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133
132. 기억할 필요 없는 배우 >
단막극 촬영 중간 쉬는 날에 신조선 사또전의 카메오 촬영이 잡혔다. 3월 중순에 방영 일자가 잡히는 바람에 관직을 임명하는 신을 빨리 찍어야 했다.
촬영장으로 가던 중 태주가 두 사람에게 쉬는 날을 뺏은 걸 사과했다. 원래 사또전에 출연하고 싶어 했던 그는 괜찮았지만, 견우와 미나는 모처럼 생긴 쉬는 날에 일하러 나오게 해서 미안했다. 태주는 단막극이 끝나면 둘에게 휴가를 챙겨 줘야겠다고 기억해 뒀다.
휴식 없이 그와 일정을 같이 하는 한 마리에게는 괜찮은 장난감을 사 줄 생각이었다. 이레귤러가 할리우드에 있으니, 긴장을 조금 풀어도 괜찮을 텐데, 태산이는 요즘도 촬영장에 함께 다녔다.
“요샌 태산이를 매일 촬영장에 데려오네.”
“경호실장 태산이에요. 옆에 있으면 얼마나 든든한데요.”
“호호호. 확실히 예전보다 듬직해졌어. 장난감 좋아하는 건 여전하지만. 그치? 태산아.”
“냐앙.”
의자 위에서 장난감을 물고 노는 태산이를 쓰다듬고 있자, 미나가 말을 걸었다. 쿠첼루스와 같이 지낸 후로 항상 집에 두고 다니던 태산이를 매일 데려오니 궁금한 듯했다.
이레귤러한테서 자신을 지켜 주려 한다는 설명은 못 했지만,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부는데 고생하는 녀석의 칭찬은 할 수는 있었다. 태주가 든든하다고 칭찬하자, 기분이 좋았는지 장난감을 힘차게 몰아붙였다.
세트가 마련된 경기도까지 가는 중에도 미나와 태주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이번 대화의 주제는 태주 대신 신조선 사또전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에 관한 것이었다. 아이돌 출신으로 이미 여러 작품에서 조연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은 배우인데, 왜 배우 인맥이 전혀 없는 건지 모르겠다는 의문이었다.
사또전의 새 주연이 소속된 아이돌 그룹은 그다지 인기를 얻지 못했었다. 몇 년간 활동하다 지금은 활동을 쉬는 중이었다. 그룹 활동 중 연기를 병행한 그와 예능에 출연하는 다른 멤버 한 명만 방송에서 볼 수 있었다.
“연기 병행한 지도 꽤 됐던데, 어떻게 아는 배우가 한 명도 없을까?”
“설마요. 정말 아는 배우가 한 명도 없겠어요? 남한테 부탁을 못 하는 성격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소속 그룹명이, 로켓 큼, 로켓보이네요.”
“호호호. 이름이 참. 하긴 이름이 무슨 상관이야. 뜰 만한 애들은 이상한 이름으로도 잘만 뜨는데.”
데뷔 6년 차지만, 태주는 그가 있던 그룹을 처음 들어봤다. 사실 회귀 전엔 이런 배우가 있는 줄도 몰랐었다. 사또전에 자신 대신 캐스팅됐다는 얘기에 알게 됐다. 그가 기억을 못 할 정도라면, 연기가 별로이거나 대표작이라 부를 작품이 없는 배우였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가 데뷔하기 전에 연예계를 떠났을 수도 있었다.
“연기한 거 찾아봤는데, 괜찮더라.”
“그래요? 어디에 나왔어요?”
“예전 거는 못 봤고, 만유 전기에 나온 것만 봤어.”
“헛. 만유 전기요?”
매번 안전사고를 내는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였다. 만유 전기 촬영 중 세트를 설치하던 스태프가 추락 사고로 중증 장애 판정을 받았었다. 노동부에서 작업장 안전문제 개선 지시를 받기도 했지만, 여전히 상황이 개선되지 않았었다. 방송이 끝난 후, 피해자에게 제대로 보상도 하지 않고 다른 안전사고도 스태프에게 회유를 가장한 협박으로 덮은 사실이 드러났었다.
“연출이 김정훈 감독이었죠? 안전사고 내고도 뻔뻔하게 스태프 탓만 하던.”
“헐. 태주야, 표정.”
“후우. 그 감독, 얼마 전에도 드라마 촬영하다 외주 제작팀 스태프 폭행해서, 기사 나오지 않았어요?”
“그럴걸. 나도 그 기사 본 기억 난다.”
태주는 주연 배우가 어째서 다른 배우들과 인맥을 못 쌓았는지 알 것 같았다. 김정훈 감독의 현장은 험악한 분위기에 남들보다 훨씬 긴 촬영 시간이 기본이었다. 배우고 스태프고 신경이 곤두서서 대화는커녕 아마 인사도 제대로 못 했을 것이다.
연출에 재능이 있다는 평 때문에 이름 있는 배우들과 작업을 많이 했지만, 한 배우와 두 번 작업했다는 얘기는 들은 적 없었다. 회귀 전에는 소속사의 다른 배우가 조연으로 김정훈 감독의 작품에 들어간 이후 그의 모든 작품을 회사에서 커트했었다.
“배우고 스태프고 험하게 굴리기로 유명한데.”
유명 배우들에게까지 제 성질을 다 부리는 감독이었다. 지금 단막극을 같이 촬영하는 강은진 감독도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물불 안 가리는 것은 같지만, 사람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부터 달랐다. 배우와 스태프를 동료로 보는 사람과 도구로 보는 사람이 같을 리 없었다.
회귀 후에 좋은 점이라면 이런 지뢰들을 피해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질이 좋지 않은 배우나 연출자들을 미리 알고 거르는 것은 꽤 큰 이점이었다. 태주는 다른 사람의 성공할 기회를 뺏는 정보를 쓸 생각은 없었지만, 이런 정보는 아끼지 않고 쓸 생각이었다.
*
신조선 사또전은 사극답게 지방의 세트를 빌린 상태였다. 드라마 촬영 현장의 열악함은 두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상태였다. 그중에서 최고봉은 아마 사극 촬영 현장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태주의 눈에 들어온 현장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보조 출연자들 휴게실도 따로 있고, 카페 차가 상주하다니. 뭐 이런 촬영장이 다 있니.”
“큭.”
아무래도 투자자가 깐깐하게 현장을 살피는 것 같았다. 감독님이나 작가님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출연자들을 꽤 배려해 주는 현장인 것만은 분명했다.
“이게 누구야?”
“안녕하세요. 선생님.”
“허! 안녕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내뺀 녀석이.”
“죄송해요. 사정이 그렇게 되었어요.”
“쯧. 됐다. 사정은 들어서 알아. 쓸데없는 말 말고, 카메오 잘하고 가라.”
“네. 그럴게요.”
촬영장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박동진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박동진은 오늘 그가 촬영하는 관직 제수 신과는 상관없는 지역 유지 역할이어서 못 만날 줄 알았었다. 가는 방향이 좀 전에 지나친 카페 차 쪽인 것을 보면 음료를 마시러 가다 마주 친 것 같았다.
태주는 박동진을 째려보는 미나를 재촉해서 분장실로 갔다. 사정을 알면서도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은 박동진을 못마땅해하는 게 분명했다.
태주가 안내받은 곳은 2인용 분장실이었다. 다른 사람의 짐이 없는 걸 보니, 태주 한 사람에게 내준 것 같았다. 태주가 의상을 갈아입고 준비하는 사이, 견우가 콜 타임을 재확인하러 갔다. 촬영장에 여유 있게 도착해서 걱정이 필요 없는 편이지만, 견우는 항상 촬영장에 오면 변동 사항이 있는지 확인 먼저 했다.
“매니저님 진짜 부지런하지 않아요?”
“부지런하지.”
“요령이 나쁜 사람도 아닌데, 현장에서 쉬시는 걸 본 적이 없어요.”
“호호호. 책임감이 강한 타입이잖아.”
“맞아요. 나중엔 같이 다니기 힘들겠죠?”
태주가 말하는 나중이 군대에 다녀온 후를 가리킨다는 걸 미나도 잘 알았다. 사실 그것은 매니저 견우만의 일이 아니었다. 미나 역시 태주가 군대에 다녀오는 사이에 다른 연예인을 맡게 될 것이다. 그녀도 경력이 꽤 길어서 이젠 팀을 꾸리고 실장 직함을 가질 때가 되었다.
“뭐 그건 그때 되어 봐야 알겠지.”
“매니저님이 현장을 계속 다니시기에는 경력이 아깝잖아요.”
“맞는 말이긴 한데. 자기가 원하면 현장에서 일할 수도 있는 거지.”
“나중에도 같이 다녔으면 좋겠어요.”
“그럼 호칭부터 좀 편하게 해 봐. 벌써 몇 년을 같이 다니는데, 아직도 매니저님이니. 나한테는 누나라고 바로 불러 놓고는.”
가볍게 흘기면서 하는 지적에 태주는 마땅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처음엔 예전 매니저인 운석이 형과의 기억 때문에 거리감이 느껴져, 선뜻 형이라는 호칭이 나오지 않았었다. 지금은 그런 거리감은 없지만, 매니저님이라는 호칭에 이미 너무 익숙해진 상태였다.
“어쩐지 매니저님은 매니저님이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리시지 않아요?”
“호호호. 사실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 그러고 보니까, 누나도 매니저님이라고 부르잖아요.”
“호호호. 픽서 뿌리게 말 그만하자.”
“읍.”
태주와 미나가 자신의 얘기를 하는 동안 견우는 콜 타임을 확인하고 대본이 바뀌진 않았는지도 꼼꼼하게 확인했다. 또 안면 있는 스태프들에게 오늘 촬영을 같이하는 배우의 성격이나 주의할 점 등도 미리 알아봤다.
주연 배우의 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연기는 괜찮다는 평이었지만, 쌀쌀맞은 성격인지 제대로 대화를 나눠 본 사람이 없었다. 그는 태주와 다르게, 대기시간에는 주로 분장실이나 밴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편이라서 촬영할 때 어떤 점을 싫어하는지도 들을 수 없었다. 분장실에 돌아온 그가 그 점을 태주에게 알려 줬다.
“아이돌이라길래 밝은 성격일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네.”
“에이. 아이돌도 사람인데, 어떻게 다 같아요.”
“하긴 김은형 씨만 봐도 예상하곤 달랐었지.”
“윽.”
친절한 김은형 씨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빠듯한 해외 일정을 다녀오면서도 태주가 좋아하는 차를 선물하고 드라마 홍보도 해주고 있었다. 여전히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에게 잘해 주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미나도 익히 알고 있어서, 가끔 언급하면서 태주의 반응을 즐기곤 했다.
“나중에 김은형 씨 드라마 찍으면, 거기 카메오 같은 거 해 줘서 갚아.”
“오! 그거 괜찮네요.”
“다 됐다.”
“멋지네요. 진짜 왕 같아요.”
“얘는. 당연히 진짜 왕처럼 보여야지.”
수다를 떠는 사이 태주의 헤어스타일링을 마친 미나가 익선관을 씌워 줬다. 짙은 붉은 색의 곤룡포에 눈썹도 굵게 일자로 표현하자, 태주의 곱상한 얼굴에 강인한 느낌이 더해졌다. 그녀는 태주와 쉴 새 없이 떠들면서도 제대로 그를 꾸며 줬다.
*
준비를 마치고 도착한 세트는 조명 배치가 한창이었다. 복잡한 선에 걸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감독에게 가자, 호들갑스럽게 그를 반겼다.
안 그래도 살집이 없이 마른 사람이었는데, 촬영이 고되었는지 깡마른 상태였다. 상당히 피곤했는지 눈 밑도 검었지만, 반대로 표정은 꽤 밝았다. 그녀와 같이 있는 다른 스태프들도 피곤해 보이는 건 같았지만, 역시 표정이 좋았다.
“와 줘서 고마워요, 태주 씨.”
“하하하. 불러 주셔서 제가 더 고맙죠.”
“그렇게 말해 주니, 그게 참 민망하면서도 좋네요.”
“촬영 순조롭다는 얘기 들었어요.”
“그러니까요. 환경이 생각보다 더 쾌적해요.”
감독이 말하는 환경이 단순히 촬영 환경만을 말하는 게 아니란 걸 다들 알고 있었다. 제작비를 남겨서 자기 뱃속만 채우려던 제작사 대표의 영향력이 줄고, 제대로 예산이 집행되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 일에 태주와 소속사인 트리즈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실 모를 수도 없었다. 가끔 현장에 들르는 ‘투자자 이지명’이 태주와 트리즈 최 대표를 여러 차례 언급했었다.
그렇게 서로 근황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중에 시간이 됐는지 주연을 맡은 배우가 세트로 왔다. 아이돌 출신이라더니 생각보다 더 곱상하고 마른 사람이었다. 태주보다 키도 작고 전체적으로 좀 유약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안녕하세요. 이태주예요. 오늘 잘 부탁드려요.”
“…네.”
“….”
“….”
“아, 하하하. 촬, 촬영 준비하셔야죠.”
감독님 근처로 다가온 배우에게 먼저 소개하며 인사한 태주가 당황했다. 설마 이렇게 면전에서 대놓고 무시를 당할 줄은 생각도 못 했었다. 안 좋은 촬영 현장을 겪은 사실을 고려해 봐도 매우 무례한 태도였다. 곁에서 상황을 보던 감독이 주연 배우를 몸으로 슬쩍 가리며 중재했다.
태주는 기분이 좀 상했지만, 애초에 문제를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잠시 카메오로 출연하는 것이었다. 몇 시간 촬영하고 돌아갈 자신과 달리 그는 앞으로 꽤 많은 촬영이 남아 있었다. 굳이 시끄럽게 만들어서 남은 촬영에 지장을 주고 싶진 않았다.
추가된 짧은 신이라서 리허설과 촬영도 빠르게 마쳤다. 순식간에 촬영을 마친 태주의 표정은 담담했다. 상대 배우의 연기에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차가운 느낌을 주던 태도와 다르게 연기는 무미건조했다. 대본 그대로라, 촬영이 끝나자 기억에도 남지 않았다. 주연 배우의 연기는 더도 덜도 않은 대본에 나온 지시에 충실한 연기였다.
태주는 가볍게 수고했다는 인사만 남기고 세트에서 빠져나왔다. 대본대로라면 왕이 자리를 든 후에 남은 사람들끼리 대화하는 장면을 찍어야 했다. 태주는 조명과 카메라 위치를 조정하는데 바쁜 사람들을 뒤로하고 일행과 함께 분장실로 향했다. 분장을 지우고 돌아가기 전에 다시 들를 생각이었다.
“괜찮으십니까?”
“네? 아! 괜찮아요. 별일도 아닌데요, 뭐.”
“뭐야? 무슨 일 있었어?”
“아니요. 별일 없었어요.”
태주의 성격이 아무리 유하다지만, 기껏 도와주러 와서 냉대를 당한 걸 참을 이유가 없었다. 견우는 태주가 처음 인사했을 때 무시당하자마자 바로 나서고 싶었지만 참았다. 당사자인 태주가 바라지 않는 것 같아서였다. 혹시나 해서 다시 확인해 봤지만, 역시나 태주의 태도는 변함없었다.
“그보다는요. 매니저님 좀 전에 연기 어떻게 보셨어요?”
“밋밋했습니다.”
“역시 그렇죠?”
“왜? 어땠는데?”
“대본대로의 연기였어요.”
미나는 알쏭달쏭한 얼굴이었다. 태주의 대답은 연기를 잘했다는 건지, 별로였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 대답이었다. 대본대로 하라고 윽박지르는 감독을 본 적 있는, 미나는 그게 무슨 문제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시간이 촉박한 드라마 현장이면 괜찮은 상대예요.”
“그래?”
“네. 자기 해석 없이, 대본대로만 연기하니까요.”
“그럼 잘하는 거 아니야?”
“잘하긴 하는데…. 제가 영화감독이라면 절대 안 쓸 거예요.”
태주의 그 말에 동의하는지 견우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모두 갈아입고 가발까지 벗고 정돈한 태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얌전히 그를 기다려 준 태산이를 칭찬하며 품에 안았다. 촬영장을 떠나기 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차례였다.
‘모노드라마도 아니고. 혼자서 벽을 상대로 공을 치는 것 같은 연기를 바랄 사람이 있나?’
벽보고 하는 것 같은 연기를 좋아하는 배우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오늘 카메오로 같이 촬영한 주연 배우는 스쿼시의 벽 같은 상대였다. 태주가 좋아하는 같이 호흡하고 주고받는 연기를 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그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돌아서자마자, 그 배우에 관한 것들은 모두 기억에서 지워 버렸다. 그런 연기를 계속하는 한 앞으로 같이 촬영할 일이 없는 배우였다. 굳이 기억해 둘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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