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ary youngest son of the marquis RAW - Chapter (275)
제 276화
* * *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인형일 때의 스승님도 분명 스승님이긴 하지만 인간의 모습인 스승님은 조금 달랐다.
분위기라든가 목소리라든가, 당연한 소리지만 외모라든가 하는 그런 거.
그래서 인형일 때 단둘이 있을 때의 분위기와 인간일 때 단둘이 있는 분위기는 같지 않다.
[참으로, 아름답구나.]이스마엘 왕성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이스마엘의 수도는 스승님의 말마따나 충분히 아름다웠다.
도시 전경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안정감이나 웃음, 행복감 그런 것들이 테슬란과는 천지 차이가 날 정도였다.
사실 강한 군주가 있는 국가가 그러하듯 템-사미트라는 강한 군주가 위에서 버젓이 버티고 있으면 아래에 있는 백성들은 당연히 안정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웃음이 생기고 행복해지고 그러는 거지.
정치는 그 안정감을 바탕으로 장사를 하는 것과 같다.
그 장사를 파나메로 공작이 대신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렇게 안정감이 있는 국가를 만든 것은 템-사미트, 그 혼자의 힘이다.
“아름답긴 한데, 이게 얼마나 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곧 피바람이 불 테니까?]“그렇죠.”
내가 사미트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지 못하는 것은 다르다.
전사로서의 사미트.
군주로서의 사미트.
그 두 개가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인데 그 공통분모가 바로 상징성이다.
쉽게 말하면 권위 같은 거지.
완전무결한 군주가 된다면 편하겠지만 사미트는 그런 군주가 되지 못한다.
사실 될 수가 없지, 앞서 말한 대로 사미트는 군주보다는 전사에 더 가까운 남자였으니까.
그런 사미트는 군주가 되었고 그 상징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최대한의 정치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이에게 권력을 양도했다.
그게 파나메로인데, 그는 사미트를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했다.
그게 만약 실행되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면 사미트는 벌레가 되었을 것이고 백성들은 사미트를 향한 신뢰를 잃고 사미트를 조종하는 귀족을 칭송하게 될 거다.
무늬만 왕.
즉, 이스마엘이라는 국가의 근본이 무너지는 거다.
그건 다른 의미의 진짜 내전이고 내란이다.
더 안 좋게 말하면 자멸로 가는 지름길.
그런데, 지금 파나메로 공작이 선을 넘었다.
세상에.
자국의 왕이자 현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적색 마나 소유자에게 자기 욕망을 심어서 자기 뜻대로 조종하려 하다니.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온다.
어떤 의미로는 거의 존경스러울 정도다.
간땡이가 보통 사람 보다는 한 열 배 정도는 큰가 봐.
그러니 이 이후에 벌어질 일은 간단하다.
피바람.
그거 말고 더 있나.
[무릇, 무언가를 새로 만들려거든 기존의 것을 부수는 과정도 필요한 법이 아니겠느냐.]“아카데미에서 제가 했던 일처럼요?”
[그것도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지.]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한 일은 기존의 썩은 뿌리를 도려내는 일이었고, 잡음 따위는 안 나오게 관련되어 있는 모든 놈들을 죽이고, 찢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테슬란 왕국이 조용한 거다.
반발할 놈들이 다 죽었으니까.
그렇다면 과연 사미트는 어떤 방식으로 파나메로를 정리하려는 걸까.
내가 알기로 파나메로 공작은 황태자가 만든 위원회의 일원이고, 이스마엘이라는 국가에서 최고 서열에 속한 남자였다.
즉 파나메로 나름의 지지층이 있다는 건데, 파나메로 스스로가 큰 그림을 그리고 있고, 그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미트의 의지를 컨트롤해야 하는 일이니 자기가 데리고 있는 모든 지지층을 데리고 왔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그 지지층은 대부분이 이스마엘 위원회 출신의 귀족들이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달빛을 맞으며 잠시 스승님과 아이컨택을 하고 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조금은 멍한 표정의 사미트.
그에게 웃으며 물었다.
“잘 갔다 왔냐?”
안부인사 같은 그 말에 사미트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저 반응은.
대화가 잘 안 풀렸나.
어깨를 으쓱하고는 테라스 난간에 두 팔을 올리고 다시 도시 전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 내 뒤쪽으로 사미트가 다가온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네.”
“뭔데?”
“자네가 테슬란 왕국에서 죽인 귀족들, 그들은 ‘테슬란 위원회’에 속한 이들인 것 같던데, 맞는가?”
도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다른 이들의 입으로 듣긴 했지만 그냥 자네 입으로 직접 듣고 싶었다네. 그런 그들에게 한 번의 기회 정도는 줘 볼 생각, 하지 않았는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얘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감상적인 놈이 됐어.
굳이 답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지만 그냥 해 줬다.
“당연하지. 왜 기회를 줘?”
“그래도 나름 영주로서 쌓아 온 것도 있…….”
“사미트야.”
녀석을 부르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네가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어, 네가. 위원회에 속해 있다는 건 자국을 버리고 툴칸에 투신했다는 거랑 다르지가 않아. 거기서 더 재미있는 건 투신한 툴칸으로 국적을 옮긴 게 아니고 여전히 다른 국가에 남아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거. 이게 진짜 진국이지.”
버리기로 작정을 했으면 가지고 있는 걸 가지고 도망을 가건 어떻게 해서든 그쪽 국가로 넘어갔어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위원회에 속해 있는 놈들은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원래 국가에 남았다.
이미 자기 영지의 주민들을 배신한 상황인데도 여전히 귀족이라는 자리, 영주라는 자리에서 얻을 건 다 얻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자리 잡았다는 건데, 그런 놈들한테 기회?
“잠깐 자리를 비운 놈이 다시 오고 나서 한다는 소리가 그런 개소리라 순간 놀라 버렸네. 진심은 아니지?”
“…….”
안타깝게도 진심이었나 보다.
“물론 너처럼 생각하는 애가 있겠지. 한 번 정도는 기회를 주는 게 맞지 않겠냐고, 그런데 왜 그래야 하지?”
“…….”
“너네가 시야가 좁아서 그렇지, 각 국가에 인재들은 많아. 귀족? 그들이 왜 귀족이야. 해당되는 영지에서 나름의 이름이 있는 놈들이라 그런 거잖아. 일종의 ‘지역유지地域有志’ 같은 거지. 그 지역유지, 찾아보면 더 없을까?”
괜히 빈 영지를 통합해서 우리 누나나 아베이루나 기타 몇몇 이들에게 관리하라고 한 게 아니다.
나는 뭐든 이유 없이 행동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그 지역 유지를 더 찾아보기 위해서다.
괜찮은 지역 유지가 얼마나 있는지 더 알아보고 그런 지역 유지를 찾으면 그를 귀족으로 임명해서 영지를 관리하게 하려는.
난 나름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다른 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헷갈리지 마. 귀족은 각 영지를 ‘관리’하는 동시에 ‘희생’하는 자리지 자기 배를 채우는 자리가 아니야. 그런데 그 영지의 주민들을 배신하고도 그 국가에 남아서 안쪽부터 썩어 들어가게 하는 그런 새끼들한테 한 번의 기회? 이게 진짜 개소리지.”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미트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서였군.”
“뭐가?”
“그대는 나이가 어린 이들이든 나이가 많든 상관없이 인재를 중요시해. 무릇 어떤 일을 행할 때에는 반드시 이유가 필요하고 목적이 필요한데.”
잠시 말을 멈춘 사미트가 나와 우리 스승님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러고는 무언가 깊게 생각하더니 침묵한다.
음.
꽤 재미있는 소리를 하려는 것 같아서 그냥 기다려 주었다.
정리가 된 건지 사미트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대에게 그 이유는 자격이 없는 이들의 자리를 대신하게 해 주기 위해서였군. 그걸 인재 발굴이라는 단어로 뭉뚱그려서 말하고 있었던 거고. 맞는가?”
“얼추 맞아. 그럼 목적은 뭘까.”
“글쎄, 워낙 주먹질만 해서 그런지 그것까지는 모르겠군. 물으면 답해 줄 건가?”
“못해 줄 것도 없지. 목적도 간단해. 난 세상이 발전하기를 원하거든.”
사미트가 고개를 갸웃한다.
“세상의, 발전?”
지금까지 너무 자연스러워서 의식하지 못한 이들이 많은 것 같은데.
400년 전 세상과 지금 세상.
뭐가 다를까.
힐끗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스승님을 바라보았다.
“스승님은 아실 겁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음…….]작게 침음을 삼키시는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사실 내 말마따나 스승님이 모를 리 없다.
보통 400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400년 후의 세상을 겪게 되면 극심한 혼란을 겪는 게 정상이다.
아니지.
무조건 겪어야 한다.
도구를 잘 사용하는 인간들만의 세상을 만들었는데, 그 상태에서 무려 400년이 지난 지금.
스승님은 현재 세상에 너무나도 익숙하게 스며들었다.
내 주변에 있는 그 누구도 의식하지 못했을 거다.
지금 세상은 400년 전 세상과 달라진 게 없다.
무슨 노예 시장이니 영광의 시대니 뭐니 항상 하던 소리를 하려는 게 아니다.
기술의 발전, 건축의 발전, 마법의 발전, 통신의 발전.
더 나아가 오락의 발전.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다.
전에, 스승님이 세상이 많이 바뀌긴 했구나라고 말했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바로 테슬란 왕국에서 ‘모험가 길드’를 보았을 때.
일반적인 길드가 아니라 중개소 역할을 자처하는 그런 모험가 길드를 보았을 때 스승님은 놀랐다.
확실히, 세상이 변하긴 했구나.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 겪는 그 모든 것들은 400년 전 세상과 똑같았으니까.
사미트를 바라보았다.
“툴칸의 건축 양식? 첨탑? 감시탑? 성벽? 전부 400년 전에 있던 거야.”
“…….”
“용병? 노예? 귀족? 다 똑같아. 발전한 게 없어.”
이유는 하나다.
귀족이라는 것들이, 그리고 그 위의 왕이라는 것들이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변화라는 것은 기존의 것을 부수는 과정을 동반하니까.
가진 것을 잃고 싶지 않아 하는 권력자들의 암묵적인 동의.
그딴 생각 때문에 세상은 발전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