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201)
201화
제이드가 정령의 은총으로 숲의 길을 열고 있던 그 시각, 생명의 숲 중앙 구역.
엘프들이 성역이라 부르는 한곳에서 카일 일행은 은신하고 있었다.
콰아아아─!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커다란 소음을 내는 폭포와 그 뒤에 뚫린 토굴.
성역에 가득 찬 생기에 이끌린 정령들이 만들어내는 신비한 지형 중 하나였다.
그리고 현재, 카일 일행에게 있어선 습격자들로부터 몸을 숨길 수 있는 안전한 은거지였다.
은신처로 활용할 만큼 넓은 토굴을 살피며, 바바크가 중얼거렸다.
“숲에 이런 곳이 있다니······. 엘프 양반. 직급답게 숲을 많이 돌아다녔나 보군.”
“늙어서 뭘 하겠나? 어머니의 숲을 산책하는 게지. 큭.”
장로 핀나흐는 그 말에 농담으로 대꾸하며 끌끌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통증에 잠시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주의해라.”
핀나흐를 부축한 바바크가 조심스럽게 그를 벽에 뉘었다.
끄응.
벽에 기대며 신음을 흘린 핀나흐가 바바크와 카일을 향해 말했다.
“이곳이라면 들킬 염려는 없을 것이네. 그동안 자네들도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떤가?”
“흥. 나와 카일은 이런 걸로 지치지 않는다. 그보단 당신부터 몸을 신경 써라.”
바바크가 툭 쏘듯 말하며 핀나흐를 흘겨보았다.
정확히는 핀나흐의 옆구리에 길게 늘어진 상처를 말이다.
무언가에 할퀴어진 듯한, 마치 맹수에게 습격당한 듯한 상처였다.
허억. 허억.
가쁜 숨소리를 내쉰 핀나흐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말게. 치명상은 아니지 않나? 게다가······ 벌써 죽기엔 300년밖에 못 살았거든.”
“질기게도 살았군. 엘프여도 꽤 오래 산 것 아닌가?”
“내가 삶에 미련이 많아서 말이야. 할 일도 많지.”
또 한 번 웃음을 흘린 핀나흐는 품속에서 약초 몇 뿌리를 꺼냈다.
그 풀들을 잘게 찢고 뭉쳐, 옆구리의 상처에 조심스레 발랐다.
‘다행이군. 치명상은 아니야.’
카일은 안색을 되찾는 핀나흐를 바라보곤, 바바크를 바라보았다.
끄떡없다더니 뭐니 했지만, 녀석의 등에도 길게 난 상처들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카일은 핀나흐가 안색을 되찾는 것을 보고, 토굴의 입구로 몸을 돌렸다.
콰아아아─!
커다란 폭포 바로 뒤에 앉은 카일은 검 한 자루를 쥐고 자리에 앉았다.
“후우우······.”
그대로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산들바람─ 내게 세상을 비춰라.’
그러자 폭포 밖, 성역 곳곳의 모습이 머릿속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카일이 성역 곳곳에 박아놓았던 검들.
그 검들과 카일의 영혼이 ‘공명’하며, 검날이 비추는 주변의 모습을 불러온 것이었다.
현재 카일이 공명으로 보고 있는 건 거대한 그림자들이었다.
작은 다람쥐와 토끼부터, 숲늑대와 암석곰, 엔트까지.
하나같이 붉은 안광을 흘리고 있었고, 신체는 마수화되어 기괴하게 변해있었다.
먹이 사슬의 관계에서 벗어나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수백 마리의 생물들의 모습은 어딘가 섬뜩할 정도.
하지만 진정 섬뜩한 것은 따로 있었다.
각각 부엉이와 원숭이, 그리고 사슴을 닮은 여러 마리의 동물들.
바로 타락한 숲의 신수들이었다.
마수화된 동물들 앞에 선 녀석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크르르르!
우우우우─!
섬뜩할 정도로 불길한 울음.
그 굉음에 숲이 동요하듯이, 숲 곳곳에서 온갖 소리들이 연달아 이어졌다.
그 안에 담긴 적의를 읽은 카일이 얼굴을 구겼다.
본래라면 성역의 신당과 신관을 수색해야 할 카일 일행.
그들이 상처 입은 채 동굴로 숨어든 이유가 바로 저 신수들 때문이었다.
붉은 안광을 터트리는 신수들의 신체에는 하나 같이 붉은 촉수가 솟아올라 있었다.
아니, 뿌리박혀 있었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몰랐다. 외부에서 침투한 것일 테니까.
‘악마에게 잠식되었어.’
신수들뿐만이 아니었다.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신수 너머로 카일이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목도할 수 있었다.
드높은 나무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솟아나 있는 거대한 크기의 나무를
세계수 혹은 숲의 어머니라 불리는 신목(神木)이었다.
이 땅의 모든 곳을 호흡하게끔 한, 생명의 근원이다.
그런데 그런 신묘한 존재의 밑동에서부터 삼분의 일이 붉은 촉수에 감싸여 있었으니······.
쿵! 쿵!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요동치는 광경은 본능적인 불쾌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 박동이 울릴 때마다 조금씩 조금씩 커다란 나무를 뒤덮어가고 있었다.
촉수들이 늘어날 때마다 주위엔 강력한 마기가 샘솟았다.
안개처럼 피어오른 마기는 하늘 위로 뭉게뭉게 피어올라 하늘의 일부를 가렸다.
쿠르릉!
이내 먹구름처럼 마기들이 세력을 넓히며 흩어졌고, 마기가 비처럼 숲 곳곳에 흩뿌려졌다.
쏴아아아······.
숲에 흩뿌려진 마기는 주변의 동물들을 오염시켰고, 또다시 붉은 촉수를 솟구치게 하고 있었다.
생명의 숲 곳곳에서 이 같은 과정이 반복되며 마기가 좀먹어가고 있었다.
“하.”
검들과의 공명을 푼 카일이 천천히 눈을 떴다.
쏟아지는 폭포 사이로 검게 물든 하늘과 마기의 구름이 보였다.
‘악마의 힘이 이렇게나 짙게 퍼졌을 줄이야.’
마치 암처럼 생명의 숲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타파하려면······
“······제이드.”
네 도움이 필요하다.
* * *
‘정말로 될 줄이야······.’
나는 숲 초입에 서서 발밑에 깔린 은색의 빛무리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맨 처음엔 긴가민가했었다.
눈앞에 보이던 숲길은 이따금 메마른 땅이나, 바다, 화산 지대 등 정령계로 보이는 것이 아른거리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망설이지 말라는 요정, 숲지기의 목소리에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디자 정령의 은총이 내게 길을 만들어준 것이다.
‘여기까지 예측했다는 건가?’
거인의 대수림에서 만났던 요정이자, 숲의 관리자.
숲지기.
그녀는 어딘가 초연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망령왕과 세계의 비밀을 알고 있던 걸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목도하고 관망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렇기에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정령의 은총을 받았을 때는 무언가 특별한 힘을 내려준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 뒤로 꽤 오랫동안 아무 효과도 없어서 잊고 있었는데······
[정령의 은총[A]이 당신을 인도합니다.]‘이게 여기서 발동이 될 줄이야.’
너무나 시의적절했기에 그녀가 어떤 의도를 내린 것인가 싶었다.
동시에 어떤 운명이 있는 건가 싶었고.
‘내가 여기 올 줄 어떻게 알고 이걸 준 거지?’
미래라도 보는 것인가? 아니면 운명을 보는 특별한 힘?
‘뭐가 됐든, 이 길 끝에 이득이 있단 말이지?’
무성해진 생각을 털고서 나는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직도 귓가에 숲지기의 목소리가 아른거렸다.
– 이곳에 너를 위한 선물이 잠들어 있단다. 망설이지 말려무나.
분명 선물이라고 했지?
이득이 되는 거라면 뭐든지 좋은 법이다.
‘선물이 뭔지 기대되는데? 그리고······.’
나는 앞의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카야와 정령술사들, 갬비스를 부축한 로빈, 그리고 여전히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는 칼라마르를 말이다.
모두의 시선이 내가 서 있는 숲 안쪽으로 향해 있었다.
‘······저 안에, 확실하게 우리가 찾는 게 있어.’
엘프들이 찾는 타락한 숲의 신수들도.
로빈이 찾는 키텔로 레인저들도.
그리고 악에 물들어가는 세계수까지.
나는 일행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 올리며 손짓했다.
“어디 한번 들어가 보자고.”
* * *
카야가 말하길 이 금지된 숲의 정확한 이름은 ‘어머니의 정원’이라고 했다.
“정원이라······ 이름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네.”
봄날의 숲처럼 나무 곳곳에 자라난 새싹들.
길 곳곳에 두둥실 떠오르는 빛무리를 보고 있자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애초에 그런 이질적이고 몽환적인 모습에 시선이 뺏겼던 것이지만.
이네스를 포함한 성기사들도, 데릭과 그룬을 포함한 결사단도 몽환적인 숲길에 작게 감탄하며 길을 걸었다.
반면 엘프 카야를 비롯한 정령술사들은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착잡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정확히는 내가 가진 정령의 은총이 만들어낸 길을 따라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카야는 ‘어머니의 정원’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정원에 가득한 정기는 생력초나 영월버섯 등 진귀하거나 특별한 약초와 정령석 같은 보석들이 만들어줘요. 숲의 보고(寶庫)라고도 할 수 있죠.”
“그래서 고위 정령술사나 장로들만 들어올 수 있다고 한 건가?”
“희귀한 물건들 때문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요.”
카야는 잠시 망설이고는 조심스럽게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장로님께 듣기로, 정원 안쪽은 어머니의 깊은 뿌리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있다고 했어요. 물론 저도 직접 와본 건 이번이 처음이라 보아도 모르겠지만요.”
“그런 걸 나한테 알려줘도 되는 거야?”
나는 카야의 말에 깜짝 놀랐다.
세계수의 뿌리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엘프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신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것 아닌가?
이런 걸 외부인에게?
의아함에 카야를 바라보니 그녀 역시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애초에 여긴 정령계랑 섞인 길이에요. 알고 있어도 자격이 없으면 들어오지 못하는 길. 그런데 제이드 님은······.”
카야는 말을 흐리며 내 발밑의 은색 빛무리를 바라보곤 말했다.
“······자격은 충분한 것 같으니까요.”
카야는 그렇게 말하며 주눅이 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히려 제이드 님을 따라 저희가 이렇게 들어와도 되는 건지 걱정이 드네요. 숲의 어머니께서 노여워하는 게 아닐지······.”
나는 카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노여워할걸? 아니, 엄벌을 내릴지도······?”
“그, 그런······!”
“그런 태도를 계속 유지한다면 말이야.”
“네? 그게 무슨······.”
내 한마디에 얼굴이 어두워졌다, 갸웃거리는 카야.
“숲의 신수들이 타락했고, 숲의 동물들이 폭주하고 있어. 과연 세계수라고 다를까? 병들어 갈 수도, 괴로워할 수도 있지. 그런데 자신을 돕는 것보다 엄벌을 무서워하는 자식들을 보면 세계수가 어떤 생각을 하겠어?”
“그건······.”
“세계수. 아니, 숲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자기 자식들이 용기를 가지고, 자신을, 숲을 재앙에서 구해주길 바라고 있을 거야.”
내 말에 엘프들이 무언가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드 님의 말이 맞아요. ······자식이 부모의 고통을 방관하면 안 되죠.”
“좋아요. 계속 가보죠.”
용기를 얻어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엘프들.
정령의 은총으로 내가 정원의 길을 안정시키면 엘프들이 수풀을 밀어내며 길을 터 냈고, 그 덕에 우리의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발자국이나 꺾인 가지 등 먼저 앞서 지나갔던 키텔로 레인저들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풀과 나무 곳곳에 박힌 화살 몇 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화살깃 끝이 붉게 물들어 눈에 띄는 것으로 말이다.
다행히 피는 아니었고, 신원을 구분하기 위해서 염료로 물들인 듯했다.
로빈은 화살을 들어 보이며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이 아는 눈치였기에 나는 슬쩍 물었다.
“아는 사람 거야?”
“이건, 키텔로 레인저 단장의 상징이다. 우리끼리만 알 수 있는 표식이지.”
단장이라······.
“좋은 징조는 아니에요.”
나와 로빈의 대화에 끼어든 카야가 우려를 표했다.
“앞서 말했듯 여기는 현실과 정령이 섞여서 온갖 환상에 빠지고 길을 잃을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뛰어난 레인저라고 해도 혼란에 빠졌을 거예요.”
카야가 고개를 들어서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를 알 수가 없네요.”
“그거야, 뻔하지.”
나는 어쩌다 그들이 이곳에 흘러들었을지 어림짐작했다.
“이 근처에선 마기가 안 느껴져, 아마 습격해오던 동물들과 마기를 피해 움직이다 들어왔을 거야. 안 그래요?”
“마, 맞습니다.”
카야에게 설명하는 한편, 나는 키텔로 레인저 단원 중 한 명인 갬비스를 향해 물었다.
그가 내 물음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신수들과 동물들을 피해 움직였었습니다. 물론 도중에 저는 낙오되었지만······ 이 안으로 향했을 확률이 높죠.”
······아직 이 숲 안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군.
우리는 정원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곳곳에 갈림길이 펼쳐지기도 했고, 갈대와 넝쿨이 이리저리 뒤엉킨 미로 같은 지형도 있었으나, 정령의 은총은 그런 우리의 고민을 불식시키듯 한 방향으로 빛무리를 깔며 안내해주었다.
점차 정원의 풍경은 더욱 신비하게 변했다.
곳곳에는 보석처럼 생긴 열매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희귀한 약초들이 널렸고, 불타고, 얼어 있는 버섯들도 볼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나무들의 높이가 커졌고, 햇빛은 빽빽해진 나무들에 대부분이 가려졌다.
그 느낌이 마치 나무 동굴에 들어온 기분이라 숲속의 드워프가 된 것만 같았다.
어느새 저물어가는 노을빛만이 숲 안을 희미하게 비췄다.
숲길 곳곳에 부유하는 빛무리나, 스스로 발광하는 꽃과 버섯 등이 숲길을 밝혔지만, 어둠을 완전히 물릴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야영해야 할 것 같은데.”
“제이드. 모닥불이라도 만들까?”
“숲이 우거져서 자칫하다간 숲에 불이 번질 거야. 그 대신 이걸 쓰자.”
나는 기름먹은 헝겊 대신 푸른 마석 몇 개를 꺼내 들었다.
푸른 마탑에서 받았던 발광석이었다.
단원들을 시켜 발광석을 임시 야영지 곳곳에 박아 시야를 확보하고 경계를 세웠다.
야영이라 해봤자 이미 어둑어둑했기에 그리 달라지진 않았다.
동굴에서 모닥불을 피운 정도의 느낌이랄까.
나는 분주히 움직이는 단원들을 살피며, 카야에게 혹시나 주의해야 할 점을 물었다.
“주의할 점이요? 아! 혹시 숲에서 꽃이나 약초, 정령석을 주우신 분은 없으시죠?”
“그건 왜?”
“물건 자체가 정령의 기운이 충만하다 보니 가끔 사고가 생기거든요. 가령 정령이 같은 정령으로 오해하고 정령계로 데려가는 경우도 있어서요.”
카야는 정령석을 훔쳤다가 정령계에서 50년 만에 돌아온 인간 이야기를 꺼내 알렸다.
“뭐, 사실 제이드 님의 동료분들이 그럴 리는 없겠죠?”
“그게······”
나는 대답을 흐리며 숲 한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다급히 달려 나간 인디에고가 수풀에 배낭을 탈탈 털어내고 있었다.
“······이제는 없네.”
“네?”
나는 갸웃거리는 카야와 인디에고를 번갈아보며 결심했다.
반드시 인디에고에게 밤새 불침번을 시키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