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egendary youngest son of the marquis RAW - Chapter (624)
제 625화
천하성의 류진은 입맛이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고기를 먹을 때도 어느 정도의 온도에서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익혀야 하는지, 세세한 것을 따지는 데다 심지어 고기가 어디에서 나온 고기인지도 따진다.
그 입맛을 맞추기 위해 동대륙에서 자신의 요리 솜씨에 자신이 있는 수천 명이 넘는 요리사들이 그의 전속 요리사 자리에 지원했었는데 오직 네 명만이 그 자리에 합격했다.
심지어 그 네 명 중 한 명은 나이가 너무 많아 1년 정도 일하다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총 세 명의 요리사가 돌아가면서 류진의 입맛에 맞는 요리를 내놓는다.
벽왕개. 주로 벽 숙수라 불리는 그가 오늘의 요리를 준비하고자 양고기를 다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한 남자가 다가온다.
그는 홍석이라는 이름을 지닌 남자였다.
천하성 본관의 총관 중 한 명으로서 본관에 오는 집하물들을 총관리하는 인물이다. 이 남자는 보통 홍 총관으로 불린다.
홍 총관이 말했다.
“오늘도 고생 많으십니다. 벽 숙수.”
“고생은요, 성주님이 배불리 먹는 것이 곧 천하성의 백성들이 배불리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웃으며 가볍게 인사를 한 벽 숙수와 홍 총관은 가볍게 스쳐 지나갔다. 이게 일상이었다.
그때였다.
스쳐 지나가기 전, 홍 총관이 슬며시 벽 숙수의 손에 작은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벌어지는 동안 두 남자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양고기를 다듬는 냉동실로 향한 벽 숙수는 조용히 종이를 펼쳐 보았다.
‘마지막 부탁입니다. 최근 들어 류진의 동태를 파악할 수가 없어졌어요. 사천 땅을 내주는 등의 비합리적인 요구도 바로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수상해요. 류진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확인해 주세요. 종이는 즉시 태우시고 확인이 되는 대로 통신망을 통해 전해 주세요.’
그리고 구석에, 정말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요. 과거의 은원은 결국 살아 있어야 갚을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벽 숙수도 아시겠지만 이미 정체가 발각되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 조심하세요.’
고운 글씨체에 걱정이 한껏 담겨있는 그것은 벽 숙수도 익히 아는 인물의 글씨체였다.
현재는 천마신교의 대호법을 맡고 있는 영월, 그녀를 생각하자 벽 숙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드디어.
영월에게 받은 ‘모든 은혜’를 갚을 수 있겠구나.
그녀에게 받은 은혜가 너무나도 많았다. 목숨을 구원받은 일이 대충 다섯 번, 그와 동시에 가족들도 구원받은 게 다섯 번이다. 영월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요리는커녕 진작 빈민가에서 굶어 죽었거나 무인 간의 싸움에 휩쓸려 가족과 함께 죽었을 것이다.
벽 숙수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건, 영월을 위해서라면 이 자리에서 곧장 자결할 수도 있다.
그런 영월이 마지막 부탁이라는 말을 썼다.
모든 일에는 전조가 있다. 정말 위험한 일이 벌어지기 전이라면, 정보를 얻기 전 그 마지막 한 걸음 전에 느낌이 온다.
벽 숙수는 후련하게 웃었다.
‘어쩌면 오늘이 내 기일일 수도 있겠구만.’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그는 즉시 화로에 종이를 불태워 버린 뒤 요리를 시작했다.
솔직히 요즘 류진의 행동이 이상하긴 했다.
평소였다면 밖으로 나와 주변을 쭉 둘러본 뒤 수련장에서 수련을 하고, 이후 본관 안에서 보고를 받는.
류진은 평범한 무인들처럼 그런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방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한다.
수련장은 오지도 않았으며 받던 보고도 거의 받지 않았다. 천하성 본관으로 오는 사람들의 숫자 자체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고 해야 할까.
아, 그리고 이건 여담인데 보통 식사는 식당에서 했었지만 최근 들어 ‘지하’로 식사를 배달해 갔다.
지하에서 대체 무엇을 하는지, 벽 숙수는 모른다.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었다. 오늘은 관심을 가져야 했다.
벽 숙수는 류진의 입맛에 맞는 완벽한 양고기를 만든 뒤 그대로 쟁반에 담아 조리실을 나왔다.
말은 안 했는데 이 쟁반이 참 기가 막히는 물건이다.
서대륙에서 넘어온 물건인데 이 쟁반에 요리를 담으면 그 요리는 최소 3시간, 최대 8시간까지 요리의 현재 상태를 유지해 준다.
온도, 신선도, 기름기 등등.
들리는 말로는 서대륙의 황태자가 재미 삼아 만든 아티펙트라는데 이것의 가격이 거의 금화 십만 냥에 달한다고 한다.
벽 숙수는 평소와 다름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이십여 분을 걸은 그가 도착한 곳은 지하실로 향하는 입구였다.
평소라면 이 입구 앞에 식사를 내려놓고 물러났을 것이다.
계속 그래 왔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우선 첫째, 지하실 문이 열려 있었다.
이건 앞선 홍 총관이 열어 놓은 것이 분명하다. 혹은 벽 숙수조차 모르는 신교의 다른 인물이 열어 놓은 것일 터.
누가 열었건 중요하지 않았다. 벽 숙수는 매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게 열려 있지?
모르는 이가 보았더라면 연기가 아니라 실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벽 숙수는 평소와 다르게 요리를 든 채 문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며 걸은 그는 이내, 또 다른 지하로 향하는 길을 발견했다.
좁지는 않았다. 복도 같다고 해야 할까.
‘……지하실에 이런 복도가 있었나?’
들어올 일도 없는 지하실이었기에 구조를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벽 숙수가 쭉 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복도의 끝에 도착한 곳에서 벽 숙수는 들고 있던 쟁반을 떨어뜨릴 뻔했다.
‘뭐…… 뭐야, 이게.’
구석에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는 류진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벽 숙수도 익히 아는 ‘그것’이 있었다.
온몸에 가시 같은 것이 돋아나 있는 ‘그것들’은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꿈틀거리고 있었으며, 또 한구석에는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용의 시체가 있었고, 또 한곳에는.
‘……사람? 세 명인데……. 잠깐, 저 얼굴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내 벽 숙수는 경악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첫째.
벽 숙수는 저 가시가 돋아나 있는 것들이 어떤 것인지 안다.
그것은 과거 라그나로크라는 괴물이 서대륙을 침범할 때 사용했던 키메라가 분명하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람은 세 명이었다. 정확히는 네 명인 것 같은데 한 명은 마치 ‘재생’ 중인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의 옆으로는 미친 듯이 불타오르고 있는 이상한 물체가 있었다. 그 물체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이 뼈만 남은 그것에 천천히 흡수되고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재생 중인 한 명이 아니다. 지금 멀쩡히 있는 알몸의 세 남자다.
저 세 남자도 벽 숙수는 알고 있다.
아니, 애초에 모르는 게 이상하다.
세 남자 모두 동대륙에서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그리고, 이미 죽은 인물들이다.
차례대로 과거 동대륙을 지배했던 두 명의 괴물.
천마신교의 천마 영정,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천외천의 천자 혁진강.
그리고 다른 한 명은.
과거 동대륙의 천하제일인이었으며, 현재의 천하제일인인 드래곤 로드 셀에게 살해당했던 남자.
하인케스 베커만.
그 세 명이 지금 알몸인 채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 세 명에게 가시가 돋친 생물들이 하나둘씩 들러붙고 있었는데, 징그럽다 못해 구역질이 났다.
그리고 세 번째는.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는 거다.
“벽 숙수, 왜 이곳에 있는 거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정갈한 머리에 정갈한 수염을 가진 한 남자가 있었다.
나이는 약 40대 정도로 보였으며 백색 장포를 입고 있었다. 그는 그냥 백색의 남자였다.
벽 숙수는 이 남자도 안다.
천하성에서 류진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는 이는 누구일까.
대원당주 사혼제? 아니다.
대원당주보다 한 계급 위에 있는 주령.
그가 류진의 총애를 받는다.
주령 적무한赤武悍.
별호는 백염존白炎尊.
그는 기존의 사혼제처럼 일선에서 거의 활동하지 않았다. 그를 본 사람조차 거의 드물다.
뭐 하고 돌아다니는지조차 알려진 바가 없다. 베일에 싸인 인물, 그런 인물을 벽 숙수가 아는 이유는 그가 본관에서만 십수 년을 넘게 살았기 때문이다.
벽 숙수가 본관에서 십수 년이 넘게 살지 못했더라면 그도 주령 적무한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벽 숙수는 이내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게,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지하실에는 그 누구도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을 텐데, 왜 들어왔지?”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거기다.”
“거기다?”
“최근 들어 성주님이 두문불출하지 않았습니까. 혹시라도 지하에서 수련을 하시다가 주화입마를 당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당당해 보였지만 떨림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그리고 주령 적무한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가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신교에서 명령이 내려오던가? 성주님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라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적무한이 슬쩍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뒤쪽에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의 양손에는 두 남자의 머리채가 잡혀 있었는데 그 두 명 모두 벽 숙수가 아는 인물들이었다.
한 명은 벽 숙수에게 신교의 명령을 전달했던 홍 총관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류진의 여러 호위대 중 ‘화천대’라는 곳에서 4분대장을 맡고 있는 정심재라는 이름의 인물이었다.
두 남자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는데, 그거면 충분했다.
“천하성이 우습게 보였나 보군. 너희 세 명이 첩자인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일제히 움직인 건 ‘황태자’의 명령인가?”
벽 숙수는 놀랐다.
황태자? 여기에서 황태자가 왜 나오지?
그 표정을 적무한은 읽었다.
“몰랐나? 천마신교의 교주가 밀로스 제국의 황태자 다니엘 밀로스라는 사실을?”
벽 숙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메론의 진짜 신분이 황태자였을 줄이야. 이것도 놀랍긴 했지만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이런 비밀을 이렇게 눈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다.
전부 죽일 생각인 거다.
“아쉬워, 벽 숙수의 양고기 실력은 동대륙에서 찾기 힘든데…….”
들려오는 이 목소리의 주인은 가부좌를 튼 채 눈을 감고 있던 류진이었다.
떨리는 얼굴로 벽 숙수가 고개를 돌렸다. 류진은 정말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류진이 말했다.
“이보시게. 벽 숙수, 저 두 명은 몰라도 나는 자네까지 잃고 싶지 않아. 그냥 다 잊고 계속 숙수로 활동해 줄 수 있겠나?”
놀라운 제안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벽 숙수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지하실 문이 열려 있을 때 이미 했다.
물러설 수도 있었다. 정보를 얻으러 오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직감이라는 게 있다.
벽 숙수는 알고 싶었다. 스스로의 직감이 외치는 그 불안감을.
그리고 그 불안감의 실체를 확인했다.
놀라웠고 죽음을 각오했다.
그런데 살려 주겠단다.
의미 없다.
영월과 천마신교에 은혜를 갚을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 죽음의 순간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그 자체로 축복이다.
거듭 말하지만 죽을 자리와 죽음의 순간을 택하는 것.
그것은 영광이다.
벽 숙수는 이미 결심했다.
자,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벽 숙수는 꽤 여러 개의 정보를 신교에 전달해 왔었다. 그럼 그 정보를 어떻게 전달했을까.
눈으로 보고 거처로 돌아와 몰래 통신구를 사용한다거나 하는 그런 방식은 일반적인 방식이지만 구식이기도 했다.
요즘같이 아티펙트가 발전한 지금이라면, 당연히 정보 전달 방식도 바뀌는 게 맞다.
벽 숙수가 쟁반을 밑에 내려놓으며 재빨리, 왼쪽 손목에 채우고 있던 팔찌를 오른손으로 강하게 움켜쥐었다.
동시에 적무한과 류진이 눈을 크게 뜬다.
두 남자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는 동시에 비슷한 행동을 했다.
우선 적무한은 눈앞에 있는 벽 숙수의 팔목을 발로 짓밟았다.
콰직-!
“끄아악-!”
동시에 뒤쪽에 있던 류진은 온 힘을 끌어모아 기파를 날렸다.
그 기파는, ‘밖으로 뻗어 나가던 눈에 보이지 않는 이질적인 마나 흐름’을 향해 뻗어 갔고, 그렇게.
파아아앙-!!
허공에서 마나 폭발이 일어났다.
팔목이 완전히 아작 난 벽 숙수는 고통에 몸부림치기보다는 그 상황에서 웃음을 지었다.
“……전부는 막지 못하셨구려.”
“……거참, 우리 벽 숙수가 이렇게 단호한 인물인지 몰랐네. 무슨 고민하는 척도 없이 바로 그걸 발동시켜?”
간단했다.
지금 벽 숙수는 지하실로 들어오고 나서부터 눈으로 보고 들었던 ‘모든 것’을 신교로 보냈다.
정보를 기다리고 있는 영월이라면 항상 대기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런데, 보내는 것과 동시에 류진이 그것을 막았다.
마나를 충돌시킨 것, 그게 그 증거다.
하지만 벽 숙수는 확신했다. 류진이 전부를 막은 게 아니라고.
“안타까워. 정말 안타까워.”
“크흐……. 대체 무엇이 안타깝다는 거요?”
“당분간 양고기를 못 먹게 됐으니까.”
“…….”
“잘 가시게. 벽 숙수. 그동안 고생 많았어.”
류진이 뒤쪽에 있는 적무한에게 손짓했다. 그건 이 세 명을 고통 없이 보내라는 의미였고, 즉시.
적무한이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 소리와 함께 이곳에 잡혀 온 세 명의 남자가 불타오른다.
화르륵-!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다. 순식간에 세 남자는 가루가 되었으니까.
적무한이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예상했던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주령님이 잔걱정이 많네. 끽해야 지하실 복도 일부만 봤을걸. 그리고 보면 어쩌게? 실험은 곧 끝나. 완성도 곧 끝나고.”
빙긋 웃는 류진에게 적무한이 물었다.
“곧? 생각보다 빠른 것 같습니다.”
“나도 놀랐어. 성화의 잠재력을 내가 오판하고 있었더라고. 이거 물건이야.”
진심이었다.
성화의 효력을 지금까지 제대로 몰랐다. 하지만 실험을 하면 할수록 성화의 진짜 능력을, 류진은 알아챌 수 있었다
성화는 ‘완전한 재생’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목이 잘린 시체도 살릴 수 있으며 고작 뼛조각 하나만 가지고 있어도 원상태로 복구시킬 수 있다.
놀라울 정도다. 세상에 이런 물건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역시.
과거 동대륙을 완전히 지배하던 천마신교답다고 해야 할까.
다만 딱 한 가지가 조금 애매했다.
“확실히 황제가 괴물이긴 한가 봐.”
적무한의 시선이 뒤쪽으로 향했다. 아직 뼈만 만들어져 있는 그것을 바라보자 류진이 말을 잇는다.
“다른 건 금방 재생이 되고 세뇌도 완전히 끝났는데 저건, 고작 뼈를 재생시키는 거에서 멈췄어.”
“포기하실 겁니까?”
“웃기는 소리, 저게 내 진짜 목표야. 저거만 재생시키면.”
시키면.
“바로 실행할 거니까. 그만 가 봐.”
“알겠습니다.”
적무한이 그대로 몸을 돌리려던 그때, 류진이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양고기 잘하는 요리사 한번 알아봐.”
“존명.”
천하성 본관 지하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렇게 생각보다 빠르게, 그리고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 * *
영월은 동대륙 감찰청에서 벽 숙수의 정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영월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팔찌가 진동한다.
영월이 빠르게 팔찌를 눌렀다. 그러자 그의 앞에 수정구의 그것처럼 몇 가지 화면이 떠올랐다.
과거 동대륙에서 황태자 다니엘 밀로스는 ‘사진기’라는 것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한 장면을 종이에 완벽하게 투영시키는 아티펙트였는데, 활용만 잘하면 종이에 그 장면을 완벽하게 그려지게 할 수도 있으며 어느 벽화에도 그려지게 할 수 있다.
이 손목의 아티펙트는 벽 숙수의 팔목에 채워진 것과 한 쌍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 사진기의 기능을 이용한 아티펙트다.
눈앞에 빈 종이를 여러 개 펼쳐 놓았던 영월은 빠르게 아티펙트에 투영된 그것들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퍼석-!
아티펙트가 연기를 뿜어내더니 별안간 박살 나 버렸다.
영월은 알 수 있었다.
“……걸렸구나.”
정체가 발각된 것은 분명 오래전부터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냥 가만히 놔뒀던 것은 천하성의 ‘자비’였다.
영월은 그것을 확실하게 안다.
그리고 자비를 베푼다고 생각할 때, 그리고 그 자비가 계속 이어질 때 방심을 한다는 것 또한 영월은 안다.
알기에 벽 숙수를 비롯한 홍 총관, 그리고 여러 명의 첩자들을 그대로 그 자리에 두었다.
그들이 오늘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니, 매우 높았다.
살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건 너무 적었다.
그럼에도 해야 했다.
지금은 천마신교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다. 류진의 정보를 얻어야 했다.
벽 숙수는, 명예롭게 죽었을까.
죽음에 만족했을까.
영월은 심호흡을 했다.
이것이 무림이다. 그리고 이게 세상이다.
그리고.
“……헛되진 않았어.”
말 그대로다.
벽 숙수가 보낸 사진들은 대부분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였다.
뚫어져라 사진을 바라보던 영월은 이내 머리를 감싸 쥐고 말았다.
건질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지하실 문의 형태조차 박살 나 있어서 이게 지하실인지 아니면 조리실 입구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다.
이건 아티펙트만 부숴 버린 게 아니라 아티펙트가 전송시키는 마나의 흐름조차 부숴 버린 게 분명하다.
그러다 영월은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군데군데 균열이 가 있는 그곳에는 가부좌를 틀고 있는 류진과 그 옆에 어떤 뼈를 불꽃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투영되어 있었다.
이게 그나마 잘 나온 거다.
그런데 난생처음 본다. 이런 광경은.
구석에 보이는 저거, 설마 ‘키메라’인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대체 이게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