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54)
54화
언젠가 한 번 집채만 한 바위가 머리 위로 날아오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1회차, 마누스 왕국이 패전하여 결국 페르딤의 속국이 되었을 때였다.
극동부에서 내전이 일어났고, 나는 그때 어느 공성전에 참여했었다.
한 마법사가 토네이도를 일으켜 바위를 들어 올리더니, 우리의 머리 위로 내리꽂았다.
투석기로 날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바위였고, 그 파괴력 또한 비교할 수 없었다.
‘그때가 떠오르는군.’
거대한 회색의 마수, 케이브 트롤이 달려오는 모습은 그때의 광경과 흡사했다.
심지어 그 바위가 외갑을 두르고 강철 무기를 들었다면?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녀석의 발걸음은 위압감을 조성했다.
“쏴, 쏴라!”
“녀석을 막아라!”
쇠뇌병을 이끌던 오세롬 훈련소 출신의 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곧장 수십 발의 화살과 볼트가 놈을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팅! 티팅!
케이브 트롤의 몸을 감싸는 두꺼운 갑옷에 볼품없이 튕겨 나갔다.
운이 좋게 외갑의 이음새 사이로 날아든 화살이 있었지만, 그마저도 케이브 트롤의 질긴 가죽에 가로막힐 뿐이었다.
크륵.
트롤은 그 공격에도 간지럽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일그러진 입꼬리는 놈이 마누스 군을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놈은 수레를 끌던 갑각뿔소 한 마리를 향해서 두꺼운 손을 뻗었다.
“다들! 피해라!”
놈의 의도를 눈치챈 내가 성벽을 향해 소리쳤으나, 이미 갑각뿔소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 거대한 것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성채에 내리꽂혔다.
성채의 파편이 터져 하늘로 솟구치며 쇠뇌병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갑각뿔소 한 마리만 해도 3~4톤은 훌쩍 넘기는 대형 동물이다.
그런 걸 케이브 트롤이 가볍게 던졌고, 또 남은 세 마리마저 연속으로 던져댔다.
쾅!
콰앙!
콰아앙!
쇠뇌병들을 지휘하던 오세롬 출신 기사는 갑각뿔소에 깔려서 한쪽 손만 삐쭉 튀어나왔다.
“살려줘!”
“괴, 괴물! 괴물이다!”
성벽 한쪽이 내려앉았고,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아군의 사기가 감소합니다.] [아군의 사기가 감소합니다.]·
·
·
[아군의 사기가 급감합니다.] [상태이상 ‘공포’에 걸립니다.]“미친······!”
그 광경에 나 또한 위축되었다.
이건 본능적인 공포였다.
인간의 설계도에 각인된 본능.
결코 넘을 수 없는 먹이사슬의 벽.
감히 넘볼 수 없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
쿵─ 쿵─
놈이 태양을 등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그림자는 몇 배로 커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향해서 스멀스멀 다가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 도망가야 해!”
“저런 것과 싸워서 이길 리가 없잖아!”
아군 진영은 순식간에 비명과 공포로 물들어 갔다.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이대로 사기가 계속 떨어진다면 제대로 대항하지 못할 게 뻔했다.
싸워야 한다고.
이겨내야 한다고 소리치려던 그 순간.
“─모두 겁먹지 마라! 한낱 짐승일 뿐이다!”
나보다 앞서, 한 사내의 고함이 울려퍼졌다.
“바르손.”
이제는 익숙해진 그 사내가.
갑옷을 무장한 그가 커다란 방패를 들고, 등에 메이스를 맨 채 트롤을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기사 바르손은 압도적인 거구였다. 데릭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클 정도로.
어쩌면 조상 중에 오크의 피가 섞여 있지 않을까 하는 건, 병사들끼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주제였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커다란 바르손이거늘, 케이브 트롤 앞에 서자 삼분의 이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초라해 보였다.
바위를 향해서 날아가는 달걀.
내 감상은 그러했다.
하지만 바르손의 발걸음에는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의 방패를 타고 터져 나오는 푸른 빛의 오러가 사각의 방벽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트롤의 압도적인 기세를 가려버릴 정도의 커다란, 푸른 오러의 방벽을 말이다.
“자리를 지켜라, 마누스의 전사들이여! 내가 앞장서겠다!”
그의 육성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이거나 처먹어라!”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바르손이 방패를 내려찍으며 소리쳤다.
콰앙!
트롤의 머리를 내려찍은 오러의 방벽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다시 한번 내려찍었다.
콰아앙!
공격을 막아주는 게 방패의 역할 아니었던가?
바르손의 방패에 담긴 오러는 트롤의 거대한 신형이 흔들릴 정도로 살벌한 위력을 품고 있었다.
흡사 공성추나 다름없는 위력이다.
“말도 안 돼. 저 괴물을 바르손 경께서?”
“이 싸움 가능할지도 몰라······.”
겁에 질렸던 병사들 또한 고개를 들어 바르손의 싸움을 바라보았다.
좌절에 빠졌던 병사들의 얼굴에 희망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형님!”
“저희도 갑니다!”
뒤이어 뛰쳐나온 바르셍, 바르멩이 함성을 외치며 방패를 휘둘렀다.
쾅! 쾅!
처음 바르손이 보여준 오러보다는 못했지만, 둘의 오러 역시 살벌한 위력이 담겨 있었다.
두 형제가 합류하고 여유를 되찾은 바르손은 등의 메이스를 꺼내 들었다.
팔방으로 튀어나온 철편의 메이스는 바르손의 덩치에 걸맞게 무식한 크기의 메이스였다.
하지만 트롤 또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검은 나무로 만들어진 거대한 둔기.
쾅!
검은 돌기둥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의 두꺼운 둔기.
끝에 장식된 늑대 머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생명을 짓누를 것만 같은 위압감을 풍겨냈다.
쾅!
그 기둥이 수직으로 우뚝 서더니, 급하강하며 바르손을 내려찍었다.
오러의 방벽이 그를 막아냈고, 바르손의 메이스가 녀석의 팔을 강타했다.
쾅! 콰앙!
기사는 방패로 공격을 막았고 트롤은 맷집으로 버텼다.
서로가 막고 맞을 때마다 그 충격에 흙먼지가 일었고, 뿌리로 엮여 있던 단단한 땅이 조금씩 갈라진다.
“맙소사······ 바르손 삼 형제가 이 정도였다고?”
“인간이 저렇게 강할 수 있다니······.”
마누스의 병사들은 그 광경에 감히 전투에 끼어들지 못했다.
페르딤에게 고용된 용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의 시선에는 이건 이제는 국가 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거대한 트롤과 세 기사의 대결.
괴물과 영웅.
숭고한 싸움.
일부 병사들의 시선은 경외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계속된 공방은 마치 하나의 연극을 보는 듯 막힘없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하지만 연극에는 결말이 있고 내게도 이 공방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방패로는 놈의 공격을 막을지언정 트롤을 쓰러트릴 수는 없다.’
쾅! 쾅! 콰앙!
트롤의 공격을 막아주며 바르손을 보조하던 두 동생의 균형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녀석의 공격을 온전히 막아내지 못하는 탓이다.
마력은 유한하다.
하물며 마력의 소모가 극심한 오러로 케이브 트롤의 강대한 공격을 막는다?
마력이 뭉텅 깎여나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르셍과 바르멩의 오러의 방벽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푸른 빛을 내뿜던 오러의 크기는 점차 줄어들었고, 점차 공방이 이어질수록 방패는 구겨져 갔다.
······지금 우리가 나가야 하나?
아니 그럴 수는 없을 듯했다.
바르손 삼형제가 케이브 트롤과 저렇게 뒤엉켜 있으면, 우리의 작전을 펼치는 게 불가능하다.
아직 기다린다.
그리고 이내 ,막내 바르멩의 오러가 꺼졌다.
콰앙!
“크학!”
“바르멩!”
트롤의 공격에 방패가 산산조각이 나며 바르멩이 날아갔다.
간신히 이어지던 균형이 무너진 것이다.
“크아악!”
한번 무너진 균형의 추는 되돌아가지 못했고, 둘째 바르셍 역시 트롤의 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으아아아!”
두 동생이 쓰러졌으나, 바르손은 메이스와 방패에 오러를 피워 올린 채 용감히 맞서 싸웠다.
두 동생의 공백으로 힘의 저울이 확연히 기울었음에도 바르손은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맹렬하게 몰아붙였다.
저력.
그렇게 표현할 만한 장면이었다.
그런데 그때.
고오오오──
트롤이 내리치는 둔기에 붉은 기운이 서리는 것이 아닌가?
‘저건······ 용력이다.’
넘치는 생명력을 끌어올려 신체의 힘을 초월하는, 말 그대로 용력(用力).
비유적인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실존하는 힘의 한 종류다.
야생의 기운이 유형화된 것으로, 오크나 바바리안 같은 힘을 숭상하는 전사 종족들이 타고나는······ 마력과는 또 다른 신비였다.
그 붉은 기운이 트롤의 검은 둔기에 맺히더니.
콰아앙!
바르손의 방패를 내려찍었다.
직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커다란 진동이 터져 나왔다.
퍽─ 소리와 함께 숲의 단단한 땅이 액상화가 되어 흙탕물처럼 밀려났다.
숱한 전투로 꺾이고 잘려 나갔으나, 아직 버티고 있던 나무 밑동들이 땅에서 끄집어 올려져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낙엽이 치솟으며 사방으로 흩날렸다.
“크헉! 무, 무슨······!”
충격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한 바르손이 피를 토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애병이나 다름없는 사각의 방패 끄트머리는 반이 박살이 난 상태였다.
승기를 잡았다는 걸 인지한 트롤은 그대로 무기를 휘둘러서 바르손을 날려버렸다.
쾅!
반파된 목책에 처박힌 바르손.
쿠구구구······.
그는 의식을 잃었는지 일어나지 못했다.
“······.”
전장엔 한순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기에.
제2 전선의 방벽이 무너졌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기에.
지독한 정적을 깬 것은, 한 병사의 중얼거림이었다.
“바르손 경이······ 졌다고?”
“말도 안 돼.”
케이브 트롤이 나타났을 때, 지독한 공포를 느꼈다.
바르손 삼 형제가 진격했을 때는 희망이 반짝였지만.
이내 절망이라는 감정이 전장을 짓누르는 것이다.
병사들부터 기사들도, 심지어 사령관까지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반면 내 심장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방패가 부서졌다.’
그리고 역시나, 방패 뒤에 숨어 있던 이들이 싸울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성문 앞에 서 있던 사령관과 지휘관을 살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해야······.”
트롤의 공포에 벗어나지 못한 듯 바들바들 떠는 사령관이 뒷걸음치는 것이 보였다.
그런 사령관의 입이 웅얼거리며 무언가 말하려 하고 있었다.
‘후퇴.’
사령관이 후퇴 명령을 외치는 순간, 전투는 끝난다.
패배로 종지부 된다.
반격은 불가하다.
그렇게 되면 놈들은 도망치는 병사들을 사냥하듯 추적하고 유린할 것이다.
그것이 겪었던 과거였고, 막아야 할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먼저 선수 친다!’
나는 곧장 검을 뽑아 들고 크게 소리쳤다.
전장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말이다.
“제이드 별동대──!”
내가 고삐를 잡아당기자, 내 군마가 앞발을 들어 올리며 울부짖었다.
“전원 출격하라──!”
내가 등자를 세차게 튕기자 군마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별동대 출격!”
“출격이다!”
뒤이어, 등 뒤에서 데릭과 로빈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어디 한번 해보자고!”
“제이드 특공대 전원 출격이다!”
“앞에 놈들 비켜!”
이내 다른 대원들이 결심한 듯 크게 외치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두렵고. 이해할 수 없고.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기는 우리 대원들도 마찬가지다.
등 뒤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대원들의 숨소리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겁에 질린 듯이.
하지만 대원들은 이제 나를 신뢰한다. 그렇기에 죽음이 눈앞에 보여도 전진할 수 있다.
“으아아아! 제이드를 따라라!”
어떤 용기는 무모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게 가능하다.
1회차 때, 용사가 보여줬던 기적과 같은 신화들을 나는 기억한다.
2회차. 나는 그 기적들을 함께해야만 한다.
“저 녀석은 누구지?”
“제이드 백인대장이다!”
“제이드 별동대다!”
우리의 출격에, 성문 근처에 도열해 있던 병사들이 갈라지며 길을 비켰다.
“별동대! 4열 종대로!”
“4열 종대로!”
내 외침에 대답한 로빈과 그룬, 브룩과 롭이 조를 지어 왼쪽과 오른쪽 뒤로 붙었다.
쩔그럭! 쩔그럭!
그들의 안장에 묶은 두꺼운 쇠사슬이 말들의 발걸음을 따라 요동쳤다.
마리온이 만들어준 길고 두꺼운 쇠사슬 2개.
그 양쪽 끝을 말들이 끌고 있다.
“목표는 케이브 트롤! 놈을 포박한다!”
내 외침에 고개를 끄덕인 대원들이 속력을 올렸다.
크워어어어!
트롤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어디 와보라는 듯 무기를 휘둘렀지만, 선두의 네 병사는 우리 별동대에서 가장 기마술이 뛰어난 녀석들이었다.
튀어나온 나무 밑동과 뿌리에 울퉁불퉁해진 이 전장에서 어중간하게 말을 탈 생각이었다면 준비도 안 했다.
쾅!
놈의 무식한 무기가 로빈과 그룬을 향해서 휘둘러졌지만, 그들은 마치 한 마음인 것처럼 놈의 공격을 피해 움직였다.
이때를 위해서 긴급 기동 훈련만을 며칠간 반복했다. 반드시 피할 거다.
이어서, 튀어 오른 흙먼지와 풀 쪼가리를 헤치고 놈을 향해 접근하는 쇠사슬 1조와 2조.
촤르르르!
그들은 트롤을 향해서 달려가다가 양쪽으로 갈라졌다.
“이 면상 좆 같은 괴물 새끼야! 여기다!”
“네 녀석의 덩치가 너무 커서 이쪽은 맞추지도 못할 거다!”
대원들이 트롤의 시선을 끄는 사이 쇠사슬 1조와 2조가 트롤의 다리를 빙빙 돌았다. 쇠사슬이 점차 놈의 다리 주변을 빙빙 에워싸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내 신호와 함께 쇠사슬 조원들이 바깥으로 말을 몰자.
촤르르르륵! 텅──!
바닥에 늘어져 있던 사슬들이 일시에 팽팽하게 잡아 당겨졌다.
크륵!?
쇠사슬이 올가미처럼 좁혀지며 트롤의 발목을 낚아챘다.
놈이 멈춰 서며 기우뚱거렸다.
당황한 놈이 발목에 묶인 쇠사슬을 끊어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그게 누가 만든 건데.”
손에 정령의 축복을 담아낸 대장장이, 마리온이 만든 쇠사슬이다.
제아무리 용력을 지닌 트롤일지라도 함부로 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사고가 벌어졌다.
놈이 들고 있던 둔기를 내려놓고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그 반동에 브룩이 탄 말의 안장이 잡아당겨지며 균형이 무너졌다.
“브룩!”
그대로 튕겨 나가 바닥에 떨어진 브룩. 다행히도 큰 충격이 없는지 잽싸게 일어났다.
하지만 브룩에게 가장 가까웠던 건 우리가 아닌 트롤.
놈의 두꺼운 손이 브룩을 낚아채려는 순간.
“젠장! 빨리 피해라!”
파앙!
로빈이 말 위에서 쏘아낸 화살이 트롤의 눈을 사격했다.
크워어억!
눈을 꿰뚫린 트롤이 커다란 비명을 질렀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놈의 손을 피한 브룩이 곧장 몸을 뒤로 뺐다.
“브룩! 손을 잡아라!”
“롭!”
롭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왔다.
브룩이 롭의 손을 잡고 빠져나왔다.
하지만 쇠사슬을 잡아당기던 힘이 하나 사라졌다.
이대로라면 놈이 쇠사슬을 풀어버릴 것이었다.
“이 더러운 트롤 새끼가!”
카드드득!
데릭이었다.
녀석이 말에서 내려서, 주인 잃은 쇠사슬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으라라랏!!!”
케이브 트롤의 발이 끌리며 기우뚱 신형이 넘어갔다.
저게 가능한 거냐? 데릭 저 자식, 힘이 센 줄은 알았지만······.
당황했지만 결과는 확실했다.
쿵!
다리가 묶인 트롤이 주저앉았으니.
“트롤이 쓰러졌다!”
내 외침에 대원들이 일제히 화살과 볼트를 쏘아댔다.
하지만 다리를 묶고 한쪽 눈을 앗아 갔다고 해도 트롤은 트롤이다.
놈의 질긴 가죽과 외갑에는 한낱 화살은 통하지 않았다.
크워어억!
그 와중에도 트롤은 상체만 일으킨 채 주먹을 휘둘렀다.
병사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허공과 땅을 무차별적으로 박살 내면서 말이다.
어찌 보면 앞서서 바르손 때와 마찬가지로 보였다.
놈을 묶었지만, 놈에게 유효한 무기가 없는 듯했으니까.
하지만 내게는 달랐다.
‘준비는 전부 끝났다.’
슬쩍 등을 매만지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마리온에게 제작을 부탁했던 창.
창보다는 송곳, 크게 확대한 바늘에 가까운 무기.
이것이 놈의 질긴 목숨을 끊을 것이다.
“가자!”
나는 말의 고삐를 잡아당기고 놈을 향해 속도를 올렸다.
고삐를 잡아당겨 트롤의 우측 측면으로 돌아 향했다.
로빈이 쏜 화살은 여전히 오른쪽 눈에 박혀 있었다.
트롤 특유의 놀라운 회복력으로 상처는 회복되었지만, 아직 제거하지 못한 화살 덕에 사실상 실명인 셈이었다.
그렇기에, 내가 놈에게 빠르게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말의 안장을 박차고 도약하여 놈의 등에 안착했다.
두꺼운 외갑의 틈 사이를 붙잡고, 놈의 어깨까지 올라갔다.
크륵!?
놈이 내가 올라왔다는 걸 눈치챘을 때는 이미 늦었다.
푹!
나는 녀석의 목덜미를 향해서, 온 힘을 다해서 창을 내려찍었다.
오러로 근력을 강화하고 예기를 더욱 높였건만, 고작 한 뼘 정도밖에 들어가지 않았다.
시발! 가죽이 얼마나 두껍고 질긴 거야?
뒤늦게 나를 발견한 녀석이 미소 지었다.
누런 이빨이 나를 반겼다.
자신의 질긴 가죽과 회복력을 믿는 것일까?
확실히, 트롤의 상위종인 케이브 트롤의 가죽은 기사들의 오러로도 쉽게 베이지 않는다.
“근데 이건 날붙이가 아니라서 말이야.”
나는 흑색의 두꺼운 창을, 그것의 재료가 된 수용철과 독각충의 갑각을 떠올렸다.
수용철은 광물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물렁물렁하고 녹여 물건을 만들어도 쉽게 부서지는 특징이 있다.
‘······라는 게 현재의 지식이지.’
하지만 미래에서는 다르다.
마기와 마력.
상반되는 두 성질의 기운이 수용철에 모여드는 순간 말도 안 되는 화력의 폭발이 일어난다.
1회차 때, 마왕군이 이걸로 최하급 마수들을 무장시켜서 자폭병으로 활용했고, 그제야 인류는 수용철의 진정한 효과를 알게 되었다. 소수의 병력에 성벽이 죄다 무너진 뒤에야 말이다.
성벽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강한 위력에 붙은 이름이 분명······.
“캐슬 브레이커.”
크륵?
놈을 향해 내가 비릿 웃어 보이자 녀석의 표정이 괴상해졌다.
마기는 극소량의 마기로도 충분하다.
독각충의 갑각에 든 마기로도 말이다.
남은 건 이걸 터트릴 충분한 마력이었다.
아니면 강하게 압축된 오러처럼 말이다.
“어디 너도 버틸 수 있나 보자고.”
나는 창대를 강하게 쥐었다.
그와 동시에 반대쪽 손으로 마기 포식자를 치켜들었다.
[고결한 어둠이 피어오릅니다.] [고결한 어둠이 시전 중인 동안에는 마기의 흡수가 제한됩니다.]검보랏빛의 이질적인 기운이, 흑암성의 오러가 검날 위로 터져 나온다.
고오오오!
흉흉하고 불길한 외형과 달리, 오로지 순수한 마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캐슬 브레이커를 점화시켜줄 것이다.
“마기 폭발.”
나는 그대로 마기 포식자를 휘둘렀다.
마치 망치로 정을 내려치듯.
흑색의 기운을 감싼 검이, 새까만 창의 끝을 후려쳤다.
────!
그 순간 내 시야가 뒤집혔다.
사방이 계속해서 회전하다 못해 새하얘지며 전신이 뻣뻣해졌다.
콰아아앙!
그런 내 귓가에 반 박자 늦게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 * *
콰아아앙!
괴물을 향해 용맹하게 돌격한 병사가 알 수 없는 폭발에 튕겨 날아갔다.
그는 흙바닥에 처박혔다. 기사 바르손처럼.
쓰러진 기사가 보여주었던 승리의 희망이 저 병사를 통해 재현될 줄 알았으나, 희망은 다시금 허망하게 스러졌다.
쿠구구구······.
폭발이 일어나며 트롤의 어깨 위로 검은 연기가 일어났기에 괴물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대한 폭발에도 괴물의 상체는 꼿꼿이 서 있었다.
검은 연기와 맞물려서, 마치 신화 속 거인처럼 보이고 있었다.
속절없이 날아간 병사와 온전히 서 있는 거인.
그 결과는 자명했다.
용맹한 병사는 실패했고, 괴물은 온전하다.
그 결과에.
전장의 모든 이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싸우던 병사들도, 허공을 가르던 화살도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전장의 모든 이들이 정지했다.
그 순간이었다.
신화 속 거인이라 생각된 트롤의 신형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동시에 쓰러졌던 병사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병사의 발치 아래로 하늘에서부터 무언가 떨어졌다.
툭.
사람의 머리만 한 그것은······.
트롤의 턱뼈였다.
결과가 뒤집힌 것이다.
모든 이들을 짓뭉갤 것 같았던 괴물이, 기어코 쓰러졌다.
용맹한 병사의 검에 말이다.
그 순간 전장의 모든 이들이 전율했다.
그는 더 이상 한낱 병사가 아니었다.
영웅.
괴물을 쓰러트린 영웅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영웅의 시야에도 수많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워 이겼습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레벨이 상승합니다.] [전장의 일기토에서 승리했습니다.] [적군의 사기가 최저치로 하락합니다.] [아군의 사기가 최대치로 상승합니다.] [전투를 목격한 모든 병사들의 전투력이 일시적으로 5 상승합니다.] [제이드 별동대의 평균 전투력이 영구적으로 32에서 35으로 성장합니다.] [특성 – 영웅의 효과가 발동합니다.] [영웅은 사람들에게 쉽게 호감을 삽니다.] [영웅은 사람들을 이끄는 존재입니다.]·
·
·
모두가 숨죽여 지켜보는 가운데 영웅이 검을 들어 올렸다.
“마누스의 전사들이여! 모두 검을 들어라!”
와아아아아!
절망의 침묵을 걷어내고, 맹렬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