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55)
55화
먹혔다.
제대로 먹혔다.
나는 쓰러진 트롤을 바라보았다.
놈의 목덜미에서는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그 아래로 녹색 피가 울컥울컥 흘렀다.
저게 바로 ‘캐슬 브레이커’의 위력이다.
물론 나 역시도 그 충격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늑골, 골반, 무릎이 망치로 맞은 것처럼 아렸다.
두통 때문에 시야가 흔들렸다.
찰나에 목걸이의 방어막을 켰으니 망정이지······.
하지만 여기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나는 검을 바로 쥐고는, 손을 들어올리며 힘껏 소리쳤다.
정신이 없어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다만, 다음 순간.
우와아아──!
마누스의 모든 병사가 함성을 내질렀다.
다행히도 영 이상한 소리는 아니었나 보다.
[현재 ‘제2 전선’ 내의 영향력이 최고치를 달성합니다.] [그들은 당신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따를 것입니다.]치솟는 사기.
다 쓰러져가던 희망을 내가 다시 일으켜 세웠다.
······괜찮은 기분이네, 이거.
별동대원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나에게 달려왔다.
“제이드!”
“제이드가 트롤을 살해했다!”
“성벽의 영웅! 마수 살해자의 두 번째 업적이다!”
‘영웅.’
이 순간 나는 영웅이었고, 그 영향력은 사령관을 뛰어넘었다.
그것을 시스템이 보증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기회였다.
“마누스의 전사들이여! 페르딤을 몰아내라!”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트롤은 놈들의 거대한 일부였을 뿐이니까.
나는 적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놈들이 표정이 보일 만큼 가까워졌을 때, 나는 놈들의 얼굴에서 경악을 읽을 수 있었다.
녹스 용병단. 놈들은 자신들의 비기, 전투 트롤이 질 리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충격적인 반전 앞에서, 반응이 한참 늦었다. 그건 큰 틈이었다.
“놈들을 물리쳐라!”
내 두 번째 외침에 용기를 얻은 병사들이 페르딤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쉬쉬쉬쉬!
화살과 볼트가 내 등 뒤에서 날아와, 나보다 먼저 적들과 뒤섞였다.
직후, 내 검이 적 선봉의 목을 베었고, 내 양쪽에서 대원들이 치고 나가며 적들을 무너뜨렸다.
“자, 잠깐! 컥!”
“놈들의 공격을 막아!”
“방패를 들어라!”
놈들이 다급히 방패를 들어 방진을 짜려 들었다.
“어딜.”
놈들에게 여유는 주지 않을 것이다.
화륵.
마기 포식자에서 피어오른 푸른 오러가 놈들의 방패를 통째로 갈라버렸다.
콰앙!
내 검에 놈들의 방패와 무기가 산산조각이 나며 허공을 수놓았다.
페르딤의 선봉대의 진영이 무너졌고, 아군이 그 틈으로 돌격하여 적들을 도륙했다.
‘전투는 기세다.’
대부분의 전투는 수적 우위 혹은 무기적 우위를 지닌 쪽이 승리를 가져갈 것이다.
하지만 소수가 다수의 적을 격파하는 경우가 드문 것도 아니었다.
역사 속에서도 소수가 다수를 이긴 전투는 많다.
현실의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고, 당장 내 기억 속에서도 존재했다.
일인 군단으로서 일 당 백을 쉽게 해내는 이들.
용사의 동료가 그러했고, 용사 카일이 그러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 또한 아군과 적군이 모두 두려워하는 괴물을 잡아낸, 또 다른 괴물이었다.
콰앙!
푸른 오러에 감싸진 마기 포식자가 휘둘러질 때마다, 내 시선 안의 페르딤 군의 절반이 휩쓸려 쓰러졌고, 남은 절반이 등을 보이며 달아났다.
“마, 마수 살해자다! 도망쳐!”
“젠장, 이딴 데서 죽을까 보냐!”
용병들은 내가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두 걸음씩 후퇴했다.
전투 트롤을 위시하면서 여유로웠던 태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싸워라! 맞서 싸우란 말이다!”
깃이 달린 투구를 쓴 페르딤의 간부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명령에도 이미 전의를 잃은 페르딤의 병사들은 도주하고 있었다.
삼천에 가까운 대군은 실상 수십, 수백의 용병대를 고용한 것이다.
대다수가 고용된 용병들로 이루어진 부대에 결속력이 강할 리가 없었다.
그간의 전세가 놈들에게 유리했기에, 한 몫 챙길 생각으로 연합했을 거다.
하지만 전세가 급격히 기울자 애국심 따위는 없는 용병들은 이기적으로 변했다.
“도망치는 놈들을 추적하고 섬멸해라!”
[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제2 전선의 모든 병력이 당신의 명령을 최우선으로 따릅니다.] [일시적으로 공격력이 15% 상승합니다.]그러나 놈들도 마냥 당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페르딤 정규군이 반격을 준비하는군.’
용병대의 후퇴를 제한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의도인 듯했다.
우리가 기세를 타서 깊숙이 들어오면 잡아먹을 생각이다.
영악한 놈들. 역시 그간 마누스가 괜히 밀린 게 아니다. 저들 사이에도 전략가가 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지.’
슬쩍 고개를 들자 전장의 상공, 그 위를 고고히 비행하는 스틸 스왈로우가 보였다.
[스틸 스왈로우와 감각이 동기화됩니다.]내 시야의 한쪽에, 마치 미니맵처럼 전장의 풍경이 펼쳐졌다.
스틸 스왈로우의 시선을 공유받은 것이었다.
“전방에 놈들이 판 함정이 있다! 우회해서 돌아간다!”
즉, 놈들이 어디서 무슨 전술을 준비 중인지 훤히 보인다.
“좌익에서 페르딤 병사가 기습해온다! 먼저 친다!”
나는 놈들의 전술에 맞춰, 병력을 움직여서 사전 차단하게 했다.
마치 RTS 게임처럼, 스타크래프트를 했을 때처럼 보이는 시야.
그 사기성을 바탕으로 말이다.
‘성능 확실하네.’
놈들이 하는 모든 행동과 거점들이 머릿속의 지도로 펼쳐졌다.
“데릭! 왼쪽의 병력이 부족하다! 별동대원들을 데리고 보조해!”
“알았어! 제이드 너도 조심해라!”
“로빈! 그룬! 휘어진 나무 뒤편에 매복한 용병들이 있다!”
“우리가 처리하지.”
별동대원들은 내 지휘를 정확히 이해하고 움직였다.
그렇게 수적 열세를 극복하며 적들의 전술을 파훼하고 아군을 구해냈다.
턱주걱 데릭, 키텔로 레인저 로빈, 꺽다리 브룩, 돼지코 롭, 욕쟁이 그룬 등.
대단한 별명조차 없는 일개 병사에 불과했던 조연들.
하지만 그간 나와 전장을 함께 했던 이들.
모두가 전장의 주역이 되어간다.
거센 파도처럼 페르딤의 병사들을 추격한 우리는, 어느새 페르딤의 전선 기지 초입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데릭, 로빈! 몰아치는 건 여기까지! 다시 전열을 가다듬는다!”
기세가 넘어왔다지만, 놈들의 병력은 우리보다 몇 배는 더 많다.
깊게 파고든다면 자칫 위험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게는 페르딤을 쫓아 압박하며 위험을 감수할만한 이유가 있었다.
스틸 스왈로우가 바라보는 숲 안쪽, 하나의 무리.
다름 아닌 와이트 아울 기사단이었다.
잊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이 작전의 근원.
‘흑마법사들.’
이 전장에서 펼쳐질 것이라는 대량 학살의 흑마법.
그걸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들어갔다가 전멸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까.
문제는 그것이 언제 펼쳐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어 나오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면 되지.”
이 전선에서의 패배는, 페르딤에게 용납할 수 없는 결과다.
그리고 궁지에 몰리는 순간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꺼내려 드는 것이 인간이었다.
몰아치면 페르딤 측의 본진에서는 비장의 수를 전부 꺼내 들려 할 것이다.
내가 노리는 점이 그것이었다.
급하게 움직이면 반드시 허술해질 것이고, 틈이 발생하기 마련이니까.
아니나 다를까, 곧 스틸 스왈로우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페르딤 전선 기지의 중앙, 공병대 사이에서 이질적인 움직임이 보였다.
한 병력이 좌우로 갈라지며 공간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자세히 살피니, 그곳에 그려져 있는 커다란 원형의 진.
이어서 팔다리가 묶인 사람들을 끌고 오더니, 그 원형진 안으로 밀어 넣는 게 아닌가?
‘빙고.’
이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이들 십수 명이 고함을 내지르며 무언가 준비하는 것까지 포착했다.
원형의 진이 붉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흑마법을 발동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곧장 말을 찾아서 타고, 숲 안으로 향했다.
와이트 아울 기사단이 매복 중인 방향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풀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네스! 저쪽이다!”
내가 곧장 달려와 소리치자 놀란 듯 이네스가 고개를 들었다.
“제이드? 너 어떻게 우릴 찾은 거야?”
하지만 설명할 시간은 없었다.
곧장 페르딤의 전선 기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쪽이다! 페르딤 안쪽에 흑마법사가 있다! 흑마법을 준비 중이야!”
당황함도 잠시 흑마법사라는 말에 이네스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이네스 뿐만이 아니었다. 와이트 아울 기사단 모두가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이들 역시 신성력을 통해서 마기를 감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마기의 정확한 위치까지 탐지해낼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내가 이들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내 뒤를 쫓아 달려온 이네스에게 소리쳤다.
“전선 기지의 오른쪽으로 뚫고 들어가야 해! 그쪽의 참호가 병사가 제일 적어!”
시시각각 변화하는 전장을 굽어보는 스틸 스왈로우가 있는 이상, 길을 뚫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내 설명대로 길이 이어지자 이네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떻게 안 거야?”
“지금 그게 중요해?”
“아니. 일단 흑마법사가 우선이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검을 뽑아 들었다.
“전원! 이단자들을 축출하겠다! 주신의 철퇴를!”
뒤이어 눈을 빛낸 기사단이 소리쳤다.
“신의 엄벌을!”
“신의 엄벌을!”
퍼엉!
일시에 뛰쳐나간 와이트 아울 기사단의 몸에 새하얀 빛이 솟았다.
신형을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의 눈부신 빛이었다.
이후 그 빛에서 뛰쳐나왔을 때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주신 루멘의 상징이 금으로 장식된 순백의 갑옷이 그들의 몸에 씌워졌다.
그들은 내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일직선으로 내달리며, 페르딤의 방어막을 녹여버렸다.
그들의 주위로 신성력이 새하얀 기운을 뿜어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닥치는 대로 밀어붙여 넘겼기 때문일까.
그들의 기세는 중기병대의 돌격보다도 더 위협적이었다.
“교, 교단이다!”
“뭐? 교단이 여기에 왜······?
그리고 마침내 전선의 기지 중앙으로 들어선 순간.
와이트 아울 기사단은 열여덟이 넘는 흑마법사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시, 신성력! 교단 놈들이 여길 어떻─!”
콰득.
깜짝 놀라 중얼거리는 흑마법사의 신형이 바닥에 처박혔다.
이네스의 새하얀 검이 휘둘러진 여파였다.
검의 옆면으로 내려쳐 놈을 일시에 제압했다.
“끄르르륵······.”
뒤이어 검을 휘두르자 놈의 기도와 팔다리의 힘줄이 베여나갔다.
“입 다물어. 역겨운 이단자 새끼들.”
이네스의 등을 지고 보고 있던 나였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타오르기 직전의 화산처럼 들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형의 진에 묶여있는 사람들을 본 이후부터였다.
“이단자들을 모두 쓸어버려라! 놈들에게 편안한 죽음을 허락하지 마라!”
“예!”
“우리가 광신도들 따위에게 당할 성싶으냐!”
자신들의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걸 깨달은 흑마법사들이 노기를 흘리며 흑마법을 쏘아냈다.
형체를 갖춘 그림자의 마수부터 바닥에서 치솟은 녹빛의 화염에다가 자신의 피를 이용한 핏빛의 창날까지.
하지만 수없이 날아든 흑마법 공격들은 빛의 장벽에 걸리며 허무하게 증발해버렸다.
교단의 어둠 속에서 암약하는 와이트 아울 기사단들이 고작 흑마법사들 따위에게 질 리가 없지 않은가?
막강한 신성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파훼 된 흑마법을 뚫고 흑마법사들을 짓이겼다.
신의 엄벌이라며 복창하던 기사단의 외침은 거짓이 아니었다.
팔과 다리가 곤죽이 되거나 주문을 외우지 못하도록 기도와 혀를 잘라내었기에.
죽을 낌새가 보이는 녀석에게는 신성력으로 놈들의 상처를 치료했다.
“우리가 네놈들에게 편히 안식을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자리에 쓰러진 흑마법사들과 함께 전투의 여파로 주변은 초토화된 상태였다.
기지의 모습을 갖추었던 것은 이제 폐허나 다름없는 꼴이 되어 있었다.
이로써, 교단에서 페르딤 공화국과 흑마법사의 유착관계를 파악했다.
‘이것으로 대륙에서 가장 강한 기사단 중 하나가 참전할 명분을 얻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자 페르딤의 본진까지 밀고 들어온 마누스 군들이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건 대체······.”
“제, 제이드? 분명 그냥 기사라고······.”
선두에 선 데릭과 로빈마저 할 말을 잃은 듯 이네스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래, 기가 막히는 풍경이겠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모닥불 앞에 앉아 있던 이들이, 빛의 갑주를 두른 채 적진을 박살 내고 있으니.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 막내들 일 잘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