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366
366화. 단순하고, 강하게
“예?”
“왜 그대들이 어젯밤에 나를 찾아왔을까? 그것을 묻고 싶네.”
대제국의 황제답지 않게 단도직입적인 물음.
그것이 타이니를 당황케 했다.
‘증거는 없을 텐데.’
어제 저 중천제일검이라는 작자도 그냥 돌아가지 않았던가.
“……무슨 말씀이신지?”
타이니는 시치미를 떼기로 했다.
그런데.
“그대들이 이곳에 온 당일. 내 뒤에 서 있는 대장군이 놓칠 정도로 강한 자가 침전에 찾아왔었네.”
“…….”
“절대고수가 시중에 굴러다니는 잡배도 아닐 텐데, 아무리 물증이 없다 한들 상황 증거가 너무나도 뚜렷하지 않나?”
황제의 눈에는 확신이 어려 있었고, 그의 말과 동시에 일행을 억누르던 기세 역시 배가되었다.
우우우웅.
어쩐지, 대전 회의치고 너무 강한 이들이 모여 있다 싶었다.
더구나 저 오러익시더 셋이 황제의 뒤에 나란히 서 있는 게 평상시의 광경일 리는 없다는 생각도 그제야 들었다.
‘사실, 그게 또 맞긴 하지.’
하지만 타이니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 일행을 암살자로 의심하시는 겁니까?”
“상황이 그렇지 아니한가? 설마 증좌가 없다고 해서 발뺌할 속셈인가?”
그 말에 타이니는 피식 웃었다.
그에 황제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 순간.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정말로 저나 제 일행이 암살자였다면, 폐하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저와 얘기를 나누고 있지 못하실 겁니다.”
타이니가 태연하게 내뱉은 말에 대전의 분위기가 한순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러다 이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건방지다!!”
우장군 개천관일창 양일원과 대장군 중천제일검 서일산, 그리고 오늘 처음 보지만 아마도 좌장군 개벽일월부 장천일로 추측되는 이까지, 세 명의 오러익시더가 일시에 기세를 뿜어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황제는 오히려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 그래, 그렇다면 어제의 방문에 나쁜 뜻은 없었다고 이해해도 되겠는가?”
……이거, 순 자기 멋대로군.
스스로 확신한다면 증거가 없어도, 누가 뭐래도 그 뜻을 바꾸지 않는다.
황제의 성향을 대번에 파악한 타이니의 표정이 슬쩍 찡그려진 것도 잠시, 이내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이런 종류의 사람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면 그 자신감의 근거를,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증명해 주겠는가?”
이어진 황제의 말은 너무 뜬금없었다.
“……예?”
“일산, 자네가 나서 주겠나?”
“물론입니다, 폐하.”
곧이어 마치 미리 말을 맞춰 둔 것처럼.
챙!
사나운 인상의 거한이 대검을 뽑아 들었다.
“허…….”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전개되는 예상 밖의 상황에 당황한 타이니가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보는데.
“사실 그대들이 전해 온 소식은 우리 입장에서는 너무 믿기 힘든 이야기일세. 그런데 증좌라고 할 만한 것들이 전부 서대륙에 있다고 하니, 우리는 이곳에 온 유일한 증거들, 즉 자네들을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미소를 짓는 황제의 말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리고.
– 겸사겸사 그대들이 어제의 일과 관련이 있는지 확인도 하고 말이야.
그 말의 저변에 숨겨진 뜻까지 파악한 타이니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어쩔 수 없게 되었지만, 황제의 수작에 그대로 끌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기왕 그렇게 하실 거면, 저기 계신 두 분까지 같이 덤비시는 게 좋겠습니다.”
“뭐라?”
황제와 대장군의 표정이 동시에 굳어질 때.
고오오오오오.
우르르르릉.
타이니의 전신에서 노을빛 기세가 피어오르며, 대전에 들어올 때부터 일행을 압박하던 기운을 단숨에 밀어 냈다.
“컥!”
“크흡!”
“쿨럭!”
여태 그 기운을 유지하고 있던 무사들이 연달아 피를 토하기 시작하고, 장내 대신들의 안색도 확 변하기 시작할 때.
타이니가 자신감 넘치는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제 이름은 타이니. 광휘라 불리는 서대륙 최강의 기사입니다. 저 세 분을 동시에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자부하는 이름이지요.”
대전의 모든 이를 찍어누르는 기세를 발하면서도, 전면에 있는 황제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힘을 조절하기까지.
서일산, 장천일, 양일원. 선 제국의 3대 고수이자 각각 대‧좌‧우장군인 그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는데도, 타이니의 태도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이런 제가, 서대륙에서 재앙을 두 번 막아 내는 동안 수도 없이 죽을 뻔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세 분을 확실하게 제압하면 여러분께서, 그리고 폐하께서 정말 재앙이 다가왔다는 걸 실감하시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황제의 눈빛 역시 한층 무거워졌다.
* * *
이미 다 준비가 되어 있었던 듯, 그들은 건청궁의 앞마당으로 빠르게 자리를 옮겼다.
너른 마당 한 켠, 사자를 닮은 생소한 짐승이 새겨진 돌판이 중앙의 길과 테두리를 따라 깔린 광장.
그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중천제일검!”
“대장군께서 나서실 정도인가?”
“저자가 대해제일검을 꺾었다고 하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대장군님은…….”
“애초에 세 장군을 한꺼번에 상대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뭐, 우리야 눈요기나 하면 되지.”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타이니는 구겨진 얼굴로 혀를 차고 있었다.
졸지에 구경거리가 되어 버린 듯했지만, 지금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애초에 무력시위를 할 거면 자신의 힘을 좀 더 확실히 보이고 싶었는데, 황제는 그에게 대장군 서일산과의 대련만을 허락한 것이다.
‘아쉬워.’
하지만 그런 그의 아쉬움과는 상관없이, 눈앞에서는 분노한 표정의 장년인이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질렀다.
쿵.
“서일산. 과분하게도 선제국의 대장군으로서 제국 무사의 대표를 맡고 있다.”
갑옷까지 챙겨 입었기 때문인지, 안 그래도 사나운 인상이 더욱 살벌해진 중천제일검의 모습.
‘무사 대표?’
여기서는 대장군이 그런 뜻이냐?
한숨이 나왔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대련을 무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힘으로 의사 결정을 한다는 게 그로서는 오히려 달가운 일이었으니.
[어떻게 좋게 해결됐네?] [압도적으로, 알지?] [알아.]멀리서 그를 지켜보는 일행이 전언으로 전한 목소리에는 조금의 걱정조차 없었다.
동료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타이니가 다시 서일산을 바라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저야 좋은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그 자신감 넘치는 발언에 서일산의 사나운 얼굴이 조금 더 구겨졌다.
“그대가 나를 이긴다면, 어제 일도 불문에 부치겠다는 것이 폐하의 뜻이다.”
“아니, 그게…….”
타이니는 뭐라 말을 덧붙이려다 그냥 또 한숨을 내쉬었다.
아예 변명을 들을 생각도 없었구먼.
‘어제는 그냥 돌아가더니…….’
아무래도 그건 저자의 뜻이 아니라 황제의 뜻이었던 모양이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이곳을 바라보는 황제의 얼굴이 보였다.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대련을 지켜보는 황제는 이런 상황이 꽤 익숙한 듯 보였다.
“황제께서 이런 자리를 즐기시는 모양입니다?”
“폐하께서 무사들의 대련을 즐기시기는 하지. 그러나 지금 이 자리를 그리 가볍게 생각해서는 곤란하네. 나는 결코 적당히 할 생각이 없으니.”
간밤 혹은 오늘 아침에 황제와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인지, 서일산이 풍기는 분위기는 어제 자신의 전각에서 느껴지던 것과 확연하게 달랐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다.
“우리가 전해 온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긴 합니까?”
“그것도 지금 자네가 하기 나름이겠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해 드려야겠군요.”
중천제일검이라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거창한 이명의 주인을, 최대한 압도적으로 패배시키는 것으로 말이다.
그 투지가 전해졌을까.
“할 수 있다면 말이지.”
쿵.
우우웅.
오연한 태도의 서일산이 완만하게 휘어진 동대륙식 대검을 전면에 겨누자, 그의 전신에 황금빛 서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 오오!
자연스레 주변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고, 타이니의 표정에도 슬쩍 놀란 기색이 번졌다.
“오시게. 내 연배가 한참 위인 듯하니, 선수는 양보하지.”
어제 전각에서 대면했을 때, 그리고 킬로미터 단위의 거리를 두고 간접적으로 싸웠을 때는 확실히 느껴지지 않던 서일산의 실력이 그제야 피부에 와닿은 것이다.
그 말인즉, 어젯밤엔 그의 감각으로도 서일산의 경지를 완전히 읽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달리 말하면.
‘나에 준하는 실력자라는 뜻이군.’
자연스레 타이니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현생의 실력이 전생의 수준을 따라잡은 이래, 그는 전생에 호적수로 생각했던 검제조차 눈 아래로 두고 있었다.
굳이 서대륙에서 일대일로 싸울 만한 상대를 꼽자면 크롬벨 하나뿐인데, 그는 엄밀히 말하면 현시대의 사람이 아닌 고대의 용사.
그러니 타이니는 현생 인류 중에는 자신과 정면으로 싸울 만한 인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런 강자가 바로 눈앞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래서 더욱.
“아깝다…….”
아쉬움에 찬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순간, 서일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뭐라?”
탄식에 가까운 그 한마디에 담긴 감정을 읽은 것이다.
“시간의 여유만 있다면 꽤 즐겁게 대련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즐겁게? 하, 지금 나를 아래로 본다는 뜻인가? 건방지다!!”
서일산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불쾌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에 타이니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렇지 않기에 아쉽다는 겁니다.”
“……?”
서일산의 얼굴에 의구심이 떠올랐지만, 타이니는 그것을 해소해 줄 생각이 없었다.
“선수를 양보한다 하셨습니까? 후회하실 텐데.”
“흥, 그럴 리가.”
서일산이 타이니의 그 말에 코웃음을 치자,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받아들이지요.”
그리고 그 순간.
우드득.
갑자기 뼈가 꺾이는 소리가 울리더니, 타이니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며 그의 몸이 순식간에 부풀어 올랐다.
고오오오오.
“저, 저……!?”
“저게 무슨……!?”
일순간에 30cm가량 더 커진 그의 덩치에 지켜보던 동대륙인들의 입에서 놀란 탄성이 터져 나왔고.
그의 달라진 기세를 느낀 서일산의 얼굴이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질 때.
“조심하십쇼, 죽지 않도록.”
타이니가 송곳니를 빛내면서 내뱉은 그 말을 끝으로.
쾅.
폭발음과 함께 그의 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강기(罡氣)의 색깔이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어찌 그자가 아니라 확신하는가.
– 저들은 서방에서 온 자들이다. 신비한 요술을 부려도 이상하지 않음이야.
– 무엇보다 암천일성조차 후에 살기를 느끼지 못했다고 하였으니, 어제의 그 일에는 의문점이 많아.
– 자네가 직접 상대하며 알아봐 주게.
서일산은 주군의 그 말을 기억하며 최대한 상대를 도발하려 애썼다.
그의 성정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몇 번이고 꺼낸 것 또한 그런 취지였다. 젊은 강자가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부러 도발한 것이다.
혹시라도 숨기는 게 있다면 남김없이 끌어낼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결코, 결코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콰콰콰쾅!
“큭!”
거세게 몰아치는 노을빛에 휩싸인 새하얀 광풍.
그 미친 바람 속에서 서일산의 황금빛 빛살은 당장이라도 휩쓸려 사라질 듯 위태위태하게 넘실대며 간신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콰콰콰쾅!
엄청난 속도로 몰아치는 거대 망치의 공세와 그것을 간신히 비껴 내는 대검의 움직임은, 구경꾼 중에서도 무력이 높은 자들만이 흐릿하게 볼 수 있는 정도로 빨랐다.
쾅!
– 이게 전부라면 실망입니다.
쩌저저저적.
일 초를 수십 분의 일로 쪼갠 시간 동안 퍼부어진 압도적인 파상 공세 속에서 들려온 영파.
그것이 서일산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혜광심어(慧光心語)라니, 말도 안 돼!!’
무공의 경지와 지혜가 동시에 하늘에 닿아야 쓸 수 있다는, 마음을 전하는 소리.
그것을 쓰는 자가 검선이라면 모를까, 눈앞에 있는 이 새파랗게 어린 청년이라니.
지금 이 상황이 도무지 현실 같지가 않았다.
거기다.
‘이게……’
쾅!
무식하게 온몸을 던져 후려갈기는 전투 망치를 간신히 피해 내자마자, 그 반동을 이용해 회전한 뒤 다시 온몸을 던져서 후려갈기는 일격까지.
‘……무슨!’
미친 듯이 빠르고 강력한 적의 공세에서는, 신묘한 무학의 도리 따위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그저 온몸을 던져 절대적인 파괴력을 실은 공격을 끊임없이 이어 가는 것뿐.
게다가 서일산은 그 사실을 느끼면서도 좀처럼 반격할 틈을 찾을 수 없었다.
욱신.
쩌저적.
사량발천근(四兩發千斤)의 기예를 이용해 적의 모든 일격을 최소한의 힘으로 흘려 내는 것만으로도 손목에 무리가 왔고, 압축검강(劍罡)에는 점차 금이 가기 시작했다.
스각.
쩡!!
우르르르릉.
비껴 낸 일격이 바닥을 스치기라도 하면 그 여파만으로 지면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말도 안 돼!’
차라리 상대가 짐작도 못 할 수준의 신묘한 무학의 묘리를 보여 주었다면 감탄이라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압도적인 힘과 힘, 또 그것을 넘어서는 힘뿐이었다.
자신이 아는 무예는 스스로를 깎아 정교한 석상을 만드는 과정인데, 눈앞의 남자는 그저 투박한 바위가 끝없이 쌓여 만들어진 돌산 같았다.
신묘한 무학은커녕 단순함의 극치밖에 느껴지지 않는 공세.
평생을 갈고닦아 온 자신의 무학이, 그 단순함 앞에 무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