고, 내년에 건강한 모습으로 보길 바라겠소…라고 하나.”
마일즈는 양옆을 둘러봤다. 커크만 교수와 아델라인, 그리고 회의록 작성을 담당하는 사무관 하나. 아무리 임시 위원회라고 하나 회의실이 허전할 정도로 사람들이 없었다. 끝내 네 명의 위원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사퇴를 해 버린 탓이었다.
“…결국 충원은 안 이뤄지는구만. 올해 말이 되어도.”
“뭐, 이편이 덜 성가시지 않겠습니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갑니다.”
“그건 그렇지. 참. 두 사람 다 차라도 한잔하겠나?”
“저는 곧바로 아카데미로 돌아가 학생들 논문 봐 줘야 해서 힘들 듯합니다. 내년 봄에는 학사모 씌워 주고 쫓아 내야 할 놈들이 많습니다.”
“그런가, 여사는? 바쁜가?”
“…네?”
여태껏 짐을 싸는 둥 마는 둥 하며 창문을 응시하고 있던 아델라인이 뒤늦게 마일즈를 바라봤다.
“무슨 일 있나?”
“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런가. 차 한잔 괜찮나? 내 쪽에서 대접하겠네. 물론 멀리 가지는 못하지만.”
“아, 네. 저는 좋습니다.”
“그래, 그러면 같이 가지. 자네는 어서 가 보고.”
“다들, 그러면 내년에 보도록 하지요. 몸조심하시고.”
“그래, 자네도 좋은 연말연시 보내게.”
“안녕히 가세요.”
커크만 교수가 떠나자, 마일즈는 아델라인을 이끌어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은 꽤 단출했다. 창가에는 마일즈의 명패가 올라간 자리가 하나, 그 옆에는 보좌관이 앉아 업무를 보는 자리가 하나. 그리고 소파와 테이블, 책장 겸 캐비닛 하나. 그리고 창가 근처에는 이 공간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석탄 난로가 하나.
그린우드의 집무실보다 작고, 알렉스의 집무실보다 큰 방에는 알뜰하게 필요한 것들이 빠짐없이 들어가 있었다.
“부관, 가서 차 좀 끓여 오게. 홍차 괜찮나?”
“아,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델라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보좌관은 캐비닛에서 찻주전자를 챙긴 뒤 집무실 바깥으로 나갔다.
“집무실 내부에서는 취사 금지라, 공동 탕비실에서 끓여 와야 한다네. 뭐, 난로로 끓여도 되기는 하지만 되도록 규칙을 지켜야겠지.”
마일즈는 난로의 문을 열고 삽으로 석탄을 한 줌 퍼넣은 뒤 소파의 상석에 가서 앉았다.
“자네도 앉게. 난로에 석탄을 더 넣었으니 더 따뜻해질 거야.”
“감사합니다.”
아델라인은 마일즈의 왼편, 길쭉한 소파에 앉았다. 아델라인이 고개를 들자, 맞은편 벽면에 걸려 있는 옷들이 보였다. 수수한 정장들, 그리고 그 말석을 차지한 화려한 붉은색 제복. 아델라인의 시선이 제복에 향하자, 마일즈는 약간 부끄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과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가끔 필요할 때가 있어서 여기에 갖춰 둔다네.”
“아닙니다. 충분히 보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그렇게 봐 주니 고맙군.”
그때, 보좌관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주전자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내 다과와 설탕이 테이블 위에 올라오고, 두 사람의 찻잔에 차가 따라졌다.
“자네도 들지 그래.”
“업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먼저 드십시오.”
“알겠네.”
보좌관의 사양에, 두 사람은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 약간 식기는 했어도 충분히 따뜻하고 좋았다.
“요즘 심경이 조금 복잡한가? 약간 산만한 모습을 보이던데.”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네. 자네를 보니 나도 느끼는 게 있기도 하고. 수십 년을 군인으로 살아오면서 가족에게 헌신적이었다…라고 스스로 말하기는 부끄러운 삶을 살았으니까.”
마일즈는 차를 홀짝이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이번 연말은 가족들이랑 같이 있으려고 생각했네. 자네 덕분에.”
“부인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고맙군. 그렇게 말해 주니. 그나저나… 연락은 잘 주고받고 있나?”
알렉스에 관한 질문에, 아델라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간격이 짧지 않지만, 그래도 저번에 답장이 와서 며칠 전에는 편지와 함께 슈톨렌을 만들어 보냈습니다. 물론… 제가 한 거라고는 마지막에 설탕 가루를 뿌리는 것 정도의 사소한 것들뿐이지만요.”
“슈톨렌. 그러면 성 축일 전에 도착하겠군.”
마일즈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적어도 오베른에서의 작전이 시작하기 전에 도착한다는 뜻일 테니까, 작전 투입 전에 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도이치 문화권에 속하는 오베른에서도 충분히 사 먹을 수 있을 테지만, 그래도 아델라인이 보내 주는 슈톨렌이 훨씬 의미가 깊을 것이다. 맛도 꿀리지 않을 테고.
“공작가의 슈톨렌을 한번 맛본 적이 있지. 로피츠 가문이 제국으로 넘어온 건 100년이 넘었지만, 맛은 하켄 공국의 그것보다 훨씬 뛰어났어. 마치 떠나온 지 10년도 되지 않은 것처럼.”
그는 홍차를 홀짝이며 아델라인을 바라봤다.
“좋은 선물이 되겠어.”
“과찬이십니다.”
그때, 집무실의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일즈 의원. 있나?”
그린우드의 목소리에 마일즈는 부관을 향해 눈짓했다. 부관이 나서 문을 열어 주자, 그린우드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마일즈를 보자마자 그린우드의 입이 열리려 했으나, 아델라인까지 보자 그 입은 다시 다물렸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두 사람은 짐작할 수 있었다.
“…로피츠 여사, 미안하지만 티타임은 여기까지인 듯하네.”
“아닙니다, 불러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그래, 그럼 내년에 보지.”
“내년에 뵙겠습니다.”
아델라인이 집무실을 나서자, 마일즈는 그린우드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냐는 듯 묻는 마일즈의 시선에, 그린우드는 이마를 짚으며 탄식을 토해 냈다.
“황후가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에 대한 후속 대처에, 도움이 필요합니다.”
“…무슨 말이십니까, 그게.”
마일즈의 물음에, 그린우드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잠시 뒤, 그린우드의 입이 열렸고, 그와 동시에 마일즈의 표정도 차차 변했다.
* * *
“돌아오셨어요?”
아델라인이 서재로 들어오자, 자리에 앉아 서류를 보던 나이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응. 회의 마치고, 잠시 마일즈 의원이랑 차 마시다 왔어. 뭐 하고 있었어?”
“연말까지 처리해야 하는 세금이랑 사용인들 월급, 그리고 각종 경비 정리했습니다. 내일 은행 영업시간에 가서 마무리하려고요.”
“그렇구나. 내가 해야 하는 건?”
그러자 나이아는 쓰게 웃으며 아델라인 책상 한쪽에 쌓인 편지들을 바라봤다.
“공작님께서 영지로 내려가실 계획이라고, 집사장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황실 연회에는 내가 대신 가야 하는 거야?”
끄덕.
“파트너를 신청하는 편지들이 계속 도착하는 중입니다. 그중에서 몇 가지 조건으로 일부를 선별했습니다.”
“…한 사람을 골라야겠지.”
아델라인의 말에, 나이아는 침묵을 지켰다. 암묵적으로, 연회에 참석하는 영애는 파트너를 구해오는 게 관례였다. 그렇기에 비록 연회장 안에서는 헤어질지라도, 입구까지는 함께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걸 곧이곧대로 말하지 못하는 건, 아델라인과 알렉스의 관계 때문이었다. 아델라인이 알렉스 이외의 파트너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나이아는 다시 한번 서류로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그사이 아델라인은 책상 앞에 앉아 화려한 편지 봉투들을 하나하나 들어 이름들을 살펴봤다. 어디 백작가의 장남 누구, 저기 남작가의 삼남 누구. 거기서 거기인 이름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편지들은 다시 책상의 반대편에 쌓여 갈 뿐, 무엇 하나 남지 못했다.
“…그냥 아프다고 빠져 버릴까.”
“주치의가 공작님께는 사실대로 말할걸요…….”
“아니면 구호소 일하는 도중에 그만 코피 흘리고 쓰러졌다던가. 그러면 뒷말도 안 나오고 깔끔하지 않을까.”
“코피는 어떻게 흘리시게요?”
나이아의 물음에, 아델라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나이아를 바라봤다.
“그러게. 좀 도와줄 수 있어? 안드레이는 너무 아플 것 같고.”
아델라인의 말에, 나이아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용인의 손을 빌려 코피를 흘리고, 그걸 핑계 삼아 연회에 빠지겠다니. 귀족 영애의 사고방식과 한참 동떨어진 말이었다.
“저는 약할 줄 아나요? 오빠가 라이플맨인데. 적어도 공학과 조교들보다 짐은 잘 옮겼거든요?”
“취소. 아니, 보류야. 보류.”
아델라인은 손을 내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기 싫었다. 진심으로 가기 싫었다. 알렉스와 함께하지 않는 연회는 별로 즐겁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아델라인의 서재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시녀가 다가와 아델라인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매닝햄 대위님으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그 말에, 반쯤 죽어 있던 아델라인의 눈에 번뜩 생기가 돌아왔다.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시녀는 아델라인에게 순순히 편지를 넘겨준 뒤 곧바로 방을 나왔다.
[언제나 사랑한다 말하고 싶은 아델라인에게.아마 이게 프룬츠베르크에서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 듯합니다. 연합 훈련은 종막을 향해 치닫고 있고, 훈련이 끝난 뒤 단계적인 철수가 시작되면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이니까요. 그리고 사령부에서도 혼선을 막기 위해 오늘을 마지막으로 편지 발송을 멈추라고 지시가 내려왔고요.
저번에 보내 준 답장은 잘 받았어요. 우편으로 함께 온 선물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역시 아델라인이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이 그 어떤 선물보다 훨씬 힘이 되는 듯합니다. 덕분에 해안에서 불어오는 시린 바닷바람에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제국에도 눈이 내렸나요? 여기는 이미 한 번 눈이 내려서, 며칠 전에는 신대륙 출신 외인 소대 대원의 지시 아래 이글루를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걸 보고 다른 부대에서도 따라 만드는 듯했지만, 다들 이내 포기하고 눈사람이나 만들더군요. 덕분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글루라. 아델라인은 알렉스와 라이플맨들이 이글루를 만드는 장면을 상상해 봤다. 산만 한 덩치의 사내들이 옹기종기 모여 이글루를 만들고 그 안에 옹기종기 들어가 있는 모습.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음 문단으로 넘어가자, 아델라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가셨다.
외출. 그 외출은 단어 그대로의 순수한 외출이 아니라, 작전을 위한 정찰이 틀림없었다. 그러니 혹여나 정보가 새어 나갈까, 편지로도 자세히 말할 수 없을 것이고. 그 생각을 하자 아델라인의 머릿속에서는 한 가지 생각만 맴돌았다.
“…기다릴게요.”
그녀는 편지를 고이 접어 봉투에 다시 넣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다치지 말고 돌아와요.”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