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228)
228화
세계관측자의 일원인 하프엘프 엔힐.
그녀의 신분은 제국의 공작이었다.
제국의 유력 가문, 와이트문 가(家)의 서녀이지만, 뛰어난 능력을 인정 받아서 공작위에 오른 이례적인 케이스.
그런 고로 본디 제국군의 진영에 있어야 할 그녀가 마누스 왕국의 사령관, 미하일과 어울린다면 어떤 식으로든 시선이 이끌릴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하여 엔힐 공작은 미하일과 원활한 소통을 위해 그녀의 시종을 미하일에게 붙여둔 상황이었다.
그리고 현재.
미하일을 향해 다급히 시종이 찾아왔다.
“미하일 사령관! 아무래도 함정인 듯합니다!”
“알고 있소.”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주위를 훑었다.
사방에서 마수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고, 협곡의 끝자락에서 마수 무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협곡이 길다고 하지만, 몇 분 내로 충돌할 것이 자명한 상황.
서둘러 대비해야 한다.
그때 시종이 자줏빛 수정구 하나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주인님께서 급히 연락을 주셨습니다.”
통신 아티팩트였다.
수정구를 받아 들자 엔힐 공작의 목소리가 수정구에서 들려왔다.
– 미하일 사령관. 결계 안쪽 상황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탈출할 수 있습니까?
“······.”
미하일은 잠시 그들의 퇴로를 막은 붉은 결계를 바라보았다.
“젠장! 대체 이게 뭐야! 검이 하나도 안 먹혀!”
“비켜봐! 흐아압!”
“······미친, 검이 부러진다고?”
병사들이 주먹으로 두들기고, 검으로 후려쳐보았지만 붉은 결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검이 부러질 정도.
그 반대편에서는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병사들을 향해 전투를 대비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인 상황.
“힘들 것 같군요.”
그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도와줄 수 있을 엔힐 공작이 자신에게 역으로 물었다.
탈출할 수 있냐고.
그 말의 의도는 확연했다.
하지만 미하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어야만 했다.
“공작. 혹시 밖에서는 방법이 없습니까?”
대답은 곧장 돌아왔다.
– ······미안해요.
역시······
미하일은 잠시 눈을 감으며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뜨곤 말했다.
“어떻게든 버티겠소. 밖에서도 방법을 찾아주시오.”
그걸로 통신은 종료되었다.
미하일은 시종에게 수정구를 다시 돌려주고, 주위의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제, 젠장······ 무슨 마수가 저렇게······.”
“시발, 이대론 틀렸다고. 굴에 갇힌 고블린 꼴이잖아.”
“······우리끼리 저 마수들을 어떻게 상대해.”
달려들고 있는 마수들의 수는 삼백여 마리.
거기에 사방에서 울리는 울음소리는 마수의 행진이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하늘을 찌를 듯 사기가 높던 병사 대부분은 좌절하고, 공포에 휩싸이는 그때.
“공포에 잡아먹히지 마라!”
한 사내의 결연한 목소리와 푸른 빛이 병사들의 이목을 끌어모았다.
사령관, 미하일이었다.
“수가 많나? 놈들은 고작 몇 백 마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4천의 군대다! 4천 명의 마누스 전사가 겁을 먹을 것인가?”
고블린, 트롤 같은 몬스터와는 급이 다르다.
상급 마수는 병사 여럿이도 어렵다는 걸 안다.
하지만 미하일은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두려움을 떨치도록.
용기를 불어넣었다.
“등을 보이지 마라. 당당히 무기를 들고 맞서 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함정에 갇힌 건 우리가 아닌 놈들이 되리라!”
미하일의 말이 이어질수록 병사들은 하나둘,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갤 들었다.
“놈들에게 있는 발톱과 이빨? 우리에겐 갑옷과 방패가 있다! 놈들도 심장이 터지면 죽는다!”
병사들이 이를 악물며 무기를 쥐었다.
마법사들은 지팡이를 고쳐잡았고, 기사들은 검과 방패를 세게 쥐었다.
“우리가 단순한 먹이가 아님을! 천한 마수 따위가 이길 수 없는 인간임을 증명해라!”
미하일은 그들을 향해 물었다.
“우리가 누구냐!”
“마누스의 전사들입니다!”
쿵!
모두가 발을 구르며 대답했다.
강인하고, 결연한 눈빛을 띠면서.
“놈들이 온다!”
“대열을 맞춰라!”
“어깨를 맞대!”
“우리는 단단한 벽이 된다!”
혼란했던 병사들은 굳센 전사가 되었고, 전열을 세웠다.
“전원, 전투 준비!”
미하일은 병사들에게 외치며 더욱 가까워진 마수 무리를 바라보았다.
고블린만 한 곤충부터, 집채만 한 마수까지.
별별 형태의 수많은 마수가 달려들자, 협곡이 진동하며 울렸다.
두두두두!
물밀듯이 달려드는 마수들.
마치 바다의 재앙이라는, 해일을 연상케 했다.
미하일은 검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화르륵!
거센 불꽃처럼 푸른 오러가 피어올랐다.
사실 알고 있었다.
생존할 확률보다, 전사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매우 위험하다는걸.
그렇기에 미하일은 각오했다.
‘한 마리라도 더 죽이겠다.’
더욱더 거세게 피어 오른 오러.
이내 미하일은 검을 휘둘렀다.
검의 궤적을 따라 오러가 날카롭게 변한다.
검기였다.
순식간에 날아간 검기가 선두의 마수들을 향해 쇄도했다.
바닥으로 떨궈지는 마수들의 머리.
동시에 놈들의 몸뚱이가 바닥을 굴렀고.
쿠과과강!
뒤이어 달리던 마수들과 뒤엉켰다.
그것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미하일은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방패!”
선두에 선 기사들이 밀집하며 방패를 내밀었다.
동시에 방패에서 푸르고, 붉은 오러가 장벽처럼 펼쳐졌다.
성벽의 영웅, 가드랜드 기사단의 방패로 유명한 바르손의 기술.
그것을 배운 기사들이 펼친 오러였다.
오색찬란한 장벽이 마수들의 진로를 막았고.
쾅! 콰과과과광!
커다란 소리와 함께 마수들이 장벽에 충돌했다.
기사들은 방패를 통해 전해지는 충격에 이를 악물고, 피를 토했다.
“크윽!”
“버텨라! 쓰러지지 마!”
“끄하아압!”
방패의 전열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그들의 모습은 벼랑 위의 등대처럼 위태로웠으나······
‘······버텼다!’
그를 확인한 미하일이 곧장 소리쳤다.
“화살과 마법을 쏴라!”
팽팽히 당겨졌던 쇠뇌와 활시위가 볼트와 화살을 내뿜었다.
양옆에서 암석이 송곳처럼 튀어나왔고, 허공에서 불덩이가 쏘아졌다.
장벽과 충돌했던 마수들이 난자되었고, 숯덩이가 되어 쓰러졌다.
“됐다! 막았어!”
“이대로 마수들을 막아라!”
기사들과 병사들이 환호하는 그때······.
쿵──
“시발, 저건 또 뭐야······.”
방금 막아냈던 마수들보다 배 이상 거대한 마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이한 생김새.
흡사 남부 초원 지대에서 사는 동물, 진흙코뿔소처럼 생긴 모습.
그보다 더 큰 덩치의 마수 두 마리.
“오, 온다!”
놈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달려들기 전에 막아야 한다!”
그걸 발견한 미하일이 다급히 요격 명령을 내렸다.
그 즉시 화살과 마법이 쏘아졌다.
하지만 코뿔소 마수는 단단한 외갑으로 화살을 튕겨내며, 점점 가속했다.
콰앙!
이내 커다란 충돌음이 울렸고, 오러의 장벽이 공명하듯 깨져나갔다.
“으아아아!”
“벽이 무너진다!”
방패를 들고 있던 기사 몇이 튕겨 나가고 쓰러졌다.
“창을 들어라!”
미하일의 신호에 후열의 병사들이 창을 들어 올렸다.
사람 다섯은 달라붙어야 할 커다란 창, 그것이 달려들던 마수의 머리와 가슴팍을 깊게 찔렀다.
쿠워어어어!
자신하던 외갑이 부서지자 마수가 고통에 울부짖었다.
비명을 지르는 마수의 입안으로 병사들이 검과 화살을 찔러넣어 죽일 수 있었다.
허억. 허억.
가쁜 호흡을 내쉴 시간도 없었다.
마수들은 이 순간에도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으니까.
“전열을 가다듬어라!”
“방패를 세워!”
기사들은 찌그러진 방패를 들며 다시 오러의 방벽을 형성해야 했다.
“으아아아!”
“나, 브리안을 기억해주게!”
운 없이 바깥으로 튕겨 나간 기사들은 전열에 합류하는 대신, 달려드는 마수들을 향해 검을 뽑아 휘둘렀다.
하지만 그들은 모래였고, 마수들은 파도였다.
검을 든 오른팔이 사라졌고, 서 있던 다리가 사라진다.
이내 파도에 휩쓸린 모래처럼 형체를 잃고 사라졌다.
붉은 피 보라와 찌그러진 갑옷만이 파도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동료의 죽음에도 슬퍼할 새 없이 전투는 이어졌다.
다시금 오러의 장벽이 출렁이고, 화살과 마법이 마수들을 죽인다.
그것이 한두 차례 반복되었을 때, 미하일이 소리쳤다.
“지금이다!”
그 신호에 줄지어 서 있던 사수들이 옆으로 갈라졌고, 뒤편에서 한 소대가 어떤 무기를 꺼내 들었다.
철컥!
핸드 캐논이었다.
그것이 일렬로 눈앞의 마수들을 조준했고.
퍼엉! 퍼버버벙!
순식간에 마수들의 머리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2열 대기!”
“발사!”
“3열! 발사!”
그것이 세 차례나 이루어지자, 방패의 전열 앞으로는 마수의 시체가 바리게이트처럼 쌓였다.
언뜻 봐서는, 순조롭다.
이대로라면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이 병사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때.
그들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사, 사령관님! 위, 위에···!”
한 정찰병의 당황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은 미하일과 인근의 병사들은 전부 고갤 들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협곡의 좌우, 드높은 절벽 위.
점차 모습을 드러내는 마수들을.
“······젠장.”
그를 발견한 미하일이 나직이 내뱉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희망이 들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적들은 많았지만, 협곡의 길은 좁았고, 아군의 화력은 충분했으니까.
소모전이고 아군의 피해가 클지라도 무력하게 당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미하일은 간과하고 만 것이다.
지형적 이점은 자신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미하일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마누스 군의 주변으로 마수들이 뛰어내린 것이다.
사방으로 마수들이 착지했다.
──!
눈앞의 병사들이 짓눌렸다.
착지한 마수가 울부짖었다가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옆의 기사가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 기사도 다른 마수에 짓이겨졌다.
그 모습을 보며 미하일은 생각했다.
‘뭘 내려야 하지? 공격? 후퇴?’
무엇을 명령해야 하는가?
무엇을 판단해야 하는가?
미하일은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미하일은 입을 열 틈조차 없었다.
──!
──!
절벽 위에서 몸을 던져서, 아군의 머리 위로 낙하하는 마수들.
미하일은 오러를 뽑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서로 밟고 또 짓밟는 마수들.
미하일은 그런 마수들의 다리를 베어 날렸다.
뒤이어 주저앉는 마수들의 머리 역시 베었다.
마수들의 머리가 뒹굴었고, 아군의 몸이 흩날렸다.
마치 눈보라처럼 말이다.
미하일은 다시금 마수를 베어냈다.
저 앞에서 마수들을 베어 넘기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 주위로 각자 살아남기 급급해하는 병사들도 보였다.
진영을 세워라.
서로 뭉치고 흩어지지 마라.
미하일은 그리 소리쳤다.
어떻게든 힘을 합쳐 포위망을 뚫어야 했으니.
미하일의 생각에 동감한 것일까.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 순간.
콰직!
미하일의 눈앞으로 거대한 마수가 추락했다.
맹렬히 돌진하던 코뿔소 마수보다 배는 더 큰,
고릴라를 닮은 마수였다.
녀석이 착지한 곳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모여있던 곳이었다.
기사들과 병사들은 순식간에 짓눌렸다.
우드득!
고릴라 마수는 기사를 무기처럼 집어 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휘둘러질 때마다 주위의 눈이 붉게 물들어갔다.
살벌한 소리가 미하일의 귀를 울렸다.
툭.
마수가 쥐고 있던 기사의 육신이 끊어졌다.
자신의 앞으로 쓸려온 기사의 상반신.
감지 못한 기사의 눈과 마주쳤다.
미하일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카드득. 카드득.
마수는 기사의 남은 반신을 입 안에 넣고 씹었다.
동시에 미하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음 사냥감을 발견한 것처럼.
미하일은 곧장 검을 휘둘렀고, 마수는 손바닥을 휘둘렀다.
서걱!
미하일이 공격을 피했다.
놈의 손가락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미하일은 안쪽으로 파고들어 놈의 발가락을, 종아리를, 허벅지를 베어냈다.
동시에 녀석의 공격을 피해냈다.
분전이었다. 미하일이 해낼 수 있는 모든 것.
그런데 그 순간.
콰앙!
미하일의 전신에 커다란 격통과 함께 시야가 뒤집혔다.
정신을 차려보니, 미하일은 마수의 손바닥에 짓눌린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큭!”
올라오는 핏물을 삼킨 미하일이 마수를 노려보았다.
마수는 마무리 짓고자, 우악스러운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저것이 내려가는 순간 미하일 역시 짓뭉개질 것이다.
하지만 미하일은 끝까지 노려보았다.
마수의 팔이 꿈틀거린다.
“······.”
거대한 손바닥이 그를 향해서 낙하한다.
그런데.
서걱!
찰나의 순간, 미하일은 볼 수 있었다.
마수의 팔에 그어지는 실선을.
그리고 나동그라지는 마수의 팔을.
동시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마수가 튕겨 날아갔다.
콰앙!
‘······방금 그건, 대체?’
기사들도, 미하일도 쉽사리 대응할 수 없었던 마수의 육신이 너무나 간단하게 절단됐다.
‘어떻게?’
그때 저 하늘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더니, 미하일의 옆으로 착지했다.
쿠웅!
그건 기사였다.
은빛 갑주를 입은, 그리고 드레이크를 닮은 투구를 찬 기사.
기사의 갑주는 피와 어둠으로 가득 찬 협곡을 은은하게 밝히는 듯했다.
기사가 고개를 돌렸다.
투구의 바이저가 올라갔다.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미하일은 처음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기사의 정체는 미하일이 여태껏 기다리던, 그리고 신뢰하는······
······제이드였으니까.
제이드가 미하일을 향해 말했다.
“늦었습니다.”
“······늦을 뻔했지.”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이드의 말에 대답했다.
“아뇨. 이미 늦었습니다.”
미하일을 일으킨 제이드는 고개를 돌렸다.
크워어어!
고릴라를 닮은 마수가 외팔로 포효하며 제이드를 향해 달려들고 있던 것이다.
제이드는 그를 보며 가볍게 손을 내리그었다.
그리고 그 순간.
허공 위에서 모여든 검보라빛의 금속, 모노리스가 거대한 대검이 되어 달려들던 마수를 그대로 쪼개버렸다.
제이드는 그런 마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협곡의 마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놈들이 도망치기엔 말이죠.”
그 말과 동시에 모노리스가.
십여 개의 칼날로 변하며 협곡 안을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