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49
149 홀로 모두를 위해
* * *
에스플러네이드는 최신식 공연장이다.
그래서 유럽의 어느 공연장처럼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현대의 음향설계를 이용하여 건축을 한 덕분에 어느 좌석에서도 꽤나 균일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명당 좌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피아니스트의 공연인 경우, 보통은 무대 왼편 좌석이 인기가 좋다.
해당 좌석에서는 피아니스트의 손을 직접 보면서 연주를 들을 수 있어 퍼포먼스에 관심이 많은 관객들이 주로 많이 예약을 한다.
한편, 1층 중앙이나 2층 앞열의 경우 피아노 소리가 비교적 더 선명하게 들리는 만큼 음악 자체에 중점을 두는 관객들이 선호한다.
소리에 더 신경을 쓰는 객석인 1층 중앙 앞쪽 객석에 앉은 관객들.
그들은 팸플릿을 보며 한껏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체 어떤 연주를 보여주려나?”
“그러게. 연주 프로그램이 하나 같이 어려워 보이는데 말이야. 그 나이에 이런 곡들 감정 표현이 제대로 될까?”
“어려울 것 같긴 한데······. 직접 보면 알게 되겠지.”
“솔직히 오늘은 그 아이가 다시 싱가포르에 와줬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잖아. 그것만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공연이긴 해.”
“하긴······. 사람들 대부분은 ‘희망의 아이’라는 데에 더 관심을 두고 있긴 하니까. 한번 봐봐.”
한 학생의 말에 다른 학생들이 공연장 안을 스윽 살핀다.
공연 시작까지 한참 남았는데도 벌써 가득 차 있는 객석.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보면, 관객들이 ‘희망의 아이’라고 대화하는 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던 한 여학생이 대표로 교수님께 질문을 한다.
“그런데 그 아이, 아무리 ‘희망의 아이’라고는 해도 지금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건 맞지 않아요? 에틀링겐도 그렇고 카네기홀도 그렇고요. 평론가 반응도 대단하더라고요.”
50대 후반 정도의 남자.
싱가포르 국립대 소속, 용슈토 음대 교수인 다니엘 후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검증을 받은 아이가 맞아. 싱가포르에서는 ‘희망의 아이’라는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그렇지, 미국이나 독일 같은 곳에서는 이미 천재 소리를 듣고 있기도 해.”
“그렇죠? CNN 인터뷰 연주 영상 보니까 장난 아니더라고요. 저는······. 그 정도까지 ⌜거울⌟을 연주하진 못했을 것 같더라고요.”
“진짜 대단하긴 하더라.”
“그러니까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을 했겠지. ⌜Schmid⌟랑 계약한 것도 그렇고 말이야.”
여학생의 말에 곧바로 맞장구쳐주는 친구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후버 교수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용슈토 음대 학생들과 함께 ‘희망의 아이’ 연주를 보러왔다.
한 학년을 무사히 잘 보냈다는 축하의 의미와 연말·연초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리고 용슈토 음대와 저 아이는 약간의 인연이 있었으니까 말이다.
“원래 저 아이, 우리 학교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받기로 되어있었다잖아.”
“맞아. 그게 AC2505 사고로 이어졌었던 거고. 큰일 날뻔했지.”
“탑승객 전원이 생존해서 천만다행이었다니까?”
“그런데 마스터클래스면 어떤 교수님한테 수업을 받기로 했던 거야?”
마지막 학생의 질문에 나머지 학생들이 큭큭 웃는다.
도대체 학교생활을 어떻게 했길래 그런 소문도 모르는 거냐고.
그 ‘당사자’ 교수님하고 같이 왔는데도 눈치를 못 챈 걸 보아하니, 혹시 다른 학교 스파이가 아니냐고 말이다.
“아~ 그게 후버 교수님이었구나······.”
학생의 말에 교수가 직접 대답했다.
“그래. 결국엔 그 마스터클래스가 흐지부지되긴 했지만 말이다.”
세계 청소년들의 음악 교류의 일환으로, 대한민국에서 진행했었던 콩쿠르.
그곳에서 3등을 한 학생이 용슈토 음대에 오기로 했었는데 일이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 버렸다.
AC2505 사고.
‘희망의 아이’가 된 아이.
아이는 싱가포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서 대한민국으로 돌아갔고, 그 뒤로는 연락이 끊어지게 됐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었는데 말이지······.’
어느새 피아니스트가 된 아이는 스스로 싱가포르에 발을 내디뎠다.
모두의 주목을 한껏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그게 무척 신기하면서도 기특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곳을 다시 찾아온 걸 보면 인연의 힘이란 게 무서운 것 같기도 하네요.”
“네? 뭐라고 하셨나요?”
후버 교수 옆자리에 앉아있던 동료 교수가 고개를 돌린다.
“아닙니다. 그냥 궁금해서요. 어떤 무대를 보여줄지. 그리고 그때보다 실력이 얼마나 더 늘었는지도요.”
“아~ 그때, 후버 교수님이 저 아이의 콩쿠르 영상을 보고 심사를 하시기도 했었죠?”
“제가 이곳 용슈토로 부른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고가 났으니······. 아직도 마음이 어수선하긴 하네요.”
후버 교수는 그 당시, 콩쿠르 평가를 위해 전달받았던 아이의 연주 영상을 회상해봤다.
‘분명 열정은 넘쳤지만.’
방향을 영 잡지 못하던 아이.
그래서 도움을 주고 싶던 거였는데, 이미 제자리를 찾은 듯한 아이를 보고 있자니 묘한 감정이 들었다.
동료 교수가 묻는다.
“그런데 그때, 후버 교수님께 저 아이가 왔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교수님도 저 아이를 눈여겨보고 있었던 만큼 많은 걸 가르쳐주셨을 것 같아서요.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죠.”
“글쎄요.”
인연을 믿는 후버 교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저랑 만날 인연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니, 저 아이가 제게 왔다고 해도 사제지간이 되진 못했겠죠. 제가 부족하거나 저 아이가 마음을 열지 못했을 거라 봅니다.”
“허허. 또 어려운 말씀을 하시네요. 그런데 후버 교수님이 부족하다고요? 뭐가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저 아이의 CNN 연주 영상을 봤거든요. 그리고 작년 여름엔 저 아이가 대한민국에서 3등을 했던 그 콩쿠르 영상도 봤었고요. 아이는 그동안 격변을 겪은 것 같더군요. 제가 그 정도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으음. 그런가요?”
“네. 그러니 저 아이에겐 저를 만나지 않은 것이 더 ‘인연’에 맞는 일이었을 겁니다.”
“뭔가 어렵네요······.”
“원래, 이 세상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비어있는 무대를 가만히 바라보는 후버 교수.
공연 시작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잠깐의 상념에 빠져있을 수 있었다.
한편, 공연장 2층에서는 조금 밝은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서진이의 연주를 보기 위해 한국에서 싱가포르까지 온 박하선.
‘새봄 피아노 학원’ 겨울 방학이 시작된 어제, 부랴부랴 싱가포르에 온 그녀는 한국대 재학 시절부터 쭉 친구로 지내왔던 송예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서진의 어머니인 송예인하고 말이다.
“서진이가 언제 저렇게 컸는지. 이렇게 큰 무대에도 다 서고 말이야. 물론, 나는 이 정도로 큰 무대는 한 번도 못 서봤지만. 그러고 보니까 비교할 바가 안되긴 하네?”
“큭큭. 얘는. 굳이 그런 말을 뭐 하러 해?”
“그냥. 뭔가 뿌듯하기도 하고 흐뭇해져서. 서진이가 내 꿈을 대신 이뤄준 것만 같아. 그래서 괜히 너한테도 고맙고.”
“솔직히 하선이 네 덕분에 서진이가 피아노에 정을 붙이게 된 거잖아. 그것만으로도 나는 고마운걸.”
“아냐. 아냐. 서진이가 스스로 잘해준 거지. 나는 옆에서 응원만 해줬던 거야.”
박하선의 말을 듣고, 강유한이 대신 대답한다.
“하선아.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역할을 해준 거란다. 저 아이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던 거니까.”
“시간이요?”
“스스로 음악적 재능을 깨달을 시간 말이다. 저 아이는 결국 그걸 해내고야 말았지. 아이에게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저 아이는 그 시기를 스스로 맞이할 때까지 음악을 이어왔잖니. 하선아. 너는 잘 한 거다.”
“······.”
“교수님 말씀이 맞아. 네가 우리 서진이 첫 피아노 선생님인걸. 그러고 보니 오늘 처음으로 서진이 피아노 선생님들이 모두 공연을 보러 오게 된 거네요? 서진이도 좋아하겠어요.”
송예인의 말을 듣고, 미소 짓는 박하선 선생님과 강유한 교수님.
박하선은 무대를 보며 말을 이어갔다.
“후우. 그보다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건지 모르겠어. 서진이가 큰 무대에 서는 건 처음 봐서 그런가?”
“아, 맞네! 너 학원 때문에 그동안 한국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지.”
“맞아. 서진이······. 분명 잘해주겠지?”
약간의 걱정이 묻어나오는 박하선의 말.
엄마 옆에 앉아있던 한수연이 제일 먼저 자신 있게 대답한다.
“당연하죠~ 우리 오빠는 정말 멋진 피아니스트니까요~”
긴장하지 말라며 박하선에게 레몬 사탕을 하나 선물하는 한수연.
덕분에 그들은 잠시 웃음을 터트렸다.
한편, 1층 왼편 좌석.
“어떻게 해요? 제가 다 떨려요!”
린은 진짜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조금······. 진정하시죠.”
“룽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차분하세요? 서진이 연주하다가 긴장이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실수라도 하면······.”
룽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린 선생님도 CNN 연주 영상을 봤다면서요.”
“네? 그런데 그게 왜요?”
“그 정도 연주는 아무나 못 하는 겁니다. ‘그런 연주’를 할 수 있는 아이라면, 린 선생님께서 걱정할 일은 없을 거예요.”
클래식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린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룽 선생님은 클래식 음악을 평소에도 듣는다고 하셨죠?”
“제 몇 안 되는 취미죠. 그러니 제 말은 어느 정도는 믿으셔도 괜찮을 겁니다.”
“그런가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많이 올 줄은 몰랐어요. 에스플러네이드가 꽉 찰 정도라니······. 농담이 아니라 서진이는 진짜로 스타였나 봐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린.
룽은 비어있는 무대를 잠시 바라봤다.
싱가포르에 오자마자 병원으로 인사부터 하러 왔던 아이.
손을 꼭 잡아주며 감사의 인사를 하던 아이의 모습과, 그 아이가 그때 병원 로비에서 보여줬던 ⌜트로이메라이⌟ 연주가 겹치며 뭉클한 감정이 생겨났다.
일을 하며 느끼는 보람.
그 아이를 통해 그걸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린은 시간을 확인하다가 공연 관계자를 불렀다.
오늘 공연에 앞서 미리 부탁했던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린과 룽은 공연 관계자에게 자신의 핸드폰을 맡겼다.
그리고 한 번 더 해당 내용을 언급했다.
“알람이나 전화가 울리면 꼭 확인하시고 저희에게 말씀해주셔야 해요. 비밀번호도 다 풀려있으니 쉽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네. 켈리 디렉터님께 미리 전달받은 내용입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알겠어요. 그럼 부탁드릴게요.”
혹시나 병원에서 ‘긴급 연락’이 올까 봐 미리 말을 해뒀던 내용.
특히, 의료진과 구조대 초청이 많은 공연이라 에스플러네이드 측에서도 미리 이 부분을 체크해뒀었다.
핸드폰을 수거하러 다니는 공연 관계자를 보며, 린은 룽에게 말했다.
“연락이 안 왔으면 좋겠네요. 공연을 끝까지 보는 것과 상관없이······. 그저 병원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면 좋겠어요.”
“저도 그러기만을 바랍니다.”
병원을 떠올리다가 문득 907호 병실이 생각난 린은 엠마를 떠올렸다.
‘엠마도 이런 큰 무대가 보고 싶다고 했었지. 같이 올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다음엔······.’
꼭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속으로 기도했다.
오늘 공연을 보는 사람들의 감정은 다양했다.
2,000여명의 관객들은 각자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초청을 받고 공연을 보러 온 구조대는 저번에 구하지 못한 어떤 사람을 떠올렸고.
초청을 받고 공연을 보러온 의료진은 스쳐 지나가버린 환자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고마움과 설렘.
슬픔과 아쉬움.
기대와 희망.
사람들의 복잡한 감정들이 에스플로네이드를 가득 채운다.
1층 중앙 앞쪽 객석에 앉아있던, 용슈토 음대 교수인 다니엘 후버는 안내 팸플릿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어려운 프로그램.
난이도가 높은 곡.
하지만.
의도가 보이는 곡 선정.
에스플러네이드에 아는 관계자가 있는 후버는, 이 아이가 이 공연을 굉장히 짧은 시간에 공연 준비를 끝냈다고 들었다.
‘네 뜻은 알겠다만······.’
후버는 객석을 바라봤다.
‘이 사람들 앞에서 정말로 그런 연주를 할 수 있겠니?’
아이가 준비한 첫 번째 곡은 리스트의 ⌜고독 속의 신의 축복⌟이다.
리스트가 말년에 작곡했던, 무척이나 차분하면서도 서정적인 곡.
프란츠 리스트는 젊은 시절엔, 비르투오소라 불리는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에 영향을 받아 화려하면서도 기교적인 피아노 곡을 주로 작곡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리스트의 서정적인 음악은 잘 알지 못한다.
⌜라 캄파넬라⌟를 비롯한 리스트의 화려한 음악에 더 눈길이 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진정으로 어렵고,
진정으로 찬란하면서,
진정으로 놀라운 곡은.
한 사람이 인생을 돌아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자전적으로 풀어낸, 리스트의 ⌜고독 속의 신의 축복⌟과 같은 곡이다.
리스트의 말년의 역작이라 불리는 작품.
이렇게 어려운 곡을.
어지간한 피아니스트들조차 손대기 어려워하는 이런 곡을.
그 아이가 옳게 연주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너는 어떤 연주를 보여줄 거니?’
관객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연주가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은 환호를 보내주기 시작했다.
희망의 아이.
그 아이가 무대에 등장했을 뿐인데도 사람들은 기립박수를 쳐주고 있었다.
후버 교수는 그들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미복을 입은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는 터벅터벅 무대 중간까지 걸어와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보통의 아이였다면, 이 상황을 보고 고양감에 얼굴을 붉혔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관객들이 보내주는 함성은 대단했다.
하지만 저 아이는 무척이나 담담해 보였다.
차분하게 관객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가만히 어딘가를 응시하는 모습.
일순간 착 가라앉은 아이의 눈빛에 후버 교수는 고개를 돌려봤다.
아이가 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궁금했으니까.
허나.
하나같이 일어서 있는 사람들 때문에 아이가 무엇을 보는지 알 수는 없었다.
어느새 아이는 피아노 앞에 앉았다.
관객들도 하나둘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들떠 있던 공연장의 분위기가 정리되며 정적이 찾아온다.
아이는 가만히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이 순간에 집중한다.
그 모습에 후버 교수는 살짝 소름이 돋고 말았다.
‘그래······.’
리스트의 ⌜고독 속의 신의 축복⌟을 연주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네게 어떤 신이 깃들었는지.’
‘또는 네가 진정한 고독을 아는지.’
‘한 번 잘 생각을 해보려무나.’
프랑스의 시인 라마르틴의 동명 시 ⌜고독 속의 신의 축복⌟에서 영감을 받아서 리스트가 작곡한 피아노곡.
리스트의 서정성을 잘 드러낸 이 곡의 서두가.
아이의 움직임과 함께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Franz Liszt – ⌜Bénédiction de dieu dans la solitude ⌟, S.173, No. 3
프란츠 리스트 – ⌜고독 속의 신의 축복⌟, S.173, No. 3
긴 주제의 선율.
아르페지오(Arpeggio, 펼침화음)와 트릴 음형이 동시에 나타난다.
숨 막힐 듯 느리게 이어지는 트릴.
잘 잡혀있는 음의 균형이 고요를 암시한다.
l’accompagnamento sempre piano e armonioso(반주는 언제나 평탄하고 조화롭다.).
프란츠 리스트의 지시사항.
그런데도.
그러한 평화와 조화를 피아니스트가 잘 지키고 있는 와중에도.
연주자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저 아래로.
깊고, 더 깊게.
평생을 음악과 종교에 헌신한 리스트가 말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써 내려갈 수 있었던 이 음악을······.
저 아이는.
성장과 성숙을 충분히 거치지도 않고서.
지금 이 자리에서 기꺼이 표현해낸다.
“······.”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음악인데도 아이는 벌써부터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힘이 들어서?
‘그렇다기보다는······. ’
저 아이는 이 음악을 진실하게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리스트는 라마르틴의 명상적인 시 ⌜고독속의 신의 축복⌟의 첫째 연을, 이 작품 악보 맨 앞에 적었다.
아이는 연주로 시를 표현하고 있었다.
아주 느리게.
자칫하다간 호흡하는 걸 까먹을 정도로 느리게.
피아노로 라마르틴의 시를 낭독한다.
⌜나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내 심장에 깃든 이 평화는 대체 어디에서 나온 겁니까.⌟
아름다움 속에 숨어 있는 불안함.
애련한 멜로디가 가슴을 찌른다.
⌜불확실하고, 불확실했던 나에게 있어서.
바람에 휩쓸리는 물결에도 이렇게 의심을 품고 말았었는데.⌟
너무나 느릿하게 진행되는 진행.
어느 피아니스트보다도 더 느리게.
아이는 선율을 곱씹는다.
음표와 쉼표.
그 사이에 있는 공간까지 음악으로 만든다.
리스트의 초기와 중기 때의 작품처럼 화려한 기교와 기술, 그런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저 높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오른손의 음형이.
천상의 소리를 표현한다.
두 옥타브를 넘나들며 진행되는 주제 선율.
아련하고도 아련한 멜로디.
그 멜로디가 어째서인지 애틋해서.
심장을 가만히 죄어온다.
⌜지혜로운 사람들의 꿈속에서, 선을 찾고, 진실을 찾아.
우레와 같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심장을 가지고도.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하행하는 선율.
천상의 소리가 지상으로 내려온다.
반음 진행이 끝없이 반복되며.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알토 주제 선율이.
가만히 숨을 내뱉는다.
⌜내가 직면했던 지나간 며칠의 고통은.
내게는 한 세기와 한 시대를 넘긴 것만 같았습니다.⌟
고요함 속에서 울려 퍼지는 화음.
‘아아.’
후버 교수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 아이는······.
믿기지 않지만, 진정한 고통을 겪은 아이였다.
3화음 상성부에서 선율이 서글피 운다.
울고, 울고, 울고.
이 고독한 곳에서.
신이 진정으로 존재한다면.
어째서 내게 축복을 내려주지 않았냐느고.
목놓아 하소연한다.
아니.
아니다.
후버는 착각할 뻔했다.
아이의 연주에 묻어나오는 슬픔에 잠식되어.
음악의 전체를 놓칠 뻔했다.
아이는 말했다.
점점 긴박해지는 음표로 소리친다.
나의 고독은······.
이제는 진정으로······.
축복이 되어가고 있다고.
잔잔하기만 하던 음계가 옥타브를 뛰어넘고,
4도 위까지 상승하며,
희망을 노래한다.
다시 한번 천상의 소리를 연주한다.
저 높은 곳에서.
⌜그리고 그것은 거대한 심연으로부터 분리되어.
내 안에 새로운 사람이 다시 탄생하여.⌟
후버는 ⌜고독 속의 신의 축복⌟의 첫 번째 연의 마지막 부분을 속으로 외쳤다.
‘이곳에서 새로이 출발합니다······.’
⌜이곳에서 새로이 출발합니다.⌟
후버는 무대를 바라봤다.
아이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아무 말도 없이, 홀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직 한참 남아있는 연주.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고 있는 아이.
그는.
저 피아니스트는.
이곳에 있는 모든 관객들과.
이곳에 없는 사람들과.
그리고 스스로를 위해.
홀로 아득한 고독 속에서······.
조용히 신의 축복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숭고한 피아노의 선율이······.
마침내 이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