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132
131. 박수 촬영 >
세트 안에 언제 긴장했냐는 듯 뻔뻔한 표정을 한 여배우와 후줄근한 모습의 태주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딜 봐도 출근하는 복장인 여성이 안고 온 아기를 태주에게 떠넘기는 장면이었다.
“말도 없이 아침 댓바람부터 쳐들어오지 말라고 했지.”
“어쩔 수 없어. 이모님이 오늘 급한 일이 생겼다잖아.”
“나는? 나는 무슨 급한 일 안 생길 줄 알아?”
“백수가 일은 무슨 일.”
“백수 아니라고 했지!”
짜증을 내는 남자의 옆에 선 채로 여자가 환하게 웃으면서 따져 물었다. 그럼 네가 직장이 있냐, 아니면 어디 건물이 있어서 세를 받냐며 따졌다. 대꾸할 말이 없던 박수는 괜히 민망해서 아기를 감싼 담요를 다시 잘 여몄다.
“내가 친정이 있니? 시댁이 있니?”
“그러니까 형이랑은 왜 갈라, 악! 놔! 놔! 내 머리.”
“아침부터 재수 없게 그 인간 얘기할래? 응?”
“이, 씨! 내가 대머리 되면 다 누나 탓이야.”
“그러게 누가 머리에 손잡이를 달고 있으래?”
여자가 말하는 손잡이는 아기를 돌보는 그가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사과 머리였다. 평소 눈을 가릴 듯 길게 앞머리를 내리는 그였지만, 아기를 돌볼 때도 그럴 수는 없었다. 아기가 얼굴을 볼 수 있게 머리를 올리고 있어야 했다.
“하여튼 주말까지만 좀 봐 줘.”
“안돼. 나 내일 일 있어.”
“설마, 너! 그 인간 가게 나갈 생각은 아니지?”
“날 뭐로 보고 그런 소릴 해. 이제 그런데 안 간다니까.”
의심스러운 여자의 눈초리를 피해서 잠이 깬 아기를 얼렀다. 살짝살짝 흔들며 눈을 맞추는 모양새가 익숙했다. 아기 돌보기 싫다며 거절하던 말과 다르게 손길은 부드럽고 다정했다.
“그럼 네가 해 봤자지. 언니들 대신 급식 배식하러 가니?”
“아니야!”
“그럼? 등하교 도우미야?”
“쯧. 어휴. 넌 멀쩡하게 생긴 게….”
박수는 그의 생활을 손금 보듯이 들여다보는 그녀에게 대꾸도 않고 아기를 안고 방으로 들어갔다. 심부름 서비스라고 말하지만, 동네 누님들의 잔심부름을 해 주고 용돈을 받는 정도였다. 제대로 된 직장이 없어 사는 곳도 하는 일도 안정적이지 않았다. 아기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는 박수를 보는 그녀가 짠한 표정을 지었다.
박수는 18살, 성년이 다 된 나이였지만, 미성년자로 보호자가 필요했던 나이에 보육 시설에서 나왔다. 그런 박수를 먼저 나와서 자립한 그녀가 지금 이 동네에 자리 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처음엔 아르바이트와 그녀의 소개로 알게 된 동네 사람들의 간단한 심부름을 병행했다. 그러다 그녀가 결혼해서 조카가 태어난 후론 가끔 아기를 돌봐 주고 용돈을 받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동네 사람들도 급할 때마다 그에게 아기를 맡기고 있었다.
“컷! 좋아요.”
강 감독의 사인이 나자마자, 태주의 머리채를 잡았던 배우가 다가왔다. 그녀는 미안한 표정으로 태주에게 괜찮은지 물었다. 이번 장면에 혹시라도 NG를 낼까 봐 꽤 긴장한 것 같았다. 사과 머리 꽁지를 잡고 흔드는 신이었는데, 실감 나게 한다고 힘을 제대로 빼지 못했었다.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머리채 쥐고 흔드시는 방향을 제때 움직였어요.”
“다행이에요.”
“사실 이런 신은 잡는 쪽이나 잡히는 쪽이나 긴장하긴 매한가지 같아요.”
여배우는 편안한 어투로 그녀의 말을 받아 주는 태주 덕에 긴장으로 굳은 몸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태주의 말대로 그녀는 한껏 긴장한 채로 연기하고 있었다. 몇 년간 단역만 전전하던 그녀에게 대사가 제법 긴 이번 배역은 다시 없을 기회였다.
주연은 언제 미니시리즈의 주연을 맡아도 이상할 것 없는 이태주고, 연출진도 괜찮았다. 감독은 신인답지 않게 촬영현장을 잘 조율했고, 작가 역시 조금 푼수기가 있었지만, 리딩 할 때부터 필요한 것들을 꼼꼼하게 알려 줬다.
“그런데 아기가 진짜 잘 따르네요.”
“하하하. 그런가요.”
같이 촬영하는 아기는 여랑 작가의 조카였다. 그녀는 촬영하느라 아기가 힘들어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태주에게 턱도 없는 소리라고 말했다. 힘든 것은 조카를 매일 봐주는 자신이라며, 이 정도 도움은 받을 자격이 있다고 울분에 차서 얘기했다.
“애도 배우님을 알아보는 거죠. 조그만 게 잘생긴 건 또 알아서.”
“하하하. 작가님도 참.”
“아니에요. 진짜 내가 평소에 얘 볼 때 얼마나 진을 빼는데요.”
“어머. 이렇게 순한데요?”
“오늘이 이상한 거예요.”
여랑 작가와 여배우가 아기가 너무 순하게 굴어서 이상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태주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몰래 웃었다. 그는 아기가 순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촬영 첫날에 아기와 같이 찍는 신이 있는 걸 알게 된 후, 일부러 정원의 상점에서 사 온 향수 때문이었다.
[안정의 향수(라벤더 향)편안하고 온화한 향의 향수이다.
불안, 불편, 당황 등 부정적인 감정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지속시간 3시간.]
태산이가 산이로 변했을 때 쓸 만한 물건을 고르다 봐 두었었다. 주로 아기들이 이유 없이 불안해할 때 사용하면 도움이 되는 향수였다. 태산이 경우는 산이로 변해도 겁 없이 빨빨거리고 다녀서 쓸 일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여랑 작가의 조카가 조금 예민한 아이라 들은 후에 바로 이 향수를 떠올렸었다.
“꺄하.”
“아이고. 좋니? 이모가 봐 줄 때는 짜증만 내더니.”
“하하하. 작가님이 아기도 봐 주세요?”
“글쎄 우리 언닌 내가 집에 있다고, 맨날 노는 줄 안다니까요. 허구한 날 조카를 맡겨요.”
아기에게 웃긴 표정을 지어 주며 가볍게 물은 질문에 분노에 찬 대답이 돌아왔다. 주먹을 꽉 쥔 여랑 작가는 돈 벌면 작업실부터 얻을 거라고 굳은 목소리로 다짐했다. 험악한 기세에 질렸는지 옆에 있던 여배우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곧 예전에 봤던 그 쓰레기장 같은 작업실이 생기겠구나.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시려면 적당히 성공하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회귀 전 방문했던 작업실 모습은 여전히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산더미처럼 쌓인 재활용 쓰레기들이 작업실 한구석을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고, 치킨, 피자, 햄버거 같은 배달 음식의 포장이 책상과 싱크대 주변에 그냥 놓여 있었다. 유일하게 깔끔해 보였던 소파와 쿠션도 자세히 보면 흘린 음료수와 과자 부스러기로 지저분했었다.
*
태주가 머릿속에 떠오른 끔찍한 작업실 모습을 지워 내려 애쓰는 사이 다음 장면을 위한 촬영 준비가 끝났다. 다음 촬영을 위해 안고 있던 아기를 제 이모에게 안겨 주려 할 때였다. 태주가 자신을 품에서 떼어 내려는 것을 알아챘는지 아기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그가 급하게 다시 아기를 품에 안고 달랬다.
“으애애앵!”
“쉬이. 착하지. 괜찮아. 우리 공주님이 왜 울까? 응?”
“으엥 ”
“아이고. 어떡해요. 배우님 촬영하셔야 하는데.”
태주가 품에서 놓으려고 할 때마다 자지러지게 울어 젖히는 아기 때문에 촬영이 늦어지고 있었다. 기다리는 스태프 보기도 미안하고 아기가 너무 울어서 이러다간 탈수증도 올 것 같았다.
태주는 그가 사용한 향수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아서 불안했다. 혹시 촬영이 다 끝나고 나서도 안 떨어지려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도 들었다.
곤란한 상황에 다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였다. 강 PD가 아기 포대기를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태주 씨 혹시 이번 촬영은 그냥 아기 업은 채로 찍으면 안 될까요?”
“감독님?”
“어차피 이번 신은 앉아서 촬영하는 거라. 아기 포대기 매고 있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킥. 아하하하. 알겠어요. 감독님 말씀대로 아기 업고 찍어도 괜찮은 장면이긴 하네요.”
곤란한 상황이었다. 아기를 데려온 작가님이 미안해하고, 빡빡하게 잡은 촬영이 늘어지면 어쩌나 스태프들도 모두 걱정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주연 배우가 우습게 보일 수도 있는 모습을 선뜻 택해 줬다. 짜증을 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는데, 웃으면서 가볍게 제안을 받아 줘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준비가 끝난 세트 안으로 들어서는 태주의 등에는 포대기로 감싼 아기가 업혀 있었다.
“저 나중에 어린이 프로 진행자에 도전해 볼까 봐요. 아기한테 이렇게 인기가 있을 줄 몰랐어요.”
“그, 그렇네요.”
다음 장면을 위해 등에 업은 아기를 잘 추스르며 앉은 태주가 맞은 편의 중년 여성 배우에게 농담을 건넸다. 그녀의 긴장도 풀어 줄 겸 촬영장의 분위기도 바꿔 볼 겸 부러 밝은 표정도 지었다. 단역으로 대사가 있는 배역은 오랜만에 맡는다며 기뻐했던 배우지만, 촬영에 긴장했는지 몸이 굳어 있었다.
태주의 생각이 통했는지 상대 배우의 표정이 한결 편해진 게 보였다. 그녀는 태주에게 고마운 눈빛을 잠시 보낸 후에 자신이 맡은 대사를 떠올렸다. 태주와 마주 앉아 신경전을 벌이면서 가격을 흥정해야 했다. 두 배우가 연기할 준비가 된 것을 확인한 감독의 사인이 바로 떨어졌다.
“한 장.”
“훗. 일없어요. 한 장? 요즘 시대에 한 장으로 나 같은 사람을 부릴 생각을 하시다니. 쯧쯧.”
“좋아. 두 장.”
입술을 앙다물고 박수를 보던 여자가 두 장을 불렀지만, 여전히 박수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녀의 의뢰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으엥 ”
“쯧쯧. 아기도 그건 아니라잖아요.”
“좋아. 세 장. 그 이상은 안 돼.”
잘 놀던 아기가 짜증을 내자, 태주가 빠르게 포대기를 풀고 업은 아기를 품으로 옮겨 안았다. 약속엔 없는 동작과 대사였지만,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워 상대 배우는 인식하지 못하고 자기 대사를 했다. 그에 맞춰서 태주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태주는 이 심부름을 하러 가는 길에 길가에 쓰러진 할아버지를 도와준다. 그리고 손자가 할아버지 짐을 정리하던 중 돌아가시기 전에 금괴를 매입한 사실을 알아낸다. 온 집안을 뒤져도 금괴를 찾지 못한 손자가 마지막에 할아버지를 도와준 태주에게 점을 핑계로 접근하면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컷. 좋아요.”
잠투정하느라 칭얼대는 아기를 토닥여 재운 후 태주가 제 이모 품에 안겨 줬다. 아기가 촬영장에 오는 것은 오늘 하루뿐이었다. 아마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다시 만나기 힘들 것 같았다. 태주는 아기를 안은 여랑 작가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얘기한 후 향수를 가져왔다.
“향수에요?”
“네. 향이 강한 건 아니고요. 심신 안정에 도움되는 향이에요.”
“아!”
“아기들이 편하게 느끼는 향이라서요. 이것 드릴게요.”
자신에겐 필요 없었지만, 가끔 아기를 봐 준다는 여랑 작가에겐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었다. 오늘 써 본 결과 효과도 괜찮았다. 아기는 향수 때문인지 낯선 제 품에도 얌전히 안기고, 짜증도 내지 않았다. 예민한 아이라고 들었던 것과 달랐다.
여랑 작가는 새 향수가 아닌, 한 번 사용한 물건이라 미안하다는 태주의 말에 아니라고 대답했다. 지금 그녀는 심장이 너무 뛰어서 아플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다. 새 향수도 고맙지만, 그보다는 좋아하는 배우가 한 번이라도 사용한 게 훨씬 더 좋았다.
그녀가 뜻밖의 행운에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에 신경 쓰는 사이, 태주는 오늘 하루 안고 다녔던 아기와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잠든 아기의 보드라운 볼을 손가락으로 살살 쓰다듬으면서 눈에 담았다.
*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밴 안에 태주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떨어지기 싫은 듯 그의 몸에 폭 안긴 태산이 때문이었다.
오늘도 같은 촬영장에 있었지만, 아기를 보듬어야 해서 태산이를 안아 줄 수 없었다. 아쉬워하는 형 마음을 읽은 듯 평소와 다르게 숨숨집에 들어가지 않고 태주의 곁에 붙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곁에 딱 붙어서 장난도 치고 애교도 부려서 태주를 기쁘게 했다.
태산이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 것은 집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마트에 가는 것도 고깃집에 밥을 먹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산이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리고 차 안에서처럼 내내 태주에게 붙어 있었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품에 안기고 목에 매달렸다. 샤워하는 욕실까지 쫓아 들어온 태산이 때문에 같이 목욕까지 해야 했다. 태주는 생각지도 못한 태산이의 어리광에 입이 귀에 걸릴 듯 웃고 있었다.
태주가 따뜻한 차를 준비하는 사이, 잠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던 태산이 혼자 거실로 갔다. 잠시 후 태산이는 무릎 담요를 질질 끌면서 돌아왔다. 붉은색 체크무늬의 담요는 거실 소파에 두는 것으로 가끔 태주가 거실에서 TV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 사용했다.
“앙.”
“응? 형 이거 덮으라고?”
“노! 에쭈.”
“응? 왜? 이거 목에 묶어 줄까?”
무언가를 바라서 담요를 가져온 것 같은데, 태주가 이해하지 못했다. 답답한 듯 노와 앙을 태산이 반복하자, 그는 담요를 펼쳐서 무슨 이상이 있는지 살펴봤다. 그냥 평범한 담요였다.
태주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태산이와 눈을 맞췄다. 대체 무얼 바라서 이렇게 그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지 차분히 물어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묻기도 전에 태산이가 정말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추려던 그의 뒤로 돌아간 태산이 등에 업혔기 때문이었다. 직후 태산이가 가져온 담요도 쓰임새를 알 수 있었다.
“하하하.”
“앙.”
“킥. 알았어, 알았어. 이걸 둘러 달라는 거지?”
“앙.”
무릎 담요를 등에 업힌 태산이 몸 위로 둘러 주었다. 그러자 태산이 모습이 촬영장에서 태주 등에 업혔던 아기처럼 바뀌었다. 아마 태산인 오늘 촬영하면서 내내 업혀 있던 아기가 부러웠던 것 같았다. 담요를 가져와 아기 포대기처럼 둘러 달라 요구할 정도로 말이다.
그는 묶이지 않는 담요를 한 손으로 잡고 태산이를 업었다. 여전히 작은 아이라서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사실 무거웠더라도 그는 힘든 걸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둘만 있었다면, 아마 진작 산이로 변해서 업어 달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꾹 참고 집에 도착해서야 산이로 변했다. 어쩌면 밴 안에서 꼭 붙어 있던 것도 참느라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장하다, 우리 산이. 참을 줄도 알고.”
“앙. 앙.”
“킥. 산이 어부바하고 싶었어? 아직 아기네. 아기야.”
“노.”
“하하하.”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진 촬영의 피로가 태산이 어리광에 모두 풀린 것 같았다. 그는 마시려던 차가 차갑게 식을 때까지, 그렇게 태산이 온기를 등으로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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