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ntel life of the returning champion RAW novel - Chapter 209
귀환 용사의 인방 생활 208화
멍하니 디지를 바라보던 아리아나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농이 과하십니다, 공자님.”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훌쩍 멀어지는 아리아나.
그녀의 목소리에서 더 이상은 허하지 않겠다는, 암묵적으로 그어놓은 선이 느껴졌다.
[특이사항: 그간 느껴온 실망, 체념, 포기의 감정 탓에 방어 기제가 발동하여 약혼자의 진심을 외면하고 있습니다.]‘그래, 오늘 하루 만에 바뀔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다.’
비유하자면 깨져 버린 유리잔을 전과 똑같은 형태로 이어붙이는 일이다. 결코 쉬울 리가 없달까.
다만.
아리아나가 심경의 변화를 느낀 건만은 확실했다.
찰칵.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그녀가 팔찌를 풀어 주었으니까.
“음? 풀어주는 거요?”
“이제 학원으로 돌아가셔야 하니까요.”
“솔직히 말하면 안 풀어줄 것이라 생각했소. 내가 아는 아리아나는 그런 여자니까.”
지고지순과 집착이란 성격 요소를 고려한 말이었으나, 아리아나가 조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공자님께서는 좀 더 소녀를 공부하셔야겠군요. 소녀는, 언제나 공자님이 먼저였답니다.”
그렇군. 지독한 추녀와 약혼 관계라는 게 알려지면 안 그래도 안 좋은 학원 내 입지가 더더욱 진창에 빠진다 이건가.
안쓰럽다. 그런 스스로에게 상처가 되는 계산조차도 합리적이라면 행동으로 옮기는 그녀의 냉정함이.
여기서 다시 팔찌를 차며 점수를 딸 수도 있었지만, 디지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학원 생도들의 수군거림이 아리아나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어.’
“가시죠, 공자님. 학원으로 돌아갈 때입니다.”
납치당해 들어왔을 때와 달리 나갈 때는 아리아나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러고 보니 아리아나. 궁금한 게 있소. 대체 어떻게 학원 밖으로 나온 거요?”
“잊으셨나요. 그란데 후작가는 상인 가문. 황립 귀족 학원의 물자를 대는 일을 소녀가 맡고 있지요.”
한마디로 물자를 나르는 마차를 이용해서 몰래 외부를 드나든다는 뜻.
그나저나 수많은 귀족가 자제들이 필요로 하는 고급 물자를 대는 일인데, 학원 생도 신분으로 그런 중책을 맡고 있다고?
-아리아나가 능력은 좋은 모양이네.
-ㅇㅇㅇ저주받은 재색겸비라더니 재능은 후작가에서도 이미 인정받고 있는 듯?
-그럼 뭐하냐 디지야 걍 루시 공략하면 안 돼? 나 루시 보고 싶어……
[안 됩니다. 이미 맘먹었어요.]단호하게 대꾸하곤 아리아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대여. 허면 우리는 오늘부터 연애하는 사이가 된 거요?”
“…….”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쌀쌀맞게 대답했다.
“이미 혼약을 맺은 사이. 그런 사소한 것은 중요치 않다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나, 그대의 의사가 궁금한 것이었다오. 나와 연애를 하는 게 좋은지, 싫은지.”
아리아나가 이번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창밖을 쳐다봤다.
‘침묵해 봤자 소용 없는데.’
[특이사항: 적극적으로 변한 약혼자의 모습에 기쁨을 느끼면서도, 애써 그런 마음을 내리 누르고 있습니다.]결국 아리아나 폰 그란데는 디지 폰 를루슈를 은애한다.
그런 이상, 지금의 행동이 좋으면 좋았지 싫을 수는 없는 것이다.
‘얼어버린 마음을 녹이는 거야 시간만 있으면 해결될 것 같고. 문제는 저주인데.’
-얘들아, 이제 포기하자. 디지가 아리아나 쪽으로 완전히 맘먹었어.
-이렇게 된 김에 로맨스 기대 버리고 걍 히든 루트 뚫는 게임적 재미로 보자고
-ㅇㅇㅇ 애초에 디지 방송 컨셉이 그쪽이잖아. 보던 맛대로 진행한다? 이것도 나쁘지 않아.
디지가 말뚝을 박아버린 이후 갑론을박이 벌어지다가 결국 디지의 편으로 기울어진 채팅창 여론.
시청자들이 디지와 함께 아리아나 엔딩을 이끌어낼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근데 이터널 러브는 엔딩 여러 개인 게임들이랑 결이 좀 다름. 아리아나 엔딩은 준비도 안 되어 있을 것 같지 않냐.
-ㅇㅇㅇ루시, 이안이랑 달리 다른 등장인물들은 주사위 굴릴 때마다 다르게 나오잖아.
-존재하지도 않는 엔딩을 만들어내려면 결국 해주, 저주를 없애는 게 핵심일 것 같은데.
맞는 말이다. 문제는 세계관 파악도 다 하지 못한 마당에 해주 방법을 알아낼 수는 없…….
‘아. 맞다. 나 공전절후의 문재지.’
어떤 상황이든 해결책을 조언해 주는 끝내주는 재능!
속으로 질문을 던지자 곧장 메시지가 떠올랐다.
[공전절후의_문재가 발동합니다.] [본디 저주와 같은 이능은 초월적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 따라서 저주의 주체는 황실, 대공가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우에 따라 두 세력에서 흘러 나갔거나 훔쳐낸 지식을 습득한 이가 저주를 걸었을 수도 있으나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저주의 정체를 파악하고 해결법을 찾고자 한다면 황실 혹은 대공가에 대해 조사하십시오.]-ㅋㅋㅋㅋ드디어 공전절후의 문재를 제대로 쓰네.
-디지가 다른 플레이 보여주는 거 기대하고 넣은 거긴 해도 원래 개사기 재능이긴 하잖아.
-ㅇㅇㅇ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되게 유용하네.
타깃이 정해졌다. 황실, 혹은 대공가.
‘대공가에서 직계 자손 약혼자에게 저주를 걸었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럼 황실이?’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아마 자신과 아리아나는 태중혼약 사이였던 게 아닐까.
두 거대 귀족 세력의 결합을 경계한 황실에서 아리아나에게 저주를 걸어 약혼을 방해하려 한 것이고.
[님들, 제 생각 어때요?]도출한 결론을 시청자들에게 공유하자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왔다.
-오오오 그럴듯한데?
-딱 그거네 살짝 백설공주 비슷한 전개?
-ㄴㄴㄴ백설공주보다는 미녀와 야수가 더 가깝지 않나. 성별이 바뀌었지만.
-아리아나랑 디지 관계도만 보면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느낌도 살짝 나.
그러고 보니, 백설공주는 모르겠지만 미녀와 야수와 바보 온달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아마 AI가 세계관과 캐릭터 서사를 구현할 때 참고하지 않았을까 싶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시청자들과 해결책을 찾아 토론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나 보다.
“어떻게 하면 그대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지 고민했소.”
저주를 풀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으니 아예 거짓말은 한 건 아니다.
-ㅋㅋㅋㅋ디지 아무렇지도 않게 둘러대는 거 보소.
-스읍. 말하는 거 왤케 능숙하냐.
-흠. 디지에게서 나지 않았던 냄새가 나기 시작했어.
-잘생긴 얼굴에 잘 빠진 몸, 거기에 능숙한 말빨까지?
-이거 완전……
-알파메일이다아아아아! 죽여! 죽여어어어어!
헛소리를 내뱉고 있는 채팅창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헌데, 왜 한 달간 수업에 나오지 않은 것이오?”
정보 수집 겸 단련으로 보낸 한 달 동안, 디지는 학원에 다니는 모든 생도들의 얼굴을 외웠다.
그리고 그중 아리아나는 없었다.
즉, 수업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아시지 않나요. 소녀가 몸이 허약하여 자주 아프단 걸.”
그랬구나. 아마 이것도 저주의 탓이겠지.
하루라도 빨리 해주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아리아나의 특이사항이 바뀌었다.
[특이사항: 사소한 것조차 기억해 주지 않는 약혼자를 보며 재차 실망합니다.]아. 실수했네.
-아리아나는 이미 공략 완료인 줄 알았는데, 이건 이것대로 공략이 필요하겠는데?
-ㄹㅇ 나름 까다롭네. 보는 맛 있겠다.
-아바타가 지은 업보를 대신 갚는 디지ㅋㅋㅋㅋ
-쾌락 없는 책임ㅋㅋㅋㅋㅋㅋㅋ
디지가 곧바로 실수를 바로잡을 방법을 떠올렸다.
“아리아나. 혹시 마차 안에 종이와 펜이 있소?”
그녀가 말없이 요구한 물건을 건넸다.
펜을 들어 종이에 무언가를 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리아나. 혹시 저주에 대해 알고 있소?”
순간적으로 흠칫 몸을 떠는 아리아나.
“그건 왜 물으시는 거죠.”
말투가 날카롭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오.”
“후작가의 대소사를 접하며 몇몇 가지 들은 바 있는 정도입니다.”
음. 본인이 저주에 걸렸다는 걸 솔직히 말해줄 생각은 없는 것 같네.
뭐, 상관없다.
“여기. 받으시오.”
종이에는 디지가 한참동안 끼적인 복잡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무엇인가요?”
“저주의 문양이오.”
“……지금 소녀를 저주하겠다는 건가요?”
싸늘하게 식는 아리아나의 눈.
예상한 바였다.
본래 감동이란 고저의 낙폭이 넓을수록 비례하여 커지는 법.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군. 내가 그린 문양은 그대의 아픔을 내게 옮기는 저주요.”
아리아나의 눈이 흠칫 떨렸다.
“공자님?”
“위대하신 드래곤께서는 말에 의지를 이적을 일으키는 용언이란 권능을 지녔다고 전해지지. 난 사람의 의지에도 미약하나 같은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오. 그대가 아프지 않길 바라는 내 마음을 담았소.”
종이를 두 번 접어 아리아나의 손바닥에 올리고 주먹을 쥐게 했다.
“항상 지니고 다니시오. 나의 저주는 그대를 지키는 부적이 될지니.”
“…….”
-캬, 진짜 말 잘한다. 디지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니었는데.
-피지컬이 봉인되니까 미쳐 날뛰기 시작하는 야부리 스킬ㅋㅋㅋㅋㅋㅋ
-근데 감동이긴 하다…… 내가 아리아나였으면 당장 고백박았을 듯여……
-ㄹㅇ……
아리아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디지는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줬을 것이라 생각했다.
* * *
아리아나와 헤어진 이후, 디지는 곧바로 시간을 스킵했다.
하루의 수업이 끝나고 데르트와의 단련까지 마친 방과 후.
땀과 흙먼지를 씻어낸 디지는 곧장 기숙사를 나섰다.
-디지야, 어디 가게?
-평소대로면 루시 보러 가야 하는데, 아리아나 루트 타기로 결정했잖아.
-ㅇㅇㅇ그니까. 아리아나랑 데이트하러 가게?
“아뇨. 오늘도 루시 보러 갑니다.”
-??? 아리아나 버려? 아리아나 버려?
-응 버려~ 잘 결정했다 방장아ㅋㅋㅋㅋㅋ
“버리긴 뭘 버려요. 저주 풀 방법 찾으러 가는 건데.”
-그걸 왜 루시한테서 찾음?
-루시는 암 것도 모를걸? 평민 출신이잖아.
-설마 루시가 흑막이라 생각하는 거?
“아뇨. 정확히는 루시를 보러 가면 딸려오는 사람한테 볼 일이 있는 거라.”
행정학부 건물 앞에서 루시를 기다렸다.
잠시 뒤 책 몇 권을 들고 걸어오는 루시.
“루시 양.”
“아, 디지 공자님.”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배에 힘을 주고 외쳤다.
“루시 양! 잠깐 시간을 내어줄 수 있겠소? 긴히 드릴 말이 있소!”
루시의 눈이 커졌다. 디지의 목소리가 주변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컸기 때문.
“언성이 높아요, 공자님. 무슨 일이신가요?”
[성격_기품 발동]메시지가 떠오르며 언행이 강제되는 걸 억지로 무시하며, 다시 한번 배에 힘을 줬다.
“이곳에서 할 얘기는 아니니, 학원의 후원으로 자리를 옮깁시다!”
진하게 감도는 불쾌감. 성격 요소를 무시한 탓이었으나, 어젯밤의 경험으로 성격 요소는 플레이어가 강한 의지를 품으면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단 걸 확인한 뒤다.
‘불편하긴 해도 이 정도는 감수할 만하지.’
루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의아해하는 루시였지만 사려 깊은 성격의 소유자답게 디지의 뒤를 따라왔다.
그렇게 도착한 학원의 후원. 달리 말해 인적이 드문 장소.
“대체 무슨 일이신가요, 공자님. 평소답지 않으세요.”
그럴 것이다. 기품 탓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쉽지 않은 몸이었으니.
“루시 양. 오늘 나는 그대에게 사과를 건네려 하오.”
“아하하, 또 뭘 잘못하셨나요?”
“그렇소. 처음 우리가 대화를 나눈 날, 나는 거짓말을 했소.”
이어서 설명을 했다.
루시에게 했던 고백은 스스로를 바꾸기 위한, 용기의 씨앗을 발아시키려는 목적의 의식이었단 것을.
-ㅋㅋㅋㅋㅋ그때만 해도 루시 공략하려고 했던 거면서.
-정확히 말하면 이안한테 뺨 맞고 발끈해서 루시 이용한 거긴 함.
-여자 맘을 가지고 놀아? 이런 나쁜 남자 같으니!
“루시 양. 그대를 이용해서 미안하오. 이 말을 하고자 그대를 불렀소.”
잠깐의 침묵 후에 루시가 싱긋 웃었다.
“사과는 필요 없답니다. 공자님의 마음 정도야 이미 알고 있었는 걸요. 한 달간 매일 같이 저와 시간을 보내면서도, 공자님은 한 번도 제게 사심 어린 눈길을 주지 않으셨잖아요.”
이어서 질문을 던지는 루시.
“그리고. 절 부른 목적은 그게 다가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이건 의외였다. 어떻게 알았지?
사려 깊은 성격 요소에 특전이라도 있는 건가.
루시의 말대로였다.
“하하, 들켜 버렸군. 말이 나온 김에 잠시만 이곳에서 나와 대화를 나누는 척을 해주시겠소?”
“뭔지 모르겠지만, 재밌을 것 같네요. 그리할게요.”
잠시 뒤. 후원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음? 루시 양. 그리고 디지 공자. 이런 곳에서 둘이 무얼 하고 있었소, 하하하.”
헐레벌떡 달려온 주제에 우연히 마주친 척을 하는 남자.
황실의 직계, 황제의 아들.
이안 레드슈타인이었다.
“아아, 이안 경. 기다리고 있었소.”
이안의 웃는 얼굴에 금이 갔다.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하였소?”
피식 입꼬리가 올라갔다.
‘돌아가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지.’
때문에 디지는 엄격하고 명예로운 이안의 성격을 믿고 돌직구를 던져 보기로 결심했다.
“이안 경.”
디지가 불쑥 손을 내밀어 루시의 손을 잡았다.
살짝 눈이 커진 루시였지만, 다행히 손길을 뿌리치진 않았다.
“그대에게는 꼭 말해주어야겠다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소. 오늘부터 나와 루시 양은 연인이 되었소!”
“뭐, 뭐라고……!”
와장창 일그러지는 이안의 얼굴. 디지가 말꼬리를 흐리며 덧붙였다.
“비록 내 그란데 후작가와 혼약을 맺은 몸이라 하나…… 루시 양. 약조한 대로 약혼은 곧 파기할 터이니 걱정 마시오.”
그 순간, 일그러졌던 이안의 얼굴에 또 다른 감정이 떠올랐다.
“그, 그란데? 설마 아리아나의……!?”
원하는 반응이 나온 순간, 디지는 곧바로 이안의 특이사항을 확인했다.
[특이사항: 디지 폰 를루슈가 아리아나 폰 그란데의 약혼자였다는 점에 경악하고 있습니다.]디지는 메시지를 보며 다시 한번 입꼬리를 올렸다.
‘찾았다, 저주의 단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