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licious Member is Back! RAW novel - Chapter (97)
악성 멤버가 돌아왔다! 97화
* * *
어떤 기억은 굳이 떠올리려고 하지 않아도, 생생하게 머리에 남는다.
예를 들어서 가수 신분으로 새롭게 발을 내딛는 순간.
내 이름과 그룹명이 박힌 대기실을 마주한 때.
혹은, 신인상을 받고 오열하던 순간, 뺨에 닿았던 리더 형의 손.
또는….
내 열애설이 터지고, 그 이슈로 잔뜩 스트레스 받은 멤버들과 안무 연습이 잡혔던 날?
“―진짜 집중 안 할래!”
“…어?”
나는 불현듯 내 눈앞 가득히 펼쳐지는 풍경에,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전면을 가득 채운 말끔한 거울.
그리고 구석에 자리한 음악 장비. 땀이 떨어지면 끽끽거리는 소리가 나는 바닥.
분명히, 우리 소속사인 AG의 지하 연습실이었다.
보아하니, 다른 멤버들까지 함께 모여서 안무 레슨을 받고 있던 모양이었다.
내가 신고 있는 운동화로 바닥을 문지르면서 상황을 파악하는 사이, 안무 선생님의 노호성이 한 번 더 터져 나왔다.
“렉스야. 너 때문에 한 번 더 가는 거야. 쌤도 이렇게 화내기 싫다, 정말!”
동시에, 이 연습실 안에서 나와 함께 안무를 하고 있던 다른 넷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모를 수가 없는 사람들의 시선이 말이다.
유찬 형, 재하 형, 시우와 화성이까지.
“…다시 하면 되지. 괜찮아.”
“…….”
“렉스, 형.”
“후우….”
어딘가 싸늘하기도 하고, 복잡한 심경까지 섞여 있는 면면이었다.
아, 그러니까….
지금 계속 틀리는 나 때문에, 오늘 안에 다 마쳐야 하는 안무 연습 진도가 딜레이 되는 중인 건가?
그렇다면야, 뭐.
“…죄송합니다!”
나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이며, 우렁차게 사과를 내질렀다.
당연했다.
내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딜레이 된 건데, 제대로 사과를 해야지. 그냥 어영부영 넘어가지 말고.
그런데.
“…너 오늘 뭐 잘못 먹었니?”
안무 선생님의 반응이 이상했다.
뭔가 많이 당황한 듯 눈동자도 마구 굴리시고. 허리에 손을 짚고 허, 하는 헛웃음도 내뱉고.
“네?”
“아니, 사과를… 멀쩡하게 하잖아. 평소에 입만 꾹 다물고 있는 애가.”
그랬나? 내가 그렇게 사회성 떨어지는 사람처럼 굴었다고?
막 사람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비난 같이 느껴져서, 입 꾹 다물고. 뭐라고 한 마디만 들으면 고개 숙이고 신발코만 쳐다보고?
…이상하네.
“아, 일단 저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사과는 당연히 드려야죠. 죄송해요. 선생님께도, 멤버들한테도.”
“어, 음. 그래… 뭐, 오늘 마인드가 좋네. 다시 가자.”
안무 선생님과의 대화 후, 다시금 멤버들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주 편안하지는 않지만, 아까 내가 실수한 직후보다는 많이 풀린 얼굴들이었다.
그래. 우리 멤버들은 워낙 착해서, 사람 구실만 할 줄 안다면 정말 잘 대해 준다니까.
나는 현재 숙지를 마쳐야 하는 안무를 떠올리고, 바닥에 신발을 끽끽 문지르며 눈동자를 굴렸다.
잘해야지, 연습.
그래야 이번에 나오는 미니 앨범을 성공시키-
…잠깐.
근데, 연습실에 오기 전까지 대체 내가 뭘 하고 있었지?
“자세 잡고. 세븐, 에잇….”
흐릿한 기억에 내가 눈살을 찌푸릴 시간도 없이, 예정되어 있던 일들은 물 흐르듯이 착착 진행됐다.
지금 연습하고 있는 건 애로우즈의 미니 3집 타이틀곡.
이미 머릿속에 안무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떤 식으로 디테일을 잡아야 각이 예쁘게 사는지 다 아는 상황에서 딱히 어려울 것은 없었다.
내가 안무를 무난하게 따라가자, 나에게 면박 주는 맛으로 레슨을 하는 게 아닌가 싶던 안무 선생님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렉스 무슨 일이야. 한 번 혼나니까 잘하는데? 미리 연습하고 왔니? 아까는 숙취 때문에 제대로 못한 거고?”
“아뇨, 뭐. 선생님께서 워낙 잘 알려 주시니까요.”
“어머….”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다가도,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나 이거 지금 어떻게 잘하고 있는 거야?
아니, 애초에.
이 레슨 오기 전에 뭘 하고 있었냐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진도가 잘 나가서 좀 빨리 끝났네. 다들 수분 보충하고, 스케줄 있는 사람은 이동하고.”
“넵!”
한 시간가량 더 이어진 연습이 끝나고 선생님이 먼저 자리를 뜨자, 연습실 내에는 그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숨을 고르는 소리, 마지막으로 다치지 않게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는 소리만이 가득한 가운데.
나는 거울 앞에 있는 물병을 몇 개 들어, 멤버들에게 자연스럽게 건넸다.
내가 이 연습을 오기 전에 뭘 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긴 하지만, 일단 한바탕 땀을 흘린 뒤니까.
천천히 가자고, 천천히.
“화성이, 시우. 여기 물. 유찬 형도요.”
“…뭐야.”
내게 가장 가까이 있던 화성이는 나를 위아래로 확인하더니, 당혹스러운 얼굴로 물병을 낚아챘다.
평소에 자주 하는 금발의 탈색이 아니라, 거의 백발에 가까울 정도의 밝은 머리를 한 화성이는 단숨에 그 물을 들이켜고는 입을 열었다.
“렉스 형, 진심으로 묻는 건데… 뭐 잘못 먹었어요?”
미심쩍어하는 눈빛에는 깊은 의심이 묻어났다.
“아니면 잠을 잘 잤다거나? 이상한데. 이렇게 행동할 형이 아닌데.”
듣자 듣자 하니까, 이 자식이?
나는 지화성의 목에 팔을 확 걸고는 녀석의 머리를 마구 쥐어박았다.
과장된 행동과 장난스러운 목소리는 덤이었다.
“야, 인마. 너 형한테 말을 뭐 그렇게 하냐? 버릇없는 자식. 기껏 연습 빨리 끝나게 해 줬더니만.”
그런데, 반응이 이상했다.
“레, 렉스 형? 뭐야, 진짜!”
지화성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나풀거릴 정도로 허우적대더니, 내 팔에서 빠져나오곤 속사포처럼 외쳤다.
“아니, 렉스 형이 나한테 이렇게 말 길게 하는 거 오랜만에 보는 거 같은데? 심경의 변화가 많이 큰가? 역시, 이러나저러나 사람이 연애를 하면 바뀌긴 하는 거예요? 어쨌든 이쪽이 훨씬 낫긴 한―.”
“야, 화성아!”
뒤에서 다가오던 유찬 형이 깜짝 놀라 외쳤으나, 나는 그 말을 이해 못 해서 눈동자를 마구 굴렸다.
연애?
무슨 놈의 연애?
“…나 연애해?”
“…….”
그 문제적 단어가 나오자, 멤버들의 몸이 모두 굳어 버렸다.
뻘하게 ‘아, 말실수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지화성만 제외하고 말이다.
“렉스야. 너 어제… 열애설 기사 났잖아. 우리도 기사 보고 알았어.”
그 상황을 수습하는 건 언제나 그랬듯, 우리의 리더 형, 재하 형이었다.
“네가 실장님이랑 사장님 만나러 가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왔다고, 들었는데.”
뭐 이걸 수습이라고 할 수 있다면 좋겠다만.
그 말을 들은 내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으니 말이다.
“제가… 무슨 연애를 해요, 형.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억울함과 어이없음이 뒤섞인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어떤 기억이 척추를 타고, 스멀스멀 머리까지 기어 올라왔다.
“저, 안녕. 렉스야.”
“어어…? 안녕하세요, 빌리 선배님.”
“응, 너 여기 클럽도 오는구나? 몰랐네. 너는 회사에서 먼 곳으로 다닌다고 들어서.”
“제가 딱히 장소를 가리는 건 아닌데요. 그냥, 같이 마시기로 한 형이 여기로 와 달라고 그래서요. 지금 약속이 완전 파투났지만.”
“어머, 그래? 혹시 괜찮으면, 나 회사까지만 차 좀 태워 줄 수 있을까? 차 몰아야 하는 우리 매니저가 꼴아서, 쯧. 내가 돌아갈 방법이 없어졌거든.”
“뭐… 가능하죠. 앞에 아직 매니저 형 계시거든요.”
클럽 앞에서 우연히 만났던 빌리 선배님을 태워다 드린 것.
[애로우즈 렉스, 릴리제이 빌리와의 달콤한 밀회? “단둘이 차 안에서.”] [[단독> 빌리가 점찍은 새로운 남자는 바로 애로우즈의 렉스? “날카롭게 생긴 사람이 좋아.”] [슬레딕스 주영, 아웃그램 게시물 화제… “좋아 보이더라.”]어제 우수수 쏟아졌던 기사들, 그리고 이마를 짚고 고통스러워하던 도재찬 사장님의 얼굴까지 말이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면서, 어디론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
이렇게 되면, 여기서….
“…렉스? 렉스야. 너 괜찮아?”
그리고 내가 어딘가로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던 그때.
뒤에서 나와 재하 형의 대화를 지켜보던 유찬 형이 황급히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형이 입은 헐렁한 흰색 나시가 시야에서 나부꼈다.
“…렉스 지금 표정이 너무 안 좋은데. 재하야. 그만 얘기하고, 일단 숙소로 보내는 게….”
“허억, 아뇨, 아뇨! 괜찮아요. 완전.”
다시금 발이 땅에 붙는 느낌이 선명하게 들었다.
사실 아직까지는 둥둥 떠 있는 것 같기도 했는데, 이 정도라면 그래도 버틸 만하지.
나는 나를 향한 면면과 한 번씩 눈을 마주쳤다.
황급히 나에게 물을 들고 달려오는 시우, 혀를 내두르는 화성이.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의 재하 형과, 여전히 내 등을 두드려 주고 있는 유찬 형까지.
나의 멤버들의 얼굴을 보자,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저, 연애 안 했어요.”
“알았어요, 알았어. 렉스 형, 제가 미안해요. 굳이 그런 걸 긁을 생각은 없었는―.”
“아니, 지금 올라가서 기사 내달라고 할 거야. 사실무근이라고.”
“…레, 렉스 형아? 뭐, 라고요?”
화성이와 시우가 당황해서 서로를 쳐다보는 사이.
나는 똑같이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재하 형과 유찬 형에게 빠르게 말했다.
“형들이 같이 가서 좀 도와주실래요? 저 혼자 말하는 것보다는 더 빨리 해결될 것 같아서.”
“어, 어어….”
“…그래. 가자.”
재하 형의 마지막 대답과 함께, 그다음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정정 기사? 그거 내주면 되는 거야?”
“네, 부탁드릴게요. 지금까지 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번에는요.”
“뭐… 어려울 건 없지. 근데 별일이네. 렉스가 여기까지 오고….”
사무실에 가서 정정 기사를 요청하고, 사장님과 실장님께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 오랜만에 멤버들 다 같이 밥을 먹자고 약속하고.
“그동안 렉스가, 엄. 다른 사람들이랑 저녁에 있었잖아. 그래서 우리도 계속 따로 먹었거든.”
“정말요? 전 항상 멤버들이 다 같이 먹는 줄 알았는데.”
“아냐, 우리도 좀… 어. 하하! 그냥, 그랬다고. 오늘 같이 먹는 게 중요하지.”
약간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 속에서, 이 모든 게 다소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정말… 무슨 일이야. 좋네, 이거. 그러게 내가 전에도 고소할 수 있으면 빨리빨리 하는 게 좋다고 그랬잖아.”
유찬 형의 신난 목소리를 듣자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살랑살랑 어깨춤을 추는 유찬 형을 팔꿈치로 툭 치면서, 허허실실 말했다.
“그러게요. 형이 하자고 했을 때 진작 할걸.”
“음? 아쉬워하는 거야?”
“네, 뭐. 이런 해명 같은 것들이요. 더 빨리 했으면 상황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싶은….”
순간, 엘리베이터 불빛이 깜빡였다.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아주 잠깐, 빠르게 말이다.
놀란 마음에 바라본 불빛은 여전히 형형했지만, 그 낌새가 어딘가 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이전 일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건? 내가 다녀올까?”
“네? 뭐, 당장 그럴 것까지는….”
거기에 정신이 팔린 내가 말을 길게 늘리자, 유찬 형은 목소리를 더욱 높이며 즐거운 투로 말했다.
“아냐, 이런 거 한 번 할 때 한꺼번에 싹 몰아서 해야 해. 내가 지금 다시 올라갔다 올게. 재하랑 너는 먼저 숙소 들어가 있어!”
“어어, 유찬 형!”
띵―
“이따가 보자!”
어째선지 바로 아래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 밖으로 걸어나가고, 그 안에는 나와 재하 형만이 남게 되었다.
“어….”
“하하, 가 버렸네.”
연습실과 사무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줄곧 차분함을 유지하던 재하 형의 입이 열린 건 그때였다.
“뭔가, 되게 잘 풀리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
묘하게 텐션이 너무 낮은 것 같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좋은 거 같아, 나는. 렉스 너는 어때?”
재하 형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다정한 그 모습에, 나는 약간 긴장 중이던 어깨를 자연스럽게 풀며 대꾸했다.
“어, 저도 좋아요. 뭔가, 이렇게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네가 조금 전에 좀 더 빨리 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말을 했잖아.”
“아, 네. 유찬 형이 전에도 그렇게 말해 줬는데, 제가 정신을 완전 빼놓고 살아서, 그걸 제대로 안 듣….”
깜빡.
엘리베이터의 불이, 또 한 번 깜빡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좀 더 빨리 했으면 좋았을 거란 거 말이야.”
그렇게 하지 않아서.
“많은 게 망가졌었으니까.”
“…재하 형?”
낌새가 좀 이상하다뿐이지, 그래도 고장난 느낌은 아니던 엘리베이터 불빛이 이제는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로 마구 떨렸다.
아니.
엘리베이터 자체가.
…떨리고 있었다.
“혹시, 원래는 어땠는지 기억나?”
“아니, 재하 형! 지금 이럴 때가 아니에요. 회사 엘리베이터가 왜 이러지? 당장이라도 멈출 것 같은….”
“괜찮아. 큰일이 나진 않거든.”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린 재하 형의 얼굴에 더 이상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난 그 얼굴을 분명 본 적이 있었다.
“어땠는지 기억해 봐, 렉스야.”
깜빡, 깜빡.
미친 듯이 흔들리는 엘리베이터와,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불빛 속에서 내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그때는.
“―진짜 집중 안 할래!”
…다시, 연습실 안이었다.
그리고, 꽉 다물린 내 입은 이전과 다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아래로 처박힌 고개가 위로 올라가고, 연습실 전면 거울에 박힌 내 모습이 두 눈에 들어온다.
뒤집어쓴 회색 후드. 그리고 그 아래, 정돈을 안 한지 오래된 기다란 검은 앞머리.
푸석푸석한 피부와 내려앉은 표정.
“…아.”
열애설이 터진 다음 날의, 나.
렉쓰레기, 렉스가 거기에 서 있었다.